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3장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③ |
死刑선고로 난장판이 된 법정
그는 히죽히죽 비웃는 웃음을 떠올렸고 다른 피고인들은 무표정했다, 11시2분쯤 김태현 검사 등 세 명의 검사가 들어왔다. 뒤이어 박정표 판사 등 세 판사가 입장했다. 피고인들은 모두 일어났다. 박정표 재판장은 “김금식, 김기철, 최형욱”이라고 세 사람을 차례로 부르더니 “사형을 선고한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朴 판사는 이들에게 한 번 더 알려주려는 듯 “너희들 알았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오른쪽의 송기방 판사에게 판결 이유문을 읽도록 했다. 이런 선고 방식은 퍽 드문 것이었다. 판결 이유문을 먼저 읽고 刑量(형량)을 적은 主文(주문)을 낭독하는 것이 상례인데 박 판사는 거꾸로 진행했던 것이다.
宋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때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법정의 공기를 가르는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이놈들아, 날 죽여라.”
여광석 피고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하나의 신호였다.
“판결 이유는 읽어서 뭘 해!”
“판사 앞에서 왜 말 못해? 여기는 억울한 사람뿐이다.”
“억울하다, 나도 죽여라!”
그때까지 넉 달 동안 얌전하게 재판을 지켜보아왔던 피고 가족들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 간수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일부 방청객들은 판사 자리에까지 뛰어올라갔다. ‘이게 무슨 재판이냐’고 주저앉아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찰관들이 들어와 가족들을 법정 바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들은 바깥복도에서 법정 문을 두들기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高 피고인은 ‘욱’하면서 졸도해버렸다. 최형욱 씨는 “어떤 놈들이 이런 판결을 내렸느냐?”고 절규했다. 김금식 피고인은 “이 따위 판결이 어딨어?”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宋 판사의 판결 이유문 낭독을 듣는 사람은 그를 에워싼 취재 기자들뿐이었다. 이유문 낭독 소리는 피고들과 가족들의 저주와 고함 소리에 눌려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김금식이다. 증인 구영근이가 쇠고랑을 차고 내가 증언대에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김금식 씨는 여유 있게 웃음을 띠고 적당히 성도 내어가면서 이 북새통 속에서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기에 바빴다. 그는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연배우의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宋 판사가 읽은 판결문의 알맹이는 이러했다.
<검사의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검찰과 재판부가 현장검증을 마치고 채택한 증거품인 노끈, 마분지 상자, 칼을 확실한 증거품으로 인정하는 한편, 피고인 김금식이 9회 공판 때까지 시종일관 범행을 시인한 진술과 이에 따른 물증 및 증언, 그리고 대구교도소를 출소한 날짜가 근하군이 살해된 10월17일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모두 충분하다고 인정한다. 진술을 번복하기 시작한 10회 공판 이후의 피고들 진술은 증거와 타당성이 없는 횡성수설에 불과하다.>
박정표 재판장은 또 여광석 교도에겐 징역 5년, 이석연 교도보에 징역 2년, 고·정 두 교도에겐 징역 여덟 달씩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대해 김태현 검사는 “준엄한 법의 正義(정의)를 보여주는 지당한 판결이었다”고 평했다. 서윤학 변호사는 격한 말을 했다.
“한심한 판결이다. 재판소는 부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죄를 밝혀내고야 말겠다.”
서 변호사나 한봉세 변호사는 그러나 1심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두 사람은 피고인들에게 몇 번이나 “여기서는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최형욱 씨도, “결과가 그렇게 나올 줄 예측은 했었다”고 말했다. “재판진행이 피고들에게 불공평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억울한 사정을 진술하려고 하면 번번이 판사가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막는 등 편파적인 진행을 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장소는 부산이었다. 부산의 검찰이 사건을 조작하기엔 편리한 곳이었다. 근하 군이 살해된 그날 밤에 나는 집에서 잠을 잤고 이 사실을 옆방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검찰 측이 철도 공무원인 옆방 사람이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었다.”
