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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국문초록
질 들뢰즈는 펠릭스 과타리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1972/3)에서 독자적인 존재론을 구성한다.
이를 “비인간주의 존재론”이라 일컬을 수 있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윤리학과 정치학을 포함하는 실천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연주의자이자 유물론자로서, 들뢰즈는 내재적 세계에 기초해서 실천 철학을 정초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존재로서의 세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무의식에 대한 들뢰즈의 착상은 정신분석의 그것과는 다르다.
들뢰즈 는 주장하기를, 생산의 차원에서 무의식은 고아이며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자기-생산).
무의식은 정신분석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리 장치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우주 내지는 전체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해할 때에만, 초월성 또는 신을 도입하지 않으면서 내재적 존재론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은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비-인간적 성(性)”과도 같다.
그것은 성, 성욕, 생산, 욕망에 대한 “부모가 있는 생산”과 관련된 그 어떤 착상도 배제한다.
그런데 들뢰즈의 무의식 개념은 순전한 논리적 구성물은 아니다.
그것은 원시 (영토) 사회에서 야만 (전제군주) 사회를 거쳐 문명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분석의 결과로
서만 발견되고 정초될 수 있었다.
역사의 끝에 가서야, 사회의 본성은 드러나게 되며, 전체로서의 존재의 본성은 사회 역사의 극한으로서 탐구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존재론을 구성하기 위해 욕망의 개념을 가다듬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욕망이 결핍된 대상에 대한 추구 내지는 심리적 현실로서의 환상의 생산으로 이해되어 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적인 착상과는 반대로, 들뢰즈는 욕망은 우주적(보편적) 생산의 내재적 원리이며, 욕망 자신이 현실을 생산한
다고 주장한다.
또한 들뢰즈는 기술 기계를 넘어 사회 기계와 욕망 기계로서의 기계 개념을 재구성한다.
기계는 흐름들의 절단의 체계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절단은 현실과의 절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성 내지 배치를 의미한다.
기계는 공장과도 같다.
전체로서의 세계는 자기 생산의 과정 안에서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무의식 또는 우주는 생산 일반이다.
말하자면,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이다.
들뢰즈에게 생산의 이론은 곧 존재론이다.
생산의 세 종합은 셋이 있는데, 연결 종합, 분리 종합, 결합 종합이 그것이다.
이 모든 종합은 시간의 견지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항상 시간의 과정 속에서 다시금 종합되기 때문이다.
분열증은 이 과정에 대한 들뢰즈의 용어이다.
분열증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우주의 경과이다.
우리의 실천적 과제는 그 과정을 완성하는 일이다.
욕망의 해방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 의 삶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규제되고 통제되고 있다.
심지어 정신분석도 아빠, 엄마, 자식으로 구성된 오이디푸스(핵가족)을 강요함으로써 자 본에 봉사하고 있다.
이제는 자본에 대한 자발적 예속에서 도주하여 분 열증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이다.
목차
국문초록
서론: 존재론과 실천 철학의 문제 / 1
1. 안티 오이디푸스: 정치 철학 또는 비인간주의 존재론 / 1
2. 자기 예속을 욕망하는 인간의 문제 / 6
3. 전면에 등장하는 맑스 / 11
4. 욕망과 무의식의 탐구: 안티 오이디푸스, 또는 정신분석과의 대결 / 15
5. 존재의 종합 이론: 시간의 견지에서 / 21
6. 논문의 구성 / 24
1장. ‘사회체’ 이론과 자본주의 / 26
1. 사회 기계: 기계로서의 사회 / 28
2. 사회체와 물신(物神) / 30
3. 자본주의와 세계사 / 35
4. 원시 영토 기계와 코드화 / 42
5. 야만 전제군주 기계와 초코드화 / 48
2장. 무의식의 존재론적 이해 / 55
1. 고아 및 자기-생산으로서의 무의식 / 57
2. 들뢰즈의 맑스 수용에 있어 몇 가지 문제 / 63
3. 맑스적 연원 1: 고아 및 자기 생산으로서의 무의식 / 69
4. 맑스적 연원 2: 유적 존재 / 75
5. 비-인간적 성 또는 n 개의 성 / 80
6. 맑스적 연원 3: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 내지 동일성 / 86
3장. 힘의 존재론과 욕망 기계 / 96
A. 베르그손의 변증법 비판: ‘가능성’ 비판과 ‘잠재’로서의 지속 / 99
B. 스피노자와 힘(potentia, vis, potestas) / 115
C. 스피노자에서 니체로: 힘과 의지 / 127
D. 기계와 욕망 / 141
1. 기계 개념의 유래 1: 구조의 변이와 이행 문제 / 143
2. 기계 개념의 유래 2: 과타리의 기계 / 147
3. 기계 개념의 유래 3: 버틀러의 ‘기계들의 책’ / 149
4. 욕망과 욕망 기계 / 152
4장. 개념적 질서 속에서 본 생산의 종합 / 157
A. 생산의 생산 또는 연결 종합 / 158
1. 연결 종합의 형식 / 158
2. 채취-절단과 흐름 / 163
3. 부분대상 / 167
4. 기관 없는 몸 / 172
5. 죽음 본능 / 176
B. 등록의 생산 또는 분리 종합 / 179
1. 투자와 대항-투자 / 180
2. 억압과 탄압 / 182
3. 편집증과 그램분자적인 것, 및 기적 기계 / 187
4. 분리 종합의 형식 및 이탈-절단과 코드 / 191
C. 소비의 생산 또는 결합 종합 / 194
1. 소비의 생산과 주체의 탄생: 결합 종합 또는 잔여-절단 / 194
2. “나는 느낀다” / 199
3. 호모 히스토리아 또는 역사의 이름들 / 204
4. 결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과 유목적 사용 / 206
5장. 자본주의 비판 / 209
1. 들뢰즈를 과타리에서 구출하라? / 209
2. 정신분석의 모범적인 들뢰즈 비판 / 225
3. 제도 분석과 식민화 / 235
4.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의 가족주의 / 244
5. 화폐 이론과 반-생산의 구체화 / 251
결론: 분열증으로서의 삶 / 258
주요 참고문헌 / 261
일러두기
1. 본 논문에서 원문의 강조는 방점̇ ̇으로, 원문의 대문자는 이탤릭체 로, 필자의 강조는 인용문에서건 본문에서건 고딕체로 표시한다.
또, 한글 문헌에서 직접 인용할 때 번역어와 구어체는 문어체로 적 절히 바꾸기도 했다.
또한 원문 인용시, 문맥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것이 확실할 때는 별도의 표시 없이 인용 구절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2. 들뢰즈의 주요 문헌은 약자만으로 표기하되, 약자는 참고문헌 에 밝혔다. (예) (AO 17)
3. 스피노자, 맑스, 니체, 베르그손 같은 주요 저자들을 인용할 때 는 저자의 이름과 참고문헌에 나오는 약자와 쪽수를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예) (Marx M 230; 506)
4. 그 밖의 다른 저자들을 인용할 때는 저자의 이름과 참고문헌에 나온 출판 연도 및 쪽수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기한다. (예) (Granel 1969: 309)
5. 같은 저자의 같은 글을 인용할 때, 인용이 반복될 경우에는 대 체로 따로 표시하지 않고 쪽수만 괄호 안에 표기한다.
단, 여러 저자 의 인용이 혼동될 여지가 있을 때는, 저자를 밝혔다.
6. 여러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본 논문과 관련된 논의는 이메 일 armdown.net@gmail.com 또는
홈페이지 http://armdown.net을 통해 이어질 수 있다.
서론: 존재론과 실천 철학의 문제
1. 안티 오이디푸스: 정치 철학 또는 비인간주의 존 재론
우리는 본 논문에서 들뢰즈(Gilles Deleuze)가 과타리(Félix Guattari)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1972/3)에 개진된 비인간 주의 존재론을 개념적 수준에서 재구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펼쳐지는 자본주의 비판의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들뢰즈는 “오이디푸스”로 지칭되는 정신분석(프로이트, 라캉 등)에 대해서는 비판 적 수용의 태도를 보이는 반면, 맑스(자본주의 비판)와 니체(인간 심리학 비판)에 대해서는 적극적 수용의 태도를 보인다.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관심과 사용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맑스는 이 책에서 비로소 전면 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 책이 맑스를 다루는 방식은 엥엘스에서 레닌을 거쳐 스탈린으로 이어진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와 알튀세르, 발리바르, 마슈레 등의 작업을 통해 시도된 맑스주의 갱신의 시도 양자를 동시에 비판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우리는 본 논문의 서술 과정에서 들뢰즈의 맑스 수용이 갖는 특성을, 맑스의 존재론과 자본주의 비판 두 차원에서, 확인
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안티 오이디푸스는 주로 정치 철학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수용되어 왔다.
실제로 들뢰즈 자신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 은 “정치 철학 책”(PP 230)이다.
푸코 역시 저 유명한 영역판 서문에서 이 책을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라 칭하면서 “윤리 책”이라고 규정 한다(Foucault 1977: ixxx).
또한 이 저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단지 세 권의 연구서가 출간되었을 뿐인데, 이들 모두는 주로 정치 철학의 관점에 서
해석하고 있을 뿐 존재론의 측면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Holland 1999; Buchanan 2008; Silbertin-Blanc 2010).
심지어 저명한 연구자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없다”는 강한 주장까지 전개하고 있다 (Zourabichvili 2004a: 6).
한편 들뢰즈에 대한 대표적 비판자인 바디우 (Badiou 1997)와 지젝(Žižek 2004)은 특이하게도 의미의 논리(1969)까지 의
존재론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비롯해 과타리와 함께 쓴 저술은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들뢰즈에서 ‘존재론 의 부재’를 주장한다.
이런 연구 정황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책에서 존 재론을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도이다.
그렇다면 들뢰즈 자신이 안티 오이디푸스를 “정치 철학 책”이라고 평가한 것은 독자들을 향한 거짓말인가?
결코 거짓말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 하다.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실천 철학과 존재론의 종합을 도모한 가장 최근의 저술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안티 오이디푸스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그렇듯 독특한 의미의 “정치 철학 책” 또는 “윤리책”이다.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안티 오이디푸스와 그 짜임이나 전개의 면에서 비견할 만한 유일한 책은 윤리학 말고는 없다.
두 책의 공통점은 정치학이나 윤리학 등 실천 철학의 문제를 존재론에서 출발해서 인간학을 경 유하여 다룸으로써
존재론의 구성을 통해 실천 철학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기획을 완결된 형태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실천 철학의 문제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이 ‘인간학’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물론 정치학이나 윤리학은 모두 인간 실천의 소관사항 이므로 ‘인간학’에서 그 출발점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독특함은 그 인간학을 구성하는 존재론으로까지 소급해 갔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런 접근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왜 굳이 존재론에서 출 발해야 하는가?
스피노자와 관련해서 윤리학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신 또 는 실체에서 출발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철학이며, 헤겔 철학은 비록 역시 절대적 이념에 관해 사고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동일하지만 헤겔은 절대적 실체를 ‘인간의 관점’에서 사유하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발생
한다”(홍준기 2006: 153-4)는 형태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런 주장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관련해서도, “존재론 혹은 자연철학 혹은 형이상학적 담론을 ‘직접적으로’ 정치 사회
철학에 적용하는 이론은 ‘특정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성급 한 정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151)
는 평가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에 대한 이런 평가를 별도로 자세하게 검토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평가가 정신분석 쪽에서의 전형적인 이해를 대표하며, 정신 분석은 바로 인간의 관점 또는 인간주의를 강조한다는 점, 나아가 인간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로서의 언어를 강조한다는 점만을 지적하고 가기로 하자.
왜냐하면 스피노자와 들뢰즈는 바로 이런 접근과 싸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작업은 인간을 존재의 부분집합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에게 부여된 신학적 특권을 박탈하는 것을 과녁
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론과 실천 철학의 관계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데, 그것은 초기의 한 숨은 텍스트 안에서
명료한 형태로 발견된다.
우리는 그 텍스트에서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정치 철학 책”이 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과 이 저술이 ‘비인간주의
존재론 책’이기도 하다 는 점이 양립 가능할뿐더러 오히려 필연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본다.
들뢰즈는 자신의 정력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하기 전 「루크레티 우스와 자연주의」(1961)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는데,
이는 나중에 상당한 수정 보완을 거쳐 「루크레티우스와 허상」이라는 제목으로 의미의 논리 (1969)의 부록으로 수록된다.
우리는 최초에 발표된 텍스트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들뢰즈의 생생한 초기 문제의식이 날것 그대로 발견 되기
때문이다.
반면 수정 보완된 텍스트에는 이 문제의식이 삭제되어 있다.
원래의 텍스트에서는 최초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자연주의가 다뤄지고 있다.
“최초의 철학자는 자연주의자다.
그는 신들에 대해 논하는 대 신 자연에 대해 논한다.”(Deleuze 1961: 28)
그러면 들뢰즈가 자연주의에 주목한 까닭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초월세계를 비판했던 최초의 움직임 중 하나를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서 보았던 것이다.
“에피쿠로스 에 이어,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의 사변적 실천적 대상을 “자연주의”로 규정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19)
바로 철학의 사변적 대상과 실천적 대상에 관한 이 이중의 규정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철학의 사변적 대상”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학(헬레니즘 원자론), 즉 존재론 을 지칭한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철학의 실천적 대상”, 즉 실천 철학 (윤리학과 정치 철학)이 정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다음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자연학은 사변적 관점에서 본 ‘자연주의’이다. […] 무한의 규정은 논리적으로 필연 적인 탐구의 대상이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바로 이 형식 아래에서 자연학이 윤리 내 지 실천에 대하여 자신의 종속을 증언한다.
마치 자연학이 실천에 종속된 수단인 양 모든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실천은, 이 수단이 없었다면, 결코 혼자서는 발견하지 못했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능력이 없다.
실천은 거짓된 무한의 부인을 통해서만 자기 고유의 목적을 실현한다.”(25)
이 구절에서 신들의 초월세계를 극복하여 작업되는 ‘무한에 대한 참된 규정’은 곧 자연주의 존재론을 가리킨다.
이를 바탕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면 두 가지 상보적인 귀결이 도출된다.
1) 우선, 자연에 부합하면서도 논리 적으로 필연적인 존재론을 구성하는 작업은 실천의 필요 때문이다.
2) 하지만 실천은 자연주의 존재론이라는 수단이 없다면 자신의 목적을 발견하지도 실현하지 도 못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귀결이 안티 오이디푸스안에서 의 ‘비인간주의 존재론’과 ‘실천 철학’ 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상호 보완적일 수밖에 없는 이 두 빗면은, 그 동안 후자에 주목이 쏠린 그만큼 전자가 소홀히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의 존재론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그런데 윤리학과 달리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술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윤리학은 그 낯선 서술상의 외양과는 달리 공리, 정의, 정리, 증 명, 주석 등 “기하학적 질서를 통한 증명”을 제시함으로써
그 존재론을 차근차근 펼쳐 보인다.
이와는 달리 안티 오이디푸스는 첫 문단부터 여러 낯선 개념들을 단박에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가로막으려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책 전체를 놓고 꼼꼼히 살피면 모든 주요 개념 들은 잘 정의된 방식으로 짜여 있다.
하지만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술 은 불친절하고 난해하다.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전문 연구자들마저도 이 책의 이런 측면에 혀를 내두르곤 하는데, 그것이 아마도 출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마련되지 못한 까닭이리라.
가령 최근에 안티 오이디푸스주석서를 쓴 뷰캐넌은 이렇 게 술회하기까지 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수사학의 어려움은 저자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취일 정도다.”
(Buchanan 2008: 133)
물론 우리가 보기에 뷰캐넌의 해석도 그리 성공 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또는 나아가, 심지어 안티 오이디푸스가 맞서 싸우려 하는 인간주의적 독해 방식으로 읽히고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확인
할 수 있는데, 그 까닭도 불친절함과 난해함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독자를 향한 모종의 악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불친절하고 난해하게
서술된 까닭은 무엇일까?
사고의 불충분함이나 서술 능력의 부족함을 이유로 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 이런 서술상의 특징은 얼마간은 고의적인 것 같다.
사실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구성한 존재론은 전례 없는 철저한 비인간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이 철저한 비인간주의 존재론을 철두철미 구성했기에(그리고 이 점이 고의성의 측면인데) 인간주의(휴머니즘)의 입장에
서 있는한 독자는 난해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안티 오이디푸스는 입구를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비인간주의란 일정한 자연적 역사적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부적합한 관념”을 진실이라 믿고 투사하여
세계를 해석한 후 다시 이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인간주의(휴머니즘)’ 내지 ‘의인화 (anthropomorphism)’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함축한다.
들뢰즈가 인간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면, 이는 인간주의가 세계의 본성을 적합하게 제시하지 않으며, 나아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상을 전제하기에 실천 역시도 덫으로 내몰고 있다고 여기는 탓이다.
따라서 인간주의를 극복한 존재론 내지 우주론이 구성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구성된 비인간
주의 존재론이다.
그것은 초월성을 철저히 배격하고, 자연의 물질에 기초하며, 우주의 생성 내지 역사를 토대로 삼는다.
이런 비인간 주의 존재론의 관점에서 새롭게 구성한 인간학의 견지에서만, 실천은 적 합하게 이해되고 행해질 수 있으리라.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지금 거론되는 인간주의와 비인간주의는 철저히 도덕 외적(extra-moral) 의미 이며, 인간에
대한 규정 및 그 규정의 역사성과만 관련된다는 점을 짚고 가겠다.
우리는 뒤에서 들뢰즈가 규정하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자기 예속을 욕망하는 인간의 문제
탐구의 길은 여럿일 수 있겠으나, 한 학자의 문제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가장 본질적인 탐구의 방식이리라.
문제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인간의 본질적인 활동의 하나겠으나, 문제를 잘 제기하는 일은 결코 자연적인
활동영역에 속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능력에 속하며,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탁월한 능력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들뢰즈의 작업을 검토하는 일은 충분히 노력에 값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장 치열한 사고의 모험을 펼친 하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삶의 표상이기보다는 말 그대로 ‘하나의 삶’.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근대 서양 철학자들을 인식론에 몰두 하게 한 시대 풍토는 근대 과학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돌연 19세기로 오면서 인식론은 존재론에 철학의 왕좌를 내놓게 된다.
그 변화의 동인은 바로 프랑스혁명이었다.
혁명의 시대에 인식의 문제는 실천의 문제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실천의 문제는 이제 존재론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과 세계의 본성 자체가 되물어지지 않는다면 실천 철학은
구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통념에 따를 수도 있겠으나, 급진적 사고는 무신론과 비인간주의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인식론의 시대에도 다른 철학 분야가 무시되지는 않았다.
가령 인식론 또한 인식 주체(주관)와 인식 대상(객체)의 관계 속에서 객체의 본성에 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심의 핵은 여전히 존재의 면보다는 인식 주체의 능력이라는 면에 놓여 있었고, 그래서 가령 칸트에 의해
존재 자체는 불가지의 영역(사물 자체)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실천이 문제로 부상하면서 이런 칸트식의 봉합은 충분치 못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실천이란 세계와 주체 간의 직접적 교섭을 전제하는데, 주체 바깥에 있다고 상정되는 불가지의 영역으로 밀려
난 세계는 그러한 직접적 교섭을 원리상 차단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인식 주체와 별도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세계의 본성 자체에 관심이 집중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이런 변화는 주체의 ‘본성’ 및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해명도 자연스레 요청하게 되었다.
주체가 세계의 일부라면 상식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그러한 인간관, 가령 의식과 자유 의지와 의도를 지닌 인간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주체가 최소한 그 일부라도 세계의 바깥에 위치한다면, 주체와 세계의 초월적 간극을 어떻게 다시 이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19 세기 존재론이 근대 자연과학의 성취를 밑거름으로 삼아 중세 이전의 존재론과 변별되는 지점이라
하겠다.
우리는 칸트 이후 헤겔에 의해 시도된 새 존재론이 두 계열을 따라 비판적으로 극복되고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포이어바흐를 극복하며 맑스로 이어진 유물론의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쇼펜 하우어를 극복하며 니체로 이어진 의지 철학의 계열이다.
이 두 계열은 서로 동떨어진 채, 나아가 어떤 점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데, 이 두 계열의 본격적인
종합은 20세기 중엽 2차 세계대전, 구조주의, ’68년 5월 사건을 통과하면서 들뢰즈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진다.
특히 ’68년 5월 사건은 혁명의 분출과 퇴각을 극명하게 드러냈는데, 이 사건의 체험을 통해 들뢰즈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격변 속에서 ‘자기 예속을 바라는 인간’이라는 문제와 싸운 스피노자에 합 류했다.
스피노자 자신도 자신의 시대 풍토 속에서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토대로서 나름의 존재론을 구성했던 것이다.
철학사 속에서 스피노자, 맑스, 니체의 존재론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 왔건 간에, 들뢰즈는 이 세 선구자의 존재론적
통찰을 전유해 독자적인 존재론을 구성했는데, 우리는 이를 내재적 물질론적 역사적 존재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 존재론이 특정한 풍토와 문제 속에서 구성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즉, 윤리적 정치적 실천의 문제 또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요청이 이들의 존재론을 낳은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최소한 자연의 운행을 거스르거나 그에 위 배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우선 68혁명의 환경(milieu)에서 탄생해서 소비된 책이다.
그 유례없는 대중적 성공이 당시 환경을 증언한다.
그러나 사실은 68혁명의 분출과 좌절이라는 환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 혁명의 열기는 어떻게 분출될 수 있었으며 또 어떻게 그토록 쉽게 사그라질 수 있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문제 를 발견하게 된다.
그 문제는 잘 알려져 있듯이, 바로 ‘인간들의 자기 예속 의 욕망’1)으로 규정될 수 있는, 스피노자와 라이히가 제기한,
“파시즘”의 문제가 그것이다(AO 37-8, 306, 412).
1)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1670)의 서문에 나오는 물음으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 을 위해 싸울까(homines […] pro servitio,
tanquam pro salute pugnent)?”(B. Spinoza,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 1670, Praefatio, §7)i)
“왜 인간들은 수세기 전부터 착취와 모욕과 속박을 견디되, 남들을 위해서는 물 론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런 일들을
바라는̇ ̇ ̇ 지점까지 가는 걸까?
어째서 사람 들은, 세금을 더 많이! 빵을 더 조금! 하며 외치는 지경까지 가는 걸까? 라이히의 말처럼, 놀라운 건 어떤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파업을 한다는 점이 아니라, 굶주리는 자들이 늘 도둑질을 하는 건 아니며 착취
당하는 자들이 늘 파 업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 에서 저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설명해야만 하는 건 군중 욕망의 이런
변태성이 다.”(AO 37)
ii) “욕망은 절대로 속는 법이 없다. 이해관계는 속거나 오인하거나 배반될 수 있지 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라이히는 외친다. 아니다,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이해 관계에 거슬러서 욕망하는 수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사회주의, 당, 당 지도부도 이것을 이용한다. 오인들이 아닌 완전히 반동적인 무의식적
투자들인 작업들에 욕망이 몸을 맡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AO 306)
그리고 들뢰즈 자신의 물음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사람들은 권력 (puissance)을 욕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무력
함을 욕망하기에 이르는가? 어떻게 그런 사회 마당[場]이 욕망을 통해 투자될 수 있었는 가?”(AO 284)
바로 이 문제가 “정치 철학의 근본 문제”(AO 36)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스피노자가 처음 제기했던 이 문제가 스피노자에 의해 해명되고 있지는 않다.
이 문제는 주로 라이히에 의해 잘 제기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들뢰즈 자신도 라이히의 탐구를 연장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스피노자라는 이름이 겨우 여섯 번, 그 것도 단지 지나가면서 등장할 뿐이다.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선배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스피노자의 부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의 스피노자의 무능을 답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무능은 그 렇지만 역사적 성격을 지닌 무능이다.
말하자면, 스피노자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 어떤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 스피노자는 자본주의 를 본격적으로 살지 않았다.
이 문제의 탐구는 맑스와 니체가 산 자본주의를 가로질러서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예속을 욕망하는 인간은 자본주의가 무르익으면서 비로소 탄생했기 때문이다.
책의 제 목인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맑스가 말하는 소외된 인간, 니체가 말하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병든 짐승으로서의 인간, 오이디푸스화된 인간인
“유럽의 인간”(AO 59) 또는 “유럽의 문명인”(AO 320) ― 들뢰즈에 따르면 이 모든 인간 유형이 자기 예속을 욕망하는
인간으로 수렴된다.
들뢰즈는 배런과 스위지(Paul Baran & Paul Sweezy)의 독점 자본주의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다.
