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떼밀리옹의 와인 산지
[ 프랑스의 와인의 본고장, 보르도 ]
보르도는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여러 개의 강줄기가 가져다 준 비옥한 토양, 그리고 강렬한 태양의 혜택을 입고 만들어진 포도와 대서양에 맞닿아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일찌감치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지역에 따라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로제 와인(1), 스파클링 와인(발포성 와인), 제조과정을 여러 번 거쳐 황금색을 지닌 황금 와인(소테른 지역에서 생산하는 최고급 단맛의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총 37개의 다양한 포도 산지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 보르도 와인 투어(생떼밀리옹의 샤토 라만테)
보르도의 와인 지역은 그리고 메독과 생떼밀리옹으로 크게 나뉩니다. 그리고 보르도 남쪽의 그라브나 소테른은 백(白) 포도주로 이름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보르도 서북쪽, 가론느 강과 도르도뉴 강이 합류해 흐르는 지롱드 강의 서안(西岸)인 메독 지역은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등 세계 최고급 적(赤) 포도주의 주고(酒庫)가 있는 곳입니다.
보르도 동쪽의 생테밀리옹은 포도주 애호가들이 흔히 찾는 상표의 이름입니다. 오늘은 생떼밀리옹 지역의 <샤토 라만테>를 찾아 갑니다. 여기서 샤토(Chateau)는 ‘성(城)이라는 뜻인데 와이너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와이너리는 포도주 양조장을 말합니다.
* 왼편이 메독, 오른편이 생떼밀리옹, 아래 소테른이 보입니다
보르도의 와이너리를 방문해 와인 제조과정을 살펴보고 시음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은 현지 관광안내소에서 진행하는 와인 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와인 투어는 1개 와이너리를 방문할 수 있는 30유로대의 반나절 투어와 여러 개의 와이너리를 방문할 수 있는 90~150유로(식사대 포함)대의 일일 투어로 나뉩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와이너리인 <샤토 라만테>는 생떼 밀리옹의 명성답게 주변이 온통 포도밭입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연녹색을 띈 포도가 수줍게 익어 가고 있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포도나무 앞에 빨간 장미가 드문드문 피어 있는데 이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장미들을 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이 장미를 통하여 포도의 상태를 미리 알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장미가 이유 없이 시들거나 벌레가 먹는다면 그 다음에는 포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장미는 꽃 중에서 아주 민감한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숙성실로 안내를 합니다. 어둡고 온도가 낮은 이곳에는 낯익은 오크통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검은 숲에서 자라는 최상급 나무를 잘라 프랑스 장인들이 만든 오크통을 세계 최고로 손꼽는다고 합니다. 오크는 와인을 숙성하게 하고 맛과 향을 돋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크통은 갓 만든 것보다 몇 년씩 포도주를 담아 놓아 숙성한 것이라야 최상급 와인을 만들 수 있으며, 15년 이상이 되면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숙성실에서 다음 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와이너리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와인 시음 시간인 것입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2가지, 잔 수십 개가 놓여져 있습니다.
와인을 맛보는 방법은 먼저 와인 색을 보고 그리고 와인 잔에 코를 담그듯 향을 음미한 뒤 맛을 봅니다. 이때는 후르르 소리를 내며 공기를 머금고 혀의 감각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그런 다음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려서 산소와 접촉하게 하고 위의 음미 방법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산소와 접촉한 와인은 색깔도 밝아지고 맛도 조금 가벼워져서 제대로 된 맛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가이드가 안내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시음이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들의 얼굴들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와인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낸 후 생떼 밀리옹 마을로 향합니다.
이 마을은 2세기 무렵 로마인들이 와인 농장을 운영한 곳으로 와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곳입니다. 마을 이름도 8세게 밀리옹이라는 수도승이 정착하면서 생떼 밀리옹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 보르도 와인의 역사
* 지롱드강을 사이에 두고 왼편에 메독, 오른편에 생떼밀리옹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르도는 12세기에 영국 왕인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여공작(2)과의 결혼으로 영국의 공작령이 되면서 품질이 좋은 보르도산 와인을 영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에는 보르도와 경쟁 관계에 있던 포도주 수출항인 라 로셀이 프랑스에 넘어 갔고, 이에 영국왕이 보르도 업자들에게 관세 특혜를 주면서 보르도 와인 산업의 독주가 시작되었습니다. 13세기 중반에는 영국 왕실이 주문하는 와인 중 3/4이 보르도산 와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7세기 네델란드의 사업가들이 보르도에 들어오면서 보르도의 와인을 좀 더 체계적으로 생산하게 되었고, 세계적인 수출 산지로 발돋음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보르도에는 약 8천 개의 샤토(와이너리)가 있습니다.
