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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해원(解怨)-1
운문상단의 상선 2척은 대운하의 북단을 유유히 타고 있었다.
상선 안에는 특별한 사건도 없이 시간만 흘러 다들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선상에서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
야 할까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갈씨 자매와 척금방, 황보영은
선상에서 즐기는 다과조차 지겨워져 무슨 사건이라도 생기지
않나 기대할 정도였다.
물론 마음 속으로 '오~ 이 편안한 세월이여 영원하라'를 외치
며 오수와 휴식으로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는 조 집사나 "술
은 내 친구야. 영원한 친구라고!"를 외치며 술병을 껴안고 선
실바닥을 구르는 석진은 예외에 해당하지만 다들 무료함에
지쳐가고 있었다. 물론 수부나 선원은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이었
다.
석진은 선실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손을 뻗어 술병을 집
었다. 그런데 술병이 자기 무게가 산뜻할 정도의 가볍다는
느낌을 석진의 손에 전달했다. 석진은 다시 한번 몸을 구르
곤 술병을 위로 올린 후엔 가볍게 흔들었다. 술병은 찰랑찰
랑 대는 소리를 기대하는 석진의 귀에 완벽한 침묵으로 '술이
없다네.'를 시위했다.
"이런 술이 다 떨어졌네..."
석진은 다시 한번 굴러 복부로 선실 바닥을 고정시키고 턱은
손바닥으로 괴는 이상적인 자세를 잡은 후 고민했다.
"술이 다 떨어졌으니... 이를 어쩐다. 돈형은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술 가져오라고 부탁도 못하고... 끄응~, 어쩔
수 없이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무려 반나절 동안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구르던 석진은 마침
내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직접 주방에 가서 술을 가져오고
덤으로 안주까지 챙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려 삼박사일에
걸쳐 선실에서 술과 함께 평화를 지켜오던 석진은 새로운 친
구를 만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컥!"
관절마디에서 산뜻한 소리가 울리더니 상쾌한 고통이 석진의
온 몸을 안마시켰다. 석진은 "컥."이라는 비참한 외마디를
자신도 모르게 지르고 말았다. 삼박사일동안 술병과 함께
방바닥을 긁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
가. 하지만 석진은 인상을 찌그리며 죄 없는 관절을 노려봤
다.
"아직도 팔팔한 성능을 유지해야 할 관절이 이따위야! 이거
문제가 있는데, 기분도 그런데 확 바꿔버릴까 보다."
석진은 관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듯이
뻔뻔하게 행동했다. 지가 잘못한 것은 생각도 않고 애꿎은
관절만 탓했다. 비록 주인을 잘못 만났다는 죄를 지었지만
욕을 먹고 그냥 있지는 않았다.
[와드득...]
"켁!"
석진이 몸을 일으키자 허리에서 듣기만 상쾌한 음악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무릎에서 난 소리는 허리에서 난 음악
소리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물론 통증
도 소리에 비례했다. 석진의 입에서 "컥."이 아니라"켁."이
나올 정도였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역시 석진의 관
절다웠다. 그야말로 그 주인에 그 관절이라 할까...
일단 삼박사일만에 일어난 석진은 온 몸에서 느껴지는 상쾌
한 고통에 이를 갈았다. 팔 다리와 허리를 조금씩 움직여 어
느 정도 움직임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자 석진은 주방을 향
했다. 석진은 주방을 습격한지 단 반 각만에 10개가 넘어
보이는 술병과 북경식 오리구이 2접시를 챙겼다. 만족할만
큼 술과 안주를 챙겼다고 생각한 석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선
실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다.
"석진 선배 오랜만이군요."
"어헉! 갈 소저..."
석진의 앞에 나타난 여인은 갈운지였다. 갈운지는 어느 순
간부터 석진을 강호의 선배로 대접했다. 그 순간이 석진이
무위를 보여주던 때라 문제지만... 그전까지 갈운지가 알고
있는 석진은 삼류건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곡
소쌍마가 무참하게 박살난 뒤부터 선배취급을 받게 된 것이
다.
강남전역을 공포로 채색한 곡소쌍마의 목숨 값이 한 소녀가
삼류건달을 선배로 격상시키는 가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면
거의 모든 강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 것이다. 곡
소쌍마가 비록 석진의 손에 죽음을 당했어도 그 정도의 가치
는 아니었다. 단지 갈운지 주변에 강자들이 모여 있어 곡소
쌍마와 같은 고수가 개뼈다귀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어머 근 나흘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 추레해 졌어
요?"
