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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백성
출 19: 1-6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제임스 콜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으로 쓴 책이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개의 경우 좋은 삶을 사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Good is the enemy of Great)라고 지적합니다. 좋은 것에 안주하여 위대한 것이 되기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위대한 기업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냥 신앙생활하기에 좋은 교회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위대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인생도 그냥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 출19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 이르렀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그마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대한 백성 삼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한 교회 그리고 한 성도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지 3개월쯤 되었을 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하나님은 떠돌이 유랑 민족, 430년 동안 종살이나 하던 민족, 노예근성이 덕지덕지 붙은 이스라엘 족속을 택하여 위대한 백성을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영광스런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구약학자들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출애굽기 19:1-6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체결한 결혼예식과 같은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왕자가 왕국 바깥의 마을 모퉁이에 사는 거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왕궁을 빠져나와 거지 아가씨와 데이트를 즐기고 밥을 사 주고 옷을 사 입혔습니다. 어느 날 이 아가씨를 왕궁으로 초청하여 결혼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가씨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생의 전환점은 바로 결혼 예식장 그곳이었습니다.
시내 광야에 솟아있는 시내산이 바로 그런 장소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호렙산이라고 불리는 산. 지금 현재는 ‘모세의 산’이라 불립니다. 오늘 본문의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 말하는데 시내산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 예식장이 되었던 곳입니다. 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천덕꾸러기 백성이 하나님의 보물 같은 백성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버려진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지 아가씨가 왕비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지금까지 너희가 보물같은 백성이었다. 제사장 나라였다. 구별된 백성이었다.’ 과거형으로 말씀하지 아니하고, ‘되겠고’, ‘되리라’ 미래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시내산 언약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존재가치가 바뀌어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영적인 시내산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 앞에 자신의 인생을 드렸던 그 자리, 그분을 만나 나의 취미도 바뀌고 꿈도 비전도 새로워지고 인생의 소원도 목적도 달라졌던 시내산! 이 경험이 우리를 위대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어떤 백성일까요?
1.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하나님의 보물’이라는 말입니다.
애굽 땅을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러서 장막을 치고, 모세는 산으로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3절,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4절)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에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위해 높은 절벽에 둥지를 치고 부드러운 털로 보금자리를 마련한다고 합니다. 알을 낳고 부화시키고 먹이를 나릅니다. 그러다가 새끼들의 날개에 힘이 붙은 어느 날 갑자기 새끼들을 둥지에서 밀어냅니다. 새끼들은 연약한 날개를 퍼득이며 몸부림치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집니다. 어미는 그 새끼 밑으로 쏜살같이 내려가 날개를 쭉 펴고 받아서 업습니다.
‘내가 너희를 등에 업어 여기까지 인도하였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여기 독수리 새끼는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자녀인 내게 왜 이런 일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깜짝 놀라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내게 왜 이런 건강의 이상이? 내게 왜 이런 사업의 어려움이? 내 자녀들에게 왜 이런 위기가? 내게 왜 이런 잠 못 이루는 아픔과 불안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보금자리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왜요? 물어다주는 먹이만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떨쳐버리라는 것입니다. 꿈도 비전도 없는 자리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벼랑에 집어던졌지만 절대 땅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여기서 ‘내 소유가 되리라’는 말은 ‘내 보물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하나님의 보물 같은 백성이란 뜻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꼬리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대대로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노예근성이 있었습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에 찌든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야 위대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위대한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떼내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온 놈, 욕심으로 남에게 딴지거는 인생이란 꼬리표를 떼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얍복강 나루에서 씨름하던 천사가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그 꼬리표를 떼라. 이제부터 이스라엘이라 하라’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안의 영적인 거인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영적인 거인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위대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하나님나라의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2.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제사장’ 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약성경 벧전 2:9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이 힘든 세상을 살며 늘 불평하며 원망하며 이 사람 저 사람 비난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늘 변죽이나 울리며 변방에서 서성이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부정적인 면만 보고 항상 부정적인 말만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근성입니다. 짜투리 인생, 변방 근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제사장(중보자)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역사의 구경꾼이 아니라 역사의 중심에 서서 역사의 아픔을 붙들고 살아가는 중보자,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어떻게 삽니까? 입으로, 삶으로 이웃을 저주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며 살아갑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복을 빌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불평이나 하는 백성들, 기다리지 못하고 걸핏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매달려서 그 칼날을 몸으로 막으며 매달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백성들의 허물과 상처와 실수를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하나님 차라리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제사장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구별된 백성’ 이라는 말입니다.
(6절) “너희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백성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지어진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이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지어진 존재를 말합니다.
(찬송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교통이 없이는 우리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진 존재들입니다.
다윗은 자식의 반란으로 왕궁을 떠났을 때에, 어려운 처지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에 왕궁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내게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주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한다고 하면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이 소천하셨을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 제가 병원에 입원하여 있으면서 그 목사님의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기독교장로회 출신의 목회자로서는 교회를 가장 크게 부흥시키며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이끄신 분입니다. 기장교단의 총회장도 지내시고, 유명해지셔서 세계 곳곳에 강사로 불리어 다니셨지만 한평생 물욕을 버리시고 곳곳에서 받은 강사비는 다 교회에 헌금하시고, 자신을 위해 물질을 쌓지 않으셨습니다.
