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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보안회[保安會,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다"
보안회(輔安會, 保安會)는 1904년 창립되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항일단체이다. 창립 이후 약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운동을 전개했으나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일제의 무력 위협에 대항했다. 보안회의 민족 운동은 대한제국 정부를 움직여 결국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
일제는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키기 위해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전쟁을 시작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군이 대한제국 황제의 궁궐을 둘러싼 무력 위협의 분위기 속에서 소위 ‘ 제1차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었다. 제1차 한일의정서는 한국의 ‘시정(施政)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내정간섭, 군사전략상 필요한 토지 수용권, 내란 등의 위험이 있는 경우 일본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시행, 러시아와의 협정 체결 배제 및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게 협력할 것 등을 규정한 침략적인 협정이었다. 한국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현지 정세 조사를 위해 3월 10일 내한했는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勸助)는 이때 이토에게 한국에서 획득해야 할 이권으로서 철도·해운·어업권·토지·우편·전신권·광업권 등을 건의했다. 이토는 귀국 즉시 이 건의안을 참작하여 「대한정책(對韓政策)」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작성하고, 1904년 5월 31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한정책」의 골자는 ① 정치적으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예속시켜 일본이 실권을 장악하고, ② 경제적으로는 이권을 획득하여 확대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한시설강령〉에서 국방·외교·재정·교통·통신·척식(拓殖) 등에서 대한정책을 실천할 방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제6항인 척식 부문에서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 장악에 대해 규정하였다.
일제는 한국에서 일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사업은 농사라고 단정했다. 한국 농업에 일본인이 진출함으로써 일본의 과잉 인구를 이식시킬 수 있는 땅을 얻고, 부족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 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또한 일본 농가를 위해 한국을 개방시키는 수단으로 두 가지 대책을 설정하였다. 하나는 일본인 개인 명의로 한국 정부로부터 관유(官有) 황무지를 경작 및 목축할 수 있는 특허나 위탁을 받고, 그것을 일본 정부의 관리하에 일본인이 경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1리(里) 밖일지라도 민유지를 경작 또는 목축 등의 목적으로 일본인이 매매·임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주한일본공사는 대한제국 궁내부에 어공원(御供院)을 신설하여, 전국의 황무지를 궁내부 소유로 하여 어공원이 관장케 하고 일본측은 어공원과 계약하여 전국 황무지 개간권을 획득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했다.
사전조치를 마친 일본공사 하야시는 1904년 6월 6일자 외교 공문으로 대한제국 전국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인 나가모리에게 특허해 줄 것을 요구하고, 동시에 ‘계약서안’을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발송하였다. ‘계약서안’은 1) 대한제국 전국의 미간지를 개간·정리·개량·척식하여 경영할 일체의 권리와, 2) 쌀·보리·콩 기타 모든 농산물 및 수목(樹木)·과실 등을 재배·수확·처분할 권리, 3) 목축·어획할 권리 등 이익을 위한 토지 사용의 모든 권리를 일본인 나가모리가 갖도록 했다. 또한 이권의 소유 기간은 50년으로 하며, 나가모리가 점유한 이 이권의 토지는 만 5년간 완전 면세의 특권을 가지며, 나가모리의 이권은 그 상속인 또는 권리계승자에게 상속 또는 또는 양도할 수 있으며, 50년 기한이 만료되면 협의에 의해 기한을 연장 또는 재행할 수 있었다. 만일 한국정부가 연장 또는 재행을 허가하지 않는 경우 나가모리가 그간 이 토지에 투자한 자본금의 원금 총액과 연 5%의 이자 누적계산분 총액 전부를 한국정부가 일시에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당시 한국정부의 재정이 감당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국의 황무지를 사실상 영구히 점탈하겠다는 안이었다.
