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절과 11절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히 10절에 표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게 위기의 상황에서 일반적인 반응들이 순차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10절입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본문에서는 먼저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말씀들은 모두 이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이라고 표현합니다. 원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들의 눈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치고 있는 것 즉 다다르고 있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마음이 매우 두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모두 네개의 동사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네개의 동사가 각기 다른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속적으로 연속해서 나타나는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과 같은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반사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씀에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하나님께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과 신앙적 바탕 위에 나타난 부르짖음이 아니라는 증거는 11절에 나타나는데 모세에게 이들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 붓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을 신뢰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자신의 신세의 한탄과 원망과 불평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의 모습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지극히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봅니다. 오직 감각과 감정에 의존한 즉각적인 반응 만을 나타내는 자들이었습니다. 눈을 들고 가까이 옴을 보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조금도 망설이거나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신자로서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상황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 에 대한 조금의 생각이나 망설임이 없이 즉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쏟아 내기에만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4:2절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왜 죽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보이신 말씀이 왜 저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인가 하면 듣는 자가 믿음을 말씀과 혼합하거나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완고하여서 그것을 믿음의 반응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신앙 상태를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12절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를 버려 두라 라는 말은 무기력한 상태로 그냥 두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로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애굽 사람들을 계속 섬기며 종노릇 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에도 그것을 잊고 그냥 그런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은 믿음도 버리고 신앙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으나 그것을 깊이 묵상하여 믿음으로 그것을 결합하지 않으면 환난이 오면 어려움이 닥치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 앞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고 즉 생각이 사육되면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사육이 된다는 말은 그것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사육되면 잘못되고 옳지 못해도 그것이 그런 줄 알고 그것에 순응하며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는 것도 그들이 생각이 노예 근성에 사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누구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써 복된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육된 이들의 사고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길들여 지고 세상에 물들어 버린 생각과 사고와 삶의 방식에 사육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를 삼아 주셔서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바라며 살게 하셨습니다. 잠시 잠깐이면 없어질 이 땅의 어떤 것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바라며 위하여 살도록 부르셨음에도 우리의 사육된 사고는 이 땅의 것에 목숨을 걸고 하나라도 더 소유하며 더 얻기 위해 이 땅의 것에 눈을 고정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세상을 동경하며 세상의 방식을 사랑하며 세상의 것에 마음을 쏟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사육된 사고를 바꾸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안을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왜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