소년 시절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이후로 평생 4차례의 죽음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1973년 이후 7년마다 입원과 수술을 반복했던 목사님은 별세신앙을 주창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목회자 세미나를 열어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면서 목회자들이 ‘별세 영성’을 갖고 사역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복음전도 사역을 귀중히 여기셨던 이 목사님은 갈2:20과 행20:24을 삶의 모토로 삼으셨습니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소천하시기 전 해 여름 담관암 수술을 통해 4번째 위기를 넘긴 이 목사님은 ‘거지(巨智 : 큰 깨달음)선언’을 했습니다. 그 내용은 별세는 큰 깨달음이니 자기를 비우고 거지로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은 물론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실천해 나가자는 선언이었습니다. 소천하시기 직전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써서,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죽복(죽음의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평생 자신을 위한 개인통장을 가져본 일이 없는 무욕의 삶을 사시며 두 자녀를 입양하는 등 자신의 별세신앙을 실천적 운동으로 승화시킨 분이십니다. 제가 병원에서 심각한 병으로 입원해 있을 때 이 목사님의 책을 읽으며 ‘목사는 적어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위대한 것입니까?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뜻을 이 땅에 펼쳐가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던 그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 그 꿈을 이 땅에 펼쳐가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고, 그 꿈을 펼쳐가는 교회가 위대한 교회입니다.
“그 사람, 사람은 좋지!” 이 말은 칭찬이 아닙니다. 욕일 수 있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열정이 모자란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위대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더 오래 살도록 내버려두신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는 곳곳마다 위대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는 위대한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복이 한없이 흘러 넘쳐서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제사장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백성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입니다. 그 위대한 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치
출 19: 1-6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싶었던 한 청년이 현자를 찾아가서 물었답니다. “사람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청년의 물음에 현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서랍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답니다. “이 보석을 갖고 시장에 가서 값을 물어 보시오. 단, 팔지는 말고 이곳저곳을 돌면서 값만 물어 보시오.” 청년은 그의 말대로 시장에 나가 보석 값을 물어 보았답니다. 먼저 과일가게에 들렀더니 그 주인이 5천원이라고 했답니다.
채소가게에 가서 물어 보니 만원이라고 했고, 철물가게에서는 3만원이라고 했답니다. 가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시장 곳곳을 돌며 물었는데 물을 때마다 그 값이 달랐답니다. 마지막으로 보석가게에 가서 물었답니다. 그 보석을 감정한 보석상은 놀라서 말했답니다.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소. 이 보석은 참으로 귀한 것이어서 금액으로 말하기조차 어렵소. 당신이 요구하는 금액을 모두 다 줄테니 이것을 나에게 파시오.”라고 했답니다.
현자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청년을 팔지 않고 현자에게 돌아와 그 동안의 일들을 그대로 얘기했답니다. 청년의 말을 듣고 현자가 조용히 말했답니다. “이 보석은 정말 귀한 보석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그것을 5천원이나 만원의 가치로 보고, 누구는 무한대의 가치로 보고 있소. 그것은 곧, 이 보석이 아무리 훌륭한 가치를 지녔다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오.
사람의 가치도 이와 다를 게 없소. 그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오.”라고 말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 따라 다른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얼마 정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 부여해 주고 있을까요?
노예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떤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까?
5절 6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 계약을 합니다. 본격적으로 시내산 계약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계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계시는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지금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렇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조건을 만족하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첫째가 “내 말을 잘 듣고” 둘째가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동일하게 베드로 전서에 나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라는 말씀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입니다. 이미 그렇게 한 것입니다. 조건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이 하나 더 들어 가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바로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 그런 신분으로 바꾸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미래형이 아닙니다. 완료형입니다. 행위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만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그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언약으로 말미 이미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 율법의 청종과 순종에 의하여 신분을 바꾸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을 주심으로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와 부활을 통하여 택한 백성,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조건이 좋지 않고 부족하게 보여도 폐물이 아니라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꿈'이 4천 8백 40만 달러(5백71억 원)에 팔린 기사를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피카소가 그렸기 때문입니다. 가치라는 것은 누구의 소유냐가 중요합니다. 소속이 어디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민족 중에 내 소유가 되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소유(세굴라)라는 말은 가치 있는 어떤 것, 어떤 물건이나 대상을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따로 구별한 것 등의 뜻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소유된 것으로 관계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자체의 가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므로 특별한 보물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전도서는 보배(전2:8)로, 말라기에서는 특별한 소유(말3:17)로, 신명기에서는 보배로운 백성(신26:18)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13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의 소유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단의 소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예민이 아니라 자유민이라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시내산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으로 시내산 언약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앗수르에게 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시내산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 행하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킨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특별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신 것입니다.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우리는 분명한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석같은 존재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세계의 주인, 전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해 주었습니다.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존귀한 자로 가치를 부여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 민족은 별수 없이 엽전이야, 우리 교회는 어쩔 수 없어, 우리 아이는 구제 불능이야. 당신이 뭐 안다고, 우리 집은 별수 없어"
이런식으로 자아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출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아름다우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소유가 문제가 아닙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하나님이 위대한 걸작품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시22:10)" 시편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답니다. 그 강아지는 오랜 동안 길을 잃고 헤매어 굶주림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보니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답니다. "밥스"였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라고 쓰여있었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왕의 부처가 에딘바라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를 잃었답니다. 수백 킬로나 멀리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준 것은 바로 이 이름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확실한 이름표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쳐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표가 확실하게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는 것은 십자로 인치신 이름표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소속의식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경우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9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히 5:5)”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힘 전혀 없을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 잡아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보배같은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신분의식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소유로 삼아 주실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은유적인 차원에서 고대의 극히 높은 위치를 점하였던 제사장처럼 이스라엘이 그렇게 놓은 위치를 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4:22) 하나님과 열방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됨과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이러한 특권을 상실하였습니다(롬 11:20) 하나님과 열방 사이에서 열방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열방에게 전달하는 나라로서의 특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영적 특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벧드로 전서 2장 9절에 보면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의 특권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직위를 제사장 나라 즉 왕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노예가 아닙니다. 이제는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왕"이자 "제사장"입니다(히10:19). 실제의 왕이나 제사장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으로부터 비롯된 왕적인 기능과, 그의 제사장직으로부터 비롯된 제사장적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왕 중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왕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제사장적 직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어도 우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청와대에 누가 마음대로 출입하겠습니까? 대기업 회장실을 누가 마음대로 출입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왕자가 된 것입니다. 예배의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특권을 주시고 있습니다. 능력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
우리는 자녀로서 삶의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죄의 노예, 물질의 노예, 아름다움의 노예, 명예의 노예, 환락의 노예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종"의 멍에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통치권이 있습니다. 계시록 5장 10절 말씀입니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이제 우리는 왕노릇 해야 됩니다.