“반인간적 기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군사 기계를 부리고 공급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재화와 서비스들을 생산하고 이것들에 대한 수요를 창조하는 수백만의 다른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과 분야들은 서로 너무도 의존하고 있어서, 거의 누구나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인간적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싸우는 군 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농부, 자동차 새 모델에 필요한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어 내는 도구와
죽음의 제작자들(tool and die makers), 자신의 생산물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는데 사용되는 종이와 잉크와 텔레
비전의 제조업자들, 기타 등등이 그러하다.”(AO 281 재인용)
들뢰즈가 인간 내지 “인간주의(휴머니즘)”(AO 267)를 비판하고 또 극복 하려 한다면, 그 까닭은 현존하는 인간이 바로
이런 특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들뢰즈의 작업은 맑스의 “사회주의자”나 니체 의 “초인”, “욕망의 인간들(어쩌면 이들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다)”
(AO 156), 또는 슈레버의 표현으로 “신인류”(AO 24), 요컨대 과정을 사는 “분열자”를 탄생케 하려는 경향성을 지닌다.
3. 전면에 등장하는 맑스
바로 이런 점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맑스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에 있어 맑스보다 깊이 파고든 철학자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은 “하나의 논리적 질서 속에서”(AO 391) 존재론의 얼개를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1장의 존재론은 대단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전개된 하나의 개요와도 같으며, 역사적-형이상학적 정당화를 아직
결여하고 있다.
바로 이 정당화 를 위해 맑스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의 결과로서 구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 들뢰즈의 존재론을 운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론에서 자본주의와 맑스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의 현실성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들뢰즈와 맑스의 관계는 여러 연구자들의 관심사였다.
들뢰즈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 네그리와 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술회 했다.
“내 생각에, 펠릭스 과타리와 나는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었는데, 아마 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지만, 둘 다 그러했다.”
(PP 232)
사실 이미 1969년 인터뷰에서도 들뢰즈는 “헤겔과 관련한 맑스의 이런 해방, 맑스의 이런 재전유, 맑스에서 미분적이고
긍정적인 메커니즘들의 이런 발 견”에 대해 그것이 알튀세르가 놀랄 만큼 수행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ID 200).
사실 들뢰즈가 헤겔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내가 무엇보 다 혐오했던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었다.”(PP 14)
따라서 들뢰즈의 과 제는 헤겔주의와 변증법에서 맑스를 해방하는 일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점에 관해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간 직후 한 인터뷰에서 들뢰즈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맑스주의에서는 시작부터 어떤 기억의 문화가 나타났다.
심지어 혁명적 활동마저도 사회 구성체들의 기억의 이 자본화 를 향해 진행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자본에 포함되어 있는, 맑스에 의해 보존된 헤겔적 측면이다.”(ID 386)
우리는 들뢰즈의 작 업이 맑스의 헤겔적 잔재를 최대한 도려내고 새로운 맑스의 초상을, “철학적으로 면도한 맑스”(DR 4)
를 그려내는 일이었다고 본다.
이런 방식의 시도는 당연히 기존의 맑스 해석과의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특히 (엥엘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진)
소련과 구동독의 정통 맑스주의 및 이를 비판하며 등장한 알튀세르와 그 동료들의 맑스주의와 충돌을 빚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가 다루는 것이 들뢰즈 판(板) 맑스라는 점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새로운 자본을 쓰려는 시도”(우노 2001: 979-80)2)였으며, 들뢰즈가 흔히 하는 말로 표현하면, 맑스가 현재 살아 있었다면 썼을 그런 책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들뢰즈가 맑스와의 친화성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은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초아트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맑스주의를 굴락[강제수용소]의 철학이라고 비난하고 있을 때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인 행동이다”(Choat 2010: 11)라고 평가한다.
또한 맑스주의자인 가로 역시도 1970~90년대 동안 맑스의 죽음과 부정이 언명되는 동안에도 들뢰즈가 보인 태도에 대해
“시대의 정신에 대한 완강 한 저항을 보인 그 당시의 드문 지성인”이라고 평가한다(Garo 2008: 615).
물론 가로는 들뢰즈가 “그 어떤 종류의 맑스주의 전통”도 지지하지 않았 다고 비판하면서(615), 그가 “별 어려움 없이
어떤 개념들을 ― 특히 변 증법, 유물론, 소외, 계급투쟁, 공산주의를 제거”했으며, 이는 “다른 철학이요 정치와 혁명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로, 그[맑스/맑스주의] 의미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한다고 지적한다(619).
하지만 여기서 가로가 행한 비판은 ‘정통성’과 ‘승인’을 둘러싼 지식-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런 비판은 들뢰즈의 맑스 이해가 다른 모든 시대적 조류에서
2) 우노 구니이치(宇野邦一)는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푸코, 주름등을 일본어로 옮긴 들뢰즈의 제자인데,
이 구절은 천 개의 고원을 해설하면서 회고적 관점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평가한 대목이다.
벗어난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으로 읽을 수 있다.
맑스와 관련해서 특히 들뢰즈 사후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들뢰즈가 기획했던 마지막 저술이 맑스의 위대함(Le grandeur
de Marx)이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호사가들의 흥미를 끌기도 했다.3)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는 맑스에 대한 별도의 책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안티 오 이디푸스에서,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충분히 맑스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개진된 들뢰즈의 존재론은 초기 맑스의 존재론에 크게 힘을 입고 있다.
여기서 초기 맑스라 함은 대략 정치 경제학 비판 작업에 몰두해서 정치 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을 쓴 런던 시기 전,
파리와 브뤼셀 시기까지의 맑스를 가리킨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1884년 경제학 철학 초고(앞으로 초고로 약칭), 「포이어바흐 테제」(앞으로 「테제」로 약칭), 독일 이데올 로기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정치 경제학 비판’의 맑스와 들뢰즈 정 치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온 데 반해(Holland
2009), 초기 맑스와 들뢰즈가 공유하는 존재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특별한 연구가 진행된 바 없다.
우리가 보기에 사정이 이렇게 된 까닭은, 들뢰즈가 자신의 존재론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초기 맑스에 대한 언급을 충분히
명시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구성된 존재론의 바탕에는 초기 맑스의 존재론이 있다.
이 논제는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라는 주제 및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본
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규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말하자면, 들뢰즈에 따르면 맑스의 작업 에는 연속성이 있으며, 초기와 성숙기 사이에 어떤 단절을 설정하는 것 은 무의미
하다.
우리는 맑스 자신이 1859년에 회고적으로 자신의 초기 작업을, 특히 초고를 평가한 대목을 주목한다.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3) Deleuze(1995), “Le “Je me souviens” de Gilles Deleuze“, Le Nouvel Observateur 1619: 50–1 (1993년 Didier Eribon과의
인터뷰)
(1859)의 ‘서문’에서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국 가 형태들과 같은 법 관계들”은 “삶의 물질적
관계들”에 근거하고 있으며 “시민사회의 해부학은 정치 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Marx
MEW13: 8).
이어 맑스는 파리(초고)에서 시작했던 정치 경제학 탐구는 브뤼셀(「테제」, 독일 이데올로기)로 추방된 후에도 계속되
었고, 그리하여 일반적 결론이 도출되었다고 말한다.
이 진술 에 따르면 최소한 맑스 자신은 초고에서 독일 이데올로기 사이에 그 어떤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맑스가 그 사이에 뭔가 비약적인 발견을 했다면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초기 맑스와 성숙기 맑스의 연속성이라는 들뢰즈의 주장은 알튀 세르와 그 동료들의 작업과의 명시적인 대결을
드러내고 있다.
들뢰즈 자신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알튀세르, 발리바르, 마슈레 등의 작업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시인하지만, 여전히
일정한 거리두기는 엄존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러하다.
“심지어 알튀세르에서도 다음과 같은 조작을 볼 수 있다. 객관적 재현( Vorstellung[ 표̇ 상̇])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기계” 또는 “기계장치”로서의 사회적 생산이 발견되 지만, 이내 기계가 구조로 환원되고 생산은 구조적 극장적 재현
( Darstellung [상연̇ ̇])과 동일시된다.”(AO 365)
알튀세르는 구조의 덫에 갇혀 “한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 형식” 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들”에서 난점을 보였다는
것이다(ID 268-9).
사실 들뢰즈가 과타리의 도움을 얻어 “기계”라는 개념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
이다.
우리는 맑스 해석과 관 련한 들뢰즈와 알튀세르의 차이에 대해 뒤에서 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의 관점에 입각해서, 또는 들뢰즈가 수용한 맑스의 관점에 입각해서, 초기 맑스의 존재론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작업은 들뢰즈 자신의 존재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할 것이다.
청년 맑스의 중요한 과제는 헤겔과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것 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포이어바흐는 의도적으로 선택한
처방전과도 같았다.
알튀세르를 비롯해 맑스의 포이어바흐 이해가 불충분했다거나 포이어바흐를 통한 헤겔에서의 해방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많지만, 우리는 그런 쟁점에 개입하기보다는 포이어바흐 비판을 통한 맑스의 성취에 주목하면서 문헌을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맑스가 전통적인 존재론에 혁신을 가하며, 인간주의 존재론에서 최대한 벗어나려 했다는 점을 확인 하게 될 것
이다.
4. 욕망과 무의식의 탐구: 안티 오이디푸스, 또는 정신 분석과의 대결
들뢰즈의 초기 소개자였던 뱅상 데콩브는 들뢰즈에게 “욕망의 철학” 이라는 명패를 붙였는데(데꽁브 1990: 215-24), 이
표현에는 일말의 진실 과 다량의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들뢰즈가 “욕망”을 주제어로 사용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의 “욕망”과는 아 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세대 갈등에서, 노인들은 젊은이들이 이해관 계(일, 저축, 좋은 결혼)보다 욕망들(자동차, 신용, 대출, 자유로운 남녀관계)
을 앞세운다고 가장 악의적인 방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우리는 듣는 다.”(AO 419)
이 구절은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욕망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데, 사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물론 앞의 구절에 언급된 욕망이 욕망의 한 현상태(現象態)로 이해될 수는 있겠으나, 그 본질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
다는 점을 강 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언급되는 욕망은 기본적으로 “표상/재현” 차원의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전의식 내지 의식의 차원
에서 이해되는 “이해관계”와 본질적 차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에게 날것인 욕망으로 보이는것 속에도, 여전히 욕망과 이해관계의 복합체들이 있으며, 이 양자의 정확히
반동적인 형식과 막연히 혁명적인 형식의 혼합이 있다.
상황은 완전히 얽히고설켜 있다.”(AO 419)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무엇보다 비표상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욕망에 대한 이런 착상은 직접적으로 니체에서 연원한다.
니체는 자신의 의지 개념이 쇼펜하우어에서 유래했다고 공공연하게 언급하곤 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권력의지” 개념을 창조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현상계(“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의 사물 자체의 세계를 “의지”로 규정하면서, 의지의 세계를
현상계의 발생 조건이라고 본다.
물론 여기서 의지에 대한 모든 인간주의적 해석을 피해야 한다.
이 의지는 인간주의적 차원을 넘어서며, 흔히 말하는 인간적 자유의지를 가리키지도 않고, 목표도 지향도 없다.
목표니 지향이니 하는 발상은 현상계 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쇼펜하 우어의 의지 개념에 대한 고찰은 많지 않았거나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프랑수아(Arnaud François 2008)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에서 출발해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경유해서 욕망 개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 한다.
이들 모두가 그 개념들을 ‘생산’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의 문제점은
1)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밝힌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의지 개념의 결정적 단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는 점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페시미즘으로 끝나기에 궁극에서는 창조적, 생산적이지 못하고, 니힐리즘으로 향한다)이고,
2)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창조물은 오직 ‘표상/재현’(representation, Vorstellung)인데, 들뢰즈의 욕망 이 창조하는 것은
오히려 표상/재현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
따라서 들 뢰즈의 욕망은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비판하고 극복한다는 점이다.
본래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맹목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며, 표상을 생산하지만 결코 표상되지 않는다.
니체의 의지 개념은 물론 철저하게 쇼펜하우어에서 출발해 발전했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차이의 즉자”(DR 164)이므로 재현 내지 표상의 바깥에 있다.
그것은 비인간적 의지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생산적 성격을 계승하되, 의지의 자기 부정의 바탕을 이루는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
세계 이론을 극복하여 “증여하는 덕”으로서의 “권력의지(der Wille zur Macht)” 개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이런 맥락에서만 쇼펜하우어 및 니체와 계보를 같이 한다.
이처럼 욕망과 무의식의 문제가 중요하다면, 정신분석이 그 해명에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그러나 정신분석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으며, 이 한계는 단순히 극복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와 데카르트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실상 라이프니츠와 스피 노자는 공통의 기획을 갖는다.
그들의 철학은 새로운 “자연주의”의 두 양상을 구성한다. 이 자연주의는 반(反)데카르트적 반발의 참 의미이다.”(SPE 207) 바로 이 동일한 관계가 들뢰즈 자신과 정신분석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관념론 대 자연주의 또는 유물론이 그것이다.
프랑수아 샤틀레 는 안티 오이디푸스 출간 직후에 있은 좌담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요컨 대 유물론적 난입에 대해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루크레티우스를 생각 하고 있기 때문이다.”(ID 307)
이는 들뢰즈를 루크레티우스(에피쿠로스) 와 등치시키는 표현인데, 이에 대해 들뢰즈는 “완벽한” 해석이라며 반색 한다.
반면 정신분석은 인간주의 안에 머무르려는 집요한 자세를 견지한다.
나아가 정신분석은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해 꼭 필요로 하는 유순한 주체 를 길러내는 작업을 한다.
바로 이 점이 들뢰즈가 보기에 정신분석이 욕망과 무의식에 관한 잘못되고 해로운 이론으로 머무는 근본 이유이다.
인간 욕망과 무의식은 우주와 자연의 운행 원리와 최소한 조리 있게 맞아 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욕망과 무의식을 가족주의의 틀로 주조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개인들을
길러내는 데 복무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냥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정신 분석을 심지어 적수로 삼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왜 ‘안티 오이 디푸스’ 즉 반(反)정신분석이라는 기획을 그토록 방대한 분량으로 착수 했는가?
여기에는 전략적인 이유와 철학적인 이유가 있다.
나아가 이 두 이유는 서로 맞물려 있다.
전략적 이유로는 당시 욕망과 무의식에 관한 연구의 첨단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 바로 정신분석이었기에 그에 대한 대응
이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분석이 욕망과 무의식에 관한 ‘참된’ 이론임을 주장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정신분석은 참된 이론이기는커녕 나쁜, 윤리적 정치적으로 해 로운 이론이었다.
뒤에서 더 보겠지만, 안티 오이디푸스의 4장 3절에 서 지적하듯이 정신분석이야말로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인간을 길러
내는 반동적 작업을 수행하는 분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과 무의식에 관한 적합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고, 이것이 철학적인 이유라 하겠다.
이 점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분석에는 세 요소가 공존한다.
욕망적 생산을 발견한 탐험적 개척적 혁명적 요소.
오이디푸스 극장의 재현 무대로 모든 것을 복귀시키는 고전 문화적 요소(신 화로의 회귀!).
끝으로 셋째 요소가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인데, 이것은 끊임없이 자기 를 인정받고 제도화시키는, 존경에 목마른 일종의
공갈이며, 끝나지 않는 치료를 나름으로 코드화하고 돈의 역할을 나름으로 냉소적으로 정당화하며 그것이 기성 질서에
모든 담보를 제공함으로써 잉여가치를 흡수하려는 엄청난 기획이다.
프로 이트에게는 이 세 요소가 모두 있었다.
환상적인 크리스토프 콜럼버스, 괴테, 셰익 스피어, 소포클레스에 대한 탁월한 부르주아 독자, 가면을 쓴 알 카포네.”(AO
140) 따라서 들뢰즈의 기획은 정신분석의 자원(資源) 말고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욕망과 무의식에 관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정신의학자들과 정신분석가들보다 로렌스, 밀러, 케루 악, 버로스, 아르토, 또는 베케트가 분열증에 대해 더 잘 안다 해도, 그게 우리 잘못인가?”(PP 37)
문학이나 예술, 그리고 과학에 대한 들뢰즈의 작 업은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안티 오이디푸스1장 1절 본문에는 철학자 대신 작가와 예술가가 주로 언급된다.
슈레버, 뷔히너 (렌츠), 베케트, 아르토, 로렌스, 밀러, 뒤비페(아르 브뤼), 미쇼, 린드너. 예외는 맑스, 레비스트로스 정도뿐. 이와 관련해 안티 오이디푸스의 일본어 번역자 우노 구니이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시대의 문제에 답하려 하면서, 동시대를 멀찍이 넘어선 전망 속에 문제를 위치시키고 답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특징이다. […]
확실히 그것은 정신분석의 영역을 한참 넘어서는 문제 제기 속에서 정신분석을 문제로 삼을 뿐이 다.”(우노 2006: 393)
이 작업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완결된 책이 아니다.
책의 제목이나 정황을 보면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구는 처음부터 방대한 작업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4), 일단 시작된
기획은 걷잡을 수 없이 분열되고 증식했다.
이듬해 잡지 미뉘(Miniut) 2호(1973년 1월)에 발표한 「욕망기계들을 위한 프로그램-대차대조」를 부록으로 덧붙인 안티오
이디푸스1973년 증보판을 시작으로,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구 작 업은 들뢰즈 자신이 좋아하는 보르헤스의 표현을 빌면
“포크처럼 끝이 갈라져 가며” 이어져, 나중에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2(1980) 의 둘째 고원을 이룰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가 미뉘5 호(1973년 9월)에, 여섯째 고원을 이룰 「기관 없는 몸은 어떻게 만들까?」 가 미뉘10호
(1974년 9월)에 각각 발표되었고, 1976년에는 천 개의 고 원의 「서론」을 이룰 소책자 리좀이 단행본으로 발간되기까지 했다. 또한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해(1975)는 그 내용을 볼 때 별도의 작업 이 아닌 일련의 연속 연구의 한 지점에 속한다.
또한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개정판(1964년 초판, 1970년 2판, 1975년 3판)5)의 2부 본문과 결론 도 프루스트를 이 연구의
일부로 편입한 작업이었다.
끝으로 파르네 (Claire Parnet)와 함께 펴낸 대담(Dialogues)의 초판(1977)도 대부분의 내 용을 동일한 작업에 할애하고 있다. 요컨대 들뢰즈&과타리는 1970년 공 동 논문 「분리 종합」(La synthèse disjonctive)을 발표한 이후 꼬박 10년을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구에 함께 몰두했으며, 특히 들뢰즈 쪽을 보자면
4) 연속 작업에서 흔히 후속 작업을 염두에 두고 ‘1권’이라고 표기하는데 그렇게 하 지 않았다.
5) 들뢰즈는 프루스트에 대한 책을 2번에 걸쳐 증보 출간한다.
1964년의 초판은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1부를 이루고, 70년의 2판은 2부 본문을, 75년의 3판은 2부 결론을 이룬다.
2판은 과타리와 동업하던 시기의 유일한(?) 저작이라 흥미롭다.
이처럼 외도 없이 꼬박 10년 동안 외길을 간 경우를 그 전에도 또 후에도 결코 찾아볼 수가 없다.6)
이런 면모는 들뢰즈가 1971년 11월 16일 뱅센 (Vincennes) 대학에서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속 강의를 시작한 이후 대체로
큰 휴지기 없이 1974년 1월 21일까지 17회에 걸쳐 관련 강의를 꾸준히 이어가며, 카프카의 출간 시기를 건너 뛰어 리좀의
출간 이후 다시 1977년 2월 15일부터 1979년 2월 27일까지 4회의 강의를 덧붙였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7)
사후에 스테판 나도에 의해 편찬된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위한 글들(2004)8)에서는 1970년부터 안티오이디푸스가
출간될 때까지의 작업의 모습과 초안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초 안에서 시작해 앞에서 언급한 여러 논문들, 단행본들,
강의들에 드러난 들뢰즈&과타리의 행보를 종합해 보면,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안티오이디푸스라는 책의 그릇에 담기
에는 그 기획과 내용이 너무도 방대했으며 결국 최초에 촉발된 그 분열의 불꽃놀이를 천 개의 고원에서야 겨우, 그것도
윤곽만 펼쳐 보일 수 있었다고 보인다.
그리하여, 천 개의 고원에 와서야 겨우 “끝(fin)”(MP 8)이라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실패하거나 폐기된 기획이 아니라 천 개의 고원에서 끝나게 될 이후의 연속
작업들의 거대한 분열의 시발점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리라.
6) 이 점은 들뢰즈의 서지에서 잘 확인된다.
들뢰즈의 서지가 처음 집성된 것은 머 피(Timothy S. Murphy, “Bibliography of the Works of Gilles Deleuze”, in Paul Patton
(ed.), Deleuze: A Critical Reader , Blackwell, 1996, pp. 270-300)의 공헌이 며, 이 서지는 점차 보완되어 ID와 DRF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들뢰즈의 온라인 서지로는 http://www.bibliothequedusaulchoir.org/French/activites/Deleuze.html가 유용하다.
7) 들뢰즈의 강의록은 http://www.webdeleuze.com을 통해 꾸준히 공개되고 있다.
이 웹사이트의 Sommaire 란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강의를 찾아 볼 수 있다.
8) Félix Guattari, Écrits pour l’Anti-Œdipe, textes agencés par Stéphane Nadaud, Éditions Lignes & Manifestes, 2004.
5. 존재의 종합 이론: 시간의 견지에서
우주는 늘 종합된다. 종합은 원래 논리학의 개념이다.
syn-thesis, 즉 thesis(정립, 여기선 언어의 정립이므로 명제)가 합쳐진다(syn)는 뜻이다.
넓게 보자면 변증법은 정립(thesis)과 반정립(anti-thesis)이 종합되는 운동 에 주목하는 논리학이다.
변증법은 원래 ‘대화’라는 뜻이다.
언어는 그 본 래적 한계 때문에 ‘차이의 개념’, 즉 본래의 차이, 존재론적 차이를 ‘개념 적 차이’, 즉 언어적 차이로 치환해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에서 변증법은 존재의 생성 운동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변증법에서는 종합이 언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무릇 변증법에 대한 비판은 언어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과 언제나 궤를 같이했다.
가령 변증법의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말은 언어 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존재의 현실에, 우주에 모순은 없다.
언어가 현실과 충돌할 때 우리는 현실에 근거해 논리를 수정함이 옳다.
언어가 실증과 충돌할 때도 마찬가지다.
통상 논리학에서 종합의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connection, disjonction, conjonction.
일반적으로 이는 각각 연접(連接), 이접(離接), 통접(統接), 내지 연언(連言), 선언(選言), 합언(合言)으로 옮겨진다.
들뢰즈는 세 종합을 말하되, 언어의 종합을 떠나 존재의 종합으로 이해한다.
즉, 시간의 관점에서, 생산=생성의 종합이 관건인 것이다.
사실 종합은 우주의 차원,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작업은 종합을 우주론 = 존재론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곧 생성과 생산의 논리인 셈이다.
