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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무관심에 대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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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무관심에 대하여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오늘 복음의 얘기는 제 생각에 어떤 부자가 주인공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시며 얘기를 시작하시는데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니거나 부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는데
주인공인 부자는 이름이 없고 그저 어떤 부자라고만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그 반대로 라자로는 이름이 없고 그저 거지로 불리고,
부자는 오히려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름이 등록되지 않아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하느님 나라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을까요?
라자로에게 못할 짓을 하고 못살게 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므로 라자로와의 관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에게 한 나쁜 짓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고,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며
악한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사람 곧 무심한 사람일 뿐입니다.
성찰을 이렇게 하면 우리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은 것으로 천당 갈 거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지옥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 없음과 관심 없음으로 인한 이 세상에서의 관계 단절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이어져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고립을 살 수밖에 없게 하지요.
비유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라자로와의 접촉만 시도합니다.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를 돕게 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구렁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성찰을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을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부자는 자기의 집, 자기의 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자기의 성 안에는 부족한 것이 없이 다 있고,
그 안에서 자기와 가족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문 밖의 라자로를 보면서도 마음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거나
마음이 불편할까 봐 아예 관심을 끄고 외면했을 겁니다.
자기의 성 안에서 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 말씀처럼 하느님도 필요치 않았을 겁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는 주님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무관심에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 뿐 아니라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하느님 나라 무관심도 있고,
어쩌면 이것이 더 끔찍한 무관심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나자로에 대한 무관심보다 하느님 나라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끝에 자기 형제들만은 회개하여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다시 청하는데
이때 형제들이 해야 할 회개란 어떤 회개일까요?
그것은 무관심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무관심이겠지요.
무관심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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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17일 목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16,19-21)
자선을 베풀지 않은 부자
자주색 옷을 입은 그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저지른 유일한 악은 교만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여, 그대 몸의 한 지체가 그대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가없은 마음이 일지 않소? 그대 눈에 하느님의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최소한 그대 자신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두려워할 일이오. 그대 신세가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오. 그대가 낭비하고 있는 것을 그대 지체한테 주시오. 그대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오. 그대가 내버리는 것,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이오.
-히에로니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꽃으로 피어난 자음들의 동산에서
그러나 이런 일은 단지 위대한 사람들, 교회의 교부들, 주석학의 거장들에게 유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만이 다양한 오페라의 서곡과 푸가(둔주곡)를 작곡하기 위해서 거룩한 책의 계기를 잡는 사람들이 아닌가! 아니다. 우리 각자가 성경을 계기로 삼아 아름다운 멜로디를 작곡할 수 있다! 그리고 계기 혹은 기회의 이런 개념은 비록 우리가 보잘것없는 작은 자들이라 해도. 거룩한 독서의 아주 중대한 특성을 알아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 특성이란 바로 창의력, 창작력, 항구적인 새로움이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심지어는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 자유 사상이 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단어들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95)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 1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어린 세 친구
경건하고 부지런한 두 가족
어린 목동
한 시간이나 두 시간쯤 걷고 나서 루치아의 신호로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그늘을 찾은 다음, 점심 도시락을 먹보인 개에게 먹혀서는 안 되겠기에 나뭇가지에 달아 매어 두고 양을 지키면서 의좋게 놀기 시작했다.
보통 파티마의 삼종소리나 태양의 위치 혹은 나무그늘의 모양으로 정오를 짐작하고 어머니가 정성들여 만들어 준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은 보리빵과 치즈와 감람열매가 들어 있었고 어떤 때는 돼지고기 한 쪽이 있을 때도 있었다.
이 간단한 점심을 먹은 다음 루치아와 프란치스꼬 그리고 히야친따는 묵주 기도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이 신심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옛날 포르투갈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온 집안 식구가 함께 모여 묵주 기도를 드렸는데 이 좋은 습관이 그때만 해도 거의 다 폐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이리아 교구의 많은 가정들은 아직도 충실히 실행하고 있었다. 마리아 로사와 올린삐아는 아이들이 이 습관을 소흘히 하지 않도록 정신차려 보살폈다.
그러나 자주 얼어난 일이지만 노는 데 정신이 팔리거나 오디를 따는 데 열중할 때면 정신이 흩어지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묵주 기도를 드릴 수가 없어서 때로--루치아가 말한 대로--성모송 전부를 외우지 않고 오직 “은총이 가득하신"만을 외우고 묵주알을 자꾸 돌리기만 한 때도 있었다.