외부대신 이하영은 일본공사 하야시로부터 받은 황무지 이권 요구 공문과 계약서안을 접수하고, 이를 고종 황제에게 아뢴 뒤 이를 의정부 회의에 회부하였다. 이 안건이 의정부 회의에 계류되어 있는 동안 6월 중순부터 자연스럽게 이 안건의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반대하는 유생들과 전직 관료들의 상소와 통문들이 빗발치듯 쏟아지며, 전국적으로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대한제국 의정부는 반대 운동의 분위기에 따라,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거절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거부 결정을 통고받은 이후에도 일본은 이를 승복하지 않고 계속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며, 더욱 위협적 자세를 취했다.
보안회의 창립과 활동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송수만(宋秀萬), 심상진(沈相震), 원세성(元世性) 등을 중심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7월 13일 종로 백목전에 모인 10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송수만은 황무지를 일본에게 차여(借與)함은 불가하며 황무지 차여에 중개 역할을 한 국내 인사들을 성토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하고, 모인 시민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 송수만과 참석한 시민들은 모임의 명칭을 ‘보국안민(輔國安民)’에서 글자를 따서 ‘보안회(輔安會)’로 하기로 결의하고, 장차 유망한 대신을 회장으로 추대한 뒤 궁궐 앞에서 상소를 올릴 계획을 세웠다. 이날 창립집회장에는 대한제국 경위원(警衛院)과 경무청에서 경찰관을 파견하고, 일본 헌병사령부에서는 일본 헌병들을 파견하여 집회를 감시하고 참석자들을 해산시켰다.
다음날인 7월 14일에도 역시 100여명이 백목전에 모여, 일본의 요구를 철폐시킬 때까지 매일 집회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송수만, 심상진 등은 전국에 통문을 발하고 정부의 각 부서와 대관들의 집에 공함(公函)을 보내어, 보안회 임시회의소에서 회동할 것을 요구하며 아래와 같은 운영 요강을 내세웠다.
1. 두 나라에서 산림·천택(川澤)·벌판의 이 세 가지 황무지를 청구하는 일로 회동하여 타협할 것
1. 회원의 언권(言權)은 다만 이 상황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타협하여 정하게 할 것.
1. 폐회 일시는 위의 문제가 해결되는 날짜로 정할 것.
1. 위의 문제를 위배하면 국제 교섭 사건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과 정부 대관들을 탄핵하는 논의를 회원에게 회부하여 법에 따라 죄과를 논할 것.
7월 16일 집회에서는 회장에 신기선(申箕善), 부회장에 송인섭(宋寅燮)을 천거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대변회장(代辯會長)에 송수만을 선출했다. 이날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와서,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갔다. 대한제국 외부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송수만과 송인섭을 붙잡아 간 것에 대해 항의하고,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 관아로 인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한국정부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송수만 등의 인도 요청을 거부했다.
고종은 경무청에 칙령을 내려 보안회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해산하게 했다. 이에 보안회는 7월 17일부터 전동(典洞)의 한어학교(漢語學校)로 회의 개최 장소를 이전하고 일본공사관에 구속된 송수만 대신 원세성을 대변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송수만·송인섭 등의 체포에 대해 격렬히 성토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7월 18일 고종은 재차 칙령을 내려 보안회를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나, 보안회 측은 일본의 요구를 대한제국 외부에서 철회시켰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해산하겠다는 자세를 고수했다. 한편 주한일본공사대리 하기와라(萩原)는 ‘무뢰배’들이 날마다 격문을 돌리고 상소를 올리며 한일 양국의 우의를 손상시키는 데도 대한제국 정부에서 이를 금지하지 않으면 일본 공사관에서 금지시키겠다고 위협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보안회의 집회를 금지하겠다는 보증서를 제출하기 전에는 송수만 등을 석방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7월 20일과 7월 21일에도 보안회는 한어학교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른 연사들이 일본의 대한제국 산림·천택·원야·진황지 개간 이권 요구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송수만과 송인섭을 일본 측에서 부당하게 체포 구금하고 있는 것을 격렬하게 규탄했다. 참석한 시민들은 천지가 진동할 듯이 환호했다.
