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위 내림 길 암봉에서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巖蹊纔斷見危欄
겨드랑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雙腋泠泠欲羽翰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十院疏鍾秋色暮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萬山黃葉水聲寒
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꽃을 피우는데 林中繫馬談諧作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雲裏逢僧禮貌寬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 빛을 가뒀는데 日落煙霏鎖蒼翠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行廚已報進杯盤
―― 다산 정약용, 「산영루에서(山映樓)」
* 행주(行廚)는 밖에 여행하는 도중에 임시로 밥을 짓는 부엌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1994
▶ 산행일시 : 2018년 4월 13일(금), 맑음, 약간 쌀쌀
▶ 산행거리 : 도상 9.4km
▶ 산행시간 : 4시간 25분
▶ 교 통 편 : 전철과 버스 이용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가급적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8 : 20 - 북한산성 입구
09 : 30 - 중성문(中城門)
10 : 10 - 태고사
10 : 30 - 동장대(601.0m)
11 : 00 - 칼바위(575m)
11 : 32 - 문필봉(497.4m)
12 : 12 - 263.4m봉
12 : 32 - 화계사
12 : 45 - 한신대 신학대학원 앞 버스정류장
1. 북한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의상봉(앞)과 용출봉(뒤)

2. 산괴불주머니

느닷없이 새벽에 북한산 태고사(太古寺)의 거목인 귀룽나무 꽃이 보고 싶었다. 어제 아차산
입구에 있는 귀룽나무를 보았는데 꽃이 절반은 졌다. 북한산 동장대 서쪽 아래 태고사는 깊
은 산중의 서향이라 그 곳 귀룽나무는 어쩌면 지금쯤 한창 활짝 피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밥도 거르고 댓바람에 달려 나갔다.
구파발에서 북한산성 입구를 경유하는 버스가 군인들로 꽉 차기에 이제는 군대가 좋아져서
사병들도 출퇴근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고 그러냐고 물었더니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는 직
장인이라고 한다. 일부러 산행준비를 부실하게 한다. 혹시 숨은벽이나 원효봉, 노적봉, 의상
봉 등을 오르려는 욕심이 생길지도 몰라 이를 제어하기 위해서다. 김밥 한 줄과 물 0.5리터가
전부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의상봉이 준엄하여 게으른 마음을 저절로 다잡게 한다. 북한산성 탐방
지원센터를 지나자마자 왼쪽 계곡 길로 간다.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오르는 것보다 한적하거
니와 우당탕 소리 지르는 계류와 벗할 수 있다. 가는 길에 절이 많기도 하다. 서암사, 노적사,
용학사, 진국사, 부황사, 중흥사, 태고사 등등.
서암사에 들려 의상봉 북벽의 험준함을 손바닥에 땀이 고이게 살피고, 중성문 문루에 올라
노적봉의 푸짐한 배흘림의 암벽에 있을지 모를 볼트를 찾는다. 길에서 200m를 벗어난 노적
사도 들른다. 가파른 오르막이 천상까지 올라가는 지상선경(地上仙境)의 사찰이라고 한다.
노적봉 바로 아래에 터 잡은 절이라 노적봉 저 암벽이 곧 무너질 것만 같아 나는 여기에서는
하룻밤도 못 자겠다.
길옆 암반에 세운 선정비군(善政碑群)을 지나면 산영루(山映樓)가 나온다.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 중 한 곳으로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며, 조선 명사들의 흔적과 문향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강산이라고 세월이 비켜 갈 수는
없을 것. 아무리 뜯어보았지만 다산이나 추사의 시구가 과장되어 보인다. 완당 김정희도 이
곳에 왔다. 그의 「산영루에서(山映樓)」이다.
한 곳에 또 한 곳이라 붉은 숲속엔 一一紅林裏
감도는 시내에다 갈라진 산이 廻溪復截巒
머언 종은 비에 잠겨 고요해지고 遙鍾沈雨寂
범패(梵唄)는 구름 속에 싸늘하구나 幽唄入雲寒
돌 늙으니 전생을 추억하여라 石老前生憶
산 깊으니 종일토록 구경 바쁘네 山深盡日看
연기 안개 언제나 장애 없으니 煙嵐無障住
오솔길이 사람 향해 너그럽구나 線路向人寬
3. 앞은 원효봉 남벽, 오른쪽 뒤는 만경대

4. 바위틈에 핀 제비꽃

5. 산괴불주머니

6-1. 산영루. 조선 명사들의 흔적과 문향이 많이 남아있다.

