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성지순례 6일차
(2022.12.02)
오늘 이동거리가 멀어 날이 밝기 전인 6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했다.
1시간 쯤 달리다 보니 원주를 지나가고 있었다.
느낌이 이상해서 생각해보니 삼척성내동 성당으로 간다고 나선 것이
강릉 임당동 성당으로 내비게이션에 찍었던 것이다(위 지도 참조).
할 수없이 강릉에서 순례를 시작하여 양양까지 갔다가
삼척으로 내려왔지만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와서
그다지 시간이 지체되지는 않았다.
숙소에서 나올 때 삼척으로 간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막상 내비를 찍을 때 성내동이 아닌 임당동 성당으로 찍은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다.
36. 임당동 성당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0년대에 이미 강릉군 내에 삼정평, 새울,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21년 5월 양양 본당,
12월 금광리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성당 앞 왼쪽에는 강릉 임영관지가 있습니다.
임영관의 칠사당과 객사문에서 병인박해 당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37. 강릉대도호부 관아
江陵大都護府官衙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순례도장은 위 건물 입구 오른쪽에 있었으나 잉크가 마른 것인지
찍히지를 않아 약간의 물을 묻혀 찍어도 역시 찍히지 않았다.
근처 관할성당인 임당동 성당에 전화를 해도 받지않아 그냥 돌아갔다.
순례지 관리가 소홀한 느낌이다.
순례 중 여러곳에서 관리가 잘 안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38. 행정 공소
1924년경에 시작되었다.
강릉지역 연곡면 행정공소는 본시 외교인 촌이었으나
경기도 양평군 룡문면 칠정리 공소(옹기점 마을)<현: 양평군 용문면 금곡리>
회장으로 있던 김세중(라파엘)<춘천교구 사제 이정행 외증조부)이
1924년경에 일가를 데리고 이주하여 행정1리 216번지에 정착하여
토기업을 주로 하는 옹기점 마을을 일으키어 행정공소가 시작되었다.
행정공소 출신 교구사제는 김종석(토마: 1969.12.16 서품-1987.4.25선종) 신부와
이정행(사도요한: 1972.12.8 서품 ~ 2006. 현재) 신부가 있고,
수도 성소로는 이귀녀(칸디다;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소속, 1985년 종신서원) 수녀와
박정남(다테오;예수의 꽃동네 자매회 소속, 종신허원) 수녀가 있다.
39. 양양 성당
이광재 신부의 순교 혼이 살아 숨 쉬는 영동 지방 믿음의 고향
6·25 전쟁 때 순교한 이광재 신부의 순교 혼이 살아 숨 쉬는 영동 지방 믿음의 고향인
양양 성당은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함께한 성당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교 길에도 남을 위해 헌신한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기념관은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고 있다.
양양 성당에는 6·25 전쟁 때 순교한 이광재(李光在, 1909~1950, 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과 기념비가 있다.
“마지막 순교 길에도 목마른 수감자에게 물을 떠다 준
가톨릭 사제의 희생은 한줄기 빛처럼 위대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8일 천주교 박해로 원산 형무소에서 순교한
이광재 신부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한중경 목사의 증언이다.
40. 금광리 공소
영동 지역에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개설되어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 본당으로서
1921년에는 양양 본당과 함께 영동 지역 두 개의 본당 중 하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참새 한 마리가 들어가 갇혀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달아나려고 창문마다 부딪히며 날아다녔다.
아내와 나는 창문을 모두 열고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참을 시도한 끝에
참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41. 라파트리치오 신부 순교터
라 바드리치오 신부가 1950년 8월 29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한 밤재굴 순교터는
묵호성당에서 강릉방면 7호선 국도 동해대로로 15km 거리에 있다.
강릉시 옥계면 밤재 철도굴(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16-2) 남쪽 굴 입구에서
약 200m 남쪽에 「라 바드리치오 신부 순교비」가 있는 주변이 순교터로 알려져 있다.
라 바드리치오 신부의 유해는 당시 묵호 경비사령부 (현재 동해시립발한도서관 앞 주차장)에 매장하였다가
묵호 성당으로 옮겼으며, 이후 춘천 죽림동 성당 성직자 묘역에 이전 안치되었다.
레일리 신부의 장례미사는 1951년 10월에 가서야 치러졌다.
42. 묵호 성당
6.25때 학살당한 라 바드리치오 신부가 사목하던 성당
1931년 하경연 요셉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묵호지역은
1940년 강릉 본당(현 임당동 본당) 관할의 묵호 공소가 설정되었으며
1948년 6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43. 성내동 성당
1949년 10월 7일 춘천교구 소속 강릉(江陵, 현 임당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삼척(三陟)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에 원주교구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1966년 10월 5일 사직리(史直里, 현 사직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본당 이름을 ‘성내리’로,
1988년 10월 18일에는 다시 ‘성내동’(城內洞)으로 바꾸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여주에 살 때 친하게 지내던 레지나 자매를 만났다.
레지나 자매는 건강이 조금 좋지않아 지인인 아녜스 자매와 도전리에 와서 살았다.
우리보다 먼저 도전리에 와서 살았는데 친하게 지내다보니
두 자매를 입교시켜 영세를 받게 하였다.
아녜스 자매는 아내의 대녀가 되었다.
레지나 자매는 여주에 신축했던 집과 딸린 밭은 정리하고
지금은 남편의 회사가 있는 제천으로 이사와 살고 있다고 한다.
제천에 와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배론성지에 자주 봉사하러 다닌다고 한다.
아녜스 안부를 물어보았지만 레지나 자매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아내도 대녀와 연락이 안되어 궁금해했고
레지나 자매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쉬워했다.
1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져서 숙소로 가는 길에
아침용으로 준비했던 여러가지 음식을 처분할 수 있는 날이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이기에 마트에 들러 몇 가지 구입했다.
내일부터 험한 산길을 다녀야하기에 저녁을 먹고 일찍 쉬었다.
▼ 크고 안락한 숙소
첫댓글
글늘건안하시면서
행복 하십시오
세잎 클로버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