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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강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 6세기 신라 진흥왕!
드디어 한반도의 중심, 한강을 차지하다!~
1816년 7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두 젊은 선비가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오르고 있는 곳은 북한산의 비봉.
그들은 당시 서른 한살의 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였다.
두 사람은 비봉 정상에 어느 비석 앞에 섰다.
추사 김정희가 비석을 덮은 이끼를 거둬내자 희미한 글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신라 진흥왕의 비석이었다.
1,200년만에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진흥왕은 왜 나라 땅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거기에 무엇을 새겨두었을까?
"역사속에 많은 왕들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라 중기 6세기 진흥왕, 그 역시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증거가 바로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북한산 순수비, 창녕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모두 네 개로 세워진 이 순수비를 외우기 위해서 학창 시절 진땀 깨나 흘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순수(巡狩)란 '황제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천지 산천에 제사 지내고, 지방의 정치, 민정을 살피던 풍습'이라고 합니다.
바로 진흥왕도 이런 풍습을 따라 영토를 확장하고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은 처음부터 진흥왕 순수비라고 알려진 게 아니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입니다.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강역을 확정하였다'
(巡幸北漢山拓定封疆-순행북한산척정봉강)
이처럼 진흥왕이 직접 순수비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흥왕 순수비는 그것이 세워진 후 약 천 년 동안 그 존재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자, 네 개의 순수비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북한산 순수비.
먼저 이 비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서울을 병풍처럼 둘러싼 국립 공원 북한산.
도심에서도 가까워 사람들이 즐겨 찾는 친숙한 산이다.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의 하나인 비봉.
뛰어난 전망과 수려한 산세로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봉 정상.
비봉의 정상에는 사각형의 화강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은 오래전부터 서 있어 사람들 눈에 익숙한데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잘 모르겠구요, 여기가 비봉 푯말이라는 거 밖에는 모르겠는데요."
"여기 올라올 때마다 자주 봐요. 이게 진흥왕 순수비라는 정도, 진흥왕이 내 땅이라고 여기에 세웠대요,
그 정도로 알고 있어요."
- 박민희
비봉의 비석은 간혹 진흥왕 순수비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나 지금 서 있는 건 진흥왕 순수비가 아니다.
'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
이 자리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다는 안내 비석인데,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진흥왕은 직접 이곳에 와서 비석을 세운 것이다.
"진흥왕이 경주 작은 분지의 국가에서 살다가,
자기 군사들이 차지한 유서 깊은 한강 일대를 순수하며 바라봤을 때, 그 기쁨과 자부심은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 김기흥 교수, 건국대 사학과
맑은 날 북한산에서 바라보면 한강은 물론,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는 바로 이러한 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북한산 순수비 진품은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비봉에 있던 거잖아요. 언제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습니까?"
"1972년에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경복궁 중앙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겉면 윗면이 거의 까져서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아랫쪽 글자만 이 정도 보입니다."
비석의 뒷면에는 한국 전쟁 당시 생긴 총탄 자국이 선명한데,
200여 자중 현재는 120자 정도만 판독이 가능하다.
"이 부분부터 판독이 가능한데요, 윗부분은 한꺼풀 까져서 글자를 읽기 어렵습니다.
맨 첫번째 줄에 '진흥태왕(眞興太王)' 이렇게 글자가 시작이 됩니다.
이 지역을 순수한 내용이 나오고, 그리고 순수 반경이 나옵니다."
- 이용현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진흥태왕'!
이 네 글자가 진흥왕 순수비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렇다면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기전 이 비석은 어떻게 알려져 있었을까?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이 비석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비봉의 비석에는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산줄기를 잘못 찾아 이곳에 오다)라고 적혀 있다."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즉, 이중환은 이 비석을 무학대사의 비석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 역시 별다른 기대없이 이 비석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판독 결과 진흥왕 순수비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 감흥이 너무 컸던지 추사 김정희는 이 비석의 왼쪽에 자신이 이 비석을 진흥왕의 것으로 판독했다고 새겼다.
