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혈모니(血牟尼)-3
장 소군은 아미파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다 하나의 결론을 내
렸다. 비전무공이 절전된 상황에서 강호의 유파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간단한 답을 냈다.
"아미파는 끝장이 난 셈이군요."
"그렇다. 비전무공이나 무학의 정수가 사라진 이상 아미파는
강호의 유파로 살아남기 어렵게 됐다. 이젠 평범한 절로 남아
야겠지. 비록 아미 무공의 정수를 모두 아는 인물이 한 사람
있지만... 불가능한 일이야."
"아미파는 그런 재앙을 맞아도 할 말이 없어요. 옥석을 구분
하지 못하니 당연히 문을 닫아야지요. 그리고 외삼촌이 말하
는 아미 무공의 정수를 아는 사람이 연화라면 아미파의 재건
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허허허, 과연 뛰어나구나. 사실 연화의 무공을 파악해 보면
하나같이 불문 무공의 정화다. 그리고 아미파가 옥석을 구분
못했다는 이야기가 정혜와 연화를 두고 한 말이라면 네 생각
이 잘못된 것이란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연화는 평범했고
정혜는 뛰어난 천재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연화의 재질과 재
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잠재돼 있어 누구도 알아내기 힘들
다."
연화의 재질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희 부성의 말은 장 소군을
어리둥절케 했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연화를 겉으로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 체질이
다. 아미파의 인물들이 그 정도로 눈이 없지는 않다는 이야기
이다."
"그런가요! 하지만 재능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둘째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으니 천벌을 받은 셈이죠. 오히려 혈모니라는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얻은 연화만 억울한 경우에요."
"연화가 혈모니라는 불길한 별호를 얻은 것은 아미산의 혈전
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사실 더 혈모니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아미산을 내려온 연화가 치른 두 번째 혈전 때문이다."
"두 번째 혈전이라고요?"
"그렇다. 아미산의 혈전보다 두 번째 혈전이 사천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장 소군은 연화의 두 번째 혈전이 어떤 싸움이었는지 궁금했
다. 도대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었기에 연화가 혈모니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장 소군은 시선은 냉
정한 외삼촌이 연화의 두 번째 혈전이 사천을 충격에 빠졌다
고 말하는 순간 입술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
는 희 부성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희 부성은 잠시 천
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장 소군에게 향한 후에 입을 열었다.
"연화는 아미산에서 자신을 모해(謀害)한 정혜를 만나지 못했
다. 그 당시 정혜는 아미산에 없었지. 연화는 두 원수 중에
하나인 설 기붕을 만나기 위해 설가장에 갔다. 그런데 설 기
붕은 사천덩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당 기붕이 된지 벌써 10
년이나 지난 뒤라 만나지 못했다. 연화는 설가장을 쑥밭으로
만든 후 사천당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당문은 준비를 하고 있었나요?"
"철저한 준비를 하고 연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화가 당문에
도착했을 당시 사천은 벌써 아미파와 설가장의 재앙으로 난
리가 아니었다. 당문은 정예뿐 아니라 금지된 암기까지 준비
했다."
"설마 오대금용암기(五大禁用暗器)까지 준비했단 말인가요?"
희 부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장 소군은 당
문이 강호에서 사용이 금지된 다섯 가지 암기마저 준비한 사
실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사천당문이 명예와 도의마저 내
던지고 연화를 상대할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희 부성은 장 소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희미한 웃
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연화는 당문에 도착하자 설 기붕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당문이니 당연히 설 기붕의 인도를
거절했겠군요."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 연화의
무위를 예측하고 있던 당문은 거절과 함께 독과 암기로 선제
공격을 시도했다."
"비겁하군요."
장 소군은 사천당문의 행동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화가 보여준 무위를 기억하자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
다. 오히려 '연화를 상대한다면 그 정도의 기습으로 효과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소군은 연화가 당문의
암기를 어떻게 피했을지 상상이 갔다. 암기의 달인은 암기의
방어법과 피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법이다.