제일 활발했던 히야친따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것을 좋아했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어머니께 순종하려는 두 가지 의무를 단번에 해치우려고 위의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히야친따였다.
오후가 되어 배불리 먹은 양떼가 조용해지면 그들의 놀이는 한층 더 열을 띠게 된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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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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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종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분이 계십니다. 많지는 않지만 얼마를 도와 드립니다. 대부분 감사의 인사를 하시며 나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받은 돈을 들고 화를 냅니다.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마치 돈을 맡긴 것처럼 외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가 어려운 자신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도와드리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면서 성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차를 몰고 어디를 가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하시는 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5.7)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가 바로 사람에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제힘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겸손을 보이지 않았고 불쌍한 이웃을 돕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힘에 의한 것으로만 착각하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오로지 주님을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뜻이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는’이라는 점을 보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했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런 이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있게 됩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당시에는 식사가 끝나면 손을 씻는데 빵으로 손을 문질러 씻었습니다. 그리고 씻은 부스러기를 식탁 밑으로 던집니다. 원래 이것은 개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이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어떠했을까요? 저승의 고통에서 곧바로 아브라함에게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를 종 부리듯이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하지요.
부자와 라자로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불평불만 없이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잘한 것은 자기 탓이고, 못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늘 불평불만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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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실수에 화가 난다면 즉시 자신을 돌아보고 비슷한 실수가 없는지 생각해보라. 그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면 금세 화가 가라앉을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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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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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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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본향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은 이 세상에서 열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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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느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매우 대조적인 두 인간형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악인과 의인, 부자와 가난한 자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마다 제 선택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서 인생길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도 있는데,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치유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교활한 자는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며, 마음을 주님께 두는 이는 좋은 열매를 줄곧 맺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부자는 자선을 베풀지 않았지만,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라자로는 허기를 면하기는커녕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할 정도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고통받던 라자로는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 곁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나, 살아서 호강하던 부자는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기시키시는 듯 기본 구도는 비슷하지만, 메시지가 훨씬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경고는 현세에서 자기 행실에 따른 심판만을 제시한 데 비해서, 예수님의 경고는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관철되고야 말 심판을 제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 등 대조적인 일들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부자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짧게,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은 길고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라자로의 죽음은 짧게 소개됩니다. 정작 죽은 후 부자가 겪는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라자로의 행복은 아브라함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조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 방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인상적으로 과연 어떻게 재물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즉, 라자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재물을 그릇되게 소유하고 사용한 인색한 죄인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에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서 경고해야 할 정도로 아무런 성찰 없이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심판적인 부자의 언도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더 엄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망설이는 부자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으니, 죽은 사람이 다시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덜어주러 가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세의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극처럼이나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재물의 소유와 나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듯 철저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소유라 내세우지 않고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을 줄 알았으며 그들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인 실천이 사회적 매력을 발산시켜서 로마 제국의 박해도 물리치고 공인되고 국교가 되었으며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도 이 비유의 핵심에 대해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47항).
교우 여러분!
오늘 입당송의 기도처럼,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걸어갈 길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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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 왔던 프랑스 외방 선교회 사제들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조선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을 보았습니다. 교우촌으로 가면 모든 신자들이 나와서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며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곳으로 가면 마을 어귀까지 모두 따라 나와서 배웅하였습니다. 차마 발걸음을 때지 못하고 뒤돌아서면 신자들은 마치 주님께서 다시 오신 것처럼 기뻐하였습니다. 선교사들도, 신자들도 함께 울면서 아쉬움의 작별을 하였습니다. 비록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지만 주님을 신뢰하였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았기에 조선의 신자들은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고난이 닥쳐와도, 박해의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제를 그리워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선교사들은 힘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해의 칼끝이 눈앞에 왔어도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고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가난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언어가 다른 것도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성당은 사제가 한국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사이동에 따라서 전임 사제가 떠나고 후임 사제가 오면 되지만 코로나도 비자 업무가 늦어지면서 몇 달씩 사제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후임 사제가 오지 못해서 걱정하는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제게 찾아왔지만 저는 이미 다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기 때문에 직접 도와 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수도회 신부님들과 연락이 되었고, 공동체는 주일 미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신부님들도 매 주일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고, 거리도 멀어서 어려워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근처 대학에서 유학 중인 사제가 있었습니다. 유학 중인 신부님과 공동체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고 공동체의 사정을 알게 된 신부님은 기꺼이 미사를 도와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유학 중인 사제가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차가 없는 신부님이 성당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보니 모든 것이 원활하게 해결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논문을 도와 드릴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이용하던 차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잘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것을 따르고,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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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
- 무지無知한 부자 -
오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회개의 표징이 되는 비유입니다. 서두의 묘사를 통해 두 인물이 극명히 비교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날마다’라는 말마디가 주목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이렇게 살다가 죽은 어떤 부자 같습니다. 어떤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바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한 하느님 앞에 참으로 존재감 없는 허무한 존재임을 상징합니다. 반면 가난한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라자로라는 이름뜻이 가난한 이인 라자로에게도 잘 어울립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 주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자집 대문 앞에 있었던 라자로는 부자에게는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에게 정말 무관심했습니다. 더불어 구원임을 몰랐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 감옥 안에 갇힌 수인이었습니다. 고립단절의 현장이 바로 지옥입니다.