'신라진흥태왕순수지비, 병자칠월김정희김경연래독'
"이 내력은 김정희의 글을 모은 <완당 전집>에 전하는 글인데요, 여름에 친구와 함께 북한산을 오릅니다.
멀리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진 비석을 봤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김정희는 올라가서 비석의 이끼를 벗기고 문질러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이 부분인데요, '진흥태왕'이란 글자가 보였습니다.
이후 김정희는 일 년 동안 이 비를 연구하여,
비로소 이 비가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내게 됩니다."
- 이용현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김정희는 비문의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를 판독, 비석의 건립 시기까지 밝혀냈다.
즉, 삼국사기에 남천주 설치 기록과 비교, 비석의 건립 시기를 568년 이후로 추정했는데
이는 지금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진흥왕 29년(568년)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했다." - 삼국사기
드넓은 한강 유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북한산 비봉.
그러나 비석을 세우기에는 좁고 또 매우 험한 곳이다.
그렇다면 왜 진흥왕은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비석을 세웠을까?
"신라가 그동안 경상도 지역, 그야말로 영남에 작은 국가에서,
이제는 한반도 중심에 와서 백제와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에서,
더구나 상대국들을 물리쳤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큰 계기되는 게 한성 지역 점령이었죠.
더 나아가서 저 멀리 중국까지도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신라는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결국은 통일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대국가로 업그레이드 된,
그걸 기념해서 여기에 순수비를 세웠다고 생각됩니다."
- 김기흥 교수
광대한 신라를 꿈꾸었던 진흥왕.
그는 그토록 바라던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자신의 영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순수비를 세운 것이다.
2. 진흥왕 순수비가 보여주는 것,
신라의 경제력 발전으로 추진된 영토 확장!~
" 북한산 순수비는 이렇게 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진흥왕의 순수비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몇 개를 어디에 세웠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데 무려 천 년의 세월이 걸렸던 진흥왕 순수비!
북한산 순수비외에 나머지 순수비도 사연이 많습니다.
우선 창녕비.
이 비석은 일제 시대, 소풍 간 학생들이 경남 창녕에 화왕산 골짜기에서 발견한 것을
일본인 교장이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둔갑 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땅에 세워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세 조각으로 깨어져 버렸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소행이었습니다.
그것이 많은 세월을 거친 후 어렵게 제 모습을 찾았다고 하는데요,
이 두 비석은 지금 북한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진품을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진흥왕 순수비는 무엇을 담고 있을까요?
단순히 경계의 표시일까요?
이 비석에는 1,500년전 신라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열쇠가 새겨져 있습니다.
창녕비부터 보시겠습니다."
경남 창녕.
555년 진흥왕은 가야 연맹의 왕국의 한 왕국이었던 창녕을 정복했다.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창녕비.
지금은 국보 33호로 지정, 비각 안에 보호받고 있다.
비석은 자연석의 표면을 정리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640자 중 180자는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저희들이 어렸을 땐 글자가 상당히 잘 보였는데, 35년~40년 사이 글자가 많이 안 보이네요."
- 김국진 사무국장, 창녕문화원
사라진 글자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제작진은 첨단 방식으로 판독을 시도했다.
'비접촉 3차원 스캔 방식'이 그것이었다.
"탁본을 하게 되면 먹물이 묻히는 부분과 안 묻히는 부분이 정밀하게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레이저 장비를 사용하게 되면 좀더 미세한 부분까지 글자를 추출해내서
더 많은 정보를 받아낼 수 있다고 그렇게 봅니다."
- 우성태 연구원, 경북전문대학 한국전통문화콘텐츠센터
비석의 표면에 레이저를 쏘아 그것의 반사 속도를 컴퓨터가 인식,
비석의 글자를 읽어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읽은 비석의 글자를 확대하여 판독에 나섰다.