우리는 영적이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노예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말씀합니다. “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면서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우리는 영적 권세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축복해 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에게 축복권이 있는 것처럼(민 6:22-27),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이제 축복권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사람들은 돈이라는 경제적 재산과 건강이라는 신체적 재산, 그리고 지식, 인격, 양심, 기술과 같은 정신적 재산이 없으면 초라하게 생각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같은 농부 삼갈을 사용하여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백명을 물리쳤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어, 우리 교회는 뻔해, 우리 민족은 앞날이 막막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사 돈이 없어, 실력이 없어, 가진 것이 없어, 권력이 없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동 다윗을 통해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렸을 때 어린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를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실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잃어 이제 끝이났다고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가정, 우리 아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영국의 심리학자 J. 하드필드 박사가 자신감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넌 틀렸어. 이젠 끝났어!"라고 자괴감을 줄 때 우리는 실제 가진 능력의 30%도 채 발휘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하는데 왜 니가 못해!"라고 자신감을 줄 때, 우리는 무려 능력의 500%까지 발휘할 수 있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자신감을 회복시켜주신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예 근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작은 문제만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입니다. 문제만 생기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구별된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예 근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애굽 군대가 추격하자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와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했습니다(14:11-12). 마라의 쓴물 앞에서도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15:22-27). 르비딤에서 먹을 물이 없을 때도 원망하였습니다(17:1-7).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은 어떻게 대우해 주었습니까? 4절 보십시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11절로 12절에서는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새 중의 왕인 독수리가 새끼를 기를 때 높은 바위산 벼랑에다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밑에는 가시로 위는 부드러운 것으로 집을 만들고 새끼가 자라면 집을 흔들어 새끼를 밖으로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새끼가 떨어지면 시속 180km로 달려 날개를 펴 새끼를 받아 위로 올린답니다. 이렇게 반복하여 나는 훈련을 시켜 독수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어미는 독수리로 독수리답게 사는 법, 사냥하는 법, 높은 곳에 집을 짓는 법 등을 새끼에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구별된 새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새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한 것입니다.
구속사의 세과정 애굽에서 행한 일(애굽), 독수리 날개(광야 여행), 나에게 인도함(시내산)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만약 내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언약을 맺으시면 그 언약을 한 후에는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9장부터 24장까지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출애굽기를 주일 마다 묵상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들을 생각해 보았는데 아시다 싶이 출애굽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18장까지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시는 장면으로 애굽에서 시내산까지의 기록입니다. 1장에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속을 요청하였습니다. 2장에서 4장까지는 구속을 준비시켰고 5장부터 15장 21절까지 열가지 재앙을 통하여 구속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15장 22절부터 18장까지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에 따라 승리의 행군을 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19장부터 40장까지는 택한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장부터 34장까지는 언약을 체결하시고 율법을 수여하시는 내용입니다. 35장부터는 언약의 증표인 성막을 건립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핵심적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 나오는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 언약 체결을 통해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징계하십니다. 이 계약 체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 잘못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합니다. 계약 체결이 끝난 후 24장 이후에는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징계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갈 때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결국 3천 명정도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출32). 디베라에서 백성이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불로 징계하십니다.(민11:1-3, 4-35)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원망합니다.(민13-14장)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합니다.