종합 이론을 통해 들뢰즈가 해명하려는 것은 ‘생산의 경과(經過, procès)’9)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는 존재(우주) 전체의 생산의 경과, 생성
9) 여기서 procès는 ‘과정’을 뜻하는 processus와 확연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영어 나 독일어는 그 둘을 process와 Prozeß로 옮기지만 구별하지 않게 되면 독해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노 구니이치는 processus와 procès를 각각 ‘과정’과 ‘프로 세스’로 옮기는데, 차이를 지각했다는 점은 훌륭하나 이 역시 우리가 받아들이기 는 어렵다. 차라리 언어학자들이 일본어를 따라 옮긴 事行이 더 적절한 듯하다. 한국불어불문학회 편찬 불한사전에는 “동사가 나타내는 동작, 상태, 상태의 변의 운행 자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과는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그 모든 것, 우주의 운행 전체이다. 생산의 논리, 생성의 논리인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개진되는 논리가 존재의 논리라는 점을 놓치면 독해가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과가 내포하는 시간성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 ‘속’에서라는 말은 미흡한데, 왜냐하면 경과 자체가 시간의 종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의 다른 이름인 (나중에 더 정확한 의미를 설명해야 할) “욕망 기계”에 대해 들뢰즈는 “자신의 조립과 일체인 시간 발생 기계(machines chronogènes)”(AO 341)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의 시간성에 대한 강조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었다. 들뢰 즈는 베르그손 논의에서 아주 중요한 방법적 규칙 하나를 취해 자신의 철학에서 끝까지 견지한다. “공간보다는 시간의 견지에서 문제들을 정립̇ ̇ ̇ ̇ ̇ ̇ ̇ ̇ ̇ ̇ ̇ ̇ ̇ ̇ ̇ ̇ ̇ ̇ 하고 풀어라̇ ̇ ̇ ̇ ̇.”(B 22) 여기서 시간은 베르그손의 ‘지속’을 가리킨다. 들뢰 즈는 차이를 시간(성)으로 보고 시간을 ‘지속’이라는 이름의 존재로 변형 시키는 저 놀라운 착상을 하이데거가 아닌 베르그손에서 취한다. 자기 안에서 본성이 달라지면서만 나뉘는 질적 다양체로서의 지속 개념 말이 다. 이 규칙의 의미와 중요성은 들뢰즈 철학에 있어 결코 단순하지 않다.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시간의 견지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이 규 칙은 결정적인 원리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우주는, 존재 는 곧 시간으로, 지속으로, 생성으로 이해해야 하며, 공간적인 그 무엇으 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세계는 언제나 생성 중에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공간에 흩어져 있는 듯 보이는 개체들은 단 한 순간도 자기 동일성 을 지니고 있지 않다. 개체들의 자기 동일성은 잠정적인 것일 뿐이며, 지성 이 언어를 통해 고정시킨 순간 상태들에 대한 지칭일 뿐이다. 안티 오 이디푸스에서 개진되는 존재론은 모두 시간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하 며, 특히 세 가지 종합(연결, 분리, 결합)의 이론은 이 규칙의 정점에 있
화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다. 참고로 procès는 법률 용어로 ‘소송’인 데, 카프카의 동명 소설(Das Prozeß)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들뢰즈&과타리의 카프카를 읽을 때도,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에 많은 오 해와 오독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철두 철미 시간의 견지에서 착상되었고 또 서술되었으며, 이 점이 이 책 특유 의 독자성을 얻게 되는 국면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하나의 철학사적 사건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를 통틀어 지금까지 그 어떤 저술도 이 정도 철저함과 완성도를 확보하면서 시간 존재론을 구성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점검하고 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안티 오 이디푸스가 들뢰즈 철학 발전의 여정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고 있으며, 특히 종합 이론과 관련해서 그러하다는 점이. 들뢰즈의 종합 이 론은 중요한 ‘인식학적 절단(coupure epistémologique)’을 갖는다. 사실 의 미의 논리(1969)까지만 해도 종합 이론은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의미의 논리에서 개진되는 종합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세 종류의 종합이 구별된다.
단 하나의 계열의 구성과 관련되는 연결(connective) 종합(만일 …라면 그렇다면[si…, alors]).
수렴하는 계열들의 구성 절차로서의 결합 (conjontive) 종합(그리고[et]).
발산하는 계열들을 할당하는 분리(disjonctive) 종합(또는 [ou bien]).”(LS 203-4)
그런데 이런 구분은 과타리와의 만남 이후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둘이 처음 발표한 공동 논문이 「분리 종합」(1970)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이는 나중에 수정되어 안티 오이디
푸스1장의 일부로 포함된다.
이 시점부터 비로소 들뢰즈의 종합 이론은 존재론과 실천 철학을 포괄하는 완결된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그 종합 이론은 다음과 같은 얼개를 지닌다.
“욕망 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 양태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자다.
첫째 양태는 연결 종합에 관련되며, 리비도를 채취 에너지로 동원한다[그리고 … 그 다음에(et... et puis)].
둘째 양태는 분리 종합에 관련되며, 누멘을 이탈 에너지로 동원한다[…이건 …이건(soit ... soit)].
셋째 양태는 결합 종합에 관련되며, 볼룹타스 를 잔여 에너지로 동원한다[따라서 그것은 …이다(c’est donc...)].
바로 이 세 양상 아래에서 욕 망적 생산의 경과는 생산의 생산인 동시에 등록의 생산이고 소비의 생산이다.”(AO 49-50)
빌라니(Arnaud Villani)는 이 변화를, ‘의미(sens)’의 문제에서 ‘사용 (usage)’의 문제로의 변화라고 해석하는데(Sasso & Villani 2003: 320), 오히려 우리는 이 문제를 ‘언어(내지 인간)’의 문제에서 ‘존재’의 문제로의 전환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존재론은 물론 사회-정치 철학 차 원에서도 인간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과제는 인간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모든 기존 철학과 결별하고, 존재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내재성의
존재론 또는 새로운 인간학의 구성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6. 논문의 구성
본 논문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단지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사회 이론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결과로서 실증적 토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밝힐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회고적으로 역사를 고찰한 후, 사회의 극한에 있는 존재 세계를 자신의 존재론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2장에서는 들뢰즈의 무의식 개념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맑스의 존재론과의 연관성이 밝혀질 텐데, 왜냐하면 맑스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의 모습이 어떠
한지 고찰한 최초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무의식은 우주 자체와 같은 것으로서, 고아 및 자기 생산으로 존재한다는 것 을, 나아가 인간은 유적 존재
이며 그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에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장에서는 들뢰즈의 욕망 기계 개념을 해명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철학사적 원천으로서 베르그손, 스피노자,니체에서 전개된 힘의 존재론을 들뢰즈의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나아가 기계와 욕망이라는 들뢰즈의 독자적 개념의 유래를 밝힘으로써, 욕망기계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4장에서는 개념적 질서 속에서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개진한 존재론의 얼개를 재구성할 것이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생산의 종합’ 이론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세 양상인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에 대해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대목은 그 동안 들뢰즈의 개념이 비체계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연구사를 교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끝으로 5장에서는 정신분석의 욕망과 무의식 개념을 검토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을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앞의 작업은 정신분석 쪽에서의 들뢰즈 비판과 그에 대한 응대를 통해, 정신분석과 들뢰즈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뒤의 작업은 들뢰즈의 존재론이 갖는 실천 철학적 의의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고찰 과정 전체를 통해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갖는 비인간주의 의 전략이 오늘날 어떤 기능을 하게 될 것
인지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다.
1장. ‘사회체’ 이론과 자본주의
들뢰즈의 존재론은 단순한 논리적 구성의 산물이 아니다.
들뢰즈는 현 대 사회, 즉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에서 자신의 존재론을 구성할 자 원을 가져왔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해서, 그 기저에 있는 욕망과 무의식의 존재론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을 도모하려 한다.
이 점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뢰즈의 사회이론을 살펴봐야 한다.
들뢰즈는 ‘사회(société)’라는 말보다 “사회체(socius)” 내지 “충만한 몸” 그리고 “사회 기계(une machine sociale)”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 때 “사회 기계”라는 말은 “욕망 기계(une machine désirante)”라는 말에 대응해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고, “사회체”
내지 “충만한 몸”은 들뢰즈가 존재론 수준에서의 “기관 없는 몸(un corps sans organes)”에 대응해서 사용하는 표 현이다.
“사회체”는 “사회 기계”의 작동이 일어나는 터전이자 “사회 기 계”의 기능의 결과로 산출되는 것이며, “사회 기계”는
한 사회에서 생산, 분배, 소비 따위의 사회적 생산 기능을 수행하며 그 결과로서 “사회체” 를 산출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체” 위에서 “사회 기계”가 작동하는 듯 현상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우리는 본문에서 자세한 의미를 살피게 될 것이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에서 사회체 또는 사회 기계를 셋으로 구분하면서 정교한 분석을 수행한다.
“원시 영토 기계”(1~5절), “야만 전제군주 기계”(6~8절), “문명 자본주의 기계”(9~11절)가 각각 그에 해당 한다.
우리는 이 세 구분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진행에 따른 구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형(type)의 구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원시(sauvage)”나 “미개(primitif)”라는 표현은 단지 인류의 과거 시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사회
기계와의 차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 영토 기계”를 다루는 데 있어 인류학과 민족학의 자료가 그것이 동시대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적극
활용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야만(barbare)”이라는 표현은 그 말의 어원에 있어 희랍 민주정과 구별되는 군주정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왕 또는
전제 군주가 통치하는 사회, 또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제국/국가(imperium)” 를 지칭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끝으로 “문명(civilisé)”이라는 표현이 그 어떤 발전 단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 곧 자본주의 체 제를 지칭
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문명” 사회가 가장 억압적인 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들뢰즈의 존재론을 사회 분석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가장 중요한 함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사회에 대한 이론이 가능해졌으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삼은 존재론의 구성이 가능해졌
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들뢰즈의 존재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극한(limite)에서만 성립 가능한 존재론으로, 그 전 시대에는 결코 발견
되지도 이해되지도 못했을 그런 존재론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 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의 끝”에서야 비로소 구성된 존재론이라 말할 수 있다.
i)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은 욕망적 생산이지만, 그것은 끝에 가서, 자본주의의 조건 들 속에서 규정된 사회적 생산의
극한으로서 그러하다.
분열증은 우리, 현대인의 “병”이다.
역사의 끝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역사의 끝에서는 과정의 두 방향이 합쳐 진다.
즉 자신의 탈영토화의 끝까지 가는 사회적 생산의 운동과 새 대지에 욕망을 나르고 거기서 욕망을 재생산하는 형이상학적 생산의 운동이라는 두 방향이 역사의 끝에서 합쳐지는 것이다.”(AO 155)
ii) “바로 자본주의가 역사의 끝에 있는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가 우발들과 우연들의 오랜 역사에서 귀결되는 것이며, 역사의 끝을 도래하게 하는 것이다.”(AO 180)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존재론은 가장 현대적인 역사 유물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뒤(4장)에 가서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수준에서 “생산의 종합 이론”을 개괄할 예정이다.
그 자체로는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생 산의 존재론은 1장에서 서술될 사회 분석에 기초해서 구체적 실증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의 논의를 세세하게 따라가기보다는 우리에게 절박한 몇 가지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대목을 위주로 검토하려 한다.
우리는 1장에서 사회 기계 및 사회체 개념 과 들뢰즈가 제시하는 사회 기계의 세 유형(원시 토지 기계, 미개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특성을 간략히 살필 것이다.
1. 사회 기계: 기계로서의 사회
들뢰즈는 사회를 “기술 기계(machine technique)”와 구별되는 “사회 기계(machine sociale)”라고 본다.
그가 참조하는 것은 멈퍼드(Lewis Mumford) 이다.
멈퍼드는 비록 야만 전제군주 제도에 국한해서 사용하기는 하지만, “집단 존재물로서의 사회 기계”를 가리키기 위해
“거대 기계 (mégamachine)”이라는 말을 쓴다.
“만일 기계를 각 요소가 전문화된 기능을 갖고 인간의 통제 아래 기능하여 운동을 전달하고 노동을 수행하는 견고한
요소들의 조합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인간 기계 는 정말이지 하나의 참된 기계이리라.”(AO 165 재인용)
여기서 멈퍼드가 말하는 “인간 기계”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기계’, 즉 “사 회 기계”를 가리킨다.
사실 전제군주 국가에서는 그 전 사회에서와는 달리,“국가라는 “거대 기계”, 즉 기능적 피라미드가 생겨난다.
이 피라미드의 꼭짓점에는 부동의 모터인 전제군주가, 측면에 있는 전동(傳動) 기관으로서는 관료 장치가, 바닥에는
노동 부품으로서 마을 사람들이 있다.”(AO 230)
들뢰즈는 바로 멈퍼드의 이 발견에 주목하여, 다른 단계의 사회에도 “사회기계”라는 개념을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러면 사회 기계는 어떤 점에서 기술 기계와 구별되는가.
들뢰즈가 이 점을 간결하게 제시한 대목을 보자.
“기술 기계는 이른바 가장 단순한 손기술 형식으로도, 이미 작용하고 전달하고 심 지어 운동하는 비인간적 요소를 내포
하고 있으며, 이 요소는 인간의 힘을 확장하고 어느 정도 풀어준다.
반대로 사회 기계는 인간들을 부품으로 삼으며, 그래서 마치 인간들은 인간의 기계들과 함께̇ ̇ 고려되고, 또 작용과
전달과 운동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들은 하나의 제도적 모델 속에 통합되고 내면화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또한, 사회 기계는 하나의 기억을 형성하는데, 이 기억이 없었다면 인간과 인간의 기계들 (기술들)의 시너지는 없었으리라. 인간의 기계들은 실제로는 그것들의 경과의 재생 산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기계들은, 그것들을 조건 짓고 조직하면서 도 그 발전을 제한 내지 억제하는 사회 기계들과 결부되어 있다.”(AO 165)
기술 기계는 인간의 힘을 확장하고 풀어주는 비인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가령 시계는 인간이 못하는 균일한 시간을 측정하는 기능을 하는 기술 기계이다.
반면 사회 기계는 인간들을 부품으로 삼으며, 인간의 기계들(기술 기계, 기술들)과 함께 고려되면서 작동한다.
가령 시계는 이번에 는 표준 시간을 재생하고 도시의 질서를 확보하는 사회 기계이다.
그렇기에 같은 기계가, 서로 다른 양상으로이긴 하지만, 기술 기계인 동시에 사회 기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 기계는 기술 기계들을 조직 하고 제어한다는 점에서 기술 기계의 조건을 이룬다.
요컨대 기술 기계의 변화가 사회 기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역이 역사적으로 진실이다.
가령 대장장이, 천문학자 등은 전자본주의 사회의 압력으 로 인해 기술 발전을 제약받았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이윤율의 압력으로 인해 과학 발전이나 기술 혁신 자체가 거부되는 측면을 보인다(AO 276-8).
들뢰즈가 사회 기계의 우선성을 내세우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욕망 기계”를 말하는 출발점은 바로 기계 개념을 기술 기계로 한정하지 않고 사회 기계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사회 기계의 기능을 일반화하면 들뢰즈의 “기계” 또는 “욕망 기계” 개념이 도출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욕망 기계들은 사회 기계들 안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다.”(AO 360)
들뢰즈가 사회 기계의 극한에서 찾아 낸 것이 바로 욕망 기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사회 기계에는 세 유형이 있다.
“원시 영토 기계”, “야만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가 각각 그것이다.
인간과 기술 기계를 포함한 모든 것은 이 사회 기계 위에 기입 내지 등록된다.
그것은 “하나의 충만한 몸”으로서 역할을 하며, 이를 가리키기 위해 들뢰즈는 “사회체(社會體)”10)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2. 사회체와 물신(物神)
들뢰즈가 존재론을 구성할 때 욕망적 생산을 중심에 놓는 까닭은, 바로 사회적 생산 때문이다.11)
욕망적 생산이 존재론의 차원이라면 사회적 생산은 ‘사회’ 또는 ‘인간’의 차원이다.
관찰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은 사회체 위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사회적 생산의 형식들 역시도 자연 발생한 비생산적 멈춤, 경과와 연동된 반-생산 의 요소, 사회체̇ ̇ ̇(socius)라고
규정된 충만한 몸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토지의 몸일 수도, 전제군주의 몸일 수도, 자본일 수도 있다.”(AO 16)
사회체라는 이 개념은 맑스의 “생산양식” 내지 “생산관계” 개념을 정련
10) 사회체(불 socius, 독 Sozius, 영 socius)라는 개념은 라틴어 남성 명사 socius (/so.ki.us/로 발음)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동료, 동무, 동반자, 반려, 벗’(독일어 der Genosse, der Gefährte, 불어 compagnon, associé, 영어 companion)을
뜻한다. 11)
“만일 우리가 중단 없는 과정 속에서 기관 없는 몸이 이후에 행사하는 힘들에 대해 뭔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병렬(parallèle)을 경유해야 한다.”(AO 16)
(精練)한 것이다.
들뢰즈는 흔히 말하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사회 기계와 인간 및
기술 기계’의 관계로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도구들에서 기계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산 수단은 사회적 생산 관계들을 내포하지만, 이 생산 관계들은 생산수단
외부에 있고, 생산수단은 생산 관계들의 지표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표”란 무엇을 뜻하는가?
기계는 도구에서 출발해서 파악되고, 도구는 유기체 및 그 필요들과 관련하여 파악되는 식으로, 왜 인간과 자연의 고립된
관계를 재현한다고 추정되는 추상적인 진화 계통을 투사했는가?
이렇게 되면 사회관계들은 도구나 기계 외부에 있다고 보이게끔 되며, 이질적 사회 조직들에 따르는 진화 계통을 부숨
으로써 도구나 기계에 또 다른 생물 학적 도식을 안에서부터 강요하게끔 된다. […]
이와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는, 기계는 한 사회적 몸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생각되어야지, 생물학적 인간 유기체와 관련
해서 생각되면 안 된다. […]
왜냐하면 인간과 도구는 해당 사회의 충만한 몸 위에 서 이미̇ ̇ 기계 부품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기계는 […]
기계 작동되는 인간들 과̇ 도구들에 의해 구성되는 하나의 사회 기계이다. […]
맑스가 인용한, 제작소에 대한 두 가지 정의 중에서, 첫째 정의는 기계들을 이것들을 감독하는 인간들과 관련시키고,
둘째 정의는 기계들과̇ 인간들, 즉 “기계적 기관들과 지적 기관들”을 이것 들을 기계 작동시키는 충만한 몸으로서의
제작소와 관련시킨다. 그런데 바로 이 둘 째 정의가 있는 그대로 얘기된 구체적인 것이다.”(AO 481-2)
들뢰즈가 일차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기계 개념에 대한 인간주의적 내지 유기체적-생물학적 관념이다.
통상 기계는 도구에서 출발해서 파악되는데, 도구는 유기체의 연장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가령 돌멩이는 주먹 의 연장이요 망치는 돌멩이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인간과 자연의 고립된 관계를 부당하게 가정하는 셈이다.
들뢰즈는 이에 맞서, 사회 기계가 우선이며, 인간과 도구 모두 해당 사회체의 부품 들이라고 본다.
기계는 일차적으로 인간과 기술 기계를 부품으로 삼은 사회 기계이며, 이는 맑스가 인용한 제작소가 “기계적 기관들”
(기술 기 계)과 “지적 기관들”(인간들)을 기계 작동시킨다는 예를 통해 말했던 바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충만한 몸으로서의 제작소가 바로 사회체이다.
들뢰즈의 사회체 개념이 맑스에서 유래했음은 다음 문장에서도 확인 된다.
“맑스가 ‘그것은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며, 외려 노동의 자연적인 또는 성스런 전제 로 나타난다’고 할 때, 그는 바로
충만한 몸에 대해 말한 것이다.”(AO 16)
물론 맑스가 여기서 지칭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자본”이지만, 들뢰즈는 이를 전자본주의 단계에까지 확장해서 적용한다.
원시 사회에서의 “토지”와 야만 내지 국가 사회에서의 “전제군주”가, 현대 사회에서의 자본 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회체와 관련된 들뢰즈의 이론이 자본주의라는 역사의 끝에서 회고적으로 또는 계보학적으로 추출된
것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들뢰즈 자신이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 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맑스 자신도 충만한 몸의
유형이 더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은 초고의 첫째 노트 중 “지대”를 다루는 한 대목에서 맑스는 들뢰즈가 “토지의 몸”과 “전제
군주의 몸”이 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것이 봉건제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미 봉건적 토지 소유 속에는, 인간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낯선 권력으로서의 토지 의 지배가 놓여 있다.
농노는 토지의 부속물이다. […]
봉건적 토지 소유에서는 최소 한 영주가 토지 소유의 왕인 것처럼 보인다̇ ̇ ̇(scheint). […]
토지 소유자와 토지와의 관 계라는 가상(Schein)이 실존한다. 땅 조각이 그 영주와 더불어 자신을 개체화한다. […]
그것은 그 영주의 비유기적인 몸(unorganische Leib)으로서 나타난다.”(Marx M 230; 506)
이 서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 측면이다.
우선 토지가 인간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낯선 권력으로서 농노를 부속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토지가 생산이 펼쳐지는 충만한 몸인 것 같다.
다음으로, 이번에는 영주가 토지 소유의 왕으로서 가상하며, 토지는 영주의 비유기 적인 몸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영주 자신이 토지를 전유하여 토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몸이 됨으로써 영주 위에서 모든 생산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측면은 들뢰즈가 말하는 “토지의 몸”을 가리키 며
둘째 측면은 “전제군주의 몸”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혼재 된 측면은 들뢰즈에서는 “봉건제”라는 체제의 이중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 같다.
들뢰즈는 원시 토지 체계의 몰락과 야만 전제군주 체계의 등장이 교차하는 시점과 관련하여 “봉건제란 무엇인가?”(AO 231)라는 질 문을 던진 바 있다.
또한 위 구절에서 맑스는 “비유기적인 몸”을 언급함 으로써 “기관 없는 몸”을 예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으
리 라.
“기관 없는 몸”의 공식 독일어 번역은 der organloser Körper지만 그것 은 충분히 der unorganischer Leib라고 번역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들뢰즈 가 생각할 때 “기관 없는(sans organes)”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유기적으 로 조직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금 살핀 맑스의 구절에서, “가상”의 출현을 보았다.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은 그 점과 관련된다.
사회적 생산과 충만한 몸 사이에 이내 전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충만한 몸은 생산력들 그 자체와 대립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 전체 로 복귀12)하고, 생산력들과 생산 담당자들13)이 분배되는 하나의 표면을 구성하며,
12) 여기서 ‘복귀’라는 말은 se rabattre sur(명사형은 rabattement)을 옮긴 것인데, 직역하면 ‘자신을 … 위로 다시 쓰러
뜨리다’라는 뜻으로, 기하학에서의 ‘사영(射 影)’, 전투 따위에서 원래 위치로 ‘물러남[退却]’, 낮은 차원으로의 ‘환원’,
만족하면 서 ‘달게 받음’ 등의 뜻을 갖고 있다.
13) ‘담당자’는 agent의 번역이다.
우리는 producteur를 ‘생산자’로 옮기는데, 이 경 우 ‘생산자’는 인간적 의미로 축소되지 않는다.
반면 생산 담당자(agent de production)라고 하면 생산을 떠맡는 개별 담당자(agent)를 가리키기에, 인간적 의미를
지니며, 이 구분을 위해 우리도 ‘생산 담당자’라고 옮겼다. agent은 불어 agir(행하다, 작용하다)나 영어 act 또는 이
동사들이 유래한 라틴어 agere의 동그리하여 그것은 잉여 생산물을 전유하고, 경과의 전반과 이제 준-원인인 그것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과의 부분들을 착복한다.
생산력들과 생산 담당자들은 기적적인 형태로 충만한 몸의 권력(puissance)이 된다.
이것들은 충만한 몸에 의해 기̇ 적을 받은̇ ̇ ̇ ̇ 것 같다. 요컨대, 충만한 몸으로서의 사회체는 생산 전체가 자신을 등록
하는 하나의 표면을 형성하며, 생산 전체는 그 등록 표면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인 다.”(AO 16)
실제로 생산을 행하는 것은 생산력들과 생산 담당자들인데, 오히려 충만 한 몸으로서의 사회체 위에서 생산이 발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전도가 일어난다.
이 전도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긴 했지만(이것이 맑스의 공헌이다), 비단 자본주의 사회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사회체에서건 충만한 몸이 하나의 “분배 표면” 내지 “등록 표 면”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 위에서 기적처럼 생산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상이다.
왜냐하면 등록의 표면인 사회체는 사실은 생산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일차적인 것은 언제나 사회적 생산(생산력과 생 산 담당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전도는 일종의 망상이다.
“사회는 생산 과 정을 등록하면서 자기 고유의 망상을 구성한다. 허나 이것은 의식의 망상이 아니다.”(AO 16)
의식의 망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알튀세르라면 이데올로기라 부를 그 무엇이다. 들뢰즈는 이 망상이 존재의 운동에서 기 원한다고 보기에 의식의 망상이
아니라고 본다.
맑스가 드는 예를 보자.
“상대적 잉여가치가 자본주의 특유의 체계 속에서 발전하고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이 증대함에 따라, 노동의 생산력들과
사회적 연관들은 생산 과정에서 분리되어 노작주(動作主)를, 즉 ‘(능동적) 행위자, 동인(動因), 주동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대 리인, 중개인, 기관원’ 등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agent의 반대말은 patient으로 ‘(수동적으로) 겪는 자, 환자’ 따위를 뜻한다.
이 대립은 앞에서 본 바 있는 action 과 passion의 대립에 상응한다. 들뢰즈&과타리는 이 책에서 agent을 능동적인 의미로
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진정한 능동은 ‘생산자’ 즉 전체로서의 존재 차 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에서 자본으로 넘어가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자본은 아주 신비한 존재가 된다. 왜 냐하면 모든 생산력은 자본의 품 안에서 생기고 또 자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이다.”(Marx K3, 25장; 835; AO 17 재인용)
이 예에서 들뢰즈는 생산력 및 생산 담당자와 충만한 몸 내지 사회체의 관계를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응시킨다.
“여기서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은 기입 또는 등록 표면을 형성하기 위한 충만한 몸으로서의 돈의 역할과 자본의
사용이다.
하지만 토지의 몸이건 전제군주의 몸이 건 그 어떤 충만한 몸, 등록 표면, 외견상의 객관적 운동, 변태적이고 마법에
걸린 물신적 세계는 사회적 재생산의 상수로서 모든 유형의 사회에 속한다.”(AO 17)
이제 들뢰즈는 앞서 얘기한 가상과 전도와 망상으로서의 “물신(物神)”을 모든 사회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확장한다.