판독 과정에서 애매했던 몇몇 글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마모된 글자는
최첨단 방식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3차원 스캔으로 잘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확실하게 보인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여러 교수님들이 91년에 가서 육안으로 하루종일 판독을 했는데
그때 이런 기술, 이런 장비가 있어서 같이 했으면 좀더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졌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 노중국 교수, 계명대 사학과
대신 최첨단 탁본으로 몇몇 정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신사년 2월 1일(辛巳年二月一日)'
첫행에는 이 비석을 세운 연대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판독 가능했던 글자 중에서 관심을 집중 시킨 글자가 있었다.
물수(水)자와 밭전(田)자를 합친 '논답(畓)'자.
창녕비에 새겨진 '논답(畓)'자는 우리나라에 새겨진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논답(畓)'자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창녕비보다 훨씬 뒤에 집필된 삼국유사에는
논답자를 '속문야' 즉, 우리가 만든 고유 글자라고 적고 있다.
'畓乃俗文也(답내속문야)' - 삼국유사
이것이 사실일까?
서울대학교 규장각.
중국과 일본의 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국의 사전에서는요, 벼를 심는 밭을 '수전(水田)'이라고 표기하구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수전(水田)'이라고 쓰고,
조선에서는 속칭 합쳐서 '답(畓)'자로 사용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비문에다가 바로 답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 글자가 일반화 되어 있었다는 표현이구요,
수와 전이 합친 글자가 우리나라에서 씌여지게 된 것은 '답'자의 필요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답'과 '전'을 분리해서 생각해 볼 의미가 있다는 거 하구요..."
- 양진석 학예연구사, 서울대 규장각
그렇다면 진흥왕 시대 왜 독창적인 '논답(畓)'자가 필요했을까?
울산광역시.
울산의 옥현 유적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논의 유적에서 한 시대의 토층별로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이곳의 논 유적은 시대에 따라 논의 규모가 어떻게 변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논은 한 논빼미가 면적이 대개 한평에서 서너평 정도로 상당히 작습니다.
삼국 시대로 가면 3~40평 정도로 면적이 상당히 넓어지는 경향이 보입니다."
- 이상길 교수, 경남대 사학과
청동기 시대는 논의 면적이 상당히 좁다.
또한 근처 지역은 개간이 덜된 황무지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반면 삼국 시대에는 주변 지역도 다 개간이 되고 논의 면적도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논농사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 시대 논농사가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경(牛耕), 즉 소를 농사에 이용한 신기술의 도입에 있었다.
신라 시대 여러 논 유적들에서 발굴되는 철제 농기구 유물들, 이들 역시 우경을 증명해주고 있다.
보습 - 6세기경, 경남 창녕 교동 출토.
삼국 시대는 지증왕 시대, 즉 진흥왕보다 약간 앞선 시기 이미 우경을 보급하고 있었다.
"지증왕 3년에 처음으로 소를 밭 가는데 사용했다." - 삼국사기
"이렇게 표시된 부분은 벼의 그루터기 흔적이라 생각됩니다.
여기 햐얗게 표시된 부분은 사람 발자국 흔적이구요, 이것은 소의 발자국 흔적입니다.
삼국 시대, 우리가 이 시기를 아마 6세기에서 8세기쯤으로 생각하는데 논의 면적이 넓어집니다.
면적이 넓어지는 이유가 우선 철제 농기구라든지 좋은 도구가 나오게 되고,
그 다음에 동물을 이용한 축력의 힘으로 경사면을 넓게 하게 된 그런 기술이 들어오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이상길 교수
삼국 시대 논농사의 발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곳이 있다.
경북 영천의 청제비.
비석에는 법흥왕, 즉 진흥왕 바로 앞 시대에 '청제라는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진년(丙辰年, 법흥왕 23년)에 처음으로 청제를 막았다."
"이것이 근자에 들어와서는 큰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조선조까지는 이 못으로 거의 수리를 했다고 봅니다."
이 시기 신라는 대규모 수리 시설이 필요할 정도로 논농사가 발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신라의 탄탄한 경제력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창녕비에는 경제력의 바탕이 되는 토지에 대한 진흥왕의 강한 집착도 보인다.
'土地疆時山林(토지강시산림)'
"그 이전에는 아무래도 토지 생산성보다도 노동 생산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두었다면,
6세기에 들어와서는 노동력보다도 토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생각이 됩니다."
