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에 사는 지인이 부산에 왔다. 2023 부산엑스포 사회적 기업 박람회에 꽃차를 가지고 왔다 한다. 곡성군 강빛마을 이장님이 전화로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꽃차 시음과 홍보를 부탁하고 식사 자리 만들기를 물어 왔다. 양산시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좋다고 한다.
3년 전 양산에 사는 친구들이랑 전남 곡성군 강빛마을에 가서 3박4일을 귀촌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연이 있다. 곡성군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되었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선생님들과도 친분이 쌓였다. 올봄에도 2박3일 전주 여행 가는 일정 중에 1박을 강빛마을에서 유숙하기도 했다.
귀촌 프로그램에 꽃차 만드는 실습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꽃차 판매에 도움도 주고 점심을 함께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여 토요일에 만남을 가졌다. 엑스포 전시장을 둘러보고 꽃차도 시음하고 반가운 선생님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근처 백화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타임을 해운대 바닷가에 가서 가졌다. 초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은 하와이 해변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따가운 햇살이 물러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즈음 저녁을 먹고 우리들은 백사장을 걸었다. 이장님은 해운대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고 양산 친구들을 차 있는 곳으로 배웅하고 나도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닻을 보았다. 해운대 해수욕장에 접한 한 호텔 정원에 설치한 닻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 보였다. 번개처럼 스치는 10년 전 큰아들의 편지가 떠올랐다. 아들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군 면제 받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참치잡이 어선을 타러 뉴질랜드로 갔었다. 3년 동안 휴가도 반납하고 항해사로 뱃사람으로 살았다.
작업을 하는 중에 거대한 냉동 참치가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고 했다. 이가 부러지고 죽을 뻔한 얘기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치과에 치료하러 다니며 비로소 말해주었다. 신혼인 인도네시아 선원 한 명은 일하다가 배에서 떨어져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은 아들은 열 번도 더 보따리를 쌌다가 풀었다고 했다.
아들은 평생 들어도 못 들을 욕들을 삼 년 동안 다 들어가며 뱃사람으로 견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빠 대신 혼자 저희 형제를 키운 엄마를 생각하면 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1년 6개월 만에 나온 귀한 휴가를 한국에 나와서 엄마를 보면 다시는 배 타러 가기 싫어질까 봐 반납했다고 한다.
귀국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그때 아들에게 유혹의 전화가 자주 왔었다. 1항사에서 2년만 더 근무하면 선장으로 승진할 수 있다며 다시 근무할 것을 요청했다. 아들은 두 번 다시 배 타는 일이 싫다며 거절했다. 나 역시 아들이 배 타는 일이 아들의 인생을 좌우할까 봐 무섭고 겁난다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더 철저히 해서 꼭 합격하라고 했다.
아들은 1년 6개월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같은 공무원인 며느리와 결혼했다. 지금은 1남 1녀를 둔 가장이 되었고 직장에서도 승진하여 중요 직책을 맡아 열심히 근무 중이다. 하지만 걱정은 또 있다. 며느리가 아이들의 미래와 저들의 꿈을 위해서 포르투칼에 이민을 가겠다 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당황했다. 하지만 저들도 쉽게 결정한 건 아니기에 저희 생각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들 내외가 6월28일~7월7일까지 열흘 동안 현지답사 겸 포르투칼로 여행을 갔다. 초등학교 4학년 손자와 2학년 손녀는 내가 돌봐 주기로 했다. 손주들과 함께할 9박 10일이 내게는 손주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쩌면 손주들과 친해질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으로 살면서 아이들과 언제 또 함께 먹고 자고 놀며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현지에 다녀온 후 마음이 바빠졌다. 좀 더 일찍 가야 했다면서 내년 여름에는 제대로 준비하여 꼭 가겠다고 한다. 안가기를 은근히 바란 건 아니지만 내 마음도 슬며시 바빠졌다. 포르투칼은 국민의 90%가 카톨릭 신자라고 들었다. 아이들이 아직 세례를 못 받았다. 아들 며느리가 바쁜 탓도 있지만 내가 강력히 설득을 안 한 때문이기도 하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타일렀다. 낯선 나라에 가서 종교라도 같으면 친구를 사귀고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너희들이 바쁘고 힘들면 내가 아이들을 00성당에 태우고 가서 토요일 초등학생 교리반에 입교시키겠다고 했다. 아들 내외는 엄마 뜻대로 하시라고 하며 아이들을 설득시켰다.
내가 저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민을 떠나도 종교를 지키고 무정란이 아닌 유정란으로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