출애굽기 19장 이전의 범죄와 내용도 유사하지만 심판을 하십니다. 구별된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못할 때 시내산 계약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당하고 심판받습니다. 이스라엘 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시내산 언약입니다.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벌리는 일이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시내산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을 정식 체결하기 전에 시내산 계약을 잘 지키면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행위 계약이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한 계약입니다.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이 계약을 지켰습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위 계약을 십자가에서 다 지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이것은 은혜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행위로 잘 지키어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피값으로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
사단은 오늘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너가 거룩한 백성이냐?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지 않느냐? 거짓말 하지 않았느냐?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 않았느냐?” 신앙인으로 자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였다. 나는 구별된 사람이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자신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국제여론조사지(IJPOR)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자부심이 비교적 낮다고 합니다. 세계 33개국을 대상으로 민족 자부심(national pride)을 조사한 결과 한국민은 노르웨이와 함께 공동 22위를 차지했답니다. 베네수엘라가 1위, 미국이 2위로 높았습니다. 가끔보면 "이 땅에 태어난 게 싫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게 창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한 민국 국민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었던 나라, 36년간 식민지지배를 받았던 나라, 그리고 6.25사변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던 나라가 지금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면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습니까? 전 세계 2백여 국가 중 국토 면적으로는 1백 9위 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GDP와 교역 규모로는 13위, 외환 보유액으로는 4위인 것을 보면 자부심을 가질만하지 않습니까? 전 세계 68억 인구, 2백여 국가 중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반도체, 핸드폰, IT기술, 조선 등 21세기를 이끌 산업에 있어서 최선두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은 결코 소국(小國)이 아닙니다. 1인당 소득이 세계 최고 수준인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43만 여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싱가포르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도시에 불과합니다. 인구 500만명의 핀란드, 400만명의 뉴질랜드나 아이슬란드 비하면 대국입니다. 한국경제 규모는 러시아보다 큽니다. 한국은 미국의 6대 교역대상국, 4대 식량수출국의 하나입니다. 지금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을 하고 있습니다. 2010년 11월 우리나라에서 제5차 G20 정상회의를 개최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만하지 않습니까?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연약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구별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치있게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성숙, 성화입니다. 성화의 기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열매는 자신이 맺고자 한다도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기본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가 많이 맺히려면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구별된 백성으로 사는 것의 기본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화의 완성을 향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거룩한 시민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파송하셨습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신분의식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출 19: 1-6
독수리를 가까이서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상상외로 큽니다. ‘이런 덩치로 어떻게 그렇게 나는가?’ 라고 감탄을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을 독수리에 비유해서 말씀을 하시는지 그 의미가 심오합니다.
오늘 본문과 함께 신명기 32장 11-12절을 보면 더 실감있게 묘사를 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은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훈련의 시범
독수리는 새 중에 왕입니다. 새 가운데는 당할 새가 없는 왕입니다. 이 종류가 48종이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종류들이 나라마다 다른 형태로 있는데 그 둥지가 2-3미터 되는 그런 큰 사이즈라고 합니다. 독수리 둥지를 하나 철거하면 그 전체 무게도 1톤에 가까운 둥지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둥지에 동원된 각종 재료들이 기묘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최고속력 시속 180키로미터로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옆으로 획 지나가는게 눈에 잘 안 보일 정도입니다. 또 90키로미터 반경에 있는 먹이를 관찰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공중에서 90키로미터 반경의 먹이를 눈으로 관찰하면서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가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비유가 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독수리로서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셨다고 말씀합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은 것 같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에 고이 있는 새끼를 날개로 업어서는 공중에 띄워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끼는 떨어지면서 죽는 줄 알 것입니다. 아직 미숙한 날개로 퍼득거리며 떨어지면서 죽는 줄 알지만 어미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날개로 받아서 다시 공중으로 올리고 또 공중에서 떨어뜨려서 훈련을 시키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훈련시키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 하나의 교훈처럼 들려 드리고 싶은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무엇인가 몰두해야 되고 훈련이 있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에 훈련을 놓치면 일생동안 성장에 큰 차질이 옵니다. 그만큼 청소년 시절에 훈련을 받고 배운다는 것은 아주 소중한 경험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부족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독서량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운동량이 부족하다, 세 번째는 부모와의 대화가 부족하다고 진단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부족은 분명히 청소년 성장에도 영향을 주는 일입니다. 이 부족이 일시적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오래가든지 습관화되든지 하면 우리들의 정서에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컴퓨터 사이트에 몰두하는 시간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있어야
우리 세대가 자랄 때만 해도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서에 많이 심취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을 숙제로 내 주기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책이라는 것은 컴퓨터와는 분명히 구별성이 있습니다. 컴퓨터는 분명히 순기능이 있고 역기능이 있습니다. 순기능을 살리면서 컴퓨터를 활용해야 됩니다. 역기능에 내가 몰두하든지 심취한다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주는 최대 장점은 편리성입니다. 쉽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숙제를 대행해주는 사이트들이 더러 있다고 듣고 있는데 만약에 숙제를 대행해주는 사이트에서 숙제를 자꾸 한다면 이것은 자기 성장에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서 몰두하는 어떤 훈련, 공부하는 이런 시간들이 많이 있어야 됩니다. 청소년 시절을 쉽게 보내면 후 세대에 여러 가지 성장에 차질이 옵니다. 청소년시절에는 파종의 계절입니다. 심어야 됩니다. 거두려고 하면 안됩니다. 계속 심어야 됩니다. 아주 몰두하면서 심어야 됩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공부가 아이에게 너무 짐스럽다, 숙제가 너무 짐스럽다 하는 그런 부모님들은 그것을 너무 애처롭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야말로 몰두하는 공부하는 시절이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신화처럼 언급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은 분명히 테러리스트이고 이슬람의 광신주의자입니다. 이 사람은 악의 화신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테러집단의 지도자로 군림을 하는가? 이 사람에게 있는 다른 사람이 추종을 감히 못하는 세 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 첫째가 이슬람 신학의 탁월한 이론가라는 것입니다. 총칼만 들고 싸우는 전사가 아니고 이슬람 신학을 통달하고 있는 이론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연설을 하면 모슬렘들이 아주 열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빈 라덴은 한번 책을 보면서 몰두하는 일들이 몇 일씩 지속이 된다고 합니다. 몰두하면서 이슬람 신학에 심취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마구잡이로 총칼을 휘두르는 깡패가 아닙니다. 이 사람의 이론은 탄복할 만큼 조직적이고 미래적이고 거기에 투신할수록 이 사람의 이론 앞에 열광을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열정적인 행동가이며 계산을 할 수가 없는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력과 이론과 열정이 겸비된 사람인데 지금 이 시대에 혁명가로서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향력은 아직도 굉장합니다.