- 주보돈 교수
진흥왕이 정복 야망을 추진할 수 있었던 힘,
그것은 바로 창녕비에 새겨진 '논답(畓)'자였다!
발달된 논농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진흥왕은 영토 확장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진흥왕의 정복 야욕!~
백제와 등돌리고 고구려와 화해하여 한강 차지!~
"진흥왕 이전 시대까지 신라는 경주 중심의 작은 나라였습니다.
당시 삼국의 세력 판도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한강 유역이었습니다.
누가 한강을 차지하느냐가 관건이었죠.
이 시기 국제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100여 년 넘게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551년에는 두 나라가 힘을 합쳐서 한강 유역을 나누어 차지합니다.
즉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진흥왕은 2년이 지나지 않아 백제의 한강 하류를 차지해버립니다.
100년 이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신라와 백제,
그런데 신라는 2년 사이 그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을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국제 관계가 냉혹하다고 해도 선뜻 이해가기 힘든 부분입니다.
학자들은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 그 이면에는 고구려와의 밀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00년 밀약을 하루 아침에 깨어버린 그 밀약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비에서 그 밀약설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영남 지역의 신라에서 백제 부여, 공주로 가는 길목 충북 옥천 관산성.
오랫동안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저 위로 관산성의 동쪽 성벽의 돌들이 흘러내린 것입니다..."
554년 관산성에서는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갈라놓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진흥왕의 신라군과 성왕의 백제군이 국운을 건 혈전이 벌어진 곳이다.
"여기가 성왕이 신라군에게 붙잡혔다는 구진천입니다.
신라군에 쫓기던 성왕이 여기서 신라군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참패로 끝났다.
백제 성왕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백제군은 3만 명 가량 죽었다.
백제의 운명이 기우는 순간이었다.
"백제 군사 2만 9천 6백 명이 죽고, 살아 돌아간 말이 없었다." - 삼국사기
그렇다면 관산성 전투는 왜 발발했을까?
그것은 한강 하류에 대한 진흥왕의 집착의 결과였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100여 년간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던 551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차지해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진흥왕은 이 동맹을 깨뜨리고 불과 2년후 백제의 한강 하류를 정복해버렸다.
백제로서는 불의의 엄청난 타격을 입고 만 것이다.
"진흥왕 14년(553년) 백제의 동북 지역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 삼국사기
"그러니까 2년전에 동맹을 맺어서 고구려를 대상으로 같이 싸웠던 두나라가 이제 갑자기 적으로 돌아선 것인데요,
백제로서는 너무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성왕은 땅을 빼앗긴 553년, 그 다음해인 554년에 아주 군사를 대대적으로 모아 신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 김기흥 교수, 건국대 사학과
100여 년간의 동맹을 일시에 깨버린 진흥왕.
여기엔 진흥왕의 치밀한 영토 확장 전략이 숨어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함께 고구려를 치자는 백제의 제안을 진흥왕이 거절하는 대목이 나온다.
"백제가 고구려를 함께 치자고 하자,
진흥왕은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어찌 감히 바라리오"라고 답하였다."
- 삼국유사
진흥왕은 고구려 침공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고구려와 모종의 밀약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런 진흥왕의 입장은 고구려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백제의 협공 제안을 거부했다는 진흥왕의 말이 고구려에 전해지자,
고구려는 이에 크게 감격했다."
- 삼국유사
두나라 사이 밀약이 성사된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 돌궐족을 마주하는 상황, 따라서 남쪽 국경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고구려도 신라와 밀약을 맺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그 당시 6세기 중반경의 고구려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3대에 걸쳐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서 그 강력했던 국력이 크게 약화되는 추세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북쪽도 돌궐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위험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신라와의 국지전을 차단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었던 것이죠."
- 강봉룡 교수,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이처럼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은 두나라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렇다면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 그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황초령비에 밀약설이 숨겨져 있다.
즉 진흥왕이 고구려 땅을 차지하자 이웃 나라에서 화해를 요청해왔다는 것이다.