"허험... 그게..."
"완전히 상거지 그 자체네. 아이 냄새까지 심해요. 퀴퀴하고
시큼한데다 고기가 썩는 냄새까지..."
"아... 그게 말입니다."
"빨리 가서 목욕부터 하세요. 만약에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우기면 내 손으로 직접 목욕탕에다 던질 겁니다."
갈운지는 코를 막고 쉴새없이 종알댔다. 석진은 갈운지가
선배 대접을 하며 가깝게 다가 오는 것이 거북했다. 처음 만
났을 때처럼 단순한 삼류건달로 자신을 상대해 주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강호의 선배라며 대접을 한다
고 나서는 갈운지의 행동은 석진에게 상당한 불편을 주었다.
게다가 갈운지는 석진을 선배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
취급을 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석진은 빨리 갈운지의 마수에서 벗어나 안전한 선실에 들어
가 사냥한 10개의 술병과 두 마리의 오리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갈운지가 서있는 곳이 선실로 가는 길목이
었으니 석진에겐 심각한 문제이었다. 석진은 갈운지의 수
다를 대충 들어주다가 손살같이 선실로 들어가는 방법과 심
한 말을 해서 빠져나가는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떤 것을 선택
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생글거리는 갈운지의 얼굴을 보자
고민할 필요 없이 한 가지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말만한 처녀의 입으로 사내를 목욕탕에 던진다고 말하다니...
듣기 민망하오!"
"무엇이 민망해요?"
갈운지는 응답은 석진의 선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 그러냐는 듯이 바라봐 석진을 난감하
게 했다.
"아무리 갈 소저와 내 나이가 15년 차이가 있다지만 목욕탕
은 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구려."
"깔깔깔, 석진 선배님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오?"
석진은 갈운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리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왠지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쾌한 감
정이 솟구쳤다. 그런데 갈운지는 석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평소의 석진 선배님은 삼류건달 그 자체잖아요. 험한 입담이
기본인데 갑자기 무슨 도학자나 유학자 같은 말투를 사용하
니까 당연히 이상하죠."
"험... 그거야 상대에 따라 말투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오."
"헤, 아니죠. 그건 이중인격자나 위선자가 하는 자기 변명이
에요."
석진은 답답했다. 남자에게 대하듯 여자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인데 갈운지는 그런 행동을 위선자나 하
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이 난관을 벗
어날 수 있는지 모르니 아득하기만 했다.
"후우~."
"웬 한숨을 쉬세요. 혹시 목욕하기 싫어 그런 건가요. 그렇다
면 내가 당장 목욕탕으로 보내 드리죠."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석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고 갈운지는 목욕하기 싫어 발뺌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갈운지가 목욕탕을 운운하자 석진은 어이가 없어
먼 산을 바라보며 넋을 잃어 버렸다. 석진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향한 시선을 갈운지에게 옮기며 힘없이 말했다.
"도대체 아까부터 목욕탕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요?"
"냄새가 나고 더러우니까요."
"허허허, 빨래까지 해주겠다는 말투구려."
"빨래도 하는 셈이지요. 옷을 입은 채로 목욕탕에 들어가면
되니까요."
"헛! 정말 갈 소저가 하는 말은 들을수록 황당하구려. 도대체
목욕탕이 어디에 있소? 진정 궁금하구려."
"사방이 목욕탕이잖아요."
갈운지는 좌우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석진은 '이건 도대
체 무슨 말이야?'라고 묻고 싶은 표정으로 갈운지를 물끄러미
처다 보았다. 갈운지는 석진의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다 목욕탕이잖아요."
"허걱!"
방실거리며 말하는 갈운지가 석진의 눈에는 마녀로 비쳐졌다.
석진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새카맣게 죽어 버렸다.
"석진 선배님, 왜 그러세요?"
"지.. 지금 나보고 강으로 투신을 하라고 말한 것이오?"
"투신이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목욕을 편하게 하는 법
을 가르쳐 드린 건데요. 힘드신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헉!"
석진은 갈운지와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뒤로 움직였다. 그런
데 얼마나 놀랬는지 석진은 그만 발을 헛밟아 뒤로 비틀거렸
다. 석진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낀 갈운지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탄성을 질렀다.