모든 사회체에 속하는 물신 현상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충만한 몸이 마치 생산이 발원 하는 표면인양
참칭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확연히 전통적 맑스주 의와 다른 면모이자 혁신적 측면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물신을 존재론적 차원과, 즉 기관 없는 몸이 욕망 기계들이 발원하는 표면을 참칭하며 복귀하는 작용과
관련짓게 될 것이다.
3. 자본주의와 세계사
우리는 앞에서 사회체의 구분이 시대적 구분이자 동시에 유형의 구분 이라고 말했다.
역사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세계사에 대한 맑스의 이해를 정확히 따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회고적으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다만 회고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이 일을 일어나게 했는지 찾아보려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맑 스 자신이 사용한 개념은 아니지만, 이러한 역사관은 정확히 니체의 “계보학”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 점을 뒤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관련된 들뢰즈의 정식화를 살펴보겠 다.
이 정식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 을 하게 될 것이다.
i) “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흐름들이 코드화를 벗어나, 이렇게 벗어나면서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체라 규정될 법한 새로운 기계를 구성
하려면, 큰 우연들, 즉 다른 데서 예전에 생산될 수도 있었을 법한 또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었을 법한 놀라운 만남들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령 사적 소유와 상품 생산의 만남이 그것인데, 그렇지만 이 둘은 사유화(私有化) 와 추상화(抽象化)라는 탈코드화의
아주 다른 두 형식으로 제시된다.
아니면, 사적 소 유 자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가들이 소유한 변환 가능한 부의 흐름들과 노동력만을 소유한 노동자
들의 흐름의 만남(여기에도 탈영토화의 상이한 두 형식이 있다).”(AO 163-4)
ii) “판매되는 재산들의 흐름, 유통되는 돈의 흐름, 그림자 속에서 준비되는 생산과 생산수단의 흐름, 탈영토화되는 노동
자들의 흐름 ―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 는, […] 이 모든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만남, 이것들의 결합, 이것들 서로간의
반작용이, 한 번에 생산되는 이 만남, 이 결합, 이 반작용의 우발이 있어야 하리라.
우발 의 세계사가 존재할 뿐이다. […]
탈코드화된 욕망들, 탈코드화의 욕망들은 늘 있었고, 역사는 이것들로 충만하다.
하지만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하나의 욕망을, 사회적인 동시에 기술적인 욕망 기계를 꿈꾸거나 결핍하는 대신 그런 기계를 생산하는 욕망 을 형성하는 것은, 한 장소에서의 이 흐름들의 만남을, 시간이 걸리는 한 공간에서의 이 흐름들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자본주의와 그 절단은 단순히 탈 코드화된 흐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들의 일반화된
탈코드화와 새로 운 거대한 탈영토화, 그리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결합에 의해 정의된다.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만든 것은 바로 이 결합의 독자성이다. […]
이 결합이 사회 기계의 맨 앞 줄로 이행할 때, 역으로 그것은 한 계급의 과잉 소비로서의 향유로 연결되기를 그치는 것
같으며, 노동의 원시적 연결들을 탈영토화된 새 충만한 몸으로서의 자본에 결부시킨다는 조건에서, 이 유일한 조건에서,
이 연결들을 되찾는 “생산을 위한 생산” 속에 서 사치 자체를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만들고 모든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생산으로 복 귀시키는 것 같다.
생산을 위한 생산은, 거기서부터 노동의 원시적 연결들이 방출되 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참된 소비자이다(마치 맑스가
묘사한 “산업 내시(內侍)”의 악마의 계약에서처럼, ‘만일̇ ̇ …라면̇ ̇, 따라서̇ ̇ ̇ 그건 네 거다.’).”(AO 265-6)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1) 세계사는 우연과 우발의 역사이지 필연과 연속의 역사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기초 요소들로는 사적 소유, 상품, 화폐, 자유 노동자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요소들은 단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만 으로는 안되고 서로 만나고 결합되어 “생산을 위한 생산”에 복무해야 자본주의가 형성되지만,
이 만남과 결합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 시대나 봉건제에서도 이 요소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만남과 결 합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본주의는 형성되지 않았다(AO 263-4).
자본 1권 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 맑스는 두 “주요” 요소들의 만남을 서술한다.
“화폐와 상품은 원래부터 자본은 아니다. […] 그것들은 자본으로의 변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변환 자체는 일정한 상황 아래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먼저 매우 다른 종류의 상품 소유자가 서로 마주보고 접촉해 야 한다.
그 한쪽은 화폐, 생산수단, 삶의 수단의 소유자로, 그에게 관건은 다른 사 람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자신이 소유한 가치액을 증식시키는 일이다.
다른 쪽은 자 유노동자로,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자요 따라서 노동의 판매자이다. […]
상품 시장 의 이 양극화와 더불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 조건들이 주어진다.
자본 관계는 노동자들과 노동의 실현 조건의 소유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이 일단 자기 발로 서게 되면, 그것은 이 분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이를 끊임없이 확대하며 재생산한다. […]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역사적 분 리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본원적(ursprünglich)”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자 본과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전사(前史)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Marx K1, 24장, 742)
자본주의의 전사라는 말은, 자본과 자유노동자들은 서로 만나지 않을 수 도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양자가 만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맑스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역할이 신 학에서의 원죄의 역할과 거의 같다고 언급하기도 하는 것이다(741).
본원적 축적은 자본의 탄생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과 자유노동자들이라는 두 요소는 각각 아주 상이한 기원을 지닌 여러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들이었다.
만남과 결합은 우연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는 역사 전개가 계보학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도 잘 지적한 바 있 다.
“일단 구성된 자본주의 구조가 소유하고 있는 통일성은 그 구조의 후방에서는 발견 되지 않는다.
생산양식의 전사(前史)에 대한 연구는 계보학의 형식을 띤다. […]
이를 위해서는, 그 결합의 결과물에서 출발해서 식별되는 이 요소들 간의 만남이, 그리고 이 요소들 고유의 역사를 생각
해야 하는 터전인 역사 마당이, 생산되는 것으로 또 엄밀히 생각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구성된) 이 역사 마당에서, 이 요소들은 그 계보학을 만들 수 있겠으나, 정확히는 “부차적
(marginale)” 상황, 말하자면 비̇-규정적̇ ̇ ̇(non déterminante) 상황만을 갖고 있다.”(Althusser et al. 1996: 531-2)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서 세계사를 회고적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만, 이는 세계사가 우연과 우발의 역사임을 드러내며,
현실 역사는 곧 계보학이라 는 점을 보여준다.
들뢰즈가 사회체의 유형들을 구분한 것은 바로 자본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관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전사(前史) 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탐구는 자본주의 사회체의 요소들에 대한 분석 덕분에
가능해질 수 있었다.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많은 것들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의 조합을 통해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2) 자본주의는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는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
물론 자본주의 전에도 생산은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 있었다. 가 령 원시 축제에서의 탕진 소비나 전제군주와 그 부하들의 사치 같은 과잉소비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러한 향유는 중단되고, 오직 생산 을 위한 생산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맑스가 돈이 돈을 낳거나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는다고 할 때 말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가치는 경과하는 가치, 경과하는 돈, 그런 것으로서의 자본이 된다. […]
이 가치 는 경과하는,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실체로서 여기에 갑자기 나타나며, 이 실체에 대해 상품과 화폐 양자는 한낱
순수한 형식에 불과하다. […]
이 가치는 원래 가치로 서의 자신과 잉여가치로서의 자신을 구별한다. 마치 아버지 신과 아들 신이 구별되 되, 이 양자가
나이가 같고 사실상 하나의 위격(位格)을 형성하듯 말이다.
왜냐하면 1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통해서만 미리 지급한 100파운드는 자본이 되기 때문이 다.”(Marx K1, 4장, 169-70)
이로써 자본은 단순한 화폐와 구별되게 되며, 오직 생산을 위한 생산에 투자된 돈으로서의 자본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자본은 경과하는 돈으로 서만, 흐름에서 가치를 창출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만 자본은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본에 고유한 잉여가치 생산 방식이 생겨난다. 자본은 오직 흐름 속에서만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맑스의 분석에 따르면, 다양한 질 적 노동들이 일반적 등가 관계에 이르게 되었을 때, 말하자면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
되었을 때, 자본주의적 상품과 화폐의 형식이 탄생한다.
그리고 추상적 노동의 발견이라는 스미스(Adam Smith)와 리카도(David Ricardo)의 업적은 자본주의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부(富)의 본성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주체적 노동, 생산 활동 일반에 있다.
“맑스가 말하듯, 본질이 주체적인 것, 즉 생산 활동 일반̇ ̇ ̇ ̇ ̇ ̇이 되며, 추상적 노동이 현실 적(réel)인 어떤 것이 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속에서이다.”(AO 359)
이제 모든 가치는 추상량(抽象量)으로 환원되었다.
이것이 들뢰즈가 “추상화(抽象化)”라고 부른 핵심이다.
추상화는 ‘상품과 화폐’의 관계에서 완성된 표현 형태를 찾게 된다.
나아가 잉여가치(Mehrwert, surplus-value), 즉 가치의 증대는 양들 간의 관계로 서술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자본 x는 잉여가치라는 아들 자본 dx와의 관계 속에서 “x + dx”라는 수학적 형식 속에 자리한다.
바로 이 맥락에서 들뢰즈는 이를 “자본의 혈연적 형식” 이라고 표현한다.
“자본은 돈이 돈을 낳거나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혈연 자본이 된다.”(AO 269)
자본주의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것은 오 직 자본의 흐름 속에서이다.
추상적 주체적 노동, 생산 활동 일반은 오직 자본의 흐름 속에서만 부품으로서 기능한다.
들뢰즈는 이를 “흐름의 잉 여가치”(AO 270ff., 446)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제 과제는 어떤 형식으로 흐름의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지, 왜 잉여가치는 맑스의 규정(“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 사이의 차이”(AO 282))과는 다른 형 태를 띠게 되는지 설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들뢰즈가 세계를 흐름들로 파악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자본의 흐름에 통합/적분(積分)된 채로 기능하기
때문이었다.
사회 속의 모든 것은 흐른다.
그렇다면 자본의 흐름에 통합된 요소들의 흐름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자본의 흐름에 통합되기 전의 흐름들은 어떤 것들이고, 어떤 기능을 했는가? 흐름은 무엇에 의해 흐르는가?
무엇이 흐름을 흐르게 하고 또 흐르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한편으로 전자본주의 사회의 탐구로 이어지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자는 사회체의 유형 학을, 후자는 존재론을 구성하게 된다.
3) 끝으로, 맑스가 ‘산업 내시’와의 악마의 계약을 언급하는 대목을 고 찰해 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만일̇ ̇ …라면̇ ̇, 따라서̇ ̇ ̇ 그건 네 거다(c'est donc à toi si …)”라고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원래
이 대목은 맑스의 초고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곳에서 맑스는 “친구여, 네게 필요 한 것을 네게 주겠다, 하지만 너는 필수 조건을 알고 있다(lieber Freund, ich gebe
dir, was dir nöthig ist, aber du kennst d[ie] conditio sine qua non)”(Marx M 279; 547)고 말하면서 이내 조건을 제시하는
산업 내시를 묘사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산업 내시는 향유(Genuß)를 미끼로 ‘너’를 기만해서 자신에게 넘기게끔 한다고 부언한다.
물론 그 향유의 약속은 기만적일 수밖에 없는데, 자본주의는 반드시 재계약을 하도록 만드는 곤 궁(Bedürftigkeit)도 함께
제공하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은 자유노동 자들을 포섭한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곤궁을 낳는 것은 바로 사적 소유 이다.
물론 사적 소유는 사유화(私有化)의 결과물이며, 부를 소유한 자본가 와 노동력만을 소유한 자유노동자를 생산한다.
그렇지만 자본가와 자유 노동자는 자본의 기능 부품일 뿐, 특정인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가령,
“자본의 인물화(人物化)로서만 자본가는 존중할 만하다. 그런 존재로서만, 자본가는 절대적 치부(致富)의 충동을 축재가
(蓄財家)와 공유한다. 하지만 축재가에게서 개인 적 광증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본가에게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용이며,
그 안에서 자본가는 단지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Marx K1, 22장, 618)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사유화해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소용되는 부품으로 삼는다.
특히 인간의 기관들과 사적 인물들은 사유화된 가족 (핵가족) 속에서 사유화된다.
들뢰즈가 자신이 결합 종합이라 부르는 “따라서 그것은 …이다”라는 형식 속에서
“따라서 그것은 네 거다”라고 표현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너”라는 개인을 만들어낸다.
“인물은 추상량들에서 파생되어 이 양들의 구체-화 속에서 구체적이 되는 그만큼 현실적으로 “사적(私的)”이 되었다.
표시되는 것은 이 추상량들이지, 더 이상 인물 들 자신이 아니다.
네 자본 또는 네 노동력 말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AO 298)
그리고 들뢰즈가 보기에, 아빠-엄마-나라는 핵가족 속의 사적 인물들을 발명한 것은 자본주의지만 완성한 것은 정신
분석이었다.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과제를 내세운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 기계와 사회체의 이론, 그리고 그 개념을 낳을 수 있게 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그러나 다른 주제로 진행하기 전에, 우리의 나중 논의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전자본 주의의 두 사회 기계인 “원시 영토
기계”와 “야만 전제군주 기계”의 특성 을 간략히 살피고 가도록 하겠다.
4. 원시 영토 기계와 코드화
최초의 사회 기계는 “영토 기계”이며 최초의 사회체는 토지이다.
여신 대지의 충만한 몸 위에 재배 가능한 종들, 농업 도구들, 인간 기관들이 집결된다.
우리가 1절에서 사회 기계의 일반적 모습을 살펴보았을 때도 유사한 양상이 묘사된 바 있다.
“토지는 다양하고 나누어진 노동 대상일 뿐 아니라, 나눌 수 없는 단일한 존재물, 즉 생산력들로 복귀해 생산력들을
자연적 또는 성스런 전제로서 전유하는 충만한 몸이기도 하다.
흙은 생산적 요소이자 전유의 결과일 수 있으며, 대지는 자연 발생 한 거대한 정체상태요, 흙을 공동으로 전유하고 사용
하도록 조건 짓는 생산보다 우월한 요소이다.
토지는 그 위에 생산의 모든 경과가 기입되고, 노동 대상들, 노동 수단들, 노동력들이 등록되고, 담당자들과 생산물들이
분배되는 표면이다.
여기서 토지는 생산의 준-원인이자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
따라서 영토 기계̇ ̇ ̇ ̇는 사 회체의 첫째 형식이며, 원시적 기입 기계이고, 사회 마당을 덮는 “거대 기계”이다.”(AO 164-5)
국가라는 거대 기계, 즉 기능적 피라미드에서 꼭짓점과 측면과 바닥에 각각 전제군주와 관료와 마을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 사 회에서는 토지 위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사회체로서의 토지 위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족 체계의 구성 같은 일이다.
미개 원시 사회체에서 “토̇ 지의 몸 위에서 결연과 혈연을 직조하는 것̇ ̇ ̇ ̇ ̇ ̇ ̇ ̇ ̇ ̇ ̇ ̇ ̇ ̇ ̇ ̇ ̇, 즉 가문들을 직조하는 것”(AO 171)은
영토 기계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혈연(filiation)이란 생물학적 기억, 현대적 용어로 하면 부모에서 자식으로 흐르는 유전적 기억이다.
결연(alliance)은 두 혈연의 구성원 남녀가 혼인을 통해 결합되는 것을 가리키며, 이를 통해 두 혈연 사이에 남자 또는
대개는 여자의 교환 이 일어난다.
그런데 결연은 혈연에서 단순히 연역되지 않는다.
결연의 조직, 또는 혼인 체제는 인간이 단순한 생물학적 유기체이기를 그치고 문화를 정초하는 행위이다.
결연이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즉 유전적 기 억과는 다른 형태인 말의 기억을 전제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참조하는 것은 리치(E. R. Leach)의 연구이다.
리치는 “지역 가계(local lineages)”라는 심급을 뽑아냈다.
“지역 가계는 혈연의 가계와는 구별되며 또 작은 분파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지역 가계란 같은 지역 내지 이웃 지역에 거주하며, 결혼을 도모하고, 구체적 현실을 형 성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혈연
체계 및 추상적 혼인 계급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친족 체계는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실천, 하나의 프락시스, 하나의 절차, 심지어 하나의 전략이다.”(AO 172-3)
이런 점에서 원시 사회에 역사가 없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원시사회는 역사로 충만하다.
“기능적 비평형 상태 또는 요동치고 불안정하며 늘 만회되는 평형 상태 속에서, 제도화된 갈등들뿐 아니라 변화, 반항,
단절, 분열 들을 낳는 갈등들도 아우르는, 사회 들의 역동적이고 열린 현실이 역사라고 불린다면, 원시 사회들은 충만히
역사 속에 있으며, 만장일치 집단의 우위라는 이름으로 원시 사회들에 돌리려 하는 안정 내지 심지어 조화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AO 177)
여기서 행해지는 실천은 “코드의 잉여가치”라는 원동력을 통해 수행된 다.
코드의 잉여가치야말로 “잉여가치의 원시적 형식”이며, “원시 영토 기계의 잡다한 조작들을 실효화”한다(AO 176).
그렇다면 들뢰즈가 사용하는 “코드” 개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들뢰 즈는 코드를 흐름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말하자면, 코드는 흐름을 흐르 게 하거나 저지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코드는 명사이기 전에 동사로 이 해해야 한다. 흐름의 코드화(codage)가 문제인 것이다.
“전자본주의 사회 기계들은 욕망을 코드화하고,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한다. 욕망 을 코드화하는 것
― 또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코드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체의 일이다.”(AO 163)
“1차적으로 코드는 사회체를 통과하는 흐름들의 성질 각각을 규정한다(가령 소비 재, 위신재, 여자와 아이의 세 회로).
따라서 코드의 고유한 목적은 질이 규정되면서 도 통약은 불가능한 이 흐름들 간의 필연적으로 간접적인 관계들을 설립
하는 일이다.
이런 관계들은 분명 상이한 종류의 흐름들에서의 양적 채취들을 내포하지만, 이양 들은 비제한적인 “어떤 것”을 전제
하게 될 등가 관계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
간 접적, 질적, 제한적이라는 코드의 관계의 이 모든 성격들은, 코드는 결코 경제적인 것이 아니며 또 경제적일 수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AO 294)
코드는 이처럼 본질적으로는 등가 관계에 돌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코 경제적인 것이 아니며 등가 교환과도 상관이
없다.
이렇게 사회체를 흘러가는 흐름들의 성질 각각을 규정하는 이유는, 이 각각의 흐름에 질이 부여되면서 서로 통약 불가능
하도록 만들어,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잉여가치가 “코드의 잉여가치”이다.
코드에 의해 형성되는 “각 사슬은 다른 사슬들의 파편들을 포획하여 그 파편들에서 잉여가치를 끌어온다.
이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보여주는 현상이다.”(AO 47)
앞서 리치가 묘사한 “지역 가계”의 역할이 바로 코드 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잉여가치는 여기서 코드의 잉여가치로 규정된다. 따라서 코드의 관계는 간접적, 질적, 제한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특성들을 통해 또한 경제 외적인 것이기도 하며, 바로 이런 자격으로 인해 서로 다른 질을 부여받은 흐름들
간에 연동들 을 작동케 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해당 사회가 실존하고 생존하는 조건으로서 집단적 감식 내지 평가의 체계를, 지각 기관들의 집합 또는
더 잘 말하자면 믿음의 집합 을 함축한다.”(AO 295)
그리고 코드의 특성은 오늘날 우리가 “유전 코드”라 부르는 것의 특성에 서도 찾아볼 수 있다(AO 295).
사회의 몸 위를 흘러가는 흐름들을 코드화하는 것은 결국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잉여가치는 정치 경제학자들과 특히 맑스가 사용 한 말로, “가치 증대(Mehrwert)”를 의미한다.
들뢰즈가 코드라는 개념을 도 입한 까닭은 가치의 창조라는 문제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보기에 사회체의 각 유형마다, 즉 토지의 몸, 전제군주의 몸, 자본의 몸 위에서 가치가 창조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코드는 토지의 몸에서 창 조되는 잉여가치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며, 다른 사회체에서의 잉여가치 생산을 설명하는 데는
부차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 의 체제에서 사정은 어떠한가? 잉여가치는 맑스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 사이의 차이 에 의해서는 정의될 수
없다.”(AO 282)
우리는 5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서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들뢰즈의 독창적인 설명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원시 영토 기계에서는 코드의 잉여가치가 어떤 식으로 생산 되는가?
아니 그 전에 친족 체계의 직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친족 체계는 기본적으로 “생산의 흐름들의 이쪽저쪽에서 초과와 부족, 결핍과 축적” 같은 “비평형(déséquilibre)”을 통해
구성되며 기능한다(AO 176).
뢰플러(L. G. Löffler)가 제시한 사례에는 이 비평형과 만회의 역학이 잘 드러나 있다.
“음루 족에서, 부계 모델이 모계 전통보다 우세하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어머니에 서 딸로 전달되는 형제-누이의 관계는 아버지-아들 관계에 의해 무한정하게 그럴 수 있는
것이지, 딸의 결혼에 의해 종결되는 어머니-딸 관계에 의해 그럴 수는 없 다.
결혼한 딸은 자기 딸에게 새로운 관계를, 즉 자기 딸을 자기 형제에게 결합시키는 관계를 전달한다.
이와 동시에, 결혼하는 딸은 자기 형제의 가문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어머니의 형제의 가문에서 이탈할
뿐이다.
자기 조카딸이 결혼할 때 그 어머니의 형제에게 변제하는 일의 의미는, 젊은 딸이 자기 어머니의 옛 가족 집단을 떠난다는 뜻으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
조카딸 자신은 어머니가 되고, 새로운 형제-누이 관계의 출발점이 되며, 이 관계 위에 새 결연이 정초된 다.”(AO 193 재인용)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 기계와 기술 기계의 중요한 차이들 중 하나를 확 인하게 된다.
“어떤 사회 기계가 잘 기능하지 말아야̇ ̇ ̇ ̇ ̇ ̇ ̇ ̇ 하는 것은 바로 기능하기 위해서̇ ̇ ̇이다. […]
사회 기계의 극한은 마모가 아니라 고장이며, 사회 기계는 삐걱거리고 고장 나고 작은 폭발들을 터뜨리면서만 기능한다.
기능 장애들은 그 기능 자체의 일부를 이루 는데, 이는 […]
미미한 양상이 결코 아니다. 부조화나 기능 장애가 사회 기계의 죽 음을 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반대로 사회 기계는 자기가 유발하는 모순들, 자기가 초래하는 위기들, 자기가 낳는̇ ̇ 불안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지독한 조작들을 먹고 사는 습관이 있다.”(AO 177-8)
사회 기계는 잘 기능하지 말아야만, 삐걱거리고, 고장 나고, 기능 장애를 일으켜야만 작동한다.
다시 말해, 비평형을 통해 기능한다.
반면 기술 기계는 그렇게 될 경우 기능을 멈춘다.
사회 기계와 기술 기계 사이의 이 차이점은 나중에 욕망 기계와 기술 기계의 차이점을 기술할 때 그대로 전용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비평형의 역학을 조직함으로써 코드의 잉여가치가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잘 밝힌 것이 니체이다.
들뢰즈가 평가하기 에, 니체는 “부채(負債) 방정식”(AO 226)을 통해 코드의 잉여가치가 발생 하는 원리를 성공적으로
정립했다.
니체의 도덕 계보학은 “원시 경제 를 부채의 견지에서, 채권자-채무자의 관계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요 유 례없는
성공”(AO 224)이다.
“인간은 강렬한 배아 내류를, 즉 집단의 모든 시도를 휩쓸어갈 거대한 생물적-우주 적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을 구성
해야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인간에게 하나의 새로운 기억을, 즉 집단 기억을 가지게 할 것인가? 즉, 말들과 결연들의 기억,
확장 혈연들로 결연들을 직조하는 기억, […]
그리하여 욕망의 흐름들의 코드화 를 사회의 조건으로서 조작하는 기억을 말이다. 그 답은 단순하다.
그것은 부채이다.”(AO 225)
니체가 발견한 원시 미개 사회체의 “잔혹극(théàtre de la cruauté)”은 “인간 을 훈육하기̇ ̇ ̇ ̇, 인간의 살에 표시하기, 인간
에게 결연을 가능케 하기, 양측 모두에게 기억(장래를 향한 기억)의 문제임이 드러날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인간에게
형성하기라는 의미만을” 갖고 있다.
