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방한한 여류소설가 펄벅은 볏가리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 옆에서 짐을 지고 가는 농부를 보았다. 그가 통역에게 물었다. “저 농부는 왜 힘들게 볏단을 지게에 지고 갑니까? 달구지에 싣고 가면 되잖아요?” “소가 너무 힘들까 봐 농부가 짐을 나누어 지는 것이죠.” 그 말에 충격을 받은 펄벅은 이렇게 글로 적었다. “이제 한국의 나머지 다른 것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짐을 나눠 지고 가는 저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자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얼마 전 나는 펄벅이 받았던 똑같은 충격을 느꼈다. 서울 역삼동 연스시 일식집에서 가진 단출한 저녁 모임에서였다. 한창 얘기 꽂이 필 무렵에 음식점 사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했다. 동석한 지인이 분명히 그를 ‘이경용 사장’이라고 소개했는데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이경용 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하는 궁금증이 발동했다. 잠시 후 지배인 명찰을 단 여직원이 서빙을 하러 들어오자 내가 물었다. “사장님이 왜 부장 명찰을 달고 다닙니까?” 그녀는 이미 익숙한 질문인 듯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거요. 우리 사장님은 자신을 사장으로 생각 안 해요.” “사장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제가 가게에 처음 왔을 때 사장님이 이러는 거예요. ‘저는 사장이 아닙니다. 제가 월급을 주지 않잖아요. 월급을 주는 분이 사장이죠. 여러분의 월급은 손님이 줍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모시는 손님들이 진짜 사장님인 거죠. 저는 다만 자리를 마련했을 뿐입니다.’ 이 말에 뿅 가버렸어요. 그 뒤부터 사장님과 계속 함께 일하고 있어요.” 지배인인 그녀는 18년째 연스시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해 가게가 뱅뱅사거리에서 역삼동으로 이사했지만 이직한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직원들은 대부분 장기 근속자이다. 일본인 주방장은 개업 이래 줄곧 자리를 지킨 21년차이다. 그의 직함은 이경용 사장의 부장 직급보다 높은 실장이다. 지배인도 부장보다 상위 직급이다. 이 사장과 같은 부장 직급을 가진 직원은 두 명이 더 있다. ‘이제 횟집의 나머지 다른 요리들을 더 먹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60여년 전 펄벅이 느꼈던 감동이 파도처럼 가슴으로 밀려왔다. 이경용 사장의 모습은 자기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발로였다. 하심은 스스로 낮춤으로써 마침내 자신을 높이는 고차원적인 인간관계의 덕목이다. 일찍이 부처도, 예수도 몸소 실천했던 그 미덕이다. 연스시 사장은 겸양을 통해 직원들을 받들고 손님들을 높였다. 사회지도층조차 갖추지 못한 덕목을 음식점 주인은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정말 강호에는 무림의 ‘진짜 고수’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갑질이 횡행하고 갈등이 심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하심이 부족한 탓이다. 강호의 고수처럼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싸울 일이 없다. 나는 연스시에서 진한 삶을 배웠다. 배보다 마음이 더 부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