"영토를 확장하고 백성들을 얻었는데
이웃 나라가 사신을 보내서 신의를 지키고 화해를 요청해 오다."
-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를 보면,
'영토를 획득하고 백성들을 얻었는데, 이웃 나라가 화해를 요청해오다' 이런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이웃 나라라는 것은 고구려를 뜻하구요, 고구려와 신라가 뭔가 협약을 맺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강봉룡 교수,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이러한 두나라 사이의 밀약설을 뒷받침 해주는 기록이 있다.
즉 진흥왕은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순수비를 건립한 이후
당시 최전방이었던 군사 주둔지 주를 후방으로 배치한다.
"진흥왕 29년(568년) 북한산주(서울)를 폐하고 남천주(경기 이천)를 설치하고,
비열홀주(함남 안변)를 폐하고 달홀주(강원 고성)를 설치했다."
- 삼국사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진흥왕 순수비를 안변 지역과 한강 하류 지역에 세웠다고 하는 것은
그 지역 영토와 그 백성들이 진흥왕의 것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인데
군사 주둔지를 남쪽으로 옮겼다는 것은 뭔가 맞지가 않죠.
그것은 고구려와 밀약을 체결해서 더 이상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대신 고구려는 신라가 지금까지 확장시켰던 영토와 그 백성들을 인정해주는
하나의 협약, 밀약을 체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강봉룡 교수,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영토 확장의 야망을 위해 우방 국가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적대국과의 밀약을 진행했던 진흥왕.
순수비에는 이러한 진흥왕의 외교 전략까지 새겨져 있는 것이다.
4. 경주 중심의 천하관!~
정복 군주이면서 교화왕이기를 바란 진흥왕!~
"진흥왕 순수비는 작은 나라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진흥왕의 노력과 함께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 사이의 미묘했던 국제 역학 관계까지 담고 있군요.
'신라(新羅, 지증왕)'라는 이름은 '德業日新網羅四方(덕업일신망라사방)'의 준말입니다.
덕으로 새롭게 해서 사방을 망라하겠다, 즉 영토를 확장하고 그 세력을 떨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국호입니다.
바로 그 팽창 의욕을 나타내는 말이 창녕비에 나오는데요 '사방군주(四方軍主)'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방군주(四方軍主)'는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창녕비에 기록된 '사방군주'는 현재 위치에서 말하자면
경기 광주에 한성군주, 또 함남 안변에 위치한 비리성군주,
경북 개령에 위치한 감문군주, 경남 창녕의 비자벌군주 등 네 명을 '사방군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라가 정복한 새로운 영토의 지배자이자 야전군 사령관이라고 규정을 할 수가 있고
왜 하필이면 네 명을 사방군주라고 표현을 했느냐 하면
거기서 말하는 사방은 신라가 천하의 중심이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라 경주를 중심에 둔 천하 사방을 다스리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신라 사방군주라는 뜻속에 진흥왕 시대 천하관이 들어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이문기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과
"진흥왕은 이런 기구를 두고 각 지역을 정복하려 했고 실제로 정복했습니다.
국토의 팽창과 정복, 여기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정복한 곳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정복지 백성들.
진흥왕의 순수비에는 탁월했던 진흥왕의 정복지 통치 방식의 비밀이 새겨져 있습니다."
경북 울진.
울진 지역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향을 받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지증왕 시대 신라로 편입되었는데, 여기엔 법흥왕이 세운 비석이 서 있다.
울진 봉평비.
비석은 당시 이 지역에서 일어난 대화재에 대한 책임자 처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비문 중에는 피정복지인을 '奴人(노인)' 즉, 노예로 묘사한 부분이 보인다.
그런데 법흥왕 직후 진흥왕 황초령 순수비에는 '新古黎庶(신고여서)',
즉 '옛 백성과 정복지의 백성은 다 같은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노인'과 '백성',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봉평비에서는 새로운 정복 집단에 대해서 '노인', '노비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고
신라 중앙의 6부를 우대하고 지방을 낮추고 차별화 시키는 정책을 썼는데,
진흥왕 때 오면 새로운 내 백성으로 보는 거죠.