장 소군은 연화가 당문에 못지 않은 암기의 달인인 것을 누
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칼 조각을 던져 잔마를 일격에
즉사시킨 암기술이 장 소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
소군은 당문의 어떠한 암기도 연화에겐 위협이 되지 못한다
고 결론을 내렸다. 오대금용암기조차도 연화에겐 무용지물
(無用之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장 소군이 궁금한 점은
독이 연화에게 얼마만큼의 효과를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문의 독이 연화에게 위협이 됐을까?'
당문의 독을 연화가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했다. 장 소군
은 희 부성에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암기는 연화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겠죠. 그런데 독은
모르겠어요."
"정확히 예측하는구나. 연화에겐 당문의 암기는 아무런 소용
이 없었다. 오대금용암기도 연화에겐 장난감에 불과했지. 무
려 백 여명이 넘는 당문의 정예가 연화의 손에 죽음을 당했
다. 그리고 당문이 자랑하는 십대절독도 연화에겐 아무런 소
용이 없었단다."
"독이 소용없다고요! 그럼 연화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백독불
침에 금강불괴라도 이루었단 말인가요?"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당문의 독이 연화에겐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정확하다."
"독도 안 된다. 차륜전도 안 된다. 그럼 무엇으로 연화를 상
대해야 하는가..."
장 소군은 당문의 독조차 연화에겐 소용없다는 사실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언젠가 꼭 쓰러트려야 할 존재인 연화의 약점
이 보이지 않아 답답해졌다. 연화에 대해 알수록 복수의 길
이 멀어져 가자 장 소군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하아~. 외삼촌 연화와 당문의 정예가 어떻게 싸웠는지 자세
히 설명해 주세요."
"흐음... 당문의 일백 정예는 연화에게 무차별로 독을 바른 암
기로 공격했다. 그들은 연화가 움직일 방위까지 계산해서 암
기를 날렸다. 그야말로 수백 개가 넘는 암기가 우박처럼 쏟아
졌지. 비수(匕首)와 건곤조구권(乾坤鳥龜圈), 자모원앙월(字母
鴛鴦鉞), 탈수표(脫手 ), 수전(袖箭), 유엽비도(柳葉飛刀), 비
차(飛叉),척전(擲箭), 철감람(鐵橄欖), 조인표(棗仁 ), 표도(
刀)등의 암기가 사방에 날아 다녔지만 연화에게는 아무런 소
용이 없었다. 연화가 무슨 공력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입
고 있던 승포가 부풀더니 그 많은 독 암기를 방패처럼 막았
다고 하더구나."
"승포에는 구멍하나 나지 않았겠죠."
"그렇단다."
장 소군은 희 부성의 대답이 없어도 연화가 별 타격을 입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승포가 부풀었다는 희 부성의 설명을 듣
는 순간 한 가지 무공의 명칭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는 그
무공은 내공을 체외로 발출해 방어벽을 만드는 최고의 호신
기공이었다. 게다가 그 무공을 익히면 독마저 체외로 간단
하게 배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밀종(密宗)의 거령금강력(巨靈金剛力)이 틀림없어. 연화는 밀
종의 비전마저 체득했다는 것이군. 그렇다면 독이 통하지 않
는 것이 당연하지.'
그녀가 희 부성조차 모르는 밀종의 비전을 알고 있는 것은
장씨 가문이 백년간 모아온 책들을 보관하는 서고에서 우연
히 발견한 유가밀전 덕분이다. 유가밀전은 밀종의 비전 종류
와 특징을 설명한 책으로 원 나라 시절 라마교에서 만든 책
이었다. 장 소군은 연화가 밀종의 비전마저 익히고 있다는
사실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섞인 한
숨이 나왔다.
"후우~..."
"무슨 한숨을 쉬느냐. 더한 내용은 나오지도 않았다."
"옛! 더한 것도 있단 말인가요?"
희 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당문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
냐?"
"그야 당문이 자랑하는 암기와 독이죠. 그리고... 독수여래 당
세진!"
"그렇다. 강호십대고수의 하나인 독수여래 당 세진이야말로
당문이 자랑하는 존재다. 강호인이 당문에서 가장 무서운 존
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름이지."