대가 있는 길
우리 사회에 무언가 성취한 사람은 반드시 배움이 몰두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독수리의 훈련이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독수리 새끼라고 한 번 연상을 해 봅시다. 높은 창공에서 어미가 나를 집어 던져 버렸다면 죽는 줄 알 것 아닙니까? "아 죽었구나"라는 죽는 줄을 느끼는 그 대목까지 우리는 훈련이 일어나야 됩니다.
몇년 전, 수영선수로서 아시안게임의 금메달 리스트인 최윤희가 금메달을 따고 어느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훈련받으면서 제일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를 훈련시키는 코치를 죽여버리고 싶도록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목이 있기에 금메달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넘으면 금메달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아주 잘못된 철학이 쉽게, 편리하게 가자는 것입니다. 쉽게 살자는 것입니다. 쉽게 예수 믿자는 것입니다. 편리를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 편리는 댓가가 지불된 편리라야 되지 대가를 회피한 편리는 범죄행위입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릴 때는 사랑을 먹고 살아야 된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일에 보람을 먹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치원생이 받는 그 사랑은 오래 받으면 안됩니다. 유치원시절 때 받던 그 사랑을 계속 요구하면서 크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 사랑받는 보람이 아니고 이제는 사랑을 베푸는 보람, 일하는 보람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데리고 와서 독수리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훈련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한 백성들입니다. 430년이라 하면 이것은 거의 20대 내지 25대가 되는 긴 세월입니다. 20대 이상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다면 그 종살이가 체질화된 것입니다. 대대로 종살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대대로 백정으로, 대대로 머슴으로 살면 그 머슴살이가 체질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문화화된 것입니다. 종살이가 불편한게 아니라 문화화된 것입니다.
사명의 길
오늘 우리들의 생활 속에 문화화된 게 아주 많습니다. 문화화현상, 콜라 마시고 햄버거 먹고 피자먹고 하는 것은 세계화의 문화화현상입니다. 세계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세계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음료입니다. 그러므로 세계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화라는 게 해외여행을 많이 하고 외국어를 잘하는게 아닙니다. 세계의 문화를 함께 누리는 것을 가리켜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피할 수 없이 세계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화가 문화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체질화된 종, 문화화된 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답게 다듬으시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독수리를 훈련시키듯이 훈련을 시켰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에게 영원한 민족스승입니다. 본인도 훌륭했지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도 도산 안창호의 제자입니다.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창호는 우리 앞에 이런 신앙고백을 줍니다. 이 분의 말의 뜻이 이렇습니다. "안창호는 마이 웨이(My way)를 가기 전에 히스 웨이(His way), 즉 하나님의 길을 발견했다"라는 것입니다. 나의 길을 가기 전에 그 분은 하나님의 길을 먼저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이 웨이보다 히스 웨이를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에 의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설정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 길을 가야 됩니다. 그래서 도산 안창호는 목숨을 거두는 그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 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말이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이 이 나라를 지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신앙고백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말을 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의 자리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 나라와 민족을 맡기면서 살았습니다. 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남강 이승훈이 회개하고 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겠다 라는 신앙가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 독수리새끼가 받는 그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후손들이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가난의 의미를 알고 커야 됩니다. 우리가 조상들이 물려받던 그 갈등을 우리 세대가 그대로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 조상들이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왜 고생을 했는지 그 고생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으로만 되는 교육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교육이 담당해야 될 몫이고 우리 부모가 담당해야 될 몫입니다.