"아하! 이제 알겠어요. 석진 선배님 걱정하지 마세요."
"무..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는 거요. 갈 소저."
"강에서 목욕하다가 배와 멀어질까봐 그러시는 거죠. 제게 좋
은 방법이 있어요."
"......"
혼자서 북 치고 장구까지 치니 석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석진은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갈운지는 벌벌 떠는 석진의 마음은 생각지 않고 허리에 매달
려 있는 채찍을 꺼내들었다.
"이 채찍으로 발을 묶고 목욕하시면 되요."
"헉!"
갈운지는 마녀였다. 아니 석진의 눈에 비친 갈운지는 마녀
이상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분가루를 바른 것 같은 석진의
안색은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갈운지는 석진의
안색에는 코빼기에 흐르는 땀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석진은 등골이 서늘해져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쳤다.
"아니 왜 그러시는 거 에요. 정말 목욕을 하지 않으실 거 에
요."
"갈.. 갈 소저..."
"네, 말씀하세요. 석진 선배님."
"내.. 내 한가지 말할게 있소이다."
"무엇인가요?"
"나는 육지 전용이오."
"네?"
석진이 사색이 돼서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갈운지는 알 수 없
었다. 갑자기 웬 육지타령이란 말인가. 갈운지는 시시각각
변하는 석진의 안색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석진은 갈운
지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
자 속이 탔다. 그러나 어차피 나온 말이니 모든 것을 밝혀야
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갈 소저도 알고 있듯이 나는 육지 전문 표사요."
"그건 저번에 말씀한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어... 설마 배 멀
미만 하는 게 아니라 자맥질도 못해요?"
"흐음... 그게 아무래도 내가 육지전용이다 보니... 어흠, 하지
만 산악이나 사막, 밀림을 비롯한 어떤 오지도 나에겐 놀이터
에 불과하오."
"단 물이 없을 때 놀이터겠지요."
석진은 갈운지의 시선을 외면했다. 보지 않아도 갈운지가 어
떤 시선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갈운지의 시선을 피해 이리 저리 돌리던 석진의 눈에 아리따
운 세 여인이 들어왔다. 석진은 속으로 '이거야말로 하늘이
나를 예쁘게 여겨 이 난국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타개책을
내리신 거다.'라고 생각하며 희희낙락했다.
"갈 소저, 보영 아가씨와 금방 아가씨가 갈 소저의 언니와 함
께 이곳으로 오고 있소."
"알고 있어요."
"그럼 갈 소저는 세 분 아가씨와 좋은 시간을 보내시오. 나는
이만 가보겠소."
"그러세요. 석진 선배님."
석진이 자리를 뜨겠다고 말하자 갈운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뜻대로 하시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떠나겠
다고 말을 꺼낸 석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
한 것이 정답이었다.
"갈 소저."
"말씀하세요. 석진 선배님."
"길을 비켜 주셔야 내가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두 사람이 마주친 곳은 선박의 중앙부 좌측 통로였다. 통로
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다. 사람들이 마주
친다면 한 사람이 난간위로 올라가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가
있어 선원이나 수부는 특별한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생활해
왔다. 그러나 그들에겐 별 문제가 없는 통로가 석진에게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석진은 바닥에서 발을 떼는 순간 지독한 배 멀미가 몰려오기
때문에 난간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특히 난간에서 떨어지는 순간 강바닥으로 추락한다는 사실이
석진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 멀미의 고통보다 더
한 물의 공포가 석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행히
도 갈운지가 난간으로 올라가 길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석진
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쉬었다. 하지만 한 번 닥친 불행은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운지야 뭐 하는 거니?"
갈운지가 난간 위에 오르려는 찰나에 갈운영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응, 석진 선배님이 선실에 갈수 있게 내가 난간 위로 오르는
거야."
"뭐라고! 아니 왜 네가 오르는 거니."
"그건..."
"석진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어째서 연약한 여자가 위
험한 일을 하고 건장한 남자가 편안한 길을 걷는 건가요!"
갈운영은 석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석진은 '일이
왜이리 꼬이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언니, 석진 선배님은 자맥질도 못한대. 그래서 내가 난간에
오르는 거야."
"뭐라고!"
"아니 운지 언니 말이 정말이에요. 어쩜 자맥질도 못하면서
어떻게 보표를 해요. 만약에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날이
있으면 그 날이 내 제사 날이네."