이것은 복수나 원 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것은 “야기한 손해 = 겪어야 할 고통”이라는 섬뜩한 “부채 방정식”이다.
“니체는 묻는다. 죄인의 고통이 그가 야기한 손해의 “등가물”의 구실을 할 수 있다 는 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어떻게 괴로움으로 “갚을” 수가 있는가?
괴로움 에서 쾌락을 뽑아내는 눈을 끌어대야 한다(이것은 복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눈은 니체 자신이 평가하는 눈이라 부른 것, 즉 잔혹한 광경들을 즐기는 신들의 눈 이다. “
벌에도 또한 그토록 많은 축제다운 것이 있다!”[Nietzsche GM II 6] 그만큼 큰 고통도 능동적 삶과 향유하는 시선의
일부가 된다.”(AO 226)
이것은 교환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눈은 자기가 관찰한 고통에서 코 드의 잉여가치를 뽑아내며”, 이것은 “눈썰미
(coup d’oeil)”를 요구하는 “평가하는 눈”의 작업이다.
이로써 우리는 원시 영토 기계에서 가치의 증대, 가치의 창조, 또는 코 드의 잉여가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i) 서 로 다른 질을 부여받은 (말하자면, 코드화된) 흐름들을 정립하고, ii) 평가 하는 눈의 작업을 통해 (말하자면,
가치 평가 내지 가치 부여 행위를 통 해) iii)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말하자면, 가치의 창조를 수행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물론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은 다른 사회 기계에서 는 다른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5. 야만 전제군주 기계와 초코드화
우리는 처음에 “사회 기계”의 모델로서 전제군주 제도가 활용되는 것 을 본 바 있다.
전제군주 기계 또는 야만적 사회체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 인가?
그것은 “새 결연과 직접 혈연”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새 결 연은 사회 구성원들이 전제군주와 맺게 되는 관계를 가리키며, 직접 혈 연은 전제군주가 신과 맺는 관계를
가리킨다.
전제군주는 니체가 말하는 “유례없는 공포”(AO 227)로서의 “국가”로서 등장한다.
“잉여 생산물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토목 공사에서 생산력들을 국가에 넘겨주고, 국가 자체를 전유의 집단적 조건들의
원인으로 보이게 하는 외견상의 객관적 운동 에 따르면 국가는 흙의 참된 소유자이다.
사회체로서의 충만한 몸은 토지기를 그쳤 으며, 전제군주의 몸, 전제군주 자신, 또는 그의 신이 되었다. […]
이 전제군주야말 로 외견상의 운동의 유일한 준-원인, 원천, 하구이다. […]
물신 또는 상징에서 체제 의 근본적 변화가 벌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군주의 인물도 아니며, 그의 기능도 아니다.
이 기능은 제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깊이 변화했던 것은 바로 사회 기계이다.
영토 기계 대신에, 국가라는 “거대 기계”, 즉 기능적 피라미드가 생겨난 것이 다.”(AO 230)
이제 영토 기계는 전제군주 기계에 자리를 빼앗겼다.
그렇다고 해서 영토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영토 기계는 새로운 잉여가치의 재료를 제공하면서 국가의 부품으로서 잔존하는 공포스런 상황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영토 기계에 의해 코드의 잉여가 치는 여전히 생산되지만, 이제 그것은 부족이나 분파 안에서 국지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독점되는 방식으로 통합적으로 소비 된다.
전제군주는 모든 것을 전유한다.
옛 사회체는 더 이상 자율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국가라는 거대 기계의 부품과 톱니바퀴로서만 기능한 다.
“영토적 가문 기계의 톱니바퀴들은 존속하지만, 이제는 국가 기계의 노동 부품들일 뿐이다. 대상들, 기관들, 인물들,
집단들은 적어도 그 내적 코드화의 일부를 유지하 지만, 옛 체제의 코드화된 이 흐름들은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초월적
통일체에 의해 초코드화된다.
옛 기입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국가의 기입에 의해 그리고 국가의 기입 속에 벽돌처럼 쌓여 있다.
블록들은 존속하지만, 처박히고 끼워진 벽돌들이 되었고, 관리되는 이동성만을 지닌다.
영토적 결연들은 대체되지 않고, 다만 새 결연에 결연된다.
영토적 혈연들은 대체되지 않고, 다만 직접 혈연에 가입된다. […]
원시 체계 전체는 우월한 권력에 의해 동원되고 징발되며, 외부의 새 힘들에 의해 굴복되어, 다른 목적들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
국가의 핵심은, 부동의 기념비 적이며 확고한 새 충만한 몸이 모든 생산력들과 생산자들을 전유할 수 있게 해주는 2차
기입의 창조이다.”(AO 232-5)
이런 점에서 국가의 성립은 “탈영토화”를 수반한다.
여기서의 탈영토화는 토지에서 벗어나 전제군주라는 새로운 기입 표면으로 이동하는 것을 뜻 한다.
이는 최초의 탈영토화 운동인데, 이는 나중에 자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있게 될 탈영토화 운동과는 구별된다.
물론 자본주의는 다시 재영토화를 수행함으로써 옛 사회체의 모든 재료들을 회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초코드화 작용이 가능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전제군주가 갖고있는 생사여탈권에 있다.
그것은 이미 “국가의 창설자들”의 출현 과정에 서부터 잘 나타난다. 이것을 탁월하게 발견한 것 역시 니체의 공헌이다.
“그들̇ ̇은 운명처럼 오며,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이성도 숙고도 구실도 없다. 그들 은 번개처럼 거기 와 있다. 너
무도 무섭고 너무도 갑작스럽고 너무도 압도적이며 너무도 “다르기̇ ̇ ̇” 때문에, 미워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들의 작업은 본능적인 형식창조, 형식-각인이다.
그들은 존재하는 자 중에서 가장 비자발적이고 가장 무의식 적인 예술가들이다.
― 요컨대,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는 어떤 새로운 것이, 하나의 살아 있는̇ ̇ ̇ ̇ 어떤 지배 형성물이 있다.
거기에서는 여러 부분들과 기능들은 한계가 정해지고 관계를 맺으며, 또한 전체의 관점에서 우선 하나의 “의미”가 있지
않은 것은 결코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 타고난 조직자들은 죄라든가 책임이라든가 숙고 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 안에는 저 무서운 예술가-이기주의가 지배하고 있는데, 그것은 청동처럼 빛나며, 마치 어머니가 그 아이들 속에서
정당화되듯이 스스로가 그 “작품” 속에서 이미 영원히 정당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전투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조직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로 보면 아마 압도적으로 우세하겠지만 아직은 형태가 없으며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주민에게 생각 없이 자 신의 무서운 발톱을 들이대는, 어느 금발의 맹수 무리, 하나의 정복자,
지배자 종 족….”(Nietzsche GM II 17)
국가의 창설자들이 지니고 있는 힘이 원시 사회체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형식을 옛 사회 구성원들에게 각인하는 예술가와도 같다.
그런 점에서 국가가 옛 결연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수단은 공 포이다.
“전제주의의 지평에는 언제나 일신교가 있다.
부채는 실존의 부채, 신민들(sujets) 자신의 실존의 부채가 된다.”(AO 234)
전제군주는 신민 들의 실존을 좌우하는 절대 공포의 존재, 신과 같은 절대 권력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들뢰즈는 원시 영토 기계의 코드화와 구분해서 초코드화 (surcodage)라고 부른다.
초코드화는 개별적인 코드화를 통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초월적 힘을 통해 흡수한다.
국가의 법은 “탁월한 형식적 통일 체”(AO 236)로 작용한다. “초코드화하기, 이것이 법의 본질”(AO 251)이다.
“초코드화̇ ̇ ̇ ̇,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본질을 구성하는 조작이요, 국가와 옛 구성체들의 연속성과 단절을 동시에 측정하는
조작이다.
그 조작이란 코드화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욕망의 흐름에 대한 공포이자, 또한 초코드화하는, 그리고 욕망을 ― 설사 욕망
이 죽음 본능이라 할지라도 ― 군주의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기입의 설립이 다.”(AO 236)
초코드화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것은 코드의 잉여 가치들을 적분(積分)한다. 그것은 가치를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이 된 것 이다.
한편, 초코드화는 자본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나타나는 탈코드화 (décodage), 즉 질적 코드들의 상실과도 구별된다.
물론 자본주의의 탈코 드화는 공리계(axiomatique)의 도입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탈코 드화라 말할 수 있지만
말이다.
국가의 초코드화는 코드의 잉여가치들을 수합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징세의 도구서로서의 “돈”의 역할이다.
전제군주 사회에서 돈의 역할은 “부채”의 증대와 주로 관련되며,
“상업에서 돈의 역할은 상업 자체보다는 국가에 의한 상업의 통제와 더 관계가 있다.
상업과 돈의 관계는 종합적이지 분석적이지 않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돈은 상업 이 아니라 국가 장치의 유지비로서의 조세와 뗄 수 없다.
지배 계급들이 국가 장치 와 구별되고 사유 재산을 위해 국가 장치를 이용하는 바로 그곳에서는, 돈과 세금 의 전제군주적 연줄은 여전히 가시적이다. […] 돈, 돈의 순환은 부채를 무한하게 ̇ ̇ ̇ ̇ ̇ ̇ ̇ 하는 수단이다̇ ̇ ̇ ̇ ̇ ̇.”(AO 233-4)
돈은 상업의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돈과 상업은 나 중에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국가는 갖가지 형태로 신민들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부채를 극대화하고, 또한 다른 형태로 작은 부채들 탕감해줌으로써, 이를 통해 종속을 강화한다.
영토 기계의 “잔혹 체계”는 전제군주 기계의 “공포 체계”에 의해 대체되었다.
물론 옛 잔혹은 여전히 존속하지만, 그것은 이제 국가 장치 속에 벽돌로 들어가며, “때로는 이 잔혹을 조직하고 때로는
묵인 내지 제한하여, 자기 목적들에 봉사하게 하고 더 무서운 법이라는 우월하며 중첩된 통일성 아래 포섭한다.”(AO 250-1)
이런 체제에서는 벌의 의미도 바뀐다. 원시 영토 기계에서 벌은 “눈이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축제”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야만 전제군주 기계에서 벌은 “복수”가 된다.
벌은 전제군주 의 자의적 법을 따르지 않았을 때 복수로서 가해진다.
이로부터 전제군 주와 신민의 기이한 관계가 생겨난다.
“복수는 전제군주에 맞선 신민들의 복수가 된다.
공포의 잠복의 체계 속에서, 더 이 상 능동적(actif)이거나 반응적(agi)이거나 반작용적(réactif)이지 않은 것, “폭력에 의해
잠복하게 된 것, … 억눌리고 물러나고 내부로 감금된 것”, 바로 이것은 이제 감̇ 정을 품게̇ ̇ ̇ ̇( ressenti ) 된다.
신민들의 영원한 원한은 전제군주들의 영원한 복수에 답 한다. […]
복수와 원한, 그것은 물론 정의의 시작이 아니라, 니체가 분석하듯, 제국 구성체 안에서의 정의의 생성과 그 운명이다.”
(AO 254)
신민은 전제군주에 맞서 복수심을 품을 수 있을 뿐 힘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 일방적 폭력 상황에서 복수심은 내면에 갇혀 행사되지 않은 힘 때문에 원한감정(ressentiment)이 된다.
원한감정의 기원에 관한 니체의 이론을 들뢰즈는 전제군주 기계에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장으로 가기 전에 우리는 들뢰즈의 자본주의 분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계(axiomatique)” 개념도 마저 정리
할 필요를 느낀다.
초코 드화가 코드에 기초한다는 점이 사실이긴 하지만, 공리계는 새로운 유형 의 코드화가 아니다.
공리계는 자명한 것 또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공리(axiome)들의 집합이다.
첫째로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 위에서 구성된 유일한 사회 기계로, 생래적 코드들을 화폐 형식을 띤 추상량
(抽象量)들의 공리계로 대체한다.”(AO 163)
들뢰즈가 자본주의 사회를 공리계에 의해 규정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당연시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공리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코드들이나 초코드화들보다 “훨씬 더 압제적”(AO 207)이며 “훨씬 더 냉혹”(AO 278)하다.
자본주의 체계의 공리계는 유연할 뿐 아니라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AO 281, 283).
또한, 둘째로, “자본주의 공리계가 포화상태에 이르는 법이 없 고, 예전 공리들에 언제나 새로운 공리를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자본주의의 역량이다.”(AO 297-8)
그래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은 대부분 자본의 공리계에 포획된다.
“임금 향상, 생활수준의 개선은 현실이지만, 이 현실은 자본주의가 그 극한들의 확 장에 따라 언제나 자신의 공리계에
추가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보조 공리에서 파생 하는 것이다(뉴딜을 수행하자, 강한 조합들을 바라고 인정하자, 참여를
촉진하자, 단일 계급이여, 러시아가 우리에게 다가온 만큼 우리도 러시아를 향해 한 걸음 내 딛자, 등).”(AO 448)
하지만 공리계는 자본주의 국가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리계는 자본 자체와 합류한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가 이 공리계에서 탄생하며, 이 공리계에서 결과하고, 이 공리계의 조절을 보증할 따름이며,
이 공리계가 기능하 기 위한 조건인 실패들을 조절하거나 심지어 조직하고, 이 공리계의 포화의 진전과 이에 상응하는
극한의 확대를 감시 내지 지도한다.”(AO 300)
심지어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잉여 내지 잉여가치의 추출, 축적, 흡수, 시장과 화폐 예측 등” 공리계의 문제
에서 출발해야만 “생산, 생산 단위들, 경제 예측 따위의 변형”을 수행할 수 있다(AO 304).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현대 사회들의 사회 공리계가 두 극(極) 사이에서 끊임없이 왕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두 극이란 우리가 4장 B의 3절에서 그 개념을 살펴보게 될 “편집증”과 “분열증”의 극이다.
아무튼 “코드와 공리계라는 개념들 자체는 그램분자적 집합들에 대해서만 타당”하며, “고유하게 분자적인 사슬에서”
사슬은 “코드들을 해체하는 것 이외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AO 391-2)
이로부터 우리는 그램분자적 층위에서 벗어나 분자적 층위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함을 예견할 수 있다.
* * *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서 역사를 회고적으로 살펴보았다.
결국은 자본주의의 부품이 될 옛 사회 기계의 요소들과 기능 방식 들을 살펴본 까닭은, 자본주의가 그것들을 어떻게
전유해서 이용하는지, 들뢰즈가 자본주의의 극한에서 발견한 분열증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나아가 분열증을 기초로
구성한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은 어떤 이유에서 착상되었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한 예비 단계로서였다.
이어지는 2장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생각하는 무의식 개념을 살펴볼 것이다.
들뢰즈의 무의식 이론은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이 아니라 많은 부분 맑스에 기대고 있다.
우리의 견해로는, 들뢰즈가 무의식 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와 거기서 발견한 분열증의 요소들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무의식 개념은 맑스적 연원만을 갖는 것은 아니며, 3장에서 살피게 될 베르그손, 스피노자, 니체라는
원천도 갖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당 대목에서 환기하 는 방식으로 정신분석의 무의식 개념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 핵심에 는 무의식을 심리적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점이 자리 하고 있다.
2장. 무의식의 존재론적 이해
들뢰즈는 정신분석이 발견한, 또는 재발견한, 무의식 개념을 전적으로 수정하고 갱신한다.
우리가 2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4절의 제목으로 삼기까지 한 “유물론적 정신의학” 의 기초로서의 무의식 개념이다.
들뢰즈는 인간을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맑스의 견해를 따르면서, 인간 정신에 고유한 무의식이라는 개념 을 거부
한다.
무의식은 인간 의식을 넘어서는 존재 전체이다.
이 시도는 당연히 휴머니즘(인간주의)을 넘어서는 것으로, 무의식마저도 통상적인 인간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는 작업이다.
무의식을 인간 정신의 한 영역으로 가둔 것은 정신분석이며, 정신분석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에 적합한 개인을 형성했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무의식은 오이디푸스 구조 또는 아빠-엄마-나라는 핵가족 삼각형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 나 들뢰즈는 무의식이 가족을 넘어 사회 전체 속에서, 나아가 우주 전체 속에서 작동한다고 본다.
무의식은 생산의 경과 그 자체이며, 우주의 운행 그 자체이다.
무의식 개념의 갱신은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도록 형성된 인간을 자연의 과정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혁명적
과제에 부응한다.
인간 해방을 도모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도 역시 인간주의의 일환으로 여겨질 수 있겠으나, 해방된 인간이 분열자
로 묘사된 다는 점에서 이 새로운 인간은 종래의 인간주의를 훨씬 넘어서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 면에서 들뢰즈의 무의식 이론 또는 비인간적성의 이론은 비인간주의라는 이름에 어울릴 수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아래에서 들뢰즈의 맑스 수용이 종래의 이해 방식과 다르기는 하지만, 텍스트(그리고 텍스트 편찬의 오류의 역사)
에 근거했을 때 오히려 타당성 을 지닌다는 점을 밝힐 것이다.
i) 무신론 비판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내 재적 존재론,
ii)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
iii)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이라는 주제가 거기에 해당한다.
또한 이런 면모가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명시적으로 주장되는지 살필 것이며, 그와 더불어 성욕과 생산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점이 지니는 불합리함을 함께 보일 것이다.
이 작업은 “생산의 논리”라고도 불릴 수 있을 들뢰즈의 작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틀을 그려 보일 수 있을 것 으로 기대
된다.
들뢰즈는 무의식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초반부에 작가 아르토 (Antonin Artaud)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언급한다.
“그래̇ ̇,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 ̇ ̇ ̇ ̇ ̇ ̇ ̇ ̇ ̇ ̇ ̇ ̇ ̇ ̇ ̇. “나, 앙토냉 아르토, 나는 내 아들이고 내 아버지고 내 어머니고 또 나다.”[Artaud 2004: 1152]”(AO 21)
또한 도곤 족 신화 속의 등장인물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한다.
“나는 아들이요 또한 내 어머니의 형제이며, 내 누이의 남편이요, 나 자신의 아버지 이다. […]
그렇다, 나는 내 어머니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AO 186)
이와 같은 발언은 그저 광인의 목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왜냐하면 나인 동시에 내 아버지나 어머니이자 내 아들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아르토의 이 선언은 분열자의 입을 빌린 우주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우주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우주를 말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본래 의미의 분열자”야말로 극복된 인간, 신인류이다.
“분열자는 삶과의 뭔지 모를 어떤 접촉을 상실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의 고동치는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현실계의
생산과 일체를 이루는 강렬한 지점에 있다.
이것은 라이히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한다. “
분열증의 특성을 이루는 것은 이 생명 감 넘치는 요소의 경험이다, … 생명의 느낌에 관해 본다면, 신경증 및 변태 환자와
분열자의 관계는, 치사한 소매상인과 위대한 탐험가의 관계와 같다.””(AO 104)
1. 고아 및 자기-생산(auto-production)으로서의 무의 식
들뢰즈가 파악하기에 무의식은 고아(孤兒)이며 자기-생산이다.
고아 또는 자기-생산으로서의 무의식과 관련해서 들뢰즈가 단언하고 있는 대 표적인 두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14)
i) “생산의 차원에서는 […] 무의식의 종합들의 사용은 무의식의 자기-생산을 돕는데, 이것은 고아-무의식[…]이다.”(AO 120)
ii) “고아적인 순환 운동 속에서, 즉 무의식이 항상 주체로 머무는 운명의 순환 속에 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은 항상
무의식이다.”(AO 345)
여기서 무의식은 단적으로 ‘자기-생산’ 및 ‘고아’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생산’의 차원에서 그렇다고 이야기된다.
생산의 차원이란 ‘우주의 운행’ 또는 ‘존재의 생성’ 차원을 가리킨다.
이는 무의식을 심리적 인간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본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 점은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으나, 지금 까지 이 점에 주목한 연구자는 거의 없다.
실은 이런 점 때문에 안티 오이디푸스는 아직까지도 그 전모를 드러내지 못한 채, 부분적으로만 이해되며 활용되어 왔던
것이리라.
우리는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에서 관련된 주요 대목을 찾아, 우리의 해석의 타당성을 입증할 것이다.
왜냐하 면 이토록 집요하고도 잦은 언급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주목은 기이할 정도로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전반적으로
14) 우리는 유사한 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환으로서의 무의식의 자기생산”(AO 40), “무의식은 고아”(AO 57),
“무의식의 자기-생산”(AO 64), “고아인 채 로 있는 무의식”(AO 93), “고아인 무의식의 저 지역들, 바로 “모든 법의 너머”,
거 기서는 오이디푸스의 문제가 제기될 수조차 없다”(AO 97),
“고아이자 생산자인 무의식에 대한 기막힌 긍정”(AO 356) 등.
무의식과 욕망을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그 원인이리라.
무의식의 탐구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고 평가되는 프로이트는 무의 식을 어디까지나 ‘마음(정신)’의 영역 안에서 이해했다. 그는 정신분석 입문 강의(1916/7)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적 과정들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
정신분석은 의식과 정신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정신을 감정, 사고, 의지와 같은 과정으로 정의하며 무의식적인 사고나 무의식적인 의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을 설정함으 로써 이 세상과 학문의 세계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방향이 확립되었다.”
(프로이트 2003a: 26-7)
프로이트는 정신적 과정들을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의식적인 것이 정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요컨대, 정신 이라는 전체집합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라는 두 부분집합으 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프로이트와 갈라지는 지점은, 무의식을 정신 내에서의 의식의 여집합으로 보지 않고 존재 세계 내에서의 의식의 여집합으로 본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탐구의 전형으로서 꿈의 작업을 드는데, 꿈이 갖는 두 가지 특성, 그러니까 꿈 자체는 주 로 시각적인
형태로 꾸며진다는 특성과 꿈의 내용을 남에게 전달할 때는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특성은 무의식을 이미
제한된 틀에 가두는 효과를 낳는다.
“왜 꿈으로 되돌아가는가? 왜 꿈을 욕망과 무의 식의 왕도로 삼는가?”(AO 377)
여기서 ‘꿈’은 결국 주관적 재현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무의식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자연으로서의 물질, 동물로서의 몸, 마음 안에서 의식을 벗어나는
영역 등을 모두 포함한다.
“사실 무의식은 물리학[=자연학]에 속한 다.”(AO 336)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무의식을 ‘고아’ 및 ‘자기-생산’ 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무의식이 ‘고아’라는 말과 ‘자기-생산’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다.
그렇 다면 ‘자기-생산’이란 무슨 뜻인가?
자기가 자기를 생산한다는 이 역설 적인, 아니 차라리 모순되는 표현은, 실존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할 때, 그 어떤 것은
선행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는 단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그 본질 또는 본성에 있어 실존하고 있고 또한 실존할 수밖에 없다면, 그 어떤 것은 자기 원인 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전체로서의 우주이다.
전체로서의 우주, 전체로서의 존재, 그것 오직 그것만은 자연 발생(l'inengendré)이요 독생자(獨生子)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태초에 우주가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내재적 존재론 의 첫째 원리일 수밖에 없다.15)
우주에 관한 한 주체와 대상의 구별은 없으며,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은 자명하다.
주객 관계를 넘어서는 것은 인식론적 표상의 관점을 넘어선다는 뜻이며, 성과 생산에 대한 인간주의 적 재현(부모에 의한
생산)을 넘어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아무튼 들뢰즈가 생산으로서의 무의식을 ‘고아’ 내지 ‘자기-생산’ 같은 말로 표현할 때 그것은 우주 전체와 관련해서가
아니라면 이해할 도리가 없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동의 모터(原動者)로서의 최초의 원인인 신에까지 소급해 가지 않으면 안 될
텐 데, 이는 그 자체로 초월성의 도입이며 ‘자연주의 내지 유물론’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성̇ ̇ ̇이,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해 자연의 현존재로서, 자연이 인간 에 대해 인간의 현존재로서, 실천적
감각적으로 관조될 수 있게 됨으로써, 어떤 낯̇ 선̇ 존재, 자연과 인간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자연과
인간의 비존
15) ‘자기-생산’이라는 말은 스피노자의 ‘자기 원인(causa sui)’과 같은 뜻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윤리학1부 정의1에서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가 이해하는 자기 원인이란, 그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고 있는 것, 즉 그 본성 이 실존하지 않는다고는 착상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실체, 신, 자연을 자기 원인에 의해 실존하는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재성에 대한 고백을 내포하는 물음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Marx M 274; 546)
인간적 성(아빠-엄마-나) 모델, 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따르면, 생 산물로서의 나는 항상 생산자로서의 부모를 필요로
하되, 이 관계는 최 초의 시점으로까지 소급된다.
물론 이는 필연적으로 신을 불러들이게 된 다.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음 구절을 보자.