일상에서 벗어나라
우리가 사회 심리적인 측면에서 자칫 잘못하면 고칠 수 없는 상태로 우리가 문화화되어 버립니다. 지금 고학력 실업자, 그리고 청년 실업자가 많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들의 문화화와 굉장히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문화, 사회문화, 직장문화 이런 것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에 고실업을 양산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3D업종에는 30만명 이상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쉽게 살고, 편리하게 살고자 하는 문화화된 의식,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하고, 조금 어려움을 감수하기 싫어하는 이런 문화화된 의식이 공부할 때부터 익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레벨이상으로 살아야지, 이 레벨 이하는 아니다' 그런 문화가 지금 우리 사회에 많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선교사회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일도 쉽게 편리하게 전도하는 길이 없나, 이런 문화의식이 나도 모르고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땀 흘리고 희생하고 수고하면서 주님을 섬기는게 아니라 어떻게 편하게, 쉽게 되는 길이 없나, 남들이 수고해 놓은 거기에 덩달아 박수 치는, 내가 밥상을 차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젓가락만 들고 가서 함께 먹는 이런 심리가 오늘 우리들의 신앙행위 속에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밥상은 내가 차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을 빼앗는 일들이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이와 같은 사회 문화화현상 속에서 우리가 탈출을 해야 됩니다. 내가 ‘이대로’ ‘이게 정상이고 만족하다’ 거기서 탈출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라고 하는 이 문화에서 탈출하는데는 상당한 피땀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길 가다가 만났는데 교회에서 복음제시를 위해 성구를 외우라 해서 인사하면서 성구암송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암송할 만 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외워 보았는데 도무지 머리에 안 들어옵니다"라고 합니다. 그게 정상 아닙니까? 외우는데 숙숙 들어오면 이상한 것입니다. 잘 안됩니다. 잘 안되는 그것을 돌파해야 되는데 그것을 돌파하지 못하니까 못 외우는 것입니다. 잘 안된다는 그것을 돌파하는 것은 나 한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까지 안해 주십니다. 이대로가 괜찮다는 그것을 돌파하는게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깨는 대목이 한번씩 있어야 됩니다.
맺는 말
등산은 좋은 운동입니다. 등산해 보신 분은 누구나 경험합니다. '아, 힘들다. 내려갈까?''정말 힘들다, 저 위에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하고 절망하는 대목이 한 번씩 있습니다. '정말 힘들다 주저앉고 싶다' 그것을 넘어서서 정상에 이르러야만 등산의 묘미를 압니다. 적당히 올라가는 그런 산이야 올라가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힘드는구나 그 대목을 올라서서 정상에 서면 말 못하는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청소년들은 곱게 자라야 됩니다. 하지만 곱게 자란다는 이 개념은 훈련을 생략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잔인할 정도로 교육을 시키는 선생님이 계셔야 됩니다.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공부하는 시기가 있어야 됩니다. 그야말로 탈출하고 싶다 라는 고통의 시간을 지식과 더불어 싸우는 대목이 있어야 무언가 됩니다. 독수리의 훈련이 청소년들에게 분명하게 각인되는 그런 보람있는 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치유하는 교회
출 19: 1-7
금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작곡가인 루빈 스타인에게 이런 질문을 누가 던졌다고 한다. “당신의 성공의 원리가 무엇인가”? 당신이 이런 놀라운 황홀한 곡들을 작곡하게 만든 뛰어난 능력들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궁금하지 않는가? 의외로 그의 대답은 이런 대답이었다. “무관심이지요”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자, 난 음악 외에 다른 일에는 무관심합니다”라는 대답이다. 그야 말로 오직 음악에만 열중한 것이다. 음악만이 그의 관심사요 사랑이요, 삶의 의미였다. 자신의 전 존재를 집중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세계적인 곡들을 작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어느 분야에서든지 그가 가진 비전에 집중하는 자들이 그 성공을 이루고야 만다.
루빈스타인이 가장 사랑하며 좋아했던 작곡 외에는 그가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작곡이 그의 가장 큰 관심이요, 흥미였다. 다른 것은 그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최고의 관심과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집중하며 헌신하는 내 인생의 열정은 과연 무엇인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에게 주님은 내 인생의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가? 진솔한 질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관심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가장 독특하게 하나님을 반영한 하나님 형상으로 만든 나에 대한 관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을 고치며 열방을 치유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기를 희망한다. 십자가를 아는 주의 종들로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내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헌신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며 힘을 잃어버리는 그런 인생 살아가는 것을 원하실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기를 바란다. 능력 있는 인생,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능력의 종들로서 열방을 치유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 우리의 전 존재를 쏟아 부어 그것에 집중한다. 관심은 곧 사랑이요, 열정적 집중력을 발산하게 만드는 원 동력이다. 음악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 갖지 않았던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 루빈 스타인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만이 주의 관심의 대상이다. 독생자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처형시키며 우리를 사랑했던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이 땅을 치유하며 변화 시키는 능력의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하는 위대한 삶의 능력을 우리는 회복하고 누려야 한다. 이 놀라운 능력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을 지금 살고 있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오늘 회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제자들이여 열방을 치유하고 고치는 희망의 교회가 되자. 나는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모세의 열정, 그것을 우리가 먼저 꼭 가져야 할 이 시대의 도전이요, 영성의 기초라고 확신한다. 열방을 치유하는 능력있는 자는 하나님을 찾는 열망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1. 열방을 고치려면 하나님을 찾는다. 모세를 불러 말씀하시는 하나님(19:3)
출19: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모세이다.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고 난 후 모세는 시내 산을 향해 하나님을 찾아 나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찾기를 원한다. 나를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나의 주인께서는 주인을 찾아 주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열심 내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을 찾고 주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쏟아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알게 하신 내 인생 최고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나는 얼마나 귀한 마음으로 찾고 있는가? 구원 받은 주의 자녀로서 나는 은혜를 사모하는 은총의 사람인가?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로 높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감격하며 겸손히 경배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모세가 찾았던 간절한 만남을 어느 정도 보여 주고 있는가?