어떤 부자는 참으로 무지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탐욕과 안락의 육적 본능의 욕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자기도 몰랐습니다. 도대체 보고 배운 것이 없었습니다. 위로 죄우사방 완전히 단절 차단된 고립의 삶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개방이요 자선의 나눔을 통한 이웃과의 개방이요 단식을 통한 자기와의 개방인데 어떤 부자에게는 전혀 이런 수행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이웃을 모르니 자기를 알 수 없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부자는 오늘날 부자는 물론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어떤 부자가 특별히 나쁜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라자로에게 악행을 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라자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임을 잊었습니다. 라자로는 부자에게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물같은 존재로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완전히 비인간화된 부자입니다.
도대체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에 있어야, 공감과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부자는 전혀 이와 무관한 괴물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자기 감옥 안에 갇힌 수인의 모습입니다. 간혹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여기가 천국이라 할 때 마다 제가 드리는 답변이 생각납니다.
“외적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서로에게 단절로 닫힌 무관한 관계라면 아무리 외적 환경이 좋아도 지옥입니다. 하느님께, 이웃에, 자연에, 자기에 활짝 열려 있어 좋은 관계 속에 살 때 비로소 천국입니다.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니라 이런 고립단절의 삶이라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지옥입니다.”
그러니 외적으로는 천국같은 부자지만 내적으로는 고립단절의 지옥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이요 이웃인 라자로와의 단절이요 결국은 참나와의 단절입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무지의 감옥에 갇힌 참으로 자유롭지 못한 부자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부자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바로 고립단절의 지옥 상태에 대한 내면의 묘사같습니다. 바로 복음의 어떤 부자의 내면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참 대조적인 것이 라자로입니다. 외적으로는 가난했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께 열려 있었고 부요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비록 가난했지만 주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었기에 내적으로는 행복했던 라자로 같습니다. 바로 예례미야서 후반부의 묘사가 라자로와 같이 가난하나 주님께 신뢰와 희망을 둔 이들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이들이 정말 내적으로 부자요 행복한 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탐욕과 안락에 중독된 어떤 부자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소유에 소유되어 자유를 잃은 존재 상실의 노예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승에서 고통받는 어떤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다음 말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말 그대로 넘을 수 없는, 넘을 다리도 없는 절망의 큰 구렁같습니다. 이미 살아 생전 부자와 라자로의 관계 단절이 계속됨을 봅니다. 부단한 섬김과 나눔의 사랑 실천만이 관계 단절의 큰 구렁을 메꿀 수 있음을 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구원이요, 살았을 때 기도와 회개이지 죽으면 기도도 회개도 없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자기 감옥의 부자유한 수인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이웃에, 자기에게, 이웃에게 활짝 열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새삼 구원은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구원을 선택하라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심판 역시 하느님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자업자득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서로 섬기고 나누며 더불어 구원의 삶을 선택하여 살게 하십니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1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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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외면하지 않고 관계 속에 키워가는 사랑 ♣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17,7)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이나 세상의 힘이 아니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참 행복의 길을 보여줍니다. 부자는 고가의 명품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지냈습니다(루카 16,19). 그러나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에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며 고통 중에 비참하게 지냈습니다(16,21). 그런데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16,20).