피고들이 재판부를 덜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막판에 가서 금식, 대범 씨가 범행을 부인하는 등 피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져 은근히 희망을 갖게 됐는데 死刑(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니 그들의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김기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말이 떨어졌을 때 나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같이 느꼈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아침 우리를 호송해간 교도관들이 ‘선고를 받거든 조용히 해! 무엇을 부수거나 해서는 안 돼!’라고 주의를 준 것이 사형 선고를 예감케 했지만, 나는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감방으로 돌아온 나는 몸뚱이를 가눌 길 없어 벌렁 자빠졌다.>(<부산일보> 1969년 8월2일, 김기철 씨 수기)
이 드라마의 각본을 쓴 장본인 김금식 씨도 불안했다.
<死色(사색)이 된 동료들 때문에 나도 일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2심이 있고 마지막 대법원에서의 재판이 있으니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질 것이라 믿었지만 ‘誤判(오판)은 선진국에서도 흔히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국제신보> 1969년 12월15일 김금식 씨 수기)
일부 취재 기자들에게도 유죄 선고는 뜻밖이었다. 처음부터 수사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신상욱 씨(당시 합동통신 기자)는 “이럴 때는 정말 하느님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피고들은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검찰도 교도관들의 선고 형량에 불만이 있다는 형식상의 이유를 들어 항소했다.
형제 69노26
서기 1969년 1월31일
대구고등법원 귀중
대구교도소 재감 피고인 김기철(32세)
본적 경남 밀양군 무안면 무안리 828번지의 18
현주소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2동 14통 5반
본 피고인은 서기 1968년 11월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등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판결에 불복코 항소를 제기합니다.
법은 분명 뭇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몇몇 수사관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법은 죄인을 벌하고 죄 없는 사람은 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본 피고인과 같은 경우는 위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방증이 없는 진술은 유죄로 인정치 못할 것인즉 어떻게 유죄로 판결을 내렸는지 본 피고인에게는 정말 이상한 누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약하고 무식한 피고이지만 흉측한 누명을 쓰고 죽어야 하겠음은 생명이 있는 한 본건 사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말 것입니다.
정신이상자와도 같은 두 사람의 방증이 없는 진술을 인정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오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피고인의 누명을 쓰게 된 시초를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올리오니 재삼 관찰하시와 사필귀정의 판결이 내리시기를 바라면서,
1. 본 피고인은 서기 1961년 7월에 제대하여 그 후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여 생계유지를 해오던 중, 서기 1967년 친우 최두영이의 알선으로 9월1일부로 부산시 개금동 소재 동일교통주식회사에 종업원으로 종사 중 서기 1968년 5월4일 오후 9시경 본 피고인의 본가에서 뜻 아닌 수사관들의 습격을 받아 감금된 이후 말 못할 정도의 흉측한 고문을 받고서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오던 중 흉측스럽게도 본건 사건의 진범으로 누명을 쓰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2. 혹독한 고문으로 흉측한 누명을 씌워놓고 현장 조사를 다닌다면서 본 피고인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짐승을 끌고 다니듯 하면서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최형욱이(注-필자가 붙인가명)와 정대범이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같이 검사님은 허위진술, 조작하였던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흉측한 고문 자체가 위법이 아니겠습니까. 본 피고인도 법에는 응해야 하는 피고입니다. 그러기에 법을 다스리는 수사관님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매를 맞았습니다. 이렇게 누명을 쓰는 데는 법이라 해도 응할 수 없습니다. 본 피고인이 죄가 있다면 정신이상자를 알았다는 죄뿐입니다.