진흥왕 때 들어오면 자기 영역내에 살고 있는 사람,
이들은 전부 왕의 백성이고, 왕의 지배를 똑같이 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식이 확대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노중국 교수, 계명대 사학과
진흥왕은 피정복지인을 자신의 백성으로 포용했던 것이다.
그 포용의 증거가 또 있다.
충북 단양 적성.
단양 지역 역시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곳이다.
551년 진흥왕은 백제와 함께 한강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 단양적성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 적성비에는 당시 고구려인에서 신라인으로 복속된 한 인물을 새겨넣고 있다.
'복속민 야이차(也 ? 次)'
그렇다면 진흥왕은 왜 이 복속민을 비문에 새겼을까?
"신라가 차지하는데 야이차는 인물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신라는 큰 공을 세우고 죽은 것으로 판단되는 야이차의 처와 가족들에게 큰 포상을 내림으로써
그 지역 주민들에게 이제는 '신라의 백성이다, 신라에 충성해라'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 김화수, 단양문화연구회
비석은 진흥왕의 탁월한 정복지 통치술도 담고 있다.
울릉도를 개척했던 이사부(伊史夫),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의 이름도 보이는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도설지( ? 設智),
그는 대가야 최후의 태자로 알려진 월광태자라는 인물이다.
도설지(都設智)는 단양적성비보다 10년후에 세워지는 창녕비에도 등장한다.
그 사이 벼슬은 한단계 올라 있다.
대가야의 태자인 도설지가 왜 신라의 관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도설지는 6세기 신라와 대가야의 결혼 동맹으로,
신라 귀족 출신의 어머니와 대가야의 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뇌왕이 신라의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월광) 태자를 낳았다." - 석순옹전
당시 신라는 대가야를 두고 백제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가야의 외교 노선이 백제쪽으로 기울게 되자,
도솔지는 어머니의 나라 신라로 망명하게 된다.
신라가 도솔지를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550년 당시에 백제 성왕의 외교 정책이 더욱 빛을 발해서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이 백제쪽으로 연합하는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신라가 520년대부터 결혼 동맹을 통해서 대가야쪽에 공을 들여놓은 게 월광태자인데
그를 통해서 다시 한번 대가야를 넘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거고,
아마도 그래서 신라 왕실에서는 대가야의 태자인 월광을 우대해서 그를 귀족 집단에 끌여들이고 관료로 임명하고
적성비의 내용으로 봐서는 그를 장군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김태식 교수, 홍익대 역사교육과
경북 고령 대가야 고분군.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하나 둘씩 사라져갔던 가야 연맹.
그 중에서 대가야는 최후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도솔지.
그의 마지막 행적을 찾아가 보면 진흥왕의 탁월한 정복지 통치술을 만날 수 있다.
562년 드디어 대가야를 침공, 정복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신라로 망명했던 도솔지가 대가야왕으로 책봉되는 것이다.
"고령군은 원래 대가야국인데,
시조는 이진아시와이고
마지막 왕은 도설지왕이다."
- 삼국사기
진흥왕은 왜 도설지를 대가야왕으로 삼았을까?
"대가야는 신라의 기습에 의해서 쉽사리 망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대가야도 아주 오래된 왕조고 대가야 백성들의 민심도 쉽사리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대가야 이내왕의 아들,
대가야 정통 왕위 계승권자인 이 월광태자 도설지를
신라의 관료로, 귀족으로 오랫동안 성장시켜왔기 때문에
그를 임명시켜서 대가야 민심을 무마시키는, 일시적인 괴뢰왕으로 앉혔다고 봅니다."
- 김태식 교수, 홍익대 역사교육과
그러나 진흥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가야의 민심이 어느 정도 무마되자 도설지를 대가야왕에서 축출하고 말았다.
이후 도설지는 승려가 되어 가야산 깊은 곳 월광사라는 절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친다.
결국 도설지는 진흥왕 정복 야망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강력한 정복 정책을 펼치던 진흥왕.