"당 세진과 연화가 격돌했군요."
"그렇다."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연화는 살았고 당 세진은 죽었다."
장 소군은 희 부성의 짧은 대답 속에 많은 뜻이 내포하고
있음을 느꼈다. 간단명료하지만 강한 뜻이 숨어 있었다. 하
지만 장 소군은 그 뜻을 찾아내는 것보다 독수여래 당 세진
은 연화를 상대로 어떤 수를 사용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
고 연화는 당 세진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하고 무슨 수로 공
략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된 거죠?"
"당 세진은 독과 암기로 연화를 공격했다. 그런데 연화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역시 승포를 부풀려 방어하는 이상
한 방어를 뚫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당문의 비전무공인 자하
독강(紫霞毒 )과 자하도법(紫霞刀法)까지 동원했지만 연화가
펼치는 창술 앞에 무릎을 끓고 말았다. 당 세진은 가문의 인
원이 도살을 당한 원한을 갚지 못하고 패배까지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해 자살을 했다."
"어이가 없군요. 비록 패배를 당했다 하더라도 내일을 기약할
줄 알아야 하는데 한 가문의 수장이 그렇게 무책임하다니 정
말 할 말이 없군요."
그 이름도 당당한 독수여래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에 장 소군
은 어이가 없었다. 장 소군은 수많은 무인들에게 두려움과
경이의 대상이었던 당 세진의 어이없는 몰락에 이상한 슬픔
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문의 수장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책임감조차 보이지 않고 자살로 도피한 당 세진이
너무나 비겁하고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인물을
두려워 한 무인들이 바보로 느껴지자 장 소군은 짜증이 났다.
장 소군은 당 세진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장 소군의 마음과 모르는 희 부성은 당 세진에 대한
평가를 내놓기 시작했다.
"천재의 비극이지. 당 세진은 서른이 되기도 전에 십대고수에
올랐다. 독과 암기라는 방비하기 힘든 무공 덕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천재성과 사천당문의 노력이 결합한 덕분에 얻은 명
예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제 생각대로 움직이던 그에게 패배
의 충격과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라난 인물은 어려움을 이기는 방
법을 모르는 법이죠."
"그 말이 맞다. 일찍 개화한 온실의 화초는 겨울을 나기 어렵
다는 말이 당 세진을 가리킨 꼴이 됐구나. 사실 당 세진은 젊
은 나이에 십대고수가 됐지만 그 이상의 평가를 받지는 못했
다. 오히려 예순이 넘어 십대고수에 오른 진룡거사 송자헌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발전을 해서 삼대이인의 한 사람으로 추
앙을 받고 있으며, 현재는 강호제일인이라는 조심스러운 반응
까지 있는데 비해 당 세진은 근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십대
고수로 불리면서도 그 이상의 경지는 개척하지 못했다."
"그렇겠죠. 외삼촌, 당 세진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해요. 그
것보다 당문이 입은 타격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데 알려 주
시겠어요?"
장 소군은 당 세진을 이야기하기 싫어 말을 돌렸다. 희 부
성은 그제 서야 조카가 당 세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
음을 눈치챘다. 당 세진의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와 사해방
의 어두운 그림자를 장 소군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
다. 희 부성은 장 소군의 내면에 깔린 어두움을 생각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 소군의 질문은 희 부성
이 생가하기엔 그 어두움을 건드리는 부분이라고 느꼈다.
희 부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결
론 내리고 말을 하기로 했다.
"사천당문이 받은 타격은 심각하다. 정예의 대부분을 잃었고
문주를 비롯해 원로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현재 당문은 과
부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나마 살아 남은 인물들은
내분에 휩싸였다."
"내분이요? 당문처럼 한 혈족으로 구성된 가문이 왜 내분에
빠졌나요?"
"당문은 내성(內姓)과 외성(外姓)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냐."
"네, 사천당문은 부계로 구성된 직계를 내성으로, 데릴사위로
들어온 사람과 그 후손을 외성으로 분류하죠... 그럼 내성과
외성이 내분에 빠진 건가요?"
