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발 궁전과 디아나 신전 이야기
카다발 궁전
상 프란시스코 성당을 나온 우리 일행은 레푸블리카 도로를 따라 지랄두(Giraldo) 광장으로 올라간다. 비가 점점 세차게 쏟아진다. 광장 이름은 12세기 후반 무어인으로부터 국토회복운동을 이끌었던 지랄두(Giraldo sem Pavor) 장군에서 따왔다. 이곳에서 길은 에보라 대성당을 지나 디아나 신전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에보라 대성당 정면만 보고 디아나 신전 쪽으로 올라간다. 코린트 양식의 디아나 신전이 보이고 그 너머에 디아나 정원이 있다. 정원 한 가운데 에보라 역사지구의 중심임을 알리는 상징조형물이 있다.
이곳 디아나 정원은 에보라 시내 북쪽을 조망하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그것은 시내 중심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식으로 말하면 아크로폴리스에 해당하는 곳이다. 성곽이 시내를 감싸고 있고, 그 밖으로 수도교가 외곽으로 이어진다. 에보라 수도교는 시 외곽으로부터 이곳 디아나 정원까지 19㎞ 이어진다. 우리는 비를 피할 겸 카다발 궁전(Palácio Cadaval)으로 들어간다.
카다발 궁전의 공식명칭은 카다발 공작 궁전이다. 카다발 공작의 저택으로 사용되었고, 부속 로이우스(Lóios)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원래 로이우스 수도원 성당이었다. 우리는 그 중 가운데 싱코 키나스(Cinco Quinas) 탑과 로아우스 성당 내부를 살펴보았다. 싱코 키나스 탑은 그 기원이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층으로 되어 있고, 상층부는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아 무데야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벽의 창문과 장식을 통해 고딕양식과 마누엘 양식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로이우스 성당은 복음사가 상 주앙(S. João Evangelista) 성당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상 주앙은 《요한복음》을 쓴 성 요한을 말한다. 건축 내부에서 로마 시대 벽, 아라비아 지배 때의 타일을 볼 수 있고, 고딕과 바로크 시대 장식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브라질로부터 가지고 온 나무로 만든 17세기 문을 볼 수 있다. 성당 내부 벽은 아줄레주 벽화로 장식을 해 푸르게 보인다. 이에 비해 지성소는 금색으로 치장을 해 성스럽고 화려해 보인다. 지성소 옆 성단소에는 카다발 공작의 후손들 무덤이 있다고 한다.
디아나 신전
디아나 신전은 기단과 14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이 신전은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 사이 로마 시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건물은 율리아의 자유분방함(Liberalitas Iulia)이라 불렸다고 한다. 율리아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로 세 번째 결혼을 통해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부인(황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유분방함 때문에 결국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미움을 사 캄파니아주로 추방당해 그곳에서 죽었다. 실제 그녀는 재주 있고 지적인 여성이었지만, 남성 중심의 로마사회에서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당시 정치중심지로 성벽, 탑, 궁전, 신전, 수도교, 개선문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 주변 3면에 수도교를 통해 들어온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물은 개선문 옆에 있던 분수에 공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전의 종교적인 의미가 쇠퇴하기 시작했고, 군사용으로 용도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5세기 로마가 멸망하면서 신전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 716년에는 무슬림이 에보라를 점령하면서 신전이 방어용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이때 기둥 위에 성벽 형식의 방어진지가 구축되었다고 한다.
1165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국토를 회복한 후 신전은 에보라성당 건물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신전 윗부분에서 종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1204년까지 에보라성당으로 사용되었고, 당시 주교이던 파이우(D. Paio)에 의해 현재의 대성당이 축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신전은 군사용 요새, 곡물 창고, 정육점 등으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다. 이 건물이 디아나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17세기다. 제수이트 교단의 마누엘 피알류(Manuel Fialho) 신부가 그 신전이 디아나 여신에게 바쳐졌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 신전의 주두 장식이 코린트 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신에게 바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피터에게 바쳐진 신전이라고 주장한다.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은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36년 정육점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로마시대 기념물로 인식되면서 신전을 포함한 주변지역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새로 추가된 구조물을 철거하고 신전의 원형을 유지하도록 했다.
신전은 19세기 후반 고고학박물관이 되었고, 1910년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신전으로 국가기념물이 되었다. 1986년에는 에보라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면서 신전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현재 디아나 신전은 로마 광장(Forum Romanum)과 성곽 그리고 수도교라는 큰 틀 속에서 발굴과 복원 그리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신전은 가로 15m, 세로 25m, 높이 3.5m의 직육면체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은 가로 6개, 세로 10개, 모두 28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쪽의 포럼 광장에서 신전으로 올라가 북쪽 지성소에서 신에게 경배하고 나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