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yh-FrpInVQ
<옮겨온 글>
-인문학과 역사 그리고 사람의 향기 밴드/ 김종찬님-
문종에 대한 모든 것(고려에 '척준경'이 있다면 조선엔 '문종'이 있다)
0.서문
조선시대 왕 중에서 삼국지의 관우를 닮았다는 왕이 있다.오늘은 이 왕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알아보자
1.관우를 닮은 왕
전쟁 등으로 왕의 어진이 몇 점 없어졌는데 이때 이 왕의 어진이 없어졌다가 나왔다
이 왕의 생김새가 풍채도 굉장히 좋고 수염이 매우 길어 관우를 닮았다.
관우를 닮은 이 왕의 외모에 관한 일화는 연려신기술에 적혀 있다
병자호란 이후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 1장이 나왔는데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한 왕의 어진이었다
신하들은 이 어진의 주인공은 인종대왕이라 주장했었다
하지만 신하 신익성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조선의 5대 왕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병약한 문종 말이다
결국 나중에 어진의 표장을 고치려 묵은 배접을 벗겨 보니 뒷면에는 문종대왕어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은 조선의 5대 왕 문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2. 문종
문종의 생김새는 체격도 크고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 보였고 얼굴 또한 매우 잘 생겼다고 전해진다
또 문종은 천문 음문 음악 무예 병법 외 기타 등등 조예가 깊었고,문종은 글씨도 잘 써서 세종의 3남 안평대군과 더불어 상당한 명필가이며 문종은 특히 과학적 무기와 병법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3. 문종에 대한 오해
문종은 재위 기간이 2년 밖에 안된다
문종하면 조선시대 왕중 재위기간이 굉장히 짧은 왕중 하나이고,나약한 왕이라고 생각하며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문종은 병으로 요절했을지 언정 나약하지는 않은 왕이다
문종은 어머니 소헌왕후 3년 상과 아버지 세종의 3년 상을 치르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허약하다 문약하다 우유부단하다
왜소하다 등등 이렇게 많이들 알고 있다.
그런데 저는 왜 요절했을지 언정 나약하지 않다고 하는지 보자
4. 재위 기간
문종은 대중 매체에서 잠깐 재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위와 같이 많이들 오해하지만 문종이 정사를 돌본 건 2년이 아니다.
세종의 건강이 악화될 때인 1442년 세종 24년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해 세종 대왕이 죽은 1450년까지 약 7년 반 정도로 대리청정하였다.
직접 대리청정하여 정사를 돌봤기에 문종 재위 기간 2년을 포함 국정을 돌본 기간은 총 9년간이며 문종은 조선의 역대 세자 중
가장 준비된 군주였다.
5. 문종의 업적
일반적으로 세종의 업적은 알아도 문종의 업적은 잘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문종은 수많은 업적이 있고 대표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측우기도 장영실이 만든 게 아닌 문종대왕의 업적이다.
문종은 대리청정을 하며 세종 후반기 정책을 주도하였으며 이 시대의 업적은 거의 문종의 업적이라 봐도 무방하다
신기전을 백발로 추가시킨 화차 개발을 직접 설계하였고 화포의 규격화 등 과학기술을 발달시켰고 부대 운영과 인원수의 운용에도
관여를 하여 병법을 정비하여 5사 체제를 만들었고 이는 후대에 조선의 군사제도인 5군영으로 이어지며
재위 기간 동안 6품까지 윤대를 허락할 만큼 신하들과 소통하여 언론을 활성화 시켰고 또 진법서인 동국병감과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여 역사책 편찬을 완수하였다
문종은 이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였다
6. 문종의 무예 사랑
문종이 세자 시절에 명나라에서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다
토목의 변이란 사건인데 명나라 황제가 몽골의 일족인 오이라트의 장수에게 붙잡히는 사건을 말한다
토목의 변 사건 때문인지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군사 부문에 굉장한 관심을 가졌는데 후에 왕이되어 무예에 대한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문종실록 2년 4월 18일에 집현전 교리 이예가
문종이 활 쏘는 것을 구경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에 대해 간언하자,문종이 국방도 국가 일인데 무예는 해이해져서는 안되니 무예의 교육 또한 임금의 일이라며 일축했다
7.수양대군
문종하면 둘째 동생 수양대군을 빼먹을 수가 없다
문종은 자기 형제들을 끔찍하게 챙겼다고 한다
실제로 보면 형인 문종을 믿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활개친 기록이 보인다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0월 1일
병인 3번째 기사
좌정언 홍응이란 신하가 말하길 국법을 어긴 중을 벌을 주려고하는데,이 중을 수양 대군이 보호했다 그러자 신하 홍응이 문종에게 국법을 어긴 중을 감싸는 수양대군을 죄줄 것을 청하지만, 문종은 절대 윤허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실록에 보면 많은 기록이 있다
8. 문종에 대한 인식
문종 하면 책만 봤을 것 같다는 인식이 강한데
문종이란 묘호는 그 시대 황금기를 이룩한 성군에게 주는 후대가 주는 최고의 평가였다.