특히 7월 21일 시민대회에서 획기적인 것은 보안회가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과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안회는 시민대회의 결의를 대한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에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국제 외교활동을 통한 투쟁은 일본 공사관이 가장 두려워하던 활동이었으며, 일본 공사관은 이날 무장한 일본군 약 100여명을 대회장에 투입하여 모인 군중들을 위협했다.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격화되고 비판과 공격의 화살이 대한제국 정부로 날아들자 외부는 7월 20일자로 일본공사에게 보낸 회답문을 공개했다. 외부는 이 회답문에서 일본 공사에게 한국 정부는 어떠한 외국인에게도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허여(許與)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7월 22일 열린 한어학교의 시민대회에서는 대회 도중 일본 경찰이 들어와 보안회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원세성, 심상진 등 회원들을 체포했다. 일본군이 무력을 이용하여 한어학교를 완전히 폐쇄하였으나, 보안회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종로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가두 투쟁을 시작했다. 일본 기마헌병대들이 권총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위협하였으나 보안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분노하여 격렬한 가두 투쟁을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져도 가두 투쟁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황제가 칙령을 내려 밤이 늦었으니 해산하도록 설득했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이날 밤 11시가 되자 일본 헌병대는 수백 명의 무장한 헌병들을 추가로 출동시켰고, 보안회는 어둠 속에서 무장한 일본 헌병대와 정면 충돌하면 살상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의 집회와 시위, 가두 투쟁은 보안회의 민족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이었으며, 또 일본군과 정면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치한 운동이었다.
7울 13일부터 7월 22일까지 10일간 전개된 보안회의 격렬한 민족운동은 일본 공사관과 대한제국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음은 물론, 서울에 주재한 외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국토는 조금도 외국에 빌려주거나 양도하지 않겠다는 고시문을 7월 23일 서울 시내 도처에 게시했다.
이에 보안회에서는 일본 공사관에 구속된 회장 등의 석방을 추진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보안회의 운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 7월 23일 아침부터 7월 25일까지 서울 시내 모든 상점들은 가게문을 닫는 철시(撤市)를 단행했다.
보안회의 운동과 대한제국 외부의 계속된 요구를 의식한 일본공사관은 송수만과 송인섭을 대한제국 경무청으로 인도했다. 송인섭은 곧 석방되었으나, 송수만은 황제에 대한 불경한 말을 하였다는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보안회는 즉시 석방을 강경하게 요구하면서 다시 강력한 투쟁을 준비했다. 보안회가 다시 가두 투쟁을 재개하면 이번에는 일본측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도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7월 30일 의정서리 심상훈(議政署理 沈相薰)과 외부대신 이하영으로 하여금 주한일본공사 하야시를 방문하게 해야, 민회의 여론이 비등하고 국민 상하의 의견이 일치하므로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게 허여할 수 없다는 뜻을 전달하게 했다. 하야시는 한국의 황무지 침탈은 포기해야 할 단계임을 감지하고, 계획을 연기할 것을 일본 정부에 제안했다. 8월 3일자로 일본 외무대신은 일본공사에게 한국정부의 제의에 동의하라는 훈령을 보냈고, 하야시는 8월 4일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에 대해 동의를 통보했다. 보안회의 운동이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보안회의 해산과 역사적 의의
일본의 황무지 점탈 계획이 저지당한 뒤, 일본군은 회장 원세성과 회원 신형균·이범석 등을 다시 체포하는 등 보안회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8월 1일 저녁 서울 시내 중요한 거리에 일본군 병참사령부 표목을 박았다. 서울이 일본군 지배하에 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1904년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군이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
보안회 회원들은 일제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창립 당시 강령에 따라 보안회를 사실상 해체하여 종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원세성 등을 체포하고 석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보안회의 속개를 준비했다.
8월 29일 전동의 입전 도가(立廛 都家)에서 약 70여명의 속개 준비 회원들이 모여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을 선출하며 보안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일본 헌병대와 경관들이 와서 회장 이건석을 체포해 갔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은 새로운 회명을 짓고 사전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회원들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회의 명칭을 ‘협동회(協同會)’로 개칭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협동회로 개칭한 이후 일제의 견제를 받아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러나 보안회의 투쟁과 구국 운동으로 인해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 개척권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보안회가 대한제국 정부의 금령과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연달아 창립되어서 구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