“우리가 욕망을 오이디푸스와 관련시킬 때, 우리는 할 수 없이 욕망의 생산적 성격 을 무시하는 것이며, […]
우리는 욕망을 독립적 실존들, 즉 생식자인 아버지, 어머니[…]와 관련시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문제는 신의 문제와 같다.
그것은 추상의 산물로서, 인간과 자연의 연줄, 인간과 세계의 연줄이 끊겼다고 상정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과 인간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인간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
공통 외연성, 즉 인간과 자연의 외연이 서로 같다는 것은 […]
무의식이 늘 주체로 있으면 서 스스로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순환 운동을 한다는 뜻이다.
무의식은 한 몸에 서 다른 몸으로, 즉 네 아버지로, 네 아버지의 아버지로… 전진하는 (또는 퇴행하는) 생식의 길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조직화된 몸은 생식을 통한 재생산의 대상이다.
그것은 재생산의 주체가 아니다.
재생산의 유일한 주체는 생산의 순환 형식을 고수하 는 무의식 자신이다.
성욕은 생식에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리려 몸의 생식이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성욕에 봉사한다. […]
무의식은 언제나 고아였다.
말하자 면, 무의식은 자연과 인간, 세계와 인간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자연 발생했다.
이제 아버지의 문제, 신의 문제는 불가능한 것, 무관심한 것이 되었다.
그런 존재를 긍정 하건 부정하건, 살리건 죽이건, 그것은 같은 것으로 돌아온다.
즉, 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유일하고 똑같은 오해로.”(AO 127-8)16)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심리적이고 인간주의적인 그 어떤 주장도 찾을 수
16) 유사한 내용의 다음 문장도 참고. “그는 더 이상 이러한 매개, 즉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경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의식의 자기-생산 지역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에서는 무의식은 고아인 동시에 무신론자이며, 직접적으로 고아이고 직접적으로 무신론자이다.”(AO 68)
여기서도 우리는 뒤에서 보게 될 맑스의 논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없으며, 다만 무의식의 내재적 존재론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 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와 신의 불가분성을 본다.
신이 초빙되는 것은 바로 인간적 성을 모델로 해서 생산을 착상할 때이며, 오이디푸스가 그 전 형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보기에 이는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단지 잘못 된 착상의 차원을 넘어서 초월성을 도입하는 해로운 차원
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순환’ 개념이 등장한다.
즉 스스로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 하는 순환 운동을 하는 무의식, 생산의 순환 형식을 고수하는 무의식 자 신이 우주
운행 또는 존재 생성의 주체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늘 주체로 있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순환 운동을 한 다. […]
재생산의 유일한 주체는 생산의 순환 형식을 고수하는 무의식 자신이다.”(AO 128)
그런데 왜 순환(cycle)인가? 최초 원인으로의 소급은 왜 안 되는가?
“오직 순환의 관점만이 정언적이고 절대적̇ ̇ ̇ ̇ ̇ ̇ ̇ ̇이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재생산의 주체 인 생산에, 즉 무의식의 자기-생산의 과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
물론 성욕이 생식에 봉사하는 것은 아니고, 전진적 또는 퇴행적 생식이 순환 운동으로서의 성욕 에 봉사한다.
이 순환 운동을 통해서 무의식은 언제나 “주체”로 머물러 있으면서 자 신을 재생산한다.”(AO 327-8)
말하자면 순환의 관점이 아니고서는 초월성을 도입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생산, 순환 운동이 정언적이고 절대적인 것
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3장에서 베르그손의 ‘지속’이 하나의 ‘실체’로서 자기 자신과의 차이 속에서 존속한다는 점을, 그리고 잠재성으로
서의 지속은 그 자신이 주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속은 그 자신 이 주체이자 대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자기-생산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다는 점에서 순환
운동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내재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달리 표현하기도 했다.
“하나의 생산만이, 실재[=현실계]의 생산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이 동일성을 두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 두 방식은 순환으로서의 무의식 의 자기-생산을 구성한다.”(AO 40)
여기서 하나의 생산, 현실계의 생산만이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초월 세계의 틈입을 막기 위함이다.
사실 현실(réalité)을 이중화하게 되면, 즉 존 재의 일의성을 포기하게 되면, 거기에는 항상 이 현실 너머에 있는 다른 현실이 개입하게 된다(AO 33).
들뢰즈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현실로 보자는 철저한 내재성의 원리를 지키려 하는 것이다.
“심리적 현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
맑스의 말처럼, 결핍은 없으며, 다만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로서의 겪음(passion)이 있다.”(AO 34)
심리적 현실이라는 특수한 실존 형식이 없으며, 단 하나의 현실만이 있다는 점에 대한 단언은 책의 출간 후에 가진 인터뷰의 다음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실계의 일의성(univocité du reel), 일종 의 무의식의 스피노자주의였다.”(PP 198)
우리는 해당 구절의 더 정확한 의미를 4장 C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고아 및 자기-생산으로서의 무의식이 지니는 함의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1) 우주나 존재 전체는 별도의 시작 내지 기원(archē)이 없으며 우주 발생의 초월적 원인 (가령 신)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
2) 이럴 경우 우주 자신은 ‘순 환’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점, 따라서
3) 내재적 존재론만이 우주에 대한 적합한 해석이라는 점, 끝으로
4) 자연과 인간은 공통의 외연을 갖 는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넷째 함의에 대해서는 6절에서 자세히 서 술하게 될 것이다.
2. 들뢰즈의 맑스 수용에 있어 몇 가지 문제
흥미롭게도 고아 및 자기-생산으로서의 무의식, 그리고 뒤에서 언급 될 순환으로서의 무의식 개념은 맑스에서 연원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기에 앞서 들뢰즈의 맑스 수용이 내포하는 몇 가지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우리는 서론에서 들뢰즈의 맑스 수용이 ‘자본주의’ 사회 및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해명에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분열증이 우리의 병, 우리 시대의 병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 저 현대의 삶이 광기를 생기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어
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삶의 양식이 아니라 생산의 경과이다.”(AO 42)
말하자면, 안티 오이 디푸스가 작동하는 시간과 지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이며, 이에 대한 탐구의 조력자로서 맑스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자신이 자본을 읽자(1965)에서 알튀 세르 및 다른 동료들과 내세운, 맑스에게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인식론적 절단(la coupure epistémologique)”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자신이 성급하게 “절단̇ ̇이라는 형이상학”을 표현했다고 고백한다.17)
알튀세르에 따르면 「테제」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절단들이 나타나며 이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이 갈라지는 중요한
이정표이다.
“맑스의 새로운 문제틀이 처음으로, 그러나 종종 아직 부분적으로 부정적이며 대단히 논쟁적이고 비판적인 형식 아래서
출현하는 1845년 절단의 텍스트들, 즉 「포이 어바흐 테제」와 독일 이데올로기를 가리키기 위해 절단의 저작들̇ ̇ ̇ ̇ ̇ ̇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나는 제안한다.”(Althusser 1965: 26)
17) J. Rancière, “Mode d’emploi pour une réédition de « Lire le Capital »”, in Les temps modernes , n. 328, novembre 1973,
p. 790. 이에 관해 Bellini(2007: 1-2) 참조. 또한 동일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글로 Granel(1969) 및 KIM (2013) 참조.
하지만 이와 더불어 “언젠가는 세부로 파고 들어가 이 텍스트에 대해 한 ̇ 글자 한 글자̇ ̇ ̇ ̇ ̇ 설명이 필요하리라”(158-9)고
평가한 초고에 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941)에서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1844), 「유대인 문제」(1844), 「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1844) 등의 저술들이 “헤겔로부터̇ ̇ ̇ ̇ ̇ 점 점
멀어져 간̇ ̇ ̇ ̇”(27) 데 반해 오히려 “헤겔로의 급작스럽고 전적으로 궁극 적인 회귀”(28)를 보인다고 말하면서 “거의 마지막 밤의 텍스트가 역설적이게도 이론적으로 말해 새로 태어날 날의 낮에서 가장 멀리 있는 텍스트”(28)라고 평하고 있다.
이런 알튀세르의 평가는 청년 맑스와 완숙기 맑스 사이의 ‘절단’이라는 문제 못지않게 절단기 직전에 맑스가 보인 이 이상
스런 행보에 대해서도 충분한 해명이 필요함을 함축한다.
그러나 절 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알튀세르 자신도 절단의 시점을 계속 뒤로 미루다가 마침내는 맑스 자신이 끝끝내 이데
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리하여 맑스주의의 위기가 맑스 자신에서 유래한다는 다소 당황스런 주 장으로까지
가게 된다(문성원 1999: 85).
이런 귀결은 랑시에르의 고백처럼 ‘절단이라는 형이상학’에 매달린 결과 때문으로 보인다.
절단의 문제는 「테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니는데, 왜냐하 면 알튀세르는 「테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양가성을 언급하고 있기 때 문이다.
“단지 몇 개의 문장들일 뿐인 「포이어바흐 테제」는 이 절단의 맨 앞쪽 경계를, 즉 옛 의식과 옛 언어활동 속에서, 따라서
필연적으로 불균형적이며 양가적인 개념들̇ ̇ ̇ ̇ ̇ ̇ ̇ ̇ ̇ ̇ ̇ ̇ ̇ ̇ ̇ ̇ ̇ ̇ 과 정식들 속에서, 이미 새로운 이론적 의식이 뚫고 들어간
지점을 표시하고 있 다.”(Althusser 1965: 25)
요컨대 그것은 “이행-절단”(255)의 작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단의 저작들̇ ̇ ̇ ̇ ̇ ̇은 맑스의 사고의 이론적 정식에 있어 그것들의 장소 자체에 따라 해석의 미묘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포이어바흐 테제」의 짧은 섬광들은 거기에 접근하는 모든 철학자들에게 빛을 내던지지만, 섬광이란 환하게 하기보다는
눈부시게 하는 것이며, 빛의 섬광이 잘라내는 밤의 공간에 자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은 없다는 점을 각 철학자는
알고 있다.
거짓으로 투명한 이 열한 개 테제의 수수께 끼를 언젠가는 보이게 만들어야 하리라.”(28)
훗날 알튀세르는 「테제」와 관련한 자신의 해석을 산발적으로 개진하게 되는데, 그 해석들은 근본적으로는 맑스를 위하여(1965)에 나타난 생 각을 반복하거나 심화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런 주장은 특히 청년기와 성숙기의 맑스를 연속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데, 즉 박사논문에서 초고를 거쳐
독일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글들을, 나아가 런던 시기 정치 경제학 비판 작업들과 관련한 글들을 상호 연관
아래서 파악하 는데 장애가 되었다.
여기서 다시 짚어봐야 하는 견해는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제라르 그라넬(Gerard Granel)이다.18) 들뢰즈는 그 이름을
슬며시 각주에서 언급 하며 지나간다(AO 10).
하지만 그라넬의 맑스 해석은 들뢰즈의 무의식 이론 또는 존재론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었고, 우리의 해석의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그라넬을 통한 맑스 해석이 들뢰즈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 동안 별다른 주목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 기에는 알튀세르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청년 맑스의 존재론을 일관되게 복원하는 그라넬의 해석은
들뢰즈에게 중요한 영감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라넬은 초고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청년 맑스의 사고
18) 우리의 관심과 관련해서 그라넬에 대한 몇몇 연구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Bellini(2007)와 Mejat(2012)가 있다. Bellini는 “Sortir de la Philosophie. L’Enigme du 'matérialsime ontologique' du jeune Marx”에서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2) 때문에 그라넬을 참조할 필요성을 말한다.
한편 Mejat는 욕망에 대한 반-관념론적 이론을 이해하고 맑스와 들뢰즈의 정치적 기획의 수렴 가능성을 보기 위해 그라넬을 활용하려 한다.
이 와중에 이들 둘은 “논리적 무신론”과 “생산으로서의 존재”라는 그라넬의 논제를 잘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둘은 현상학과 인간주의라는 틀에 여전히 머물고 있으며, 들뢰즈 및 그라넬이 도달한 지점에 미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를 연속성의 견지에서 설득력 있게 해석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초고의 관계라는 물음은 열린 채로 남아 있다. […]
우리가 여기서 다시 다루자고 제안하는 것은 바로 그 점으로, 우리는 그 두 텍스트 사이에 는 하나의 연속성이, 그것도
본질적 연속성이 실존한다는 점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 한다.”(Granel 1969: 268)
앞에서도 보았듯이, 알튀세르는 맑스의 초고와 독일 이데올로기 사이에 ‘절단’ 내지 ‘단절’을 설정했고, 그 증명은 랑시에르에게 넘겼는데, 정작 랑시에르는 초고를 자본 또는 요강과 직접 비교함으로써, 증명은 생략된 채로 남게 되었다.
그라넬이 보기에 이런 모호함 내지 이상 함으로 인해, 자본을 읽자에서 랑시에르의 읽기(lecture)는 또한 읽지 -않기(non-
lecture)로 전락하고 말았다(269-70).
게다가 그라넬은 초고와의 연속성을 증명하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절들을 환기하는데, 그 가 제시한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i) “[마치 자연과 역사가] 두 가지 별개의 “사물들”이고, 또한 인간은 언제나 그 앞에 하나의 역사적 자연과 하나의 자연적
역사를 가지기라도 한 양 [...]”(Marx DI 9; 37)
ii)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 의 국한된 처신이 인간 상호간의 국한
된 처신을 규정하고, 또 인간 상호간의 국한 된 처신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국한된 관계를 규정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DI 17; 31)
ii) “이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역사에서 배제되고, 이를 통해 자연과 역사의 대립이 출산된다.”(DI 31; 39)
그라넬이 인용하는 구절들은 옛 판본(MEW)에서 온 것이어서 최신판 (MEGA II-2)과는 출처의 선후관계가 다르지만 오히려 최신판의 순서를따르는 선견지명을 보이면서 맑스의 사고 순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특히 둘째 인용은 맑스의 원 텍스트의 여백에 쓴 것임이 밝혀져 아마 맑스 자신이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였으리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그라넬의 해석의 식견이 돋보이는 징표이다.
아무튼 그라넬은 “초고에서 성취된 존재론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미 획득된 어떤 것으로 남아 있다”(296)고 단정한다. 그리고 마침 1973년에 랑시에르는 자신의 작업을 철회하고 알튀세르와 결별하게 된다.
나아가 그라넬이 다루고 있는 쟁점은 알튀세르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들뢰즈로부터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 ‘만남의 유물론’이라는 관점 을 채용한 것과도 관련이 있기에 더 의미심장하다.
그라넬에게서는 근대 형이상학의 전개 속에서 맑스의 위치, 청년 맑스의 “존재론적 유물론”의 고유한 특징, 이 이중의 운동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Bellini 2007: 3).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 구성에서 그라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뒤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들뢰즈와 알튀세르의 관계를 조금 더 미묘하게 만드는 지점은 ‘주체’ 와 ‘실천’에 관한 알튀세르의 언급이다.
사실 인간주의의 맥락에서 파악 됨으로써 가장 문제가 되는 개념의 하나가 바로 ‘실천’이기도 하다. ‘언행 일치(言行一致)’, ‘지행합일(知行合一)’, ‘작심삼일(作心三日)’ 같은 말을 통해 말(언어), 앎(인식), 뜻(의지)과 대립되는 통념적 실천 이해는,
사실 인간주의적 이해의 전형이다. 말하자면 주체와 목적을 설정하는 실천 개 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알튀세르는 모두 이런 실천 개념 을 전복한다.
알튀세르는 「철학의 변형 — 그라나다 강연」(1976)에서 실 천을 “주체도 목적도 없는 경과(procès sans sujet ni Fin)”
(Althusser 1994a: 151)라고 표현하며 나중에 「철학과 맑스주의 -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 담」(1984-87)에서도 이를 되풀이
하고 부연하며 더 자세히 서술한다.
“유물론적 철학들은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긍정한다.
그리고 로고스에 전적으 로 낯선 실천은 진리 (Verité)가 아니며, 말하기(le dire)나 보기(le voir)로 환원되지 않고, 이것들
속에서 완성되지도 않는다.
실천은 자신의 고유한 실존 조건들에 늘 종 속되어 있는 변형 과정(un processus de transformation)이며, 진리 를 생산하는 것이 아 니라, 여러̇ ̇ “진실들”(des “vérités”) 즉 부분적̇ ̇ ̇ 진실(de la vérité)을, 말하자면 자신의 고 유한 실존 조건들의
마당 내부에서 결과물들(résultats) 또는 인식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실천이 담당자들(agents)을 갖고 있다 해도, 실천은 그 목표, 그 기획의 초월론 적 또는 존재론적 기원으로서의
주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실천은 그 경과 (procès)의 진리로서의 목적 (Fin)도 갖고 있지 않다.
실천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경과 이다(주체가 무역사적 요소라고 이해된다면).”(Althusser 1994a: 60-1)
이 진술에 대한 주석은 일단 접어두고, 여기서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 이미 개진된 사실의 되풀이로 보인다.
물론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은 것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알튀세르(맑스를 위하여 및 자본을
읽자)는 중요한 참조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가 1970년대 변화를 시도하면서 들뢰즈를 적극 수용했다는 점이다.19)
이는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 노선이 들뢰즈의 비인간주의에 의해 강화되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양자의 반인간주의/비인간주의가 모두 맑스를 참조하며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귀결과 관련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한편 실천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맑스의 전 시대를 통해 ‘비판’ 개념을 탐구한 좋은 글에서 곽노완은 맑스를 ‘실천주의’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즉, 실천 개념을 중심에 놓고 맑스를 해석하는 것은 맑스가 보여 준 혁신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아직 맑스는 휴머니즘의 지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현실과 인간의 본질을 실 천의 산물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고전
철학의 ‘순수한 실체로서의 주체’―‘순수한 실
19) 초아트(Choat 2010)는 탈-구조주의를 통과한 맑스. 료타르, 데리다, 푸코, 들뢰 즈라는 책의 1, 5, 6장에서 들뢰즈와
알튀세르의 관계 문제를 잘 논의한다. 하지 만 우리가 평가하기에, 그는 들뢰즈에 대한 알튀세르의 영향을 상세히 다루는
반 면 반대 방향의 영향은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체로서의 객체’라는 이분법의 ‘이론틀’을 실천 중심의 틀로 전환시켰음에도 불구하 고, 아직 근대철학적 ‘이론틀’의 지반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근대철학을 완성하는 데 머문다.
단지 달라진 것은 ‘실천’을 중심으로 주체-객체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다.”(곽노완 2006: 217-8)20) 하지만 곽노완은
이런 비판을 더 밀고 나가, 후기 작업에 해당하는 자 본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 경제학 비판’ 작업에 이르기까지 ‘이론틀’의
혁명적 전환은 일관되게 유지되지도 않으며, 여전히 소박한 경험론적 잔 재를 보이고 있고, 심지어 방법론적 개인주의나
원자론적 소재적 유물론 의 잔재까지도 드러난다고 지적하기에 이르는데(232), 사실 이 정도까지 가게 되면 곽노완이
요청하는 맑스의 ‘한계와 이중성’에 대한 새로운 해 명만으로 과연 그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알튀세 르가 처한 문제(‘절단’)와 유사한 문제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에, 곽노완의 이런 비판은 실천에 대한 통념적 이해 속에서만 타당하며, 또한 인간이 강조된다고 해서 이를
‘휴머니즘’(인간주의)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르다.
맑스의 혁신은 차라리 실천 개념의 혁신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와 연관되는 인간, 자연, 역사, 초월성 등에 대한 비판적 혁신이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속에서 우리는 초기에 서 후기에 이르는 맑스 작업이 갖는 일관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3. 맑스적 연원 1: 고아 및 자기 생산으로서의 무의식
우리는 앞에서 고아 및 자기-생산으로서의 무의식, 그리고 뒤에서 언 급될 순환으로서의 무의식 개념은 맑스에서 연원하며 이를 잘 밝힌 것이
20) 물론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적절하다.
“이전의 ‘철학의 실천’과 구분되는 ‘실천의 철학’(「테제」)은 전통철학의 본질주의적인 자연주의를 일거에 넘어선다.
‘현실 또 는 대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도 이제 실천의 산물로 간주된다. […]
자본주의 에서 인간의 본질은 비판의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다.”(곽노완 2006: 217)
그라넬이라고 말했다.
그라넬의 출발점은 남다르게도 셋째 초고의 무신론 비판 부분이다.
그는 맑스의 무신론 비판이 중요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Granel 1969: 271-2).
1) 우선 무신론 비판이라는 논점은 초고속의 ‘철학’을 인정하는 어느 주석가에게도 주목 받지 못했으며,
2) 이런 생략은 “1844년 맑스의 사고가 놓인 존재론적 수준̇ ̇(le niveau ontologique)” 을, 결과적으로 “이 사고의 뼈대를
이루는 개념들의 해석 원리̇ ̇ ̇ ̇”를 못 보 게 했으며,
3) “무신론 비판 및 그 적극적 표현인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 ̇ 통일성(l’unité essentielle de l’homme et de la nature)”은
이른바 “절단”의 첫 텍스트(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시 부정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텍스트 의 출발점과 터전(terrain)
자체를 구성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아가 맑스의 무신론 문제는 그 안에서 “사회주의”의 출발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Marx M 274; 546)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의의를 벨리 니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존재-신학의 틀 안에서 내재성을 설명하려는 목표를 지닌 모든 체계는 초월성 밖 으로 나오지 못하는 채로 머물며, 형이
상학적 이상과 독립해서 내재성의 개념을 파 악하지 못하는 채로 머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맑스는 그의 특유한 무신론을 통해서 다른 내재성을 추구하려 했으며,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에 기원 을 부여하는 데서 성립한다.”(Bellini 2007: 5)
우선 셋째 초고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부터 보도록 하자.
거기에는 그라넬도 주목하고 있는 무신론에 대한 대화가 나타난다.
맑스의 무신론은 신과 싸우는 데 있지 않고 신을 “2차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데 있는데, 이는 “인간과 자연의 창조자” 내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매개”로 서 신을 표상하는 것에 맞서는 일이며, 인간과 자연을 ‘실존하지 않는 것 내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립하는 것을 극복하는 일과 관련된다 (Granel 1969: 276-7).
인간과 자연의 “창조”라는 물음과 관련해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창조̇ ̇는 민중의 의식에서 억누르기 매우 어려운 표상이다.
자연과 인간이 자기 자 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Das Durchsichselbstsein der Nature und d[es] Menschen)은 민중의
의식에게는 파악되기 어려운̇ ̇ ̇ ̇ ̇ ̇ ̇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 삶의 모든 명백함̇ ̇ ̇ 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Marx M 273; 545)
이런 어려움이 생겨나는 원인은, 이 점이 일상인의 통념적 사고로는 포착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존재하게 한 작용인(가령 어미, 신 따위)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곧이어 말한다.
“자연 발생(generatio aequivoca)은 창조론에 대한 유일한 실천적 반박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 발생이란 무슨 뜻이며, 왜 그것은 창조론에 대한 유일한 실천적 반 박인가?
더욱이, 자연 발생(generatio aequivoca)이라는 라틴어 표현은 독 일 이데올로기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포이어바흐는 특히 자연과학의 관조에 대해 이야기하며, 오직 물리학자나 화학자의 눈앞에서나 명백해지는 비밀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산업 및 상업이 없이 도대체 자연과학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순수” 자연과학조차도 상업과 산업을 통해, 즉 인간의 감각적 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재료뿐 아니라 실로 그
목적까 지도 획득한다.
그리하여 이 활동, 이 부단한 감각적 노동과 창조, 이 생산이야말로 지금 실존하고 있는 그런 감각적 세계 전체의 기초
이므로, 이것이 단일년만이라 도 중단된다면, 포이어바흐는 자연 세계의 엄청난 변화를 발견하게 될 뿐 아니라, 아울러
인간 세계 전체와 그의 고유한 관조 능력, 실로 그 자신의 실존마저도 당장 사라지고 말 것이다.
확실히 이 경우에도 외적 자연의 우선성(Priorität)은 남아 있으 며, 물론 이 모든 것은 근원적인, 자연 발생̇ ̇ ̇ ̇(generatio aequivoca)에 의해 탄생한 인간 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별(Unterscheidung)은 인간을 자연과 구별 되는 것으로 고찰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인간 역사에 선행하는 이 자 연은 포이어바흐가 살고 있는 자연이 아니며, 또한 새로 생긴 오스트레일리아의 몇
몇 산호섬들을 제외하면 오늘날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따라서 포이 어바흐에 대해서도 실존하지 않는
그러한 자연이다.”(Marx DI 9-10; 44)
도대체 이 두 텍스트에서 “자연 발생”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의 창조이다.
