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1972년 10월의 맑고 푸르고 하늘이 엄청나게 높던 날.
내가 태어난 곳은 영세...평창군 대화면 000번지가 내 출생지이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댕길 때 시내에 **약방집 아들과 **문구사집 아들은 둘이서 사촌지간이었다.
그 부잣집들 아~들 둘은 버덩말에 살았고 우리들은 조그마한 골안에들 살았다.
그러니 사촌형제는 천하무적 이었구 안하무인 이었다...
이 눔들이 교실에서 노는시간이면 원기소와 박카스를 울매나 약을 올리면서 쳐먹는지 우리는 그기 울매나
먹구 숩던지 그져 흐르는 침 만 삼킬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박카스 같은 것은 언감생심 이것은 부잣집 아이들이나 먹는 약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체육시간이면 나는 제일 좋았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가죽공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동네에서는 왕초 노릇을 할 수가 있던 때 였으니...오죽하면 공
주인중에 어떤 눔은 공을 땅볼로 차면 공이 빨리 닳는다고 공중으로 차라고 하면서 땅볼로 차면 끼워주지도 않는
넘들이 있을 시기니 오죽했겐?..
축구공이 제대로 된 공으로 마음껏 공을 찰 수 있다는 것이 가제나 공부하기 싫어하던 나에게는 최고로 기다려지는 시간....
고등학교 진학 할 무렵이 되어서 강릉에 상업핵교에 축구 특기생으로 원서를 넣는다고 하니 당시 아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아버이가 눈두 끔쩍 안 하신다.(아들은 객지에 내 보내믄 아 베린다는 것이다)
지금에 생각을 해보니 아버지 생각이 맞다라고 생각이 드는게 울 아버지가1,902년 생이시다.
나이로 봐서는 내 할아버지 뻘두 더 되는 그런 상황이었으니...
그러니 당시에 아버지두 강릉을 함 구경도 못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사 드는 것은...
난 여기가 아니면 고등학교 안 간다고 울미불미 떼를 썼지만 결국은 나의 완패로 끝이나고 나는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학교를 접을 생각이었는데...(중학교 때 내 생활기록부를 보믄 축구에 소질이 있는데 이로 인해 공부를 게을리 함)
우리 사랑방에 세들어사시던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대화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라는 것이다.
난 안 간다고 방파멕이를 쳤지만 결국은 타의 반 자의 반 해서리 대화 고등학교(당시 농고 잠업과)로 진학을 하고
학교 생활을 하게 되는데 가기 싫은 학교에 간기 공부는 될리가 만무하고 하교하고 나서는 맨날 동네 선,후배들과 공차는게
낙으로 알고 살고있었다.
우리 1년 선배들과 같이 점심시간이면 자장면 내기를 거의 매일 했는데 실력은 우리가 조금 나았는데두 우리는 매일
져야만 했다니요...
야들이 우리가 이기믄 단체기합을 들어와서는 뭐이 담배 조사를 한다나 우짼다나 핑계를 대민서 우리를 담날 공을 못차게
기합을 주는기 일명 고무의자...발뒷꿈치를 들고 무릎은 45도가 되도록 구부리고 팔은 앞으로 쭉뻗고 이런 자세로 30분
정도하게 되면 다음날은 다리에 알이 배어서 뛰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다닌다..이러니 우리가 이기믄 이기 큰일인기
공 안 차는 아들꺼지 피해를 주니 이길 수가 없는기라...ㅎㅎ
그 바람에 나는 읎는 자습서가 읎고 공책도 거의 매일 산다고 우리 어머이 고쟁이 속에 있는 돈을 맨날 같이 긁어갔지만
내 책가방에는 제대루 된 참고서는 한 권두 읎구 공책이나 겨우 과목당 한권 밖에는 없었으니...
이럴 즈음 군(郡) 체육대회가 열렸다.(당시는 군 체육대회가 지금은 노성제란 이름으로 매년 가을에 열린다.)
이 때 쯤 되면 면에서 공깨나 찬다는 사람들을 소집을 해서 약 보름정도 합숙을 하면서 체육대회에 대비하는데
그 선수들과 연습게임을 동네 선후배들과 같이 하는 과정에서 체육회 임원의 눈에 띠게 된 것 같은데 청년들이 부족할
시기였기에 어쩌다 나두 거기에 합류 할 수가 있었다...
물론 학교에 연락을 해서 아무개를 이번 군민체전에 선수로 기용해야하니 수업을 할애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당연히
학교에선 출석으로 인정을 하고 수업은 빼 준다는데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ㅎㅎㅎ
드디어 몇일을 그렇게 연습을 하고 체육대회가 열린 날 우리는 우후에 첫 게임을 하게 되었다.