"그게..."
갈수록 태산이라는 속담이 왜 생겼는지 석진은 절감했다.
자신이 배 멀미를 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자맥질도 못해 물이
라면 질색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만 해도 억울한데 업종
마저 믿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돼 자존심에 금이 갔다. 비록
물에서는 약하다 해도 땅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자
신이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처량했
다. 특히 보표에 관해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자존심이 무
너지는 소리를 고용주에게 직접 듣는 악몽이 있을 줄은 꿈에
도 몰랐다. 석진은 처량한 자기 모습이 한심해 고개를 푹 숙
이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석진에겐 악몽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죠. 도저히 역겨워 참을 수가 없네요."
"보영 언니, 그건 석진 선배님 몸에서 나는 냄새인데요. 며칠
동안 씻지도 않고 술만 마시며 선실에서 뒹굴어서 그런 것이
에요."
"뭐라고! 씻지도 않고 술만 마셔... 석진 무사님 그렇게 안 봤
는데 그런 지저분한 생활을 하신 거죠?"
"보영 아가씨, 그게 말입니다..."
"이런 아무리 물이 무섭다고 해도 폐인 같은 생활을 하다니
문제가 있어요. 보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겠어요."
"폐인!"
아가씨 네 명이 석진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석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바로 목욕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해주십시오."
"좋아요. 그런데 그 술과 오리구이는 뭐죠?"
"이.. 이건 식사입니다. 금방 아가씨."
"석진 무사님..."
척금방은 석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석진은 술병과 오리구
이를 등뒤로 숨긴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이건 안됩니다. 저도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 에요?"
"사실은 술에 취해 있으면 흔들거려도 멀미가 나지 않습니다.
취해서 흔들리는 것으로 몸이 착각하니까요. 그런데 멀쩡한
정신으로 흔들리는 배 안에 있으면 바로 배 멀미가 납니다."
"그 거짓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죠."
"거짓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좋아요. 그 거짓말을 믿기로 하죠."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목욕을 하러 가겠습니다."
"냄새가 나니까 옷도 갈아입으세요."
네 여인이 옷을 갈아입을 것까지 요구했지만 석진은 빨리 피
하기만 원하느라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네 여인과 헤어지
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선상에서 움직일 때마다 사용하던 접
지보를 포기하고 공중으로 날아갔을 정도였다. 배 멀미를 조
금이라도 피해보려고 발바닥과 선상 바닥이 최대한 붙는 접
지보로 생활하던 석진이 허공으로 몸을 던질 정도였으니 얼
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석진은 속으로 '배 멀미를 하고 말지 더 이상은 같이 못 있겠
다.'라고 생각하고 상선의 중앙부에 있는 돛을 향해 과감하게
몸을 날렸지만 밀려드는 배 멀미를 느끼자 후회했다. 허나
네 여자와 헤어졌다는 기쁨이 배 멀미를 눌러버리는 괴력을
발휘하자 후회라는 감정은 가마솥에 들어간 얼음조각처럼 사
라졌다.
석진은 재빠르게 조 집사가 기거하는 거실로 달려갔다. 최대
한 빠른 속도로 움직여 네 여자와 조금이라도 멀어져야 한다
는 긴박함을 안고 달리는 석진은 정말 처량했다. 갈운지는
석진이 꽁지에 불붙은 참새처럼 도망가자 얼굴에 웃음이 번
지기 시작했다.
"호호호, 금방 동생 말이 맞네. 석진 선배가 정말 자맥질도
못해 물이라면 질색한다는 이야기가 정말이었어."
"나는 항상 진실을 말해요. 운지 언니."
"다들 오랜만에 웃어 보는구나."
"보영 언니, 웃는 건 좋은데 석진님한테 미안하군요. 무료한
기분을 달랜다고 한 장난치고는 너무 짓궂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운영 아우, 그래서 마음이 안 좋니."
"아뇨, 사실은 너무 재미있었어요."
황보영의 질문을 웃으면서 대답하는 갈운영의 자태는 가증스
러웠다. 그러나 석진은 이 사실을 몰랐다. 자기가 자맥질
을 못해 물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음을 척금방이 눈치를
채고 다른 아가씨들이 말했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또
한 지루한 선상생활로 무료한 네 아가씨가 이런 장난을 꾸민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 못했다.