대표적으로 고려시대만 고려시대 최고의 찬란한 문화 황금기를 이룬 고려의 11대 왕의 묘호도 문종이다
즉 문종은 태종-세종-문종으로 이어져 조선이란 신생 국가가 안전하게 탄탄해지는데 마침표를 찍은 왕이며 앞서 말했듯 세종 말년에 대리청정 7년 반을 포함 재위 2년을 더해 약 9년 반의 정사를 문종이 본 것이다
왕이 아니라 세자였을 뿐이지 이미 국정은 문종의 정치력으로 안정화 되어 있었다
단지 재위 2년만에 요절했다란 드라마 매체 이미지가 강하고 아들 단종이 계유정난으로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았겨 죽어서
그렇지 문종에 대해 조금만 깊게 파보면 이러한 문약한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9 글쓴이의 개인적인 평가
문종 자체는 준비된 군주였고 완벽했으나 후계 구도를 탄탄하게 하지 못한 게 가장 아쉽다
조선의 세자가 나라의 근본 즉 국본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세자 단종을 떠받혀줄 정치적 세력이 문종이 죽을 때 불러서 잘부탁
한다고 한 고명대신 밖에 없었던 점 그리고 단종을 받쳐줄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어머니만 있었더라도 계유정난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문종이 왕비를 3번이나 갈아치워 원자가 늦게 생성되어 국본이 나오지 못했으니 자업자득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결국 문종의 이런 온전치 못한 후계구도는 단종의 세력 약화로 이어졌고 힘이 신하에게만 국한된 단종의 조선은은
결국 권력을 못가진 종친과 권력을 가진 신하의 대결구도로 바뀌어 불만을 야기했고 이러한 불만은 결국 계유정난이라는 대참사로
발생했다
나이도 어리고 정치력을 갖추지 못한채 신하인 고명대신에게 의존한 단종 체제는 애초에 망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문종 최대의 실수는 온전치 못한 후계 구도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본인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요절할지 몰랐겠지만...
첫댓글 그렇군요...그토록 명민했던 文宗의 요절과 이어지는 비극적인 어린 단종의 비화를 생각하면
聖君 세종대왕을 추앙하다가도 너무나 슬퍼집니다...
저도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왕의 묘호가 문종文宗인 이유가 있었더군요.
문종을 생각하면
단종과 수양대군 세조가 함께 떠오르죠
수양과 그 똘마니들이였던 칠삭둥이 한명회를 비롯한 역심,야심,권욕에 미친자들이
자기들의 집권야욕을 채우려고
충효와 인간의 이성을 말아먹고
역성반란을 일으켜 수양조,세조조정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이지요
세종을 떼 놓으면 기타 왕들은 그냥
별볼것없는 인물들
이순신장군을 떼놓으면 군졸들도 그렇지요
추천합니다~~
조선역사에서
초기 가장아쉬운 부분이
문종이 재위 십년만 넘겼어도
조선의 역동력은 계속되었으란것
수양대군이 조선을 말아 먹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