6-2. 산영루(山映樓) 현판, 서예가 초정 권창윤(艸丁 權昌倫, 1943~ )의 글씨다.

7. 태고사 귀룽나무. 수령 178년인데 지금은 반신불수 상태다.

8. 천해대에서 바라본 용출봉

9. 천해대에서 바라본 (왼쪽부터) 백운대, 만경대, 용출봉

10. 천해대에서 바라본 노적봉

계류는 중흥사 앞에서도 힘차다. 태고사는 동장대 아래 산중턱에 있다. 계류 벗어나 산자락
을 오른다. 노적사 요사채 마당 가장자리에 귀룽나무가 있다. 경기도 보호수다. 수령 178년,
수고 23m, 흉고 2.3m. 안내판의 특기사항이다. “희귀목으로 매년 3월 20일경이 되면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덮이는데 백설 같이 된다고 한다. 특히 고찰인 태고사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고 있다.”
꽃이 다 졌다. 불과 몇 해 전만해도 우아하던 수형이 왜소해졌다. 북동쪽 가지가 부러졌고 서
쪽 가지만이 약간 성한 반신불수인 데다 노쇠하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대웅전 앞
마당에 혼자서 풀을 매고 있는 연만하신 보살님에게 이 귀룽나무의 근황을 물어보았더니,
금년에는 꽃이 핀 것 같지 않게 피다가 그만 지고 말더란다.
너른 대웅전 앞마당에 난 풀은 고들빼기였다. 보살님이 캔 고들빼기 좀 가져가시라며 한 무
더기를 준다. 배낭이 빵빵해졌다. 대웅전 뒤 계단 오르막에 있는 영천용왕당약수는 고인물이
라 마시지 않는다. 지능선 마루에 올라서면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普愚, 1301~
1382)의 사리탑이 있다. 우리나라 보물 제749호다. 보우의 법호는 태고다. 보우 스님의 사
리는 이곳만이 아니라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사리탑 뒤로 흐릿한 인적을 따라 한 피치 올라가면 봉성암(奉聖庵)의 기도 도량이라는 ‘천해
대(天海坮)’가 나온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전망 좋은 암반이다. 건너편 용출봉의 웅자
와 오른쪽 옆의 기봉인 노적봉, 만경대, 용암봉을 들여다본다. 비지정등로 구간이라 발걸음
이 조심스럽다. 발밑에 부서지는 낙엽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이마에 땀이 맺힐만하니 동장대다. 비로소 하늘이 트인다. 원
경이 명료하지 않은 우중충한 날씨다. 성곽 따라 간다. 대동문 주변은 어느 대학의 모임이 있
는지 자리 확보를 위해 수십 군데에 돗자리를 미리 깔아 놓았다. 술이 없을 터이니 모임이랬
자 맨송맨송할 것 같다. 산에 웃음소리까지 사라졌다.
칼바위 갈림길. 오랜만에 칼바위를 간다. 바윗길을 살금살금 한 피치 내렸다가 데크계단을
오른다. 칼바위를 오른 뜻은 염초봉,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을 보고자 함이다. 그 연
봉을 살피느라 어느새 김밥 한 줄을 맛 모르고 먹어버렸다. 칼바위 동릉은 예전 그대이지만
하도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 암벽이 닳고 닳았다. 미끄럽다.
이제 진달래 꽃길이 시작된다. 춘유하는 기분난다. 한 차례 뚝 떨어졌다가 오른 497.4m봉은
‘문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왼쪽 화계사 쪽으로 간다. 곳곳이 전망하기 좋은 암반이다. 꼬
박 들른다. 그때마다 시원한 탁주에 진달래 꽃잎 띄운 두견주가 퍽 아쉽다. 범골은 깊은 협곡
이다. 양쪽 암벽은 연분홍 진달래로 수놓았다. 암벽을 오른쪽으로 길게 돌아내리면 삼성암
일주문이고 대로와 만난다.
화계(華溪)는 봄이 한창이다.
11. 노랑제비꽃

12. 왼쪽이 보현봉

13. 칼바위 갈림길 옆의 암봉

14. 왼쪽 앞에서부터 뒤로 형제봉, 백악산, 인왕산, 안산

15-1. 칼바위에서 바라본 백운대 산군

15-2. 산자락은 봄이 한창이다

16. 문필봉에서 바라본 만경대와 인수봉

17. 화계사 가는 길, 범골

18. 서울 시내는 혼탁하다

19. 삼성암 뒤쪽 암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