"그렇단다. 당문의 비전무공을 독점해온 내성의 인물들이 기
본 무공만 익히는 외성의 인물들을 지배하는 구조였지. 외성
의 인물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워낙에 강한 힘을 가진 내성의
인물들에게 눌려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연
화와 격전을 치르고 나서 거의 모든 내성의 인물들이 몰살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힘이 약화되자 그동안 참아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분의 시초는 당문이 가진 구조적 특성 때문이군요."
장 소군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천당문의 내분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해방 역시 내분이 일어날 구조적
결함을 안고 시작한 방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
소군에게 사천당문이 처해 있는 사태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희 부성은 장 소군의 얼굴에 나타난 씁쓸한 표정을 읽었다.
예상한 대로 장 소군이 사천당문의 내분에서 사해방의 미래
를 생각하자 희 부성은 답답했다. 하지만 조카인 장 소군이
강해지기를 원하는 희 부성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차없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문의 내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성과 외성의 분란말
고도 내성끼리 문주 자리를 놓고 싸우는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친형제간이 싸운다는 건가요?"
"그렇다. 친형제만이 아니라 내성과 외성의 싸움에 여자들까
지 끼어 들었다."
"여자들이요?"
"과부들과 외성의 부인들까지 내분에 뛰어 들었다. 형제자매
가 모두 원수가 되었지. 거기에 형수와 제수까지 합세했으니
당문의 앞날이 재미있지 않겠느냐."
"외삼촌, 무슨 뜻으로 그 이야기까지 하신 건가요?"
장 소군은 희 부성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외삼촌이 조카에게 남매끼리 싸우라고 종용하다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요?"
"어차피 장 철군은 너를 혈육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를 경쟁자로 여겨 너를 위험에 빠트릴 작자다."
"그러나 장가의 종손이에요."
"네 부모를 죽인 여자의 소생이다. 네 조부도 그 점을 알고
계신다."
"네, 하지만 장가의 종손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아요. 오라버
니가 동해방의 주인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에요."
장 소군은 허탈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런데 희 부성은 장
소군의 음색에서 허탈함이 묻어 나오자 미소를 지었다.
"장 철군은 동해방의 차기 주인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장가의 종손으로서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됐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장 철군이 의문의 인물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그럼 척추가 박살나 평생 누운 채로 살아야 한
다는 사실도 알고 있느냐?"
"뭐라고요!"
장 소군은 깜짝 놀랐다. 연화의 일격에 오빠인 장 철군이
인사불성이 됐던 것을 목격했지만 그 정도로 중상인지는 몰
랐다. 장 소군은 오빠의 불행을 듣고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자기 모습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남에게는 잔
인해도 혈육이나 가까운 사람에겐 다정한 자신이 혈육의 불
행을 듣고도 담담하다 못해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
습에 환멸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오빠를 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냉
혹하고 인정머리 없는 여자로 변한 것일까?'
장 소군은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회의에 빠져들었다. 희 부
성은 차가운 안색에서 무표정한 안색으로 변하더니 고뇌에
빠진 장 소군을 바라만 보았다. 장 소군의 마음이 심각한
번뇌에 사로잡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희 부성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장 소군이 움직
이기를 기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이겨내야 하고 혈육이라도 냉정하게 버릴 줄 아는 인물이 되
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 부성은 시시각각 변하는 장 소군의 표정을 보다가 그녀가
연화와 어떤 악연을 맺었는지 궁금해졌다. 장 소군이 연화를
만났다는 것은 대화를 하면서 알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르
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아는지 얼마나 원한이 깊은지 자세히
알아야겠다고 희 부성은 생각했다. 잘못하다가는 조카의 생
명이 봄날의 꽃잎처럼 피자마자 사그라질 수 있다는 불행한
예상이 떠오른 것이다. 장 소군이 복잡한 시선을 지우지 못
하고 허공을 바라보자 희 부성은 질문을 던졌다.
"연화와 어떤 인연을 맺은 것이냐? 자세히 설명해 다오."
"후우... 연화를 만난 건 악삼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
이 발단이에요."