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열정적으로 나를 구원하신 은혜의 주님을 찾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세상에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도전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 감각한 세상 가운데 우리의 삶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찾는 열정을 잃어버렸다. 애타게 찾는 간절한 마음을 상실했다. 우리는 생사를 건 하나님과의 만남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모세는 모세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리더 할 능력이 없음을 알았다.
민족의 치유와 희망은 하나님만이 희망이요, 소망임을 기대한다. 조그마한 틈이 생기면 불평 불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아는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고 난 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려 산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만남을 집중하는 한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고 계시는 것이다.
겸손한 모세이다. 인간의 한계를 가진 모세이다. 그가 비록 애굽의 왕궁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으나 그런 인간적인 최고의 것을 배웠다 할 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가장 위대한 능력의 길이요, 인생 문제의 해결점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한 국가를 치유하고 살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길밖에 없음을 모세가 보여 준다.
우리는 착각하며 인생을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모세처럼 아무리 뛰어난 훈련과 재능을 가졌다 하여도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라는 이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 앞에 있는 자인가? 아니면 아직도 나를 의지하는 인간적 방법에 몰두하는 인간적인 사람인가?
전적인 믿음과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리더임을 고백하며 찾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만나신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하나님을 만나야만 했을까이다. 다른 그 어떤 것 보다도 하나님을 찾는 모세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주 중요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모세가 하나님을 찾아 나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며 만남을 기대한 것이다. 완전하신 하나님,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 나를 만드신 하나님, 나를 이스라엘의 리더로 세우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내 것을 주장하고 내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여지 없이 불평하며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공격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을 듣기 위해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모세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관심인가? 민족을 치유하고 살리는 길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기 위해 모세는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의 방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이 은혜가 있어야 한다. 내 것 내려 놓고 주님이 원하는 주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드리기 위해 날마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의 말씀 앞에 나를 내려 놓는 것이다.
여러분 문제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기를 바란다. 인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만나 주실 것이다.
마음과 몸이 상하였는가? 나를 만드신 창조 주 앞에 겸손히 나아가 문제를 내려 놓고 도우심을 간구하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이미 내가 겪은 모든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주님 앞에 엎드리며 도움을 간구하라. 주의 은총이 넘치게 쏟아질 것이다.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느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에 풍성하시고 내 모든 인생에 필요한 은총을 얻기 위해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항상 나를 돕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시다. 나는 이 놀라운 은혜의 삶을 우리가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와 같은 들을 귀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 말을 모세에게 하고 있지만 이 말을 잘 전하라고 말한다.
잘 듣고 그대로 순종하라고 말한다.
과연 어떻게 우리가 열방을 치유하고 민족을 고치며 축복을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세 가지 면에서 열방의 주인공들로 살아갈 우리들의 위대한 능력을 말씀하신다.
1.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열방을 치유한다(5).”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5절에서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고 말한다. 세계는 내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를 만드신 분이 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온 세상이 주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요 기적의 삶을 우리가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자들이다. 그 놀라운 승리를 나의 것으로 받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주의 자녀들이다. 이것을 믿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미 구원의 비밀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모신 자들이 여러분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소유된 확실한 주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는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복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로 남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이다. 우리는 주의 영원한 소유가 되었다.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보장된 축복을 누리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이다. 열방 중에서 내 소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언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주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 복이 우리에게 이미 십자가의 능력으로 온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주의 소유가 되어 주의 다스림 가운데서 누리는 자유와 평안과 능력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주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두려움 없이 사는 능력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자이다.
출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에게는 전능자의 보호가 있다. 독수리는 그 새끼를 그 날개 위에서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는다. 과거의 보여 주셨던 절대적 보호를 이스라엘은 체험했다. 그리고 모세는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하나님의 일을 실행했던 자이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나의 완전한 소유라고 말씀한다.
43:2 “내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니”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너는 내게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완전하게 지키고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들이 이 땅에서 이런 존귀와 보배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소망인 것이다. 이런 완전한 보호 아래 있는 우리가 능력의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열방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의 백 그라운드는 이 세상의 왕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방을 치유할 주님의 대사이다.
우리는 오늘도 힘 없이 능력 없이 살아갈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절대적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이 놀라운 능력의 자녀들로서 이 땅을 고치는 것이다. 열방을 주의 나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배후에는 이 세상의 왕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2.열방을 치유하는 제사장들이 되게 하는 것(6)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라”
주의 소유된 백성들이 곧 제사장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축복의 통로로 위대한 복의 제사장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관심이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섬기는 일만을 최선을 다하여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살지만 우리의 삶의 목적은 주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다.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께 경솔히 행하지 않고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제사로서 속하며 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을 제사장이 한다. 이 세계를 치유하는 능력의 종들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가 우리의 섬김과 헌신으로 고쳐진다는 것이다. 바로 주님이 화평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신을 신고 이 땅에 버려진 죽은 영혼들을 복음으로 살리는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들이다. 이 땅에 버림 받고 상처 받은 자들을 주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선포하며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제사장이며 열방을 치유하는 위대한 부름 받은 사명의 사람들임을 깨우치는 주의 비밀을 맡은 능력의 종들인 것이다. 이 놀라운 사명을 이 땅에서 실현시켜 나갈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죄가 있는 곳에 더 이상 죄가 자라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우리가 선포하고 섬기는 데로 된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열방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내가 만나는 자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냐는 것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내가 축복하면 그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내가 선포하고 명령하는 데로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저주의 사람들이 되면 안 된다. 우리의 저주가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 참 조심해야 할 이 땅에서의 인간 관계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권위는 대단한 권위요 구별된 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레위 지파만이 이 일에 구별되어 쓰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선포하고 복을 내리는 데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벧전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축복의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죄를 끊고 다시 주의 놀라운 사역자들로 태어난 귀한 복의 선포자들이 되어야 한다.