‘자연 발생’은 결국 스피노자의 ‘자기 원인’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역시 내재적 존재론을 정초하기 위해 그 개념을 도입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뒤에서 보겠지만 맑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맑스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은 두 개의 구분되는 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은 즉각 자연 존재̇ ̇ ̇ ̇(Der Mensch ist unmittelbar Naturwesen)”(Marx M 296; 578)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금 본 독일 이데 올로기에서는 자연과 인간과 역사의 동일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 맥락에서 관건은 물질적 존재 전체로서의 우주 내지 세계 및 그것의 창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창조라는 문제에 직면해서, 맑스는 우리의 통념적인 사고방식, 즉 성과 생산에 관한 의인적 재현을 일단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부모가 있는 성과 생산 모델에 익숙해 있다(“너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태어났고, 이처럼 네
안에서 두 인간의 성교가 […] 인간을 생산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계속해서 묻게 된다.
“누가 내 아버지를 낳았고 누가 내 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낳았지?” 하지만 이런 물음은 “끝없는 진 행” 또는 무한퇴행으로
이어지는 운동만을 만날 뿐이다.
사실상 이런식 의 물음은 우주의 창조자, 최초의 원인, 부동의 모터(原動者)로서의 신을 요청하게 된다.
맑스는 그런 물음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
너는 저 진행 속에서 감각적으로 관조 가능한 원운동̇ ̇ ̇ 역시도 꼭 붙잡아야만 하는데, 이 운동에 따르면 인간은 출산 속
에서 자기 자신을 반복하며, 그래서 인간̇ ̇은 늘 주체로 남아 있다.”(Marx M 273; 545)
하지만 단번에 원운 동으로 도약하기 위해 우리는 무한퇴행을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저 선형 (線形) 운동에서 어떻게 단절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왜 인간은 항상 주 체로 남아 있는가?
첫째 물음에 대해 맑스는 “누가 최초의 인간과 자연 일반을 낳았는 가?”라는 물음은 “추상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만약 네가 자연과 인간의 창조에 대해 묻는다면, 그로써 너는 인간과 자연을 추상 하고 있다.
너는 자연과 인간을 존재하지 않는 것̇ ̇ ̇ ̇ ̇ ̇ ̇( nichtseiend )으로 정립해 놓고서, 내가 그것들을 존재하는 것̇ ̇ ̇ ̇ ̇으로 증명
해 주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추상을 버려라. 그러면 또한 너는 너의 질문을 버리게 되리라.
그렇지 않고 너의 추상을 고수하려 한다면 수미일관하라.
그리고 네가 인간과 자연을 존재̇ ̇ 하지 않는 것̇ ̇ ̇ ̇ ̇으로 생각하면서 생각한다면, 또한 자연과 인간인 너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라.”(Marx M 274; 545)
자연 일반은 물론 질문자 자신, 자연의 일부인 질문자 자신도 이미 존재 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자연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추상 내지 무의미에 불과하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맑스의 답변은 원운동[=순환 운동]을 포착하라는 것이다.
그라넬도 암시하듯이(278-9), “인간 유(類)”를 구성하는 원운동은 “인간 개체들”을 구성하는 직선 운동과 완전히 양립 가능
하다.
이것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이 맑스가 “자 기 자신을 통한 탄생̇ ̇(sein Geburt durch sich selbst)”(Marx M 274; 546)이라 는 말을 한 까닭
이다.
하지만 이 원운동에서 왜 인간은 주체로 남아 있는가?
또한 “자연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das Durchsichselbstsein der Nature und d[es] Menschen)”(Marx
M 273; 545)이라는 표현에서 ‘자기 자신 을 통한 존재(das Durchsichselbstsein)’는 무슨 뜻인가?
우리가 보기에 이런 표현들(‘자기 자신을 통한 탄생’, ‘자기 자신을 통한 존재’)은 「테제3」 의 “자기 변화(Selbstveräderung)”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이 표현들 에서 “자기(Selbst)”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런 해석상의 난점 때문에 엥 엘스는 「테제3」의 “자기 변화”라는 말을 아예 삭제하기까지 했다.
서양 근대철학의 역사에 대해 면밀하게 고찰한 끝에 그라넬은 중요한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주체”로 남아 있으며, 존재의 의미는 현상들을 대상성̇ ̇ ̇으로 생산하기̇ ̇ ̇ ̇(la production des apparences à l’objectivité )인 채로, 즉 현상들을 자기 자신에 대한 주체 의 근원적 현전으로(à la présence originelle du sujet à soi-même) 생산하기인 채로 있으며, 이 조작을 통해 이번에는 주체가 “자신을 생산한다(se produit)”.”(Granel 1969: 294)
우리는 들뢰즈의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이 방금 언급한 맑스의 개념 들에 대한 번역이라고 본다.
즉, ‘자기 자신을 통한 탄생’, ‘자기 자신을 통한 존재’, ‘자기 변화’ 같은 개념들은 결국 들뢰즈가 말하는 무의식, 즉 자연
내지 우주의 ‘자기-생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그 자신이 ‘주체’인데, 이는 초월적 원인을 상정하지 않는다(‘무신 론’)는 점에서, 또는 자기 생산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충분 히 납득할 수 있는 사고이다.
단언컨대, 맑스가 말하는 ‘자기(Selbste)’란 우주 자체를 가리킨다.
그렇게 볼 때에만 맑스의 존재론은 정합적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맑스는 ‘인간’이 늘 ‘주체’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체로서의 인간과 주체로서의 무의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이 곧 무의식이라는 말인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살펴볼 것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주제와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내지 통일성’
이라는 주제인데, 이 두 주제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거니와 맑스와 들뢰즈 양자에서 중요하게 개진되고 있다.
미리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우리가 통 상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의 인간이 아니며, 오히려 분열 자로서의 인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들뢰즈가 사용하는 “주체” 개념의 두 의미를 구별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주체 개념을 완전히 구별되 는 두 의미로 쓴다.
첫째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을 말할 때 그 생산을 이 끄는 자로서의 주체이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우주 자신밖에는 없다.
맑스와 그라넬이 사용하는 “주체”의 용법이 대개 는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생산의 경과의 잔여물로서 생산의 한 순환이 완결될 때 탄생하는 “주체”가 있다.
이런 의미의 주체는 전통적인 “자 아” 개념을 해체하면서 가공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4장 C에서 개진될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바른 독해를 위해서는 이처 럼 들뢰즈가 사용하는 “주체” 개념이 상이한 두 가지 의미와 용법을 지닌
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4. 맑스적 연원 2: 유적 존재
들뢰즈에게 유(類)적 존재로서의 본연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분열자는 병원에 있는 환자가 아니라 자 연과 일체인 인간이요, 유적 존재이다. 분열자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 이전에, 이 구별이 설정한 모든 좌표들 이전에 자리해 있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으로 산다.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오로지 하나 속에서 다른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들을 연동하는 과정만이 있다.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類的) 삶(la vie générique) 전체로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AO 8)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한다.
1) 분열자에게 인간과 자연 의 현실적 구별은 없다. 또한 2) 분열자의 그런 삶은 유적 삶이라고 이야 기된다.
들뢰즈는 ‘유적 삶’ 내지 ‘유적 존재’라는 개념을 맑스에서 직접 채용했는데, 맑스 자신은 포이어바흐가 마련한 토대 위
에서 그 개념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용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에서 포이어바흐를 거쳐 맑스로 이어지는 그
개념의 계보 를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19세기 독일 철학의 맥락에서, 유(類)는 린네 식의 분류학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개념이다.
헤겔은 백과사전(1813, 1830(3판))에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인 “유(類, Gattung)”를 “구체̇ ̇ 적̇ 보편(das konkrete
Allgemeine)”이라고 정의한다(Hegel 1979: 328).
“유는 주체의 개별성과의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단순한 통일 속에 있으며, 그 주체의 구체적 실체가 바로 유이다.”(498)
따라서 인간이 유적 존재라는 말의 뜻은, 인간은 그의 주체적 개별성을 넘어서며, 자신 안에서 객관적 보편을 인정하고,
그리하여 개체임을 통해 인간은 동시에 ‘인간’의 대표 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포이어바흐에서, ‘유’라는 개념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기독 교의 본질(1841)에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에 대해 물으면서, 포이 어바흐는 좁은 의미의 의식은 동물에게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 밀한 의미의 의식은 인간에게만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유 및 본질에 관련된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의식은 그의 유̇, 그의 본질성̇ ̇ ̇이 대상으로 존재하는 곳(wo einem Wesen seine Gattung ,
seine Wesenheit Gegenstand ist)에만 있을 따름이다.
동물 은 분명 개체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한 느낌은 갖고 있다.
하지만 동물은 유로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동물은 앎̇( Wissen )이라는 말에서 이름을 얻게 된 의식( das
Bewußtsein; 알게 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의식이 있는 곳에는 학문(Wissenschaft)의 능력이 있다.
학문은 유의 의식̇ ̇ ̇ ̇( Bewußtsein der Gattungen )이다.
삶 속에서 우리는 개체로서 교섭하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유로서 교섭한다.
하지만 그 의 고유한 유, 그의 본질을 대상으로 삼는 존재만은, 자신의 본질적 본성에 따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물들 또는
존재들을 대상(Gegenstand)으로 만들 수 있다.
/ 따라 서 동물은 단순한 삶만을 갖지만, 인간은 이중의 삶을 갖는다.
동물에서 내적 삶은 외적 삶과 하나지만, 인간은 내적 삶과 외적 삶을 갖는다.
인간의 내적 삶은 그의 유, 그의 본질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이다. […]
인간은 대상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 ̇ ̇ ̇ ̇ ̇ ̇ ̇ ̇ ̇ ̇ ̇ 다̇. […]
한 주체가 본질적으로̇ ̇ ̇ ̇ ̇, 필연적으로̇ ̇ ̇ ̇ ̇ 관계하는 대상은 그 자신의 고유한̇ ̇ ̇, 하 지만 대상적인̇ ̇ ̇ ̇ 본질(das eigne ,
aber gegenständliche Wesen)과 다른 것이 아니 다.”(Feuerbach 1956: 35-9)
우선 포이어바흐에게 ‘유’는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앎(Wissen)’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의식( das Bewußtsein)’의 ‘대상 (Gegenstand)’이다.
여기서 포이어바흐가 ‘의식’이란 말을 지칭하면서 das Bewußtsein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의식이란 결국 ‘알게 된 것’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유적 존재는 자신이 아닌 존재들을 의식의 ‘대상’ 또는 더 정확히 하자면 ‘앎’과 ‘학문’의 ‘대상’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대상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용의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서 인간 주체가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대상’, 즉 인간적
대상은 그 자신의 “고유한( eigne ) 본질”이면서도 “대상적( gegenständliche ) 본질”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인간적 대상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면서도 그것이 ‘대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대상 자체를 인간이 생산
한다는 점에 의해서만 이해 가능하다.
많은 학자 들은 맑스가 포이어바흐를 단순화한다고 적절하게 지적해 왔다.
가령 「 테제1」에서 맑스는 포이어바흐가 “인간 활동 자체를 대상적̇ ̇ ̇ 활동이라고 파악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방금 보았듯이 맑스의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사실 대상적 존재가 생산에 의해 사고되었다는 점은 헤겔과 포이어바흐가 근대철학을 통해 이룬 유일하게 “진정한
이론적 혁명”(Marx M 317; 468)에 속한다.21)
그런데도 불구하고 맑스가 포이어바흐 를 이렇게 단순화한데는 그가 대상의 물질적 역사성을 알지 못했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도록 하겠다.
이 맥락에서 그라넬은 포이어바흐가 제시하는 호흡의 예를 독창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한다.
미래 철학의 원리들(1843)에서 포이어바흐 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호흡하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며, 마시기 위해 물이 필요하고, 보기 위해 빛이 필요하고, 먹기 위해 음식이 필요
하지만, 생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즉각적으로는
21) "적극적인 인간주의적 자연주의적 비판은 포이어바흐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포이어바흐의 저술들의 작용은 과묵하면 할수록 더욱 더 확실하며 심오하며 광 범위하고 지속적이다."(Marx M 317; 468)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
호흡하는 존재로서 나는 공기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보는 존재로서 나는 빛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지만, 생각하는
존재로서 나는 혼자서 고립된 채로 생각할 수 있다.
호흡하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와 연관되어 있으며, 자기 바깥에 그것을 통해 그 자신인 바일 수 있는 자신의 본질적 대상을 갖는다.
하지만 생각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과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대상이고,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본질을 가지며, 자기 자신을 통해 자신인 바로서 있다.”(Feuerbach 1950: §6)
그라넬이 보기에, 이 호흡의 사례에서 포이어바흐는 생리적 기능이 물리적 환경에 의존한다는 사소한 사실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포이 어바흐는 “하나의 본질적̇ ̇ ̇ 통일성(une unité essentielle )”을 세우려 하고 있다.
즉, “호흡하는 존재는 공기 없이는 사고 불가능하고̇ ̇ ̇ ̇ ̇ ̇ ̇, 보는 존재는 빛이 없이는 사고 불가능하다̇ ̇ ̇ ̇ ̇ ̇ ̇” 등의 사실을
정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호흡 과 공기의 불가분성 또는 봄과 빛의 불가분성, 이 불가분성은 존재(주체) 와 대상의 불가분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빛은 어떤 것이 보이기 위해 주어지는 열림(ouverture) 속에 있는, 사물들의 운동으로서 자신을 생산할
(γίγνεσθαι) 수도 있는 하나의 열림, 현실 속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이미(ἀει ὂν)의 양태 위에서의 열림이다. […]
봄(voir)은 실제로는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며̇ ̇ ̇ ̇, “구체적인 것에 의해 즉각 시작”하는데, 그렇지만 “봄”은 그 어떤 순간
에도 별도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말하자면 “생각하는 존재”를 위한 허구적인 “심리적”
사건과 같은 것이 아니다.”(Granel 1969: 298-9)
여기서 주목할 점은, 데카르트적 주체(“별도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의식”) 와 객체(그런 주체 바깥에 남아 있는)의 구분은
극복되며, 주체와 대상의 일치가 감각계(Sinnlichkeit)에 의해 정립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맑스도 초 고에서부터 유사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인간이 몸을 갖고 있고̇ ̇ ̇ ̇ ̇ ̇ 자연력들이 있고 살아 있고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 ̇ ̇ ̇ ̇ ̇ ̇ ̇ ̇ ̇ ̇ ̇을 자신의 존재의 대상으로, 자 신의 삶의 표현의 대상으로 가진다는 것 또는 인간은 오직 현실적 감각적 대상들에 서만 자신의 삶을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대상적, 자연적, 감각적이라는 것̇ ̇ ̇ ̇, 대상, 자연, 감각을 자기 바깥에 가진다는 것, 또는 자신이 제3자에 대해 대상, 자연,
감각이라는 것은 다 똑같은 말이다.”(Marx M 296; 578)
그런데 그라넬은 이 성취가 맑스 자신에 앞서 포이어바흐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와 인간의 근원적인 통일성은 “수동성”, “필요”, “감각계” 안에 있다. 그래서 그라넬은 계속해서 말한다.
“인간은 자신과 관련해서도, 사물들과 관련해서도, 어떤 “관계(rapport)” 속에 (그리 고 심지어 두 관계 속에도) 있지 않다. […] 만일 내가 호흡한다면, 나는 공기로부터 내가 호흡하는 그것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호흡 자체도 받아들인다.
후자는 식물 주 위에서 일어나는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단순한 교환도 아니고 개한테서 일어나는 헐떡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호흡한다. […]
내가 “공기”라 부르는 이 세계형식(forme-de-monde)의 이 부분, 그것은 가스의 혼합이 아니라 지상의-존재 (l'être-sur-terre)의 양상이다.”(Granel 299)
인간이 어떤 관계 속에, 심지어 두 관계 속에도, 있지 않다는 말은 동일성에 대한 지적이다.
호흡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공기와 분리되지 않는다.
호흡이란 나와 공기의 합체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유물론 자로서 그라넬은 호흡 자체의 발생이 ‘지상의-존재’, 즉 내재적 세계의 양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나)과 자연(공기)은 감각계에 있어 하나이다.
이로써 맑스의 포이어바흐 비판은 상당 부분 포이어바흐에 대한 단순 화에 기인한다는 점이 더 분명해진다.
이처럼 맑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 하는 많은 문헌도 있지만, 또한 맑스가 “진정한 이론적 혁명”이라고 포 이어바흐를
평가하는 또 다른 많은 문헌도 있다.
특히 맑스 자신이 1844년과 1845/6년 텍스트 모두에서 포이어바흐와 공유하는 동일한 비판적 논점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이어바흐와 맑스의 차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맑스의 전략적 서술은 여전 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포이어바흐는 감각계 내지 유적 존재의 역사성 을 모르고 있었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유명한 구절에서 맑스는 말한 다.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자인 한 역사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려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Marx
DI 11; 45)
하지만 이런 평가는 이미 초고에서부터도 등장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맑스는 거기에서 인간의 역사와 역사성을 부단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라넬도 강조하고 있듯이 초고와 독일 이데올로기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5. 비-인간적 성 또는 n개의 성
들뢰즈가 보기에 지금껏 우리가 ‘자기-생산’의 영역에 이르지 못한 것 은 생산에 대한 인간주의적 착상 때문이었다.
성과 성욕에 관한 인간주 의적 착상은 기본적으로 “부모가 있는 생산(une production parentale)”(AO 21)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주 내지 존재에 관한 한 생산(성, 성욕)은 부모가 없다.
아르토의 말처럼, “난 / 엄마-아빠 게 아냐”(AO 21, 57). 이 와 관련하여 들뢰즈가 참조하는 것이 다시 맑스이다.
들뢰즈는 프로이트 에 맑스를 대조시키는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맑스는 훨씬 더 신비한 것도 말한다. 즉, 참된 차이는 인간의 두 성의 차이 가 아니라 인간의 성과 “비-인간적 성”
간의 차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분명 짐승들, 동물 성욕이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 문제인 것이다.”(AO 350) 여기서 언급되는 텍스트는 맑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1843)이다.
맑스 는 헤겔의 차이 개념이 현실적이지 않고 형식적이며, 진정한 차이, 본질의 차이는 ‘북과 남’,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극(極)과 무극(無極)’, ‘인간 적 성과 비인간적 성’이라고 말한다.
“참된 현실적 극단은 극과 무극, 인 간적 성과 비인간적 성(menschliches und unmenschliches Geschlecht)이다.”
(Marx MEW I 293)
보통 ‘das menschliches Geschlecht’는 ‘인류’를 뜻하지만, 유물론자로서 맑스가 ‘인류’와 ‘비인류’(즉 인간을 제외한 다른
자 연)을 구분해서, 거기에 “본질의 차이, 두 본질의 차이(ein Unterschied der Wesen, zweier Wesen)”를 두었다 볼 수는
없다.22)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장-프랑수아 료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담 론, 형상(Discours, Figure)에서 맑스의 “비인간적 성”에 대해 나름의 해석 을 제시한다(Lyotard 1972: 138-41).
즉 ‘비-인간적 성’은 정립̇ ̇(Stellung)의 차원에 속하는 반면, ‘인간적 성’은 표상과 의식의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적 성(남성/여성)은 개념적이고 (칸트적 의미에서) ‘분석적’인 차이인 반면, 비인간적 성은 존재적,
즉 본질적̇ ̇ ̇(Wesen)이고 정립̇ ̇ 적̇(Stellung & Position)이며 (칸트적 의미에서) ‘종합적’인 차이이다.
그리 고 후자야말로 유일하게 현실적인 차이 내지 대립이다.
후자는 전자를 정립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비인간적 성은 “사고 안에서 사고되지 않̇ ̇ ̇ ̇ ̇ ̇ ̇ ̇ ̇ ̇ 는 것̇ ̇( ce qui dans le penser n'est pas pensé )”(139)을 가리
키며, 그것은 욕망 과 무의식의 차원에 속한다고 료타르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료타르의 해석은 들뢰즈의 해석 방식과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인간적 성이 인간적 성을 정립하는 역할을
하며 무의식의 수준 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료타르를 따른다.
특히 무의식 차원에 속한다고 한 것은 맑스가 정립(Stellung)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이 앞에서 보았듯이 “사고 안에서
사고되지 않는 것”이라는 료타르의 주석에서 확
22) 들뢰즈가 주목한 것은, 맑스가 초기부터 상식적인 의미의 ‘인간주의자’가 아니 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유물론 또는 비인간주의는 맑스의 박사학위논문(데모 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 1841)부터 드러나며,
1844년 경제 학 철학 초고(1844)나 독일 이데올로기(1845-6)에서도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962) 초반부터 맑스의 학위논문을 언급하는데(NP 7), 이는 들뢰 즈의 맑스에 대한 관심이 이른
시기부터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인된다.
요컨대 료타르에서 그것은 비표상적인 것, 사고 바깥에 있는 것 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들뢰즈는 “비인간적 성”을 다시 “비-의인적”이라고 해석한다.
이 경우 의인적(anthropomorphique)이라는 말은 ‘인간-형태-중심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오히려 물질적인 우주의 경과의 결과일 뿐이다.
들뢰즈가 프로이 트와 정신분석을 비판한다면, 이는 그들이 성욕과 무의식을 사고하는 데 있어 의인적 상상과 표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욕망 기계들이 사회 기계들 속에서, 즉 사회 기계들 마당, 사회 기계들의 구성체, 사회 구성체의 기능 속에서 현존하고
작용하는 한에서, 성욕은 욕망 기계들과 엄밀 하게 하나를 이룬다.
비-인간적 성이란 바로 욕망 기계들, 분자적 기계적 요소들, 이것들의 배치체들, 이것들의 종합들로, 이것들이 없으면
큰 집합들 속에서 특유화 된 인간의 성도 없을 것이요, 이 집합들을 투자할 수 있는 인간 성욕도 없으리라.
성욕이 문제일 때 맑스는 아주 말수가 적고 주저하긴 해도 몇 구절을 언급하는데, 이 구절들은 역으로 프로이트와 정신
분석 전체가 영원히 사로잡혀 있는 것, 즉 성̇ 의 의인적 재현̇ ̇ ̇ ̇ ̇ ̇( la représentation anthropomorphique du sexe )을
뛰어넘게 했다!
우리가 의인적 재현이라 부르는 것은, 두 성이 있다고 하는 관념뿐 아니라 하나의 성만 있 다는 관념이기도 하다.”(AO 350)
성의 의인적 재현은 성, 성욕, 생산 따위를 인간적 내지 동물적 성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성 또는 생산이 부모에서 자식으로 진행한 다고 보는 사고 이미지인데, 이는 “부모가 있는 생산”이라는 말로 표현
된 바 있다.
하지만 무의식의 수준에서 그것은 전혀 참이 아니다.
무의식 은 우주(univers)의 다른 이름이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 망 기계들의 우주(univers)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본원적 인 보편적
(universelle, 우주적) 생산이다.”(AO 11)
그렇다면 비-의인적 또 는 비-인간적 성 내지 생산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주라는 의미 에서 ‘우주적=보편적’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맑스는 “인간은 보편 적인 방식으로 생산한다”
(Marx M 241; 517)고 말한다. 그라넬의 주석을 참고하자면, 이 말에서
“문제는 보편성에 대한 그 어떤 개념이 아니라 그것의 근대적 개념, 바로 대상성 (l’objectivité)이다.
여기서 대상성은 보편(l'universel)의 다른 의미와 비교해서 정의되 고 있지 않다. 보편은 현상들의 객관적 우주(Universum)
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나̇ 타나는 존재자의̇ ̇ ̇ ̇ ̇ ̇ ̇ 세계-임으로서의 우주(l'univers)에서 유래한다. […]
우리가 맑스에서 유적 삶의 생산이 “감각계(Monde sensible)”의 생산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때, “세계(Monde)”는 […] 대상성의 총체(la totalité de l’objectivité)를 가리키기 위해 의미 하는 바를 끊임없이 의미한다.“(Granel 1969: 309).
우리는 맑스, 그리고 들뢰즈에서, 보편이라는 말과 우주라는 말의 친화 성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한편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라는 문제에 대 해서는 6절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들뢰즈는 앞에서 “두 성이 있다고 하는 관념뿐 아니라 하나의 성만 있다는 관념이기도 하다” 고 말했다.
여기서 “하나의 성만 있다”는 말은 인간의 성만을 성으로 착상한 다는, 인간의 성을 생산의 모델로 삼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게 아니라 사실 은 n개의 성이 있으며, 보편적=우주적 생산이 있다.
말하자면 성은, 성욕과 욕망과 생산은 인간적 성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 비-인간적 성이 뜻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어디에나 현미경적 횡단-성욕이 있어서, 여자 속에 남자만큼 남자들이 들어 있게 하고 또 남자 속에 여자만큼 여자들이
들어 있게 하되, 남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또 여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두 성의 통계적 질서를 뒤집는 욕망의 생산 관계들
속 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둘을 한다는 것도 아니며, 수천수만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 기계들 또 는 비-인간적 성이다.