그리고 검사님의 엉터리 공소사실을 보면 교묘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만 본 피고인이 모르는 공소사실을 누가 만든 것인지 의문이며 오늘날 법치국가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면 백성들은 공포심에 살아가기가 곤란할 것이며 사회는 무법국가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검사님의 엉터리 조서를 인정하고 병만을 만들어 약만 팔아서 자기의 이욕만 채우려는 돌팔이 의사에 비할 바 없는 위법 검찰관님의 엉터리로 작성된 조서만으로 오인을 하고 유죄로 판결을 내렸음은 부당한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송기간 6개월을 두고 조사를 하였지만 어느 누구가 진범이다 하는 증인도 없고 증거물도 없는데 단순히 정신이상자와 같은 김금식이와 정대범 피고인의 방증이 없는 진술로 죄 없는 사람을 진범으로 인정하였음은 법치국가에서는 행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4. 분명 본 피고인은 사건 당일 동일교통주식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서면과 같이 근무한 사람으로서 경남 영업용 1195 차주 김항구와 경남 영업용 1194 차주 김상태, 그리고 동일교통주식회사 내 조수 이석우 등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검사님은 증인을 거절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회사에서 모든 잡일을 보았습니다. 오전 6시부터 배차를 하고 있는데 배차원이 아침 일찍 나오지 않기 때문에 본 피고인은 회사에서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오전 6시부터는 본 피고인이 배차원이 나올 동안 보아주고 배차원이 출근을 하면 배차 일지를 인계하여줍니다.
배차를 보아주라는 회사에서의 지시는 없지만 배차원을 생각해서 보아주고 했습니다. 본 피고인이 근무하는 날까지는 이런 식으로 근무하여 왔습니다. 사건당일 본 피고인이 배차표에 기재되어 있는 필적도, 배차일지에도 본 피고인 필적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사님은 허위조작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본 피고인의 회사에서는 배차 일지와 배차표가 있습니다. 배차 일지는 회사에 보관되고 배차표는 각 차에 한 장씩, 아침 첫 배차할 적에 가지게 됩니다.
혹시 이런 수는 있습니다. 본 피고인이 글씨가 나빠서 배차원이 출근하여 배차 일지를 보고 글씨가 나쁘면 다시 작성할 수 있지만 차들이 가지고 다니는 배차표는 잊어버리든가 찢어지면 다시 작성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다시 작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기 1967년 10월18일 사건 이튿날 배차 일지에는 본 피고인의 필적이 아니고 배차표에는 본 피고인의 필적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사님은 조작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서기 1967년에는 만나보지도 못한 김금식이를 만난 것처럼 하고 본건 사건을 조작하였던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서기 1968년 1월 초순경에 김금식이가 찾아와 만난 사실은 있습니다. 서기1968년 1월 초순경에 만난 김금식이를 검사님은 서기 1967년 10월17일에 만난 것처럼 하고 본 피고인이 대구에 간 사실도 없는데 대구에 올라가서 불법 출소한 김금식이를 만나 볼 박스를 사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와 미리 약속한 정대범이를 본 피고인이 인사를 시키고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 소재 진주상회에 가서 술을 먹고 또다시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 소재 돼지국밥집에 가서 술과 국밥을 먹고 거기서 9시경에 사건 장소에 가서 김금식이와 본 피고인은 망을 보고 있었다고 검사님은 주장하고 있지만 본 피고인은 사건장소도 모르고 죽은 사람의 얼굴도 모르는 것만도 아니라 몇 살이나 먹었는지도 본 피고인은 모릅니다.
5. 현명하신 재판장님. 끝으로 재삼 관찰하시와 사필귀정의 판결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유서를 대합니다.
서기 1969년 1월31일
대구교도소재감 피고인 김기철
본인의 무인임을 증명함 교도보 이상억
피고들과 그 가족들에게 있어서 1심 선고 날부터 2심 공판 시작까지의 석 달간은 피를 마르게 하는 고통의 계절이었다.