3.거룩한 백성들이 열방을 치유한다(6)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라”
요즘 신정아 사건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거짓 학위와 학연과 일가 친척들 그리고 자기 사람 봐주기의 한국은 도덕 상실의 나라와 같다.
신정아씨, 알고보니 기독교 신자…일주일 3~4번 교회기도9/13/07조선 닷 컴
그동안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던 신정아(35)씨가 사실은 수년간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기독교 신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연합뉴스가 13일 보도했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B교회에 따르면 신씨는 주일에 3~4번 교회에 나가 한달에 60여만원이 넘는 헌금을 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는 평일 아침 8~9시께 자신의 BMW 차량을 타고 이 교회에 들러 혼자서 기도를 했고 그 때마다 3만~5만원씩 헌금을 했다.신씨는 올해 초 종로구 내수동 오피스텔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 교회가 있는 봉원동 인근 대신동에서 살았다.이 교회 담임목사는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신씨가 평일에는 일주일에 3~4번씩 출근 시간대에 혼자 나와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나갔고, 일요일에는 공식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나와 잠깐씩 머물다 갔다”며 “교회를 처음 찾은 것은 3~4년 전쯤이고 이사한 뒤에도 교회에 나왔다”고 전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그는 의로운 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되는 것이다. 결혼 식장에서 결혼을 앞둔 신부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일생에 단 한번인 신부로 단장되어 그날의 주인공이 된 신부의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런 놀라운 신부로 단장 되는 것이다.
이 땅에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을 주의 신부로 단장하게 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돋 보이는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끊임 없이 관심 가지고 있는 부분이 바로 거룩한 주의 자녀들로 드려지는 것이다. 구별된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물론 죄의 영향을 우리가 이 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거룩한 자녀가 되는데 힘 써야 한다.
이 땅이 죄로 물들고 악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는 것이다. 구별된 주의 종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기와 거짓이 나무한 이 땅에 희망은 거룩한 주의 백성들 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과 속임의 아비인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죄의 종들이 죄악을 벗어 던져버리고 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것이 열방을 치유하여 회복시키는 일이다. 이 일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며 고치는 능력의 자녀들이 우리인 것이다. 나의 힘으로 되지 않고 십자가의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정복해 세계 비전의 교회가 되자.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향하여 원하시는 능력의 회복은 거룩이요, 이 놀라운 거룩성을 가지고 세상을 고쳐 나가는 것이다.
이런 존귀한 열방의 축복의 교회가 되는데는 두 가지의 조건을 하나님은 제시한다. 우리가 세상을 치유하는 능력의 교회가 되는데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5)
모세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전능자임을 알고 하나님을 찾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서 산으로 향했다. 이미 마음이 준비된 모세였다. 어떠한 말씀에도 순종할 각오가 된 전능자 앞에 선 겸손한 마음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부분적으로 내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잘 듣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 준다. 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취하며 승리하는 길은 잘 듣는 것이다. 들을 귀를 가지고 완전한 순종까지 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귀가 다 있다고 다 잘 듣는 것이 아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믿음 생활하다가 결혼한 가정을 만났다. 아이를 낳아 돌을 맞아 돌 잔치에서 온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매의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것만 골라서 들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나에게 맞고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가는 말은 잘 듣는데 나에게 부담이 되거나 힘들다 생각되면 그 말은 걸러서 듣는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실패하며 사는 실패의 삶의 지름길이다. 신앙에도 성공의 지름길이 있다. 그 반면에 실패의 지름길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소유며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을 잘 듣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서 듣는다면 하나님의 평화를 부분적으로만 맛보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다 성공적인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행복한 인생, 신나는 인생,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희망한다.
누리며 살 뿐만이 아니라 민족과 세상을 변화시키어 그들도 우리처럼 사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 위대한 능력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보여준 이 땅을 고치며 치유하는 화목자들로 이미 우리는 부름 받은 것이다. 이 땅의 축복을 선포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선택된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것을 믿는 우리가 되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던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려는 불 타오르는 열망이 여기 모인 자들에게 있는 줄 믿는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줄 믿는다.
이 음성을 잘 듣는 것이다. 그들이 축복의 종들이요, 이 세상의 희망인 것이다. 열방을 치유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한 번뿐인 이 땅에서의 인생, 하나님께서 관심가지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유로 드려지기를 바란다.
제사장이 되어 이 땅의 죄악을 치유하며 고치는 능력의 화목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 되어 구별된 신부들로 주님 오실 그 날 두 손들고 주님과 재회하는 축복의 신부들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의 말씀을 내 인생을 걸고 순종하며 온전히 드리는 우리의 삶이 될 때 열방은 주에게로 회복될 것이다. 민족을 주께로, 열방을 주께로 헌신하는데 힘 있게 드려지는 우리교회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