그러나 그는 정복지 주민의 교화에도 뛰어났다.
진흥왕과 우륵의 관계가 이를 잘 말해주는데
가야금의 명인 우륵 역시 도설지가 신라로 넘어올 즈음에 신라로 망명한 음악인이었다.
진흥왕은 귀족 관료들의 강렬한 반대에도 무릎쓰고 우륵을 받아들였다.
우륵의 음악으로 정복지 백성들을 교화하려 했던 것이다.
"진흥왕 13년 왕은 계고, 법지, 만덕으로 하여금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 삼국사기
정복의 야망을 하나씩 실현하면서 포용과 교화로 정복지 백성들을 동화시킨 진흥왕.
그는 정복왕과 교화왕의 두 얼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5. 정복왕이자 교화왕이기를 바란 진흥왕의 야망!~~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100년 동맹도 과감하게 깨트릴 수 있었던 진흥왕.
정복지를 지배하기 위해선 적국의 왕자까지 왕으로 삼고 그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포용 정책을 펼쳤던 진흥왕.
그리고 그 기록을 1,000년후에 남을 기록으로 남긴 진흥왕.
그러나 국토 곳곳에 순수비를 세운 것은 또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창녕비에 새겨진 비문의 일부입니다.
여기엔 수많은 이름이 나오는데요, 당시 신라 귀족 관료들의 이름만도 서른 아홉 명이나 보입니다.
이들 이름 중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도 보이는데요,
거칠부(居七夫), 이는 바로 진흥왕 때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지은 인물이구요,
김무력, 그는 나중에 삼국을 통일하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입니다.
이들 서른 아홉 명의 귀족 관료들은 당시 신라 사회를 이끌던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3부의 요인이 다 모인 것인데요, 이들이 모두 경주를 떠나 창녕비를 세운 현장까지 온 것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 그렇다면 진흥왕은 누구이며, 그가 순수비를 세운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쫓아가 보겠습니다."
울산 울주군 천전리 각석.
이곳의 바위위에는 진흥왕과 관련 최초의 기록이 남아 있다.
높이 3미터, 길이 10미터 가량의 경사진 바위면.
청동기 시대 이래 수많은 비문이 새겨져 있어 천전리 각석은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바위면에는 14년의 시차를 둔 두 개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14년후 다시 새겨진 바위면에는 '사부지왕자랑(徙夫知王子郞)'이라고 적고 있다.
"사부지왕자랑은 바로 사부지왕의 아들로서,
바로 이 이듬해 540년에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을 이릅니다.
그 당시 나이 겨우 6살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삼국사기에 7살에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왕위에 즉위하기 1년전에
죽은 자기 아버지 사부지왕을 찾아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 강종훈 교수, 대구카톨릭대 역사교육학과
근친혼이 성행했던 신라 사회에서 법흥왕의 손자이자 외손이기도 했던 진흥왕.
그는 겨우 일곱살의 나이로 즉위, 마침내 신라 최대 전성기를 이룬다.
경주 황룡사.
진흥왕 14년에 건립되기 시작, 20여 년의 대역사 끝에 세워진 황룡사,
황룡사에는 정복 군주 진흥왕이 품었던 야망의 상징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높이 16척, 약 5미터에 이르렀다는 장륙존상이 그것이다.
진흥왕은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건립하면서 자신이 강력한 정복 군주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아소카왕의 전설을 빌어왔다.
즉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이 마지막상으로 장륙존상을 건립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그 재료를 바다에 띄워놓았다.
그것이 신라로 전해졌고 진흥왕이 단숨에 장륙존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금과 쇠를 모아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인연 있는 나라로 배에 실어 보냈는데 수백 개의 나라를 거쳐 신라에 당도하니
진흥왕이 그것으로 불상(장륙존상)을 만들었다."
- 삼국유사
* 아소카왕 - 기원전 3세기 인도 최고의 정복왕
* 아소카왕 사자주두
고대 인도를 정복한 정복왕 아소카왕.
그는 불교로 정복지를 교화하려고 했다.