"악삼! 오행도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산동악가의 괴물을 쫓
고 있었느냐?"
"네, 외삼촌. 그런데 악삼을 잡기도 전에 연화를 만나 부하를
모두 잃었지요. 그 자리에 오빠와 학경자가 같이 있었죠."
"학경자는 보나마나 패배했을 것이고 장 철군은 불구가 됐
군."
희 부성은 장 철군이 어떻게 불구가 됐는지 알았다. 연화가
펼치는 일 격은 막지 못하면 바로 뼈가 부셔지고 살이 찢겨
나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화의 공격을 겉멋만 든 나약한 귀공자가 당해낼 리가 만무
하지. 강자와 겨루며 무공을 높은 경지에 오를 생각은 하지
않고 모략이나 꾸미고 남을 질투하기 바쁜 그런 비열한 놈이
어떻게 연화의 공격을 받아 내겠는가.'
희 부성은 장 철군이 생명을 건지고 불구가 된 것이 천운이
라는 생각을 했다. 장 소군은 그 날 있었던 내용을 설명했
다.
"네, 겨우 일 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불구가 될지는 몰랐어요.
그나마 학경자가 오빠를 구해 갔으니 생명이라도 건진 셈이
됐군요."
"학경자는 패를 잘못 선택했구나."
희 부성은 장 소군의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속에 숨어 있는
뜻을 모두 파악했다. 자신은 버리고 오빠만 구하고 도주한
학경자에 대한 분노를 찾아냈다. 장 소군의 말속에 숨어 있는
그 분노를 희 부성은 간단하게 찾아낸 것이다. 또한 학경자
가 장 철군을 최고의 패로 생각하고 움직였다는 점까지 알아
내고 비웃음을 던졌다.
"학경자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럴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지금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에요."
장 소군은 말을 하는 동시에 희 부성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희 부성은 장 소군의 서늘한 시선이 무엇을 말하
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 중요한 것은 네가 사해방에 되돌아가서 동해방의 소방
주로 되는 것이다."
"외삼촌의 뜻인가요? 아니면 다른 누구의 뜻인가요?"
"내 뜻도 있지만 네 할아버지의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네 마
음이 소방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느냐."
"호호호, 외삼촌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군요."
"세월이 지나면 네가 나보다 더 잘 볼 것이다. 너는 나보다
뛰어난 인재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
"과찬이에요. 외삼촌. 그것보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어요."
장 소군은 희 부성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묻고 싶은 게 무엇이냐?"
"살막과 연화의 관계가 궁금해요. 연화를 처음 들었을 때 외
삼촌의 표정은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게다가 연화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상당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더군요."
"흐음... 관찰력이 훌륭하구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면 바보지요."
"허허허, 그런가..."
희 부성은 너털웃음을 내어 상황을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장 소군은 끝까지 듣겠다는 자세를 고수했다.
"외삼촌에겐 그런 웃음이 어울리지 않아요. 싸늘한 미소가 맞
아요."
"알았다. 말해 주마. 내가 너에게 처음 한 말을 기억하느냐?"
"어떤 말씀을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본 막이 각파마다 간자를 풀어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 말
이다."
"기억하지요. 설마 아미파와 사천당문에 있는 간자들이 연화
손에 죽음을 당한 원한이 연화와 살막의 관계는 아니겠죠?"
장 소군은 말을 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물론 자파의 인물이
죽음을 당했다면 복수를 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간자의 경우
는 달랐다. 간자는 죽어도 보복전이 있을 수 없었다. 오히
려 죽음을 당한 간자는 외면을 하는 것이 이치였다.
"본 막은 연화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간자
때문은 아니다. 본 막이 연화를 추적하고 있는 것은 청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청부요?"
"본 막은 5개의 하부조직을 운영하고 있단다. 그 중 세 군데
에서 살인청부가 들어 왔는데 대상이 연화였다."
"하부조직의 이름을 제가 알 수 있나요?"
"궁금하다면 가르쳐 주마. 하나는 여인들로 구성된 백모란회
이고 다른 것들은 불구들이 모인 잔결방과 백정들 모임인 포
정루, 유생들이 생활하는 단심서원, 곡마단인 천예기단이다."