* 프랑스 와인 라벨 읽는 법
프랑스에서 샤토는 원래 봉건시대의 성곽이나 요새를 의미하지만, 와인 라벨에서는 포도원이나 양조장을 가리킵니다. ‘샤토 OO’라는 표현에 고급 와인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단순한 브랜드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명칭을 사용하는 곳은 대체로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인데, 보르도는 지역이 매우 넓기 때문에 밭에 따라 세분화, 차별화하려고 생산자들이 각각 자신의 밭에 이름을 붙이고 ‘샤토’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프랑스 부르고뉴나 론, 알자스 같은 지역의 와인에서는 샤토 대신 도멘을, 이탈리아 와인은 까스텔로나 테누타를, 스페인 와인은 보데가스나 카스띠요를, 독일 와인은 바인굿을, 미국이나 칠레를 비롯한 신세계 와인 생산국가에서는 와이너리, 빈야드, 셀러 등을 이름에 붙이기도 합니다.
(1) 로제 와인
포도 껍질과 과육을 같이 넣고 발효시키다가 색이 우러나오면 껍질을 제거한 채 과즙을 가지고 제조하는 와인으로 색이 분홍빛이며 맛은 화이트 와인에 가깝다. 로제와인은 보존기간이 짧아 오래 숙성시키지 않으며 화이트 와인과 같이 차게 해서 마시는 것이 좋다.
때문에 외국의 노천카페나 해변에서 로제와인을 시원하게 해서 많이 마시며 ‘바캉스 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비를 지냈고, 열 명의 자식을 낳아 잉글랜드 두 왕의 모후가 되었던 12세기 유럽을 풍미했던 여인이었다. 그 후로도 그녀의 자손들은 대대로 유럽 제국의 왕과 황제, 왕비를 지냈다. 그녀가 ‘유럽의 할머니’라는 병칭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700년 이후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등장하면서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칭을 계승한다.
엘레오노르는 막대한 재력과 미모의 소유자였다. 열다섯의 나이에 중세 프랑스 왕의 영지보다 더 넓은 땅을 물려받아 중세 유럽의 가장 부유한 상속녀가 되었으며, 화려한 외모와 교태, 사교술 덕분에 끊임없이 스캔들을 몰고 다닌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고 자란 땅 아키텐(프랑스 남서부 일대)에 대해 평생 뜨거운 애정과 책임감을 잃지 않았던 자비로운 통치자였다. 차례로 왕위에 올랐던 두 아들, 사자왕 리차드 1세와 존 왕의 재위 기간 동안 누구보다 신뢰했던 섭정이자 조언자이기도 했다.
[ 볼레로의 작곡가, 라벨 ]
클라식 음악 중 가장 인기 있는 곡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보통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나 비발디의 <사계>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 태생의 모리스 라벨이 1928년에 발표한 <볼레로>가 단연 최고의 인기 곡입니다.
<볼레로>가 클라식과 팝 음악을 통틀어 단일 곡으로는 가장 많은 저작권 수입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 곡이 광고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라벨은 스페인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 서남부의 소도시 시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부르의 강변도로에 있는 관광 안내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건물 입구 벽면에 ‘이 집에서 모리스 라벨이 1875년 3월 7일에 태어났다’라는 표시에 눈길을 던집니다. 라벨의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바스크(1) 여인이었으니 그의 혈관 속에 반은 바스크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 라벨의 고향(왼편 빨간 점)
라벨은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부르가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볼레로>는 나중에 대서양의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이곳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 라벨이 태어난 집(가운데 높은 집)
그는 세 살 때 기사(技師)이며 과학적 지식과 폭넓은 예술적 교양을 갖추고 있던 아버지를따라 파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 사려 깊은 아버지는 아들의 최초의 음악공부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입이 험하기로 유명한 스트라빈스키(2)는 라벨을 가리켜 ‘스위스의 시계 제조 직공’이라고 말했습니다. 과히 틀린 말은 아닐 성 싶습니자. 라벨 자신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이지만 아버지가 스위스 출신의 철도기사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음악은 너무나도 치밀한 계산 아래 정교하게 쓰여져 스위스제 회중시계에 충분히 비유될 만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관현악곡 <볼레로>를 예를 들어 봅니다.
우선 저음 현악기 피치카토 3박자에 실려 작은북의 볼레로 리듬이 시작됩니다. 이 작은북 리듬은 전곡 연주에서 무려 169회나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되다 겨우 마지막 2소절에서만 해방되는 끈질긴 반복을 계속합니다. 또 뒤따라 들어오는 스페인 아라비아풍의 선율주제도 수없이 반복되지만 변주되거나 조성을 바꾸는 따위의 전개는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15분이나 걸리는 음악에서 이런 예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듯 반복을 거듭해도 듣는이에게 권태감을 주지 않으니 꼭 무슨 마술에라도 걸린 것만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음악계에서는 흔히들 라벨을 가리켜 ‘관현악의 마술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초인적인 마력이 있어서라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빈틈없는 계산 아래 정밀한 수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스트라빈스키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볼레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곡이 아주 여리게 시작해 조금씩, 그야말로 조금씩 끝까지 음량을 보태어가는 크레센도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투른 오케스트라가 멋모르고 좀 크게 출발했다가는 나중에 파워가 모자라 낭패를 보기 십상인즉 지휘자도 강약에 아주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하는 곡입니다.