아소카왕은 전륜성왕에 비유되기도 했다.
아소카왕은 불법의 바퀴로 세계를 교화하는 전륜성왕이고자 했다.
아소카왕은 속세의 전륜성왕으로 인식이 됐다.
진흥왕은 바로 이를 자신의 야망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신라에 바로 그런 아소카왕의 고사가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진흥왕은 아소카왕의 전륜성왕 이야기를 자기에 대입시켜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그런 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소카왕은 인도 대륙을 무력으로 통일했던 정복왕이었고,
무력으로 통일한 영토의 백성들을 불교로 교화하려고 했던 교화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진흥왕은 정복왕이면서 교화왕이었던 아소카왕의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서
실천에 옮길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강봉룡 교수,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진흥왕은 아들 태자의 이름까지 동륜으로 지었다.
"진흥왕 27년 왕자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진흥왕은 강력한 정복 정책을 펼치고 순수비를 세웠던 것이다.
창녕 진흥왕순수비.
창녕비에는 이런 정복 정책에 참여한 서른 아홉 명의 귀족 관료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신라의 고위 관료들을 총망라한 것이다.
진흥왕은 왜 이들을 멀리 창녕까지 불러 모았던 것일까?
진흥왕은 비석 건립 의식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과 왕권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즉 강력한 정복 군주로서의 권력을 취임 받고 널리 알리는 정치적 이벤트로 활용했던 것이다.
입비 의식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정치력을 과시하고, 또한 영토의 경계로 삼았던 진흥왕.
이에 더하여 그는 비석에 자신의 통치 철학까지 뚜렷히 새겼다.
"순풍이 불지 않으면 세상의 도가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퍼지지 않으면 거짓이 활개친다."
- 마운령비
마운령비에는 덕화를 강조하여 자신의 교화왕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꿈을 새겼으며
또한 스스로를 경계하는 진정한 정복 군주의 상을 새기기도 했다.
"그래서 제왕은 스스로 몸을 닦아 백성을 평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황초령비에는 정복지 백성들을 적극 포용하고 활용하려는 의지도 보인다.
"전쟁에서 용감히 싸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무리에게 상을 내리노라." - 황초령비
이러한 진흥왕의 순수비는 과연 어떤 효과를 불러왔을까?
"고대 사회 정복 군주 진흥왕이 지금의 서울 지방, 당시 신라로서는 상당한 북방 개척을 한거죠.
그 다음 함경도 지역까지 순수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죠.
그러니까 일생 평생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왕을 백성들이 직접 보고 군인들도 왕을 보게 되겠죠.
이럴 때 그 지역의 백성들이나 군인들이 왕을 향한 감격이랄지 충성심이 생겨났겠죠.
왕은 백성들에게 포상을 하고 군인들을 위로하구요.
또 비문을 새겨 자기가 온 사실을 영원히 남기게 되는데
그럴 때 백성들이 왕의 존재를 직접 대하고 느꼈을 뿐아니라
그 비문을 통해서 왕의 통치를 늘 받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죠."
- 김기홍 교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전국 순수와 순수비 건립으로 마침내 정복왕이자 교화왕이 된 진흥왕.
그는 젊고 패기 넘쳤던 자신의 꿈과 야망을 새겨 나라땅 곳곳에 천 년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진흥왕의 비석을 더듬으며 진흥왕의 꿈과 야망을 살펴보았습니다.
동시에 당시 신라와 복잡했던 국제 관계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순수비 건립을 정치적 이벤트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진흥왕의 노력은 빛을 발해 약 100여 년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됩니다.
진흥왕.
그는 마흔 셋의 젊은 나이로 죽습니다.
그러나 재위 37년간 신라의 최전성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정복을 통해 국력을 확장하고 포용과 교화를 통해 삼국 통일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덕업일신망라사방'이라는 신라의 야망을 달성했으며, 그것이 지금 네 개의 비석으로 남아있습니다.
위대한 리더.
진흥태왕의 꿈과 야망을 새긴 채 이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 고두심의 HD 역사스페셜(늘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