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존惠存의 의미
이사할 때 박스에 넣었던 책을 정리하려고 거실에 내놓았다.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데 짐만 되는 책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2년여 한번도 읽지 않았으면 버려도 되는 책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과감하게 버리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박스를 열고 추리다 보니 버릴 책이 몇 권 안 된다.
아무 미련未練 없이 버릴 수가 없다. 책도 정이 드는 모양이다. 굳은 마음이 흔들려 자꾸 예외 규정을 만드니 버릴 책이 줄어든다.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미련이 문제다. 헤어져야 할 마당에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가. 읽지도 않으면서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強迫感은 아닐까. 아니면 소유욕일 수도 있다. 책만 가지고 있어도 정신 세계가 풍요로워지는가.
방법은 있다. 버리기로 마음 먹었으니 박스를 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박스째 버리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마음뿐이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박스 하나를 열어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권 꺼내지 않아서 증정본贈呈本 한 권이 나왔다. 받아만 놓고 완독하지 못했다는 생각 끝에 겉장을 펼쳤다. 시원한 필체로 쓴 몇 줄 글이 마음을 두드린다.
지성해님 惠存
어쩌고저쩌고
2001년1월1일
저자 드림
왠지 모르게 ‘혜존’이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온다. 무슨 뜻일까. 대충 아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치던 단어인지라 확실한 뜻을 다지려고 한한자전漢韓字典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 보기로 했다.
'惠 어질, 은혜, 줄(혜). 存 있을, 살필, 물어볼, 이를至(존)'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자기의 저서나 작품 따위를 남에게 드릴 때에 상대편의 이름 아래에 쓰는 말.
순간, 나는 책 정리의 원칙 하나를 정했다. ‘혜존’의 뜻 그대로 기증받은 책은 저자를 생각하며 간직하자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책 정리 시간이 꽤 걸리게 생겼다. 드문드문 기증받은 책이 나오면 읽었는지 확인하고 안 읽었으면 조금이라도 훑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 어떤 책이든 그 저자는 많이 읽혀지고 독자들이 간직하기를 갈망할 테니 버릴 책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언젠가 한 권 책을 내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저자가 친필 서명을 해서 증정한 책이 아니라고 가볍게 생각하고는 폐휴지로 취급해서는 안 되지. 자기가 지은 책이 쓸모없이 항아리 뚜껑으로 쓰여지는 것을 염려한 사람이 김부식뿐이겠는가.
고전 시간에 다루면서 마음에 와 닿았던 삼국사기 서문을 검색해서 읽어 보았다. 다음은 마지막 두 문장이다.
"이것이 명산名山에 비장祕藏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 항아리 덮개와 같은 무용無用의 것으로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의 구구한 망의妄意는 천일天日이 비추어 내려다볼 것입니다."
.
첫댓글 짧은글인 수필이 되었네요? 제목을 -'혜존'의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글 읽고 반성을 많이 해씁니다. 보내온 그 많은 책들을 꽃아만 두고 완독하지 못한 점을요. 그러면서도 또 책은 내고 싶어서.... 도 만들면 혜존이란 낱말과 함께 보내겠지요? 저도 받은 책은 죽을 때까지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방문 감사! 시조만 쓰다가 수필이라고 써 보았습니다. '이슬처럼 수정처럼' 덕분입니다.
주신 제목이 더 선명하고 핵심을 찌른 것 같습니다. 역시 제목이 중요합니다. 동인 활동의 보람을 느끼며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렇지요, 제목이 바뀌니 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다시 읽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목은 글을 다 쓴 후에 다시 돌아보고 고치기도 하지요. 제목을 다는 방법 중에 '낯설게 하기'도 좋아요. 무슨 내용일까 하고 읽게 된다는 것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