전반전을 열심히 쫓아다니고 우리가 1골을 이기면서 하프타임이 되었는데 면장님두 오시구 각계 인사들이 찾아와서
꼭 이겨달라고 당부를 하시민서 격려를 해주시는데 기분이 아주 만빵인기라...ㅎㅎㅎ
그 다음에 박카스랑 삶은 달갱이 날 달갱이를 앞에 내놓고 마음껏 먹으라는데 달갱이는 그래도 많이는 못 먹어봤지만
먹어본지라 박카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
허이들은 박카스를 따서 훌쩍 하고는 단숨에 마셔버리는데 나는 이기 왜 안 따지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니까 이미 소주병과 환타병은 이빨루 몇번 따보았던 경험이 있는지라 이빨로 물어 뜯는데 아무리
뜯어도 열리지를 않는다...
이쪽으로 물어뜯어두 보구 저짝으로도 그래보구 해도 이거이 허옇게 되었는데도 도무지 열릴 생각을 안 하는데 소심했던
당시의 성격으로 누구에게 물어보지두 못 하고 그렇게 물고 뜯다가 후반전이 시작 되는데두 난 아직 박카스를 마시지
못하고 있었으니 증말로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ㅎㅎㅎ
운동장으로 밀려 들어가서 후반전을 하는기 이기 대체 공차는데 정신을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도 그럴 것이 박카스를 처음 대면하고 맛으 보겠다고 핸기 이걸 그냥 두고 들어갔으니 말이다...ㅎㅎ
우찌하여 그 1골을 잘 지켜서 우리가 이기고 나왔는데 잘 했다면서 등을 두드려 주는 면장님두 이장님두 내 눈에 뵈키지
않았으니 이제 박카스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선배들 먹는 걸 좀 봐야겠다.
겐데 이 허이들 좀 보게 양 손으로 쥐고 픽 돌리니 뚜껑이 열리는게 아닌가?.....오우 마이 갓...ㅎㅎㅎ
이기 밀폐식마개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고 난 그날 얼마나 많은 박카스를 마셋는지 댜음날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갈기면서 보니 오줌이 노랗다 못해서 아주 핏빛이 된게 변기를 뛰디린다...ㅋㅋㅋ
군대를 다녀와서 서울에 직장을 찾아간기 삼양라멘...ㅎㅎㅎ
여기서 직장선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우스워 죽는다고 발으 동동 구르든기.. 그 냥반 나를 부를 땐 어이 출세한 눔...
왜 내가 출세한 눔이냐고 선배는 철원 촌눔 아니냐고 따지면 넌 박카스도 못 따던 눔이 이제는 못 따는 병이 읎잔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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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원도 사투리 버젼으로 써봤어요..
옛날에 쓴 글인데 하두 오래돼서 다시 함 추억해볼라구요...
저도 이빨로 갉아서 결국은 벗겨먹고 다먹은 바카스병 뒤로세워놓고 많이도빨았지요
나랑 같은 넘이 하나 더 있었구만...
바부탱이 하나 추가요
옛날 생각에 잠시즐거웠음다...낭구하러 다니던시절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우리도 고등과 댕길 때까정 낭구하러 많이 다녔지요...
난 운동화 신고 가죽 가방 메고 핵교 댕겼는디
당근이쥐
아니 어른도 몬알아보고 크니리네~~~떽!!
우행님아옆에 없잖여유
촌넘
소쿠리엉아 맹라이
요넘이 떼끼 떼치하게
엉덩이 대
우히히히
이눔이 이거 이제는 엥기는구만 너 그러다 장 함 내려가면 죽는다....
쎈걸로 때려야겠어
연식이 월메 안디나봅니다.
내 어릴적엔 박카스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디....~~~^^
네이제 서른살됐어요
얼라네~~~~^^*
아직 얼마 안 묵었어요...
쿠리옹아 덩말 촌넘,출세 항거이 맞구먼유
그려 출세했제... 잘 올라간겨 새벽에 내려오는 바람에 인사도 못하고
어제 밤에 왔네유
담엔 남양주도 함 오이소
출세한넘 맞구만요 감유
자서전
내가 땅볼차기 똥볼차기 명수인데..ㅎㅎㅎ
나 왜그리 축구를 못했는지 차암...ㅋㅋ
몸매는 박지성인데....
ㅎㅎㅎ
바디빌딩을해서리
상체만 좋아요
간직하고픈 추억이 있으니 참 행복하지요?
삼륜차에 솥단지 싣고 고향 떠나올때 창문넘어 가로수가 휘익휘익 지나가는거 보고 기절한 사람도 있습니다~~
항복한고물이라니까요~~
푸하하~~동물원님요~~지가. 항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