"백모란회, 잔결방, 포정루, 단심서원, 천예기단이라고요..."
희 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 소군은 외삼촌이 고개를 끄
덕이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어이
가 없었다. 희 부성이 말한 조직은 강호에서 오대살수조직으
로 불리는 살인귀들의 집합소였다.
"살막은 자객들의 암중 지배자인 가요?"
"사실 그렇다."
"재미있군요."
"그것도 맞다. 하지만 나는 네가 하루라도 일찍 사해방으로
돌아가는 일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럼 외삼촌을 기쁘게 해드려야겠군요. 내일 떠나겠어요."
"좋아. 갈 때 이 아홉 명과 동행하렴. 앞으로 너의 수족이 될
것이다."
아홉 사람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 소군 앞에서 무
릎을 끓었다. 그들은 부복한 채 침묵을 지켰다. 장 소군은
자기가 명령하면 이들이 자세를 푼다는 것을 짐작했다. 하지
만 일단 한 번만이라도 명령을 내리면 그 후로 수족을 자처
하면서 귀찮게 굴 거라는 예상까지 한 장 소군은 아무런 말
도 하지 않았다. 충성스런 수하가 생기는 일은 그녀도 바라
마지 않는 일이지만 생각지 않는 선물은 부담이 가는 법이다.
희 부성은 장 소군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아홉 명에 대해 설
명했다.
"앞으로 암살의 단계를 넘어 무력으로 너를 해치려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암살을 방비하는데는 암영대로 충분하지만 무
력이 동원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 아홉 명은 제법 뛰어
난 무공을 가지고 있으니 네 안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맙습니다. 외삼촌."
장 소군은 희 부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사해방
에 들어가는 순간 여태까지 해오던 방식과 다른 형태의 움직
임과 삶을 살기로 정했다. 그 삶이 얼마나 위험을 부르는
지 알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보호할 무력의 필요성을 절감하
고 있었다.
화월영은 실외로 나가면서 문고리에 가느다란 실을 매달았다.
그리고 20여장 정도 떨어져 있는 은밀한 자리에 주저앉았다.
팽팽하게 늘어진 명주실의 끝을 잡은 화월영은 눈을 감았다.
장 소군과 희 부성이 나누는 대화를 화월영은 도청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실내에 울려 퍼졌고 그 중에 일부
가 명주실에 전달돼 희미한 진동으로 바뀌었다.
화월영은 실의 진동을 이용해 대화를 도청하는 기술을 가지
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도청한
화월영은 포식한 고양이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필요한 정
보를 모두 얻었다고 생각한 화월영은 명주실을 살짝 잡아 당
겼다.
[뚝.]
문고리의 매듭이 가볍게 풀리더니 화월영 손에 명주실이 모
두 회수됐다. 단 한 점의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화월영의 도청능력은 정말 놀라웠다. 강호의 4대 정보 조직
이 얼마나 뛰어난 조직인지는 화월영이 잠시 보인 능력만으
로도 알 수가 있었다. 화월영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은밀
한 몸놀림으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화월영이 사라지자 조용한 파동이 일어났다. 작은 기의 파동
이었다. 기의 진원지는 화월영이 있던 곳에서 삼 장 정도 떨
어져 있는 고목이었다. 고목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
났다. 그는 화월영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요호 화월영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의 독백은 싸늘했다. 화월영이 자기 거처로 들어가는 것
을 목격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도 자기 거처로 향했
다. 작은 탁자와 일인용 침대만 있는 그의 거처는 보기에도
삭막했다. 하지만 그는 거처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
다. 탁자에 있는 술병을 들어 마개를 열었다. 좋은 술 한
잔과 하루 세끼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술을
벌컥벌컥 마신 그는 탁자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괜찮은 술이군."
그는 술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적당
히 취기가 오른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이
름은 혁무강이었다.
첫댓글 주인공 악삼은~~
감사...
감사합니다
즐독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ㄳ
즐독하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이랍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