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 15,20-27ㄱ; 루카 1,39-56
+ 오소서, 성령님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너무나 뜨거웠던 날씨가 요 며칠 좀 선선해졌는데요, 어른들은 이를 두고 ‘성모님이 승천하시면서 더위를 가져가셨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1950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에, 비오 12세 교황님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반포하셨습니다. 이는 80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청원한 가운데, 교황청이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이어져 온 신앙을 확인하고, 전 세계의 주교님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이루어진 선포였습니다.
교의가 반포된 것은 1950년의 일이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님의 승천은 기도와 전례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성모님 승천은 4세기 말부터 5세기 무렵 기념되기 시작했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영광의 신비에서 성모님의 승천을 묵상한 것도 이미 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삼 20세기에 들어서 이를 교의로 반포하게 된 것일까요?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형성된 인간 이성에 대한 한없는 신뢰는 인류의 미래를 무척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첨단 과학 기술을 동원하여 이룩한 문명의 이면을 인류는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식민주의와 일본 제국주의,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폭력적인 이념과 전체주의의 등장은 결국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고,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류는 이제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1854년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교의를 반포하였는데, 4년 뒤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우리의 어머니께서 당신 아드님의 부활의 영광에 온전히 참여하셨다는 믿음은 교우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참상으로 죽음을 목도한 모든 이에게, 죽음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희망의 표징이었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제2대 조선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의 청을 받아들여 1841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의 주보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4년 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하여 광복을 맞을 줄 앵베르 주교님과 교황청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역사 안에서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계약 궤’가 있었습니다. 이 ‘계약 궤’는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던 궤로서,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궤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사무엘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긴 궤를 되찾아 오기 위해 “일어나 유다의 한 고을로 갑니다.” 그리고 궤를 모셔 오면서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 그런데 이 궤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어떤 교부들은 이 계약 궤가 신약성경에 다시 나타났음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일어나 유다의 한 고을로 가십니다.” 사무엘기에서 다윗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이 성모님께 적용됩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자 ‘큰 소리로 외칩니다.’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등장하는 ‘큰 소리로 외치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에 다섯 번 등장하는데요, 그 가운데 네 번은 계약 궤를 모셔 오는 전례적인 장면에서 사용됩니다.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 말은 다윗이 했던 “주님의 계약 궤가 어떻게 나에게 오실 수 있는가?”(2사무 6,9)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이 태 안에서 뛰놀았다”라는 구절 또한 다윗이 계약 궤를 모셔 오면서 기뻐하며 춤추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가량 머무시는데, 다윗도 계약 궤가 오벳 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무르게 합니다(2사무 6,11).
이미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을 잉태하실 것을 예고할 때,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했는데, 이는 “계약 궤가 있던 ‘만남의 천막’ 위에 주님의 영광이 덮여있었다”(탈출 40,35; 칠십인역)라는 탈출기의 말씀과 연관됩니다.
이 궤는 오늘 제1독서에도 등장합니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라고 시작되는 묵시록의 말씀은, 성모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교회를 상징하기도 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이어서 전합니다.
이처럼 오늘 전례는 성모님을 새로운 계약 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계약 궤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다면, 신약에서 하느님의 현존 자체이신 예수님을 모신 성모님이야말로 새로운 계약 궤이심을 보여줍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고,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모든 수확물이 주님의 선물이므로, 수확의 맏물을 주님께 바치라고 규정합니다. (레위 23,10-14)
맏물은 전체 수확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맏물’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한 분만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이의 부활을 보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시는데,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죽음의 파멸’이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었고, 성모님의 승천을 통하여 온전히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오늘 고백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단순히 ‘성모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이 결국 ‘몸’까지 포함한다는 것으로서,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몸을 지닌 인간 전체가 구원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몸으로 겪어 온 우리 역사 전체를 포함합니다.
내가 사랑한 것, 땀 흘려 일한 것, 아팠던 것,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것, 기도한 것, 눈물을 흘렸던 것 모두 몸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 우리 영혼만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구체적 역사와 우리의 관계가 구원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살아온 그 모든 날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 사랑하고 땀 흘리고 아파하고 희생하고 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우리의 삶이 하느님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날에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성부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냐?”라고 물으셨을 때에는, 혈연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드님의 십자가 길에 동행하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온 인류의 어머니로 세우시며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성자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도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는 모두 성모님의 한결같은 “예”를 보여주는 신비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 ‘예’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며 살아온 삶의 마지막은 허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남의 기쁨이며,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입니다. 우리도 성모님과 함께 매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https://youtu.be/BDSwSSr5qbA?si=g6txMNpRpY2oirw9
빅토리아, 아베 마리아
티치아노, 성모 승천, 1516-1518년
출처: Assumption of the Virgin (Titian)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