그런데 두 사람은 죽어서 전혀 다른 처지에 놓입니다. 죽은 다음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지만 부자는 철저히 고립되어 고통을 받습니다. 부자는 자비를 청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얼핏 보면 부자는 드러나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라자로 역시 겉으로 무슨 큰 선행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사람의 처지가 그토록 정반대로 갈리게 되었을까요? 부자의 문제는 거들떠보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무관심했고, 그 결과 라자로를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는 현세에서의 풍족함과 달콤함으로 자신을 채우며 말씀을 경청하지도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에게서 마음이 떠난(예레 17,5) 그에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자비와 사랑어린 배려를 잃어버린 그는 라자로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귀를 막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오직 재물에서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재물을 통하여 사랑의 관계, 창조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디에 마음과 눈길을 두고 살아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느라 바빠서 정작 사랑의 눈길로 보아야 할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안락과 편리, 물질과 현세적인 것들이 주는 달콤함을 좇느라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떠나버릴 때도 있습니다.
남의 아픔과 사회적 고통을 거들떠보지 않는 무관심과 냉정함은 우리 영혼을 죽이는 암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남을 해코지하지 않고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늘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이고 애정 깊은 관심의 날개를 펼쳐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현세 일과 재물에 한눈파는 사이 자신의 힘이 커가고 인간적 만족감이 충족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말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죽음의 세계로 내모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 굳게 뿌리를 내리고, 이웃의 필요에 사랑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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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신실한 믿음과 맹신의 차이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세상에는 세상 사람들이 신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의 종교로써 인정을 하는 종교가 있는가 반면에 겉은 종교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실된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이비 종교도 많이 있습니다. 원래 사이비 종교는 조선말기부터 근현대사에서 보더라도 사회 구석 곳곳에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원래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이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내면 면면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각의 인물도 많이 포진돼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훌륭한 학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이비 종교에 현혹이 돼 빠지게 될까요? 아마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모든 이유를 포괄해서 하나로 정리하면 '생각하지 않는 신앙' '꼼꼼히 따져보는 면밀성 부족' 이게 가장 큰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아이러니한 게 오히려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이런 면에서는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는 그렇게 학식이 뛰어나면 당연히 지적인 힘으로도 얼마든지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우를 범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 단체는 그런 사람들의 이런 치명적인 단점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처음엔 쉽게 그런 곳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실 하나에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휘말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가 되고 점차 그들 종교의 교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합리적인 사고로 의문을 가지고 정말 그런가 하고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에서 사이비에 빠질 뿐만 아니라 그 종교에 대해 절대적인 맹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다 인정하는 정통 종교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정통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표면적으로 보면 그럴 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내면 면면을 보면 우리도 우리가 믿는 이 세상에 단 한 분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우리도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단순히 성당만 다니고 미사 전례와 같은 외형적인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앙을 하게 된다면 우리도 진실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기도가 과연 제대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얼마나 자신할 수 있을지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낙제 점수에 가까운 사람이 수두룩백백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성당을 다니며 하느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게 허다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우리는 사이비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사이비에 빠진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굿뉴스 자료실에 나온 자료 중에 주호식 신부님께서 올리신 글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신앙도 공부가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려움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달리 말하면 하느님을 알려고 또 예수님을 알려고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통 종교를 선택하고도 천운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자칫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항상 견지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맹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해 누군가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믿는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을 아주 독실한 믿음이라도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건 오히려 예수님과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아주 저명한 신학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올까요? 바로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바로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을 우상숭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사실 조금만 고민해보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신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더 충격적인 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시편 말씀을 한 번 더 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또 행복한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복론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그렇게 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하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바로 그들은 이미 오만한 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길에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서 전력투구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늘나라는 그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일 것입니다. 이런 모든 언급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저는 오늘 복음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나자로와 부자 이야기 복음이지만 이 복음을 통해서 다른 면을 하나 진지하게 살펴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들만은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곳에는 오지 않게 하고 싶어서 그런 청을 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아브라함할아버지로부터 돌아온 답변에 우리는 깊은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설령 부자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하여도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실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믿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 속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만큼 신뢰하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자가 됐든 부자가 되지 않았든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계신 그런 천상의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일반적으로 아는 그런 내용을 조금 벗어나 이런 면도 한번 묵상해본다면 의미있는 묵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그 말씀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그 의미가 무슨 깊은 뜻을 담고 있는지 다시 깊이 고민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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