석진은 지저분한 몰골을 정리해야 네 아가씨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만 했다. 조 집사는 석진이 들어오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통속소설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게 물들
이고 있었다. 석진에 못지 않게 선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취
미생활을 즐기다 보니 안 그래도 푸짐한 몸매가 환상적으로
변했지만 통속소설에 빠져 눈물을 흘리는 조 집사는 그 사실
을 인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휘어진 침대의 다리를 본다면 다들 "자네 몸매 좀 보게
나. 어떻게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찌는가!"라고 말할
것이지만 누구도 조 집사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 간이 배 밖으로 나가
다 못해 아예 사라진 석진이 들어 왔지만 제 발에 떨어진 발
등의 불에 신경이 팔렸으니...
조 집사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석진을 보자마자 보고 있던
소설책을 후다닥 숨기고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훔쳤다.
물기가 어린 붉어진 눈동자와 돼지를 초월해 하마를 연상시
키는 푸짐함을 자랑하는 조 집사를 보면 다들 한 마디를 했
겠지만 석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배 멀미로 울렁거
리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 집사는 오랜만에 본 석진이 거의 돼지우리에서 뛰쳐나온
거렁뱅이와 별 차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자 어이가 없었다.
또한 석진의 몸에서 나오는 환성적인 향기는 예민한 조 집사
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조 집사는 일단 코를 막고 석진에게
말했다.
"석진 무사님, 무슨 일입니까?"
"이보게 돈형. 나 좀 살려주게."
"네! 무슨 말씀입니까? 살려 달라니요?"
"부연 설명은 나중에 하겠네. 일단 내 부탁을 들어주게."
"아... 네, 말씀하십시오."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석진 무사님의 몰골을 보니 목욕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리고 새 옷도 준비하겠습니다."
조 집사는 석진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어떻게 하던
목욕을 하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석진이
제 입으로 제발 목욕을 하게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까지 하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이건 마치 소가 스스로 가죽을 벗어 피혁점에 진열하고 제
살을 먹기 좋게 자른 후 정육점에 받치는 꼴이 아닌가'
조 집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다. 석진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목욕을 할 수 있게 준비하기 위해 조 집
사는 오랜만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출렁. 출렁.]
[뿌지직...]
조 집사가 몸을 일으키자 살과 비계가 춤을 추었고 무게 중
심이 갑자기 변하자 침대 다리는 요동을 쳤다. 석진은 멍하
니 조 집사를 바라보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자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허어! 자네..."
"말씀하십시오. 석진 무사님."
"웬만하면 살 좀 빼게나. 자네 침대가 불쌍하네."
오십보 백보(五十步 百步)는 두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상대가 문제가 있다며 어떻게 고쳐야
하나 생각했다. 두 사람은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버렸다.
강 집법과 한 집법은 네 아가씨가 석진을 바보로 만드는 장
면을 숨어서 구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상선 안에 있는 고
수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적지에 들어온 이상 감
시는 생존의 필수인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석진이
바보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여보게 한 집법."
"말하시게."
"우리가 계속 저 바보들을 감시해야 하는가."
"후우~, 사실 나도 회의를 느끼고 있네."
"어쩌다가 저런 바보들을 관찰하는 일을 우리가 하게 됐는지
모르겠어. 집법사자 중에 최고의 실력자로 불리는 자네와 내
가 말이네."
"허허허... 한 놈은 배 멀미에 자맥질도 못해 여인들에게 놀림
을 받고 다른 한 놈은 책을 보며 눈물이나 흘리니..."
두 사람은 상대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짓다가 고개를 도리도
리 흔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석진이나 조 집사를 감시하는
일이 그들에게 회의와 허탈감을 주었다.
"악삼을 감시하는 영주가 부럽구먼. 그래도 그 놈은 제법 사
람다운 구석이나 있으니 말이네. 차라리 저 둘을 감시하려니
눈을 감고 싶어지네."
"하지만 저 세 여인은 감시할 만 하지 않은가."
"흐흐흐, 갈씨 자매와 척가 계집은 정말 감시할 만 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저만한 미인들을 구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가끔씩 눈요기도 하니 석 바위와 조 돼
지를 감시하면 생기는 울화가 다 날아가지."
두 사람은 음충맞은 웃음을 지으며 종알대는 네 송이 꽃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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