그들이 억울하다는 울부짖음은 사형 선고라는 ‘유죄 公認(공인)’으로 제3자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어져버렸다. 더구나 1968년 12월3일 군사법정에서 정대범 씨마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기철이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 나는 방청석에서 잠시 기절해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고물상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계속 술만 퍼마시기 시작했지요. 이웃과 만나는 것도 겁이 납디다. 내가 아무리 변명을 하고 이웃사람들이 아무리 위로 말을 해도 그들은 속으로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김이만 씨의 말)
기철 씨가 잡혀간 뒤 화병으로 자리에 누웠던 그의 어머니가 “너희들 면회 가지 마라. 기철이는 곧 나올 거야”라는 헛소리를 하다가 숨을 거둔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감방 속의 피고들이 느꼈을 불안은 상상만으로 족할 것이다. 법정에서 아무리 애절하게 자신들의 무고를 외쳐대도 ‘현명한’ 판사들에겐 흉악범들의 몸부림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 했을 때의 무력감과 배신감, 이런 誤判(오판)이 앞으로도 되풀이돼 ‘법정살인’의 희생물이 되고야 말 것이란 불안감은 그들의 가슴을 죄고 속골을 쑤셨을 터이다.
“내 목 갖고 가십시오”
무대는 이제 대구로 옮겨졌다. 그것은 큰 변화였다. 부산지검이 부산교도소나 부산지법이나 부산의 기자들과 부산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대구교도소, 대구고등법원, 대구의 기자들과 대구 사람들에게는 통할 리가 없었다.
“대구교도소로 옮겨오니 우선 대우가 달라집디다. 부산에 있을 때는 줄곧 가죽 수갑을 차고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풀리고 모두 동정의 눈초리로 저희를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교도소 직원들은 동료 직원들과 우리가 모두 억울하게 엮이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는 훌륭한 판사들이 사건을 맡았으니 안심해도 좋은 것이라고 위로도 해주더군요.”(최형욱 씨의 회고)
2심의 재판장은 공교롭게도 김태현 부장검사 이름과 한자까지 꼭 같은 김태현 부장판사였다. 검찰은 김태현, 정경식, 이원형 검사를 임시로 대구고검에 발령, 이 사건을 맡게 했다. 항소심 첫 공판은 해가 바뀌어 1969년 2월21일 대구고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모든 피고인들은 검찰의 기소 사실을 부인했다. 김금식 씨는 검사들을 비웃듯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더 농락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법정 신문도 김금식 씨의 불법 출소 여부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검찰의 신문은 거의가 1심에서 되풀이된 내용이었다. 변호인단(서윤학, 박찬)에선 “2심 구류 만기가 3월22일이니 원심에서 신문한 사실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첫 공판이 끝난 뒤 김태현 부장판사는 어떤 확신을 얻었는지 “이 재판은 질질 끌 필요가 없겠다”고 徐 변호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7일 뒤 두 번째 공판, 이날에도 불법 출소 문제가 주로 거론됐다. 김금식 씨는 거듭 “검찰 신문 조서에 기록된 내용은 전부 거짓말이다. 항소심에서 진술하는 것만이 사실이다”고 말하며 불법 출소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또 검사들을 향해 “당신네들을 위해 죽어달라면 죽어줄 용의도 있다”고 내뱉기도 했다. 2차 공판을 끝낸 뒤 재판부는 검사들과 변호인단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정대범 씨를 신문하기 위해서였다.
정대범 씨는 1968년 12월3일 군수기지 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서울 고등군법회의에 넘어가 있었다. 서울행 기차간에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함께 탔지만 재판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의 군 교도소로 정대범 씨를 찾아간 그들은 바로 신문에 들어갔다. 정 씨는 물론 범행 일체를 부인했다. 金 검사가 “1심에서는 시인하다가 왜 번복을 하느냐?”고 물었다. 정 씨는 “그건 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 하고 싶어 시인을 했습니까? 내 목숨이 그렇게 갖고 싶거든 갖고 가십시오”라고 쏘아붙이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이어서 鄭 씨는 金 판사에게 “대구로 내려가시거든 피고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재판부는 鄭 씨에 대한 출장 신문을 끝으로 법정 신문을 끝냈다. 3월7일 검찰 측은 1심 형량과 꼭 같은 구형을 했다. 이제 피고인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꼭 같은 검사에 꼭 같은 구형은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