즉, 하나의 성이 아니요 두 개의 성도 아니라, n개의 성이다. 사회가 주체에게 강요하고 주체 자신도 자기 자신의 성욕에
대해 받아들이는 의인 적 재현을 넘어, 분열 분석은 한 주체 안에 있는 n개의 성의 다양한 분석이다.
욕망 적 혁명의 분열-분석적 공식은 무엇보다 이럴 것이다. 곧, 각자에게 자신의 성들을.”(AO 352)23)
그런데 성에 관한 의인적 재현이 정점에 이르는 것은, 설사 “이들의 의도 는 종종 진보주의적”일지 몰라도, 정신분석이라는 것이다(AO 367).
오이 디푸스 모델, 또는 아빠-엄마-나라는 핵가족 삼각형이 그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성(성욕, 욕망, 생산)에 대한 견해는 그 기초에서부터 오류인 셈이며, 완전히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
비인간적 성, 자기-생산 및 고 아로서의 생산에서부터.
사실 처음부터 정신분석이 잘못되었던 건 아니다. 프로이트에게는 분 명 공과가 있다.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욕망의 본질 내지 본성을 더 이상 대상들, 목표들 및 심지어 원천들(영토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추상적 주체적 본질, 즉 리비도 내지 성욕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이 본질을 여전히 사적 인간의 마지막 영토성인 가 족과 관련시키고 있다. […]
모든 일은 마치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적어도 그것은 가족 밖으로는 나가지는 않으리라!’라고 말하면서 성욕에 대한 자신의 심오한 발견 을 변명하는 듯 일어난다.
언뜻 보인 크고 넓은 것 대신, 더러운 작은 비밀뿐. 욕망 의 파생물 대신, 가족주의적 복귀뿐. 탈코드화된 큰 흐름들 대신,
엄마의 침대에서 재코드화된 작은 개울들뿐. 바깥과의 새로운 관계 대신, 내면성뿐.”(AO 322)
따라서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과 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에까지 이르 러, 오류를 극복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무의식의 자기-생산에, 우주적 생산의 경과에 다시 도달하는 것이다.
“자기-비판 지점이란 무엇인가? […] 거기서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되돌려지고, 그 분자적 요소들과 관계되며, 또한
거기서 욕망은 자연적 감각적 대상̇ ̇ ̇ ̇ ̇ ̇ ̇ ̇이라고 정의되 는 동시에 실재[현실계]는 욕망의 대상적 존재̇ ̇ ̇ ̇ ̇ ̇ ̇ ̇로 정의
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결핍하
23) 들뢰즈가 ‘미시(micro)’를 말할 때 강조하려는 것은 단순히 크기 면에서 ‘작고 미세하게’ 보자는 점이 아니라 ‘욕망의
수준’에서, ‘n개의 성’의 수준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 은 ‘분자적 성’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관점이다.
고 있지 않다. 사실이지 분열-분석의 무의식은 인물들, 집합들, 법들을 모르며, 이미 지들, 구조들, 상징들을 모른다.
무의식은 고아이다.
무의식이 무정부주의자요 무신 론자이듯 말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부재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이름들(“고유명들의 바다”)이 현전하는 강도(强度, intensité)들을 가리키는 어디서건 무의식은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무의식은 고아이다. […]
무의식은 구 조적이지도 상징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현실은 그 생산에 있어서, 그 비조작성 자체에 있어서
실재 [ 현실계] 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재현적이지 않고 단지 기계적이며 생산적이다.”(AO 370-1)
바로 이 자기-비판 작업을 들뢰즈는 ‘분열-분석’이라 명명한다.
여기서 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고아 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무의식은 기계적
이며 생산적이라고, 바로 실재 내지 현실계 그 자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또는 정 신분석의 자기-비판이라는 문제를 5장 4절에서 더 깊이 다룰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1장 4절의 적절한 구절에서 들뢰즈는 욕망과 무의 식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미리 개진한 바 있다.
이 구절에는 상세히 설명되어야 할 (그리고 실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3절까지 설명된) 거의 모든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실재[현실계]를 생산한다.
욕망이 생산자라면, 그것은 현실 속의, 그리고 현실의 생산자일 수 있을 따름이다.
부분대상들, 흐름들, 몸들을 기계 작동하며, 생산의 통일로서 기능하는 수동적 종합들̇ ̇ ̇ ̇ ̇ ̇, 욕망은 이런 수동적 종합̇ ̇ ̇ ̇ ̇ 들̇의 집합이다.
현실계는 수동적 종합들에서 생겨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 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탄압을 통해 서만 고정된 주체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욕망과 그 대상은 한 덩어리, 즉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그래서 생산물은 생산하기에서 채취되고, 생산하기에서 생산물로
가는 중에 뭔가가 이탈 하며, 이것이 유목하고 방랑하는 주체에게 여분을 주게 된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실재 [ 현실계 ] 그 자체이다(L’être objectif du désir est le Réel en lui-même). 심리적 현 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
맑스의 말처럼, 결핍은 없으 며, 다만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로서의 겪음(passion comme “être objet naturel
et sensible”)이 있다.
욕망은 필요들에 기대고 있지 않으며, 역으로 필요들이 욕망에서 파생된다.”(AO 34)
이 대목에는 우리가 지적하고 가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1) 욕망은 실 재[현실계]를 생산한다는 점,
2) 욕망은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라는 점,
3) 실재[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라는 점,
4) 욕망과 그 대상이 한 덩어리라는 점,
5) 욕망은 기계 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라는 점,
6)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실재[현실계] 그 자체라는 점,
7) 심리적 현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 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생산의 종합 및 기계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데, 이 내용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상세히 살 펴볼 것이다.
다만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 내지 동일성이라는 문제 는 여기서 검토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6. 맑스적 연원 3: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 내지 동일성
이제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내지 통일성 및 자연과 역사의 동일성 내지 통일 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해보자(여기에
상응하는 것이 들뢰즈의 호모 나투라 개념이다).
맑스와 들뢰즈가 자연과 인간과 역사가 동일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들뢰즈는 자기-생산, 고아, 순환으로서 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연과 인간의 통일 내지 공통 외연성에 대해
되풀이해 언급한다. 그 대표적인 구절은 이렇다.
“무의식은 고아이며̇ ̇ ̇ ̇ ̇ ̇ ̇ ̇, 그 자체가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서 생산된다. 무의식의 자기-생산이 생겨나는 것은, […]
사회주의 사상가가 생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통일 을 발견했던 그 지점, 순환이 부모로의 끝없는 퇴행과 관련해 자신의
독립성을 발 견하는 지점에서다.”(AO 57)24)
여기서 사회주의 사상가는 맑스를 지칭한다.
들뢰즈는 맑스를 경유하여 ‘인간과 자연의 통일’이라는 문제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주제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을 보도록 하자.
“더군다나 ‘인간과 자연’의 구별은 없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 은, 말하자면 인간의 유적 삶 안에서 일치하듯, 생산 내지 산업으로서의 자연
안에서 일치한다.
산업은 이제 효용이라는 외면적 관계 속에서 파악되지 않고, 자연과의 근 본적 동일성 속에서 파악되는데, 이때의 자연은
인간의 생산 및 인간에 의한 생산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킨다.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온갖 형태 또 는 온갖 종류의 깊은 삶과 접촉해 있으며, 별들 및 동물들도 짊어지고 있고, 기관기계를 에너지
-기계에, 나무를 자기 몸에, 젖가슴을 입에, 태양을 엉덩이에 끊임없이 접속하는 자, 즉 우주의 기계들의 영원한 담당자이다. […]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항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산자 및 생산물의 하나의 같은 본질적 현실
(une seule et mê̂me réalité essentielle du producteur et du produit)이다.
과정 으로서의 생산은 모든 관념적 범주들을 넘어서 있으며,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망과 관계된 하나의 순환을 형성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욕망적 생산은 유물론적 정신 의학의 실효적 범주인데,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
̇ ̇ ̇ ̇(Homo natura) 로 설정하며 다룬다.”(AO 10-1)
들뢰즈는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이 “생산 내지 산 업으로서의 자연 안에서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산업이 자연과 근본적으 로 동일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의 생산 및 인간에 의한 생산 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킨다.
인간과 자연은 마주보고 있는 외면적 관계 속에서 분리된 두 항이 아니라 “생산자 및 생산물의 하나의 같은 본질적
24) 다음 구절도 참고. “인간과 자연 이 외연을 같이 할 때 일어나는 무의식의 자기생산”(AO 64).
현실”이다.
그라넬은 “‘생산’의 근본 존재론”이라는 차원에서는 “맑스가 최초이자 유일하게 그것을 만나고 개시한 그곳”인 초고를
독일 이데 올로기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Granel 1969: 305).
들뢰 즈는 바로 이 입장에서 논의를 개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의 핵 심은, 인간주의를 넘어서 “생산 내지 산업으로서의 자연”을 해명하는 일이다.
그런데 맑스는 이미 초고에서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다.
이 점은 다음 구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굳고 잘 다져진 대지 위에 서서 모든 자연력들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자신의 외화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본질적 힘들̇ ̇ ̇ ̇ ̇을 낯선 대상들로 정립̇ ̇한다면, 정립̇ ̇은 주체가 아니다.
정립은 대상적인̇ ̇ ̇ ̇ 본질적 힘들의 주체성이며, 따라서 이 본질적 힘들의 작용 역시도 대상적̇ ̇ ̇ 작용이어야만 한다.
대상적 존재(=본질)는 대상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은 대상적인 것이 자신의 본질 규정에 들 어 있지 않다면 대상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
대상적 존재가 대상들을 창조하고 정립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 대상들을 통해 정립되기 때문이고, 그것이 본래는 자연̇ ̇
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정립 작용에서, 대상적 존재는 자신의 “순수한 활동”에 의해 대상의 창조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대상적
̇ ̇ ̇ 생산물이 그의 대상적̇ ̇ ̇ 활동을 실증할 따름이요 그의 활동을 대상적이고 자연적인 존재의 활동으로 실증할 따름이다.”(Marx M 295; 577)
인간은 대상적 존재인데, 그 대상적 존재가 대상들을 창조하는 것은 그의 순수한 활동 때문이 아니다.
이는 ‘실천’에 대한 통념적인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다.
보통은 실천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스의 견해로는, 인간은 본래 자연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상적 생산물이 인간의 대상적 활동을 역으로 실증한다.
따라서 정립은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인간 과 자연의 통일성인 것이다.
이런 독특한 사고는 「테제」에서도 개진된다.
「테제1」에서 맑스는 “대상(Gegenstand)”을 인식론적이고 관조적인 의미의 “객체(Objekt)”와 날카롭게 구분하면서, 그것을 “감각적 인간 활동”이고 “실천(Praxis)”이라고, 나아가 “주체적(subjekitv)”이라고 단언한다(Marx T1).
나아가 맑스는 “모든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 ̇ ̇이다”(Marx T8)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삶 전체가 이러한 대상적=주체적 측면을 갖는 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3절에서 「테제3」의 “자기변 화”라는 말의 “자기”라는 것이 우주라는 것을,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으로서의 우주라는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더 심화되어 개진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감각적 확실성”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포이어바흐를 조롱하며, 그 개념을 산업(Industrie)에 상응하는 실천적 (더 이상 이론적이지 않은) 현실로 대체한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각적 세계가 영원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항상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상태의 생산물
이라는 것을, 게다가 그 사물이 역사적 생산물이라 는 의미에서, 즉 앞 세대의 어깨 위에 서서 자신들의 산업과 교류를
계속 완성시켜 나가고 변화된 욕구들에 따라 자신들의 사회적 조직을 변용시켰던 그러한 세대들의 계열 전체의 활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포이어바흐는 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가장 단순한 “감각적 확실성”의 대상들조차도 오직 사회적 발전을 통 해, 산업과 상업적 교류를 통해 그에게
주어져 있다.
거의 모든 과실수가 그러하듯 벚나무는 알다시피 겨우 몇 세기 전에야 비로소 상업을 통해 우리들의 지역에 심어진
것으로, 어떤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사회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야 비로소 포이어바흐의 “감각적 확실성”에 주어
졌다.”(Marx DI 8; 43)
처음에 산업 또는 상업은 원료, 순수하고 단순한 자연, 또는 원시의 땅과 대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감각적 세계는 “산업과 사회 상태의 생산물”이며 “역사적 생산물”이다.
말하자면, 여러 세대에 걸친 활동의 결과로서 “감각적 확실성”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인 간 활동과 별개로 존재한 후 나중에 인간과 만나게 되는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산업과 자연은 동시에 생성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한다.
“나타남으로서의-존재자(l’etant-paraissant)의 존재 “양태”는 세계(le Monde)이다. 세 계의-나타남(paraissant-Monde)의
열림 “속에서” 자연은 “발견되고”, 거기에서 산업 자체가 가능하다.”(Granel 1969: 302)
이 모든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사실 맑스의 의도는 다른 더 심오한 데 있다.
여기서 요점은,
“그가 어디에 살든 간에, “그가 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은, 그 자신 및 다른 모든 인간은, 말하자면 세계(le Monde)로서 주어진 감각적 현실은, “생산”을 벗어나 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생산은 […] 모든 감각 세계의 기초”[Marx DI 10; 44]이기 때문이다.”(Granel 1969: 304)
이 표현에서, “생산”은 미리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의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처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1844/45년의 맑스의 존재론에서 생산은 존재의 의미 자̇ ̇ ̇ ̇ ̇ ̇ ̇ ̇ ̇ 체̇( le sens même de l’être )를 가리키는 용어이다.”(304-5) 그렇다면 맑스는 왜 포이어바흐의 “감각적인 것(le sensible)”이라는 개념을 정교화하면서, 실존하는 것의 존재를 “생산”
이라고, 나아가 “산업” 이라고 부르는가?
그라넬(305)이 보기에,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은 산업 생산의 차원을 넘어서는 용어인데, 왜냐하면 “삶의 생산”(Marx DI
31; 39)으로서의 생산은, 그 자체로 “의식의 생산”(Marx DI 25 오른쪽 여백; 37)을 포함하며, 또한 그 역사성 자체가 그것이
“세계사”라는 데서 성 립하는 하나의 역사를 개시하는 “전 세계(Erde)의 생산”(Marx DI 26; 37) 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 점 또한 초고에서 진술된 바 있다.
“산업̇ ̇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따라서 자연과학의 현실적인 역사적 관계이다.
따라서산업이 인간의 본질적 힘들의 공개적 드러냄̇ ̇ ̇ ̇ ̇ ̇ ̇ ̇ ̇ ̇ ̇ ̇으로 파악된다면, 자연의 인간적̇ ̇ ̇ 본질 또는 인간의 자연적̇ ̇ ̇ 본질도 또한 이해되며, 따라서 자연과학은 자신의 추상적으로 물질적 인 또는 차라리 관념론적인 성향을 상실하고 마치
그것이 이제 이미 — 비록 소외 된 모습일지라도 — 현실적인 인간 삶의 토대로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적 과학의
토대가 될 것이다.”(Marx M 272; 543)
맑스가 보기에, “산업”은 “인간의 본질적 힘들의 공개적 드러냄”이며, 그 렇기 때문에 산업을 통해 “자연의 인간적 본질”
또는 “인간의 자연적 본 질”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 동일성이 다시금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산업”이 어째서 맑스에게 “인간적인 본질적 힘들의 펼쳐진 책”(Marx M 272; 542)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존재는 그에게 생산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는 일이다.”
(Granel 306)
초고의 첫째 노트에서 맑스는 말한다. “생산적 삶은 유적 삶이 다.”(Marx M 240; 516)
그리고 “소외된 노동”이라는 중심 개념은 실제로 는 “생산”이라는 근원적̇ ̇ ̇ 개념에서 출발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그
개념의 진실과 의미는 바로 노동 속에서 소외된 것이다(Granel 306).
초고의 ‘노동(Arbeit)’은 ‘실천적 인간적 활동(praktische menschliche Thätigkeit)’ 과 동의어이다.25)
초고의 노동에 대한 규정은 텍스트 편집상의 중대한 오류와 맞물려, 오해를 가중시켜 왔던 것이 사실이다.
맑스 엥엘스 저작 집(MEW 별책 1권 1968년)에 수록된 내용과 맑스 엥엘스 전집 2판(MEGA II-2, IV.2권 1981년)에 수록된
내용 사이에는 중대한 문헌학적 차 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실천적 인간적 활동의 소외된 행위, 즉 노동을 두 측면에서 고찰했다(Wir
25) 노동 규정 부분 차이는 두 텍스트의 문헌학적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MEW 판이 노동을 “실천적 인간적 활동의 소외의 행위”로 본 반면, MEGA II-2 판이 노동을 “실천적 인간적 활동”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이는 사소한 오류가 아닌 매우 중대한 오류이자 왜곡이라 하겠다.
haben den Akt der Entfremdung der praktischen menschlichen Tätigkeit, die Arbeit, nach zwei Seiten hin betrachtet).”
(Marx M, MEW 515)
“우리는 실천적 인간적 활동의 소외의 행위, 즉 노동의 소외의 행위를 두 측면에서 고찰했다(“Wir haben den Akt der
Entfremdung der praktischen menschlichen Tätigkeit, d[er] Arbeit, nach zwei Seiten hin betrachtet.”(Marx M, MEGA II-2 239) 말하자면 저작집은 노동을 “실천적 인간적 활동의 소외의 행위”로 본 반면, 전집은 노동을 “실천적 인간적 활동”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해석은 저작집에 의거했다는 점에서, 이는 사소한 오류가 아닌 매우 중대한
오류이자 왜곡이다.
즉, 노동 개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개념의 기저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그라넬이 보기에는, 초고에 “생산자로서의 인간 존재(그것의 비존재[Unwesen]는 노동자) 및 생산으로서의 존재 자체
(그것의 비존재는 노동)가 나타난다”는 점 이 초고를 읽고 독일 이데올로기와 비교하는 데 있어 핵심이다 (271).
초고의 맑스가 ‘노동 소외’를 다룬 첫째 노트의 후반 논의에서 ‘소외된 노동’을 논한 것은 노동 소외 자체를 다루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유 재산의 발생 원인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史초고量의 소외 분석은 결국 자본주의의 토대인 사유 재산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목적을 지니며, 이는 인간주의가 아닌
비인간주의, 즉 과학적 작업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그 동 안 이를 인간주의로 읽은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초고의 소외 이론과 관련한 많은 오독은, 인간의 본래 상태와 소외된 상태 사이의 서술이 교 차하며 오가는 정확한 맥락을 놓친 채, 그 텍스트의 편집자가 암시한 모종의 선입견에 따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보인다.26)
사실 초
26) 고증의 문제는 단지 문헌학적 호사가 아니라 그 자체 해석의 일부이다. 박사논 문 이래로 맑스에게 인간주의가 개입
할 여지는 없었다.
반헤겔주의, 즉 비인간주 의는 처음부터 맑스 사상의 동기였다.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 정치 경제 학,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맑스 사상의 원류로 삼은 레닌의 설명(1914)은 폐기되
어야 한다.
본질을 짚지 못한 이런 정치적 해석은 맑스 텍스트로 돌아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고 첫째 노트의 XXII부터 XXVII까지에 대해 저작집 편집자는 “소외 된 노동”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는 이후 이 책을 인간
주의의 맥락으로 방향 짓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실은 사적 소유의 발생 원인 을 다루고 있다.
텍스트의 오류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노동’에 서 ‘생산’ 개념을 읽어낸 것은 그라넬의 혜안이라 하겠다.
나아가 이를 자신의 맑스 해석 및 존재론 구성의 기초로 삼은 들뢰즈의 혜안도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이제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 및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그라넬의 최종 진술을 보자.
“앞에서도 보았듯이, 유적 삶은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에 의해 정의된다. 자신의 본질에 부합하는 인간적 삶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 본질적 통일성을 나타나게 하는, 앞으로̇ ̇ ̇-끌어내는̇ ̇ ̇ ̇( pro-duire ) 삶이다.
“그것은 삶을 낳는 삶이 다.”[Marx M 241; 517]
따라서 여기서 생산은 물질적 재료들을 산업 “생산물”로 변형 하는 세계 안에서의 노동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생산은 자신의 유일한 “대 상”으로서 세계 자체만을 갖는 이 앞으로-끌어냄(pro-duction)이요, 그것은 “인간의 유적 삶”과
같은 말이다(인간의 “유”는 실제로 그 본성에 의해 세계 -의-세계-임 (l’être-monde-du-Monde)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맑스가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성에 대해 말할 때 의도했던 바이다).
“인간은 바로 대상적 세계의 가공 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이 유적 존재임을 확증한다.
이 생산은 인간의 작업 활동적 인 유적 삶이다.”[Marx M 241; 517]”(Granel 306)
여기서 세계가 “대상적”이라 불린다면, 이는 제3초고에서 인간 역시도 “대상적 존재”라고 불리고 있는 바로 그 의미에서
이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의 생산의 대상을 빼앗음으로써, 인간의 유적 삶을, 인간 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빼앗는다.”(Marx M 241; 517)
맑스의 이 말에 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사유화가 노동 소외를 낳으며, 노동 소외는 인간 과 자연의 본질적 동일성을 파괴
한다는 점이다.
맑스의 철학적 성취는 다음 구절에서 요약되고 있다.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 ̇ ̇이다.”(Marx M 295; 578) 들뢰즈는 이와 같은 그라넬의 논제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분열자는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나아가 분열자는 주체로서 생산되면서 역사를 이용한다.
“분열자만큼 역사를 이 용한 사람은, 분열자가 하는 방식으로 이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단번 에 세계사를 소비한다.
우리는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 ̇ ̇ ̇ ̇로 규정하면서 시작 했는데, 결국 분열자는 호모 히스토리아̇ ̇ ̇ ̇ ̇ ̇ ̇(Homo historia)로
구나.”(AO 28)
“호모 히스토리아”에 대한 설명은 4장 C의 몫으로 미루도록 하고, 어쨌 듯 이처럼 인간을 규정하는 두 방식, ‘호모 나투라’와 ‘호모 히스토리아’ 의 통일이 고아 및 자기-생산으로서의 무의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하나의 생산만이, 실재[현실계]의 생산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이 동일성을 두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 두 방식은 순환으로서의 무의 식의 자기-생산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에서 욕망 적 생산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호모 나투라̇ ̇ ̇ ̇ ̇. 하지만 또 우리는, 그리고 더 정확하게, 욕망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이며, 끝에서야 자신을 해방하는 데 로 향한다고 말해야 한다(원래 호모 히스토리아̇ ̇ ̇ ̇ ̇ ̇ ̇).”(AO 40)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앞에서 단편적으로 살폈던 구절들의 맥락적 의미가 짜 맞춰진다.
아래 구절들은 앞의 논의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했던 것들 로, 이제 전체 맥락 속에서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i) “무의식은 늘 주체로 있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순환 운동을 한다. […]
재생산의 유일한 주체는 생산의 순환 형식을 고수하는 무의식 자신이다. […]
무의식은 언제나 고아였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자연과 인간, 세계와 인간의 동일 성 속에서 스스로 자연 발생했다.”(AO 128)
ii) “오직 순환의 관점만이 정언적이고 절대적̇ ̇ ̇ ̇ ̇ ̇ ̇ ̇이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재생산의 주체인 생산에, 즉 무의식의 자기-생산의 과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역사와 자연 의 통일,
호모 나투라̇ ̇ ̇ ̇ ̇와 호모 히스토리아̇ ̇ ̇ ̇ ̇ ̇ ̇의 통일). […]
이 순환 운동을 통해서 무의식은 언제나 “주체”로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을 재생산한다.”(AO 327-8)
iii) “인간의 자리가 전혀 딴 곳에, 즉 인간과 자연의 공통-외연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의 낯선 존재,
자연과 인간을 넘어 있는 존재”에 관한 물음의 가̇ ̇ ̇ ̇ 능성̇ ̇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그는 무의식의 자기-생산 지역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에서는 무의식은 고아인 동시에 무신론자
이며, 직접 적으로 고아이고 직접적으로 무신론자이다.”(AO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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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고아, 자기-생산, 순환으로서의 무의식이라는 들뢰즈 의 무의식 개념을 살펴보았고, 그 중요한 전거로
헤겔 법철학 비판, 초고 및 독일 이데올로기 시절의 맑스가 활용되었음을 보았다.
그것 은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이라는 주제로 집약되어 표현되었다.
물론 들뢰 즈의 무의식 개념은 맑스에서만 자원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맑 스의 자원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어지는 3장에서 들뢰즈의 무의식과 욕 망 개념의 다른 원천들을 살피고자 한다.
우리는 “힘의 존재론”이라는 표제로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전 단계의 작업들을 모아보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욕
망과 기계에 대한 들뢰즈의 견해가 어떤 식으로 주조 되었는지 정리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