‘관현악의 마술사’로서의 라벨의 실력은 편곡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원곡은 피아노 독주용이지만 하도 잘 되어 있어 많은 음악가들이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무소르그스크(3)의 유명한 <전람회의 그림>만 해도 라벨의 편곡이 우수해 오케스트라로 연주할 때는 보통 그의 것을 씁니다.
그는 어렸을 때 신동이라고 떠받들 만한 악재(樂才)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12세부터 화성을 배우고 작곡을 시도할 정도였습니다. 14세 때 파리 국립음악원 예과 피아노 클래스를 거쳐 16세 때 들어간 샤를르 드 베리오의 클래스에서 그는 스페인 선생 비네스를 만나 함께 현대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1895년 20세 때 음악원을 떠난 그는 <하바넬라> 등 독자적인 작풍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897년에는 다시 음악원에 돌아와서 포레의 작곡 클래스에 들어가서 관현악법을 배웠습니다.
1901년부터 3년 동안 그는 로마 대상 작곡 콩쿠르에 응모했다가 번번이 낙선하고 네 번째는 연령이 초과되었다는 이유로 응모 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둘러싸고 심사위원들의 라벨에 대한 편견이라며 파리 악단이 발칵 뒤집히는가 하면 로망 롤랭(4)까지 당국에 공개서한을 보내 항의하는 등 일대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라벨 사건’이었습니다. 라벨로서는 당국의 처사가 뼈에 사무쳤던 듯 훗날 그가 대성하고 나서 국가에서 수여하려고 했던 최고로 명예로운 상(賞)인 ‘레종 도뇌르 상’을 보기좋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로마 대상에 실패하면서도 <물의 장난>, <현악 4중주> 등 명곡을 발표해 이미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라벨을 공군에 입대를 지원했으나 신장, 체중 미달로 떨어졌습니다. 2년 뒤에야 겨우 수송대의 트럭 운전사로 뽑혀 입대한 라벨은 차 사고를 당하고 발에는 동상을 입고 이질에 걸려 오래지 않아 제대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사망하는 등 여러 가지 불행을 맞는 가운데 그는 전선에서 쓰러진 전우에게 바치는 곡으로 유명한 <쿠프랭의 무덤>을 썼습니다.
* 라벨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
라벨이 1929년에서 1931년 사이에 쓴 곡 중에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고>이 있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아노를 왼손으로만 연주하도록 한 이 곡은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명피아니스트 파울 뷔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했다고 합니다.
1932년 그는 또다시 자동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이 돌연 악화한 그는 폐인과도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37년 두부 외과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해 파리에서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1) 바스크
* 바스크족이 사는 곳
라벨은 프랑스 쪽 바스크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 바스크인들의 특징인 베레모
전통적으로는 프랑스와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을 가운데 두고 인근의 양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역이다. 바스크인은 인종적, 관습적으로 주변의 프랑스인·에스파냐인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눈썹이 짙고 강한 턱을 가지고 있다. 기질은 용감하고 모험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약 250만 명의 바스크인이 이 지역에 거주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부터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의 요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바스크 지역은 광산물이 풍부하며, 빌바오 등의 공업도시가 발달되어 있어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2)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882년 6월 17일, 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음악에의 동경과 그 재능에 따라 19세 때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인정받고 사사하며 생애의 방향이 정해졌다. 1910년 6월 25일 러시아 발레단이 그의 신작 <불새>를 파리에서 상연했을 때, 파리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독창적이고 현란한 음악은, 파리뿐 아니라 전 유럽과 이윽고 미 대륙에 그 파문을 던졌다.그러나 <봄의 제전>을 발표했을 때에는 맹렬한 비난이 난무하면서, 심지어 그를 음악 파괴자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그의 작품은 찬사를 받고 있다.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3) 무소르스키
러시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사관학교에 지원(당시 러시아는 음악원이 없었다),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청산하고 농노 해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뒤 창작에 몰두하였다.
미하일 글린카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국민 음악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지식은 빈약하였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으로 좋은 작곡을 하여, 프랑스 인상파 등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4) 로맹 롤랑
20세기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탁월한 인물이다. 프랑스의 작가, 평론가로서 소르본느 대학의 음악사 교수를 역임했다. 베토벤을 모델로 하여 쓴 장편소설 <쟝 크리스토프> 10권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반전을 주장하여 부득이 스위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