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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해원(解怨)-2
운문상회의 상선에서 악삼은 만나기 힘든 존재였다. 선실에
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자은 선생과 조 집사는 만나
거나 보기 힘든 사람에 속했지만 악삼에 비하면 얼굴을 자주
비춘다고 말할 정도다. 그들은 최소한 하루에 세 번은 사람
들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인 이상 식사 때만큼은 선실에서 나와야 했던 것이다.
물론 식사조차 포기하고 술로 영양을 섭취하며 선실 바닥을
구른 석진이 있지만 그 조차 술이 떨어지면 주방을 향했다.
그러나 악삼은 상선에 오른 날부터 단 하루도 선실에서 나오
지 않았다. 선실에다 준비한 식량으로 식사하며 밖으로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악삼은 단 한번도 얼굴도 비추지 않고 선실에서 무공수련만
했다. 갈운지는 악삼을 걱정했다. 단 한번도 선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불안한 생각이 들어 악삼의 거처에서 서성이기
도 했다. 갈운영은 특별할 것 없는 폐관수련이니 큰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달래 주었으나 갈운지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
다.
악삼이 빨리 폐관을 깨고 선실 밖으로 나오기만 고대했다.
그리고 갈운지와 다른 뜻을 가졌지만 악삼이 폐관을 끝내고
선실 밖으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더 있었다. 그는 환
객이었다.
선실 안은 어둠이 가득했다. 닫혀진 창문 사이로 강렬한 햇
볕이 한 줄기 흘러 들어오고 있었지만 선실 안에 퍼져 있는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팍. 화르륵...]
갑자기 화섭자에 불이 붙었다. 꺼진 촛불을 화섭자가 바람
처럼 스쳐 지나갔다. 12개나 되는 초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
기 시작했다. 방안은 촛불로 인해 밝아진 것이다.
[파박.]
방안에서 갑자기 강렬한 파공성이 터졌다. 촛불은 일제히 꺼
져 버리더니 선실 안은 다시 어둠 속에 파묻혔다. 파공성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촛불을 꺼트린 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
다. 다시 화섭자에 불이 붙더니 초들 사이를 유영했다. 12
개의 초에 불꽃이 타오르자 어둠에 묻혀 있던 방안은 다시
밝아졌다.
"태을지의 기본 오대요결은 정리가 됐군."
악삼은 삼일동안 태을지에 매달려 많은 소득을 얻었다. 촛
불이 갑자기 꺼진 것은 악삼이 태을지의 수련과정에서 나타
난 현상이었다. 악삼은 눈을 감고 태을지의 오대요결을 머
릿속에서 정리했다.
폭(爆).
음양오행의 일곱 종의 진기가 뭉쳐다가 목표점에 도달하면
나선형으로 소용돌이치며 목표물을 산산조각내는 용법이다.
태을지의 오대요결 중에 가장 파괴적인 위력을 가졌다. 극성
으로 펼친 폭결은 시신조차 남기지 않는 잔혹함을 가지고 있
어 악마의 손가락이라고 불리고 있다.
진(振).
음양이기를 사용하는 요결로 목표물의 내부를 박살내는 용법
이다. 목표물에 침투한 음양이기는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켜
오장육부를 뒤흔들어 장파열을 유도하는 용법이다. 극한에 이
르면 격중된 상대가 충격을 견디지 못해 폭발해 버리는 만큼
사악한 무공으로 오인할 소지가 많은 무공이다. 또한 격공장
이나 벽공장을 허공에서 분쇄시키는 방어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운영의 묘를 가지고 있다.
투(透).
음양이기 중에 음기를 사용해 오행기를 날리는 요결이다. 음
유한 공력으로 화기(火氣)나 수기(水氣) 또는 다른 오행기 중
에 하나를 담아 지력을 날리는 기법으로 방어가 불가능한 용
법이다. 게다가 격산타우의 묘결이 있어 지력이 앞사람을
통과해 원하는 목표물만 타격을 입히는 용법도 가지고 있다.
탄(彈).
음양이기 중에 양기를 사용해 오행기를 날리는 요결로 투와
반대의 요결이다. 양강한 공력에 오행기 중에 하나를 담아
적을 격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
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점(點).
음양오행의 기 중에 하나를 사용해 상대방의 혈도를 제압하
는 요결이다. 인체의 각 혈도를 파악하고 있어야 사용이 가
능한 방법으로 생사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생사결이라
고 부르기도 한다. 제압한 적을 3일이든 100일 이내든 원하
는 시간에 죽음을 접하게 할 수 있으니 생사결이라 부르는
것이 절대로 잘못된 이름은 아니었다. 특히 점의 요결로 제
압한 상대는 오직 태을진기로만 해혈이 가능해 협박이나 고
문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태을지의 오대요결을 정리한 셈이니 이제 3단계만 남았군."
태을지는 초입부인 1단계와 오대요결을 사용할 수 있는 2단
계, 종반부인 3단계로 구성돼 있다. 악삼은 태을지의 2단계
를 완성해 3단계를 바라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선실에서
태을진결의 내공 수련과 태을지의 용법을 갈고 닦은 결과였
다.
"3단계를 익히려면 태을선천강기(太乙先天 氣)를 완성해야
하는데..."
태을선천강기는 태을진결의 3부에 있는 내공의 정화였다.
일곱 종의 이종진기(異種眞氣)를 융합해 일원기(一元氣)로 만
든 후에야 익힐 수 있는 것이 태을선천강기였다. 복잡한 내
력을 순수한 하나의 공력으로 완성해야 접근이 가능한 만큼
위력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악삼이 태을진결의 3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암울했다.
칠종의 이종진기를 융합하는 과정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융합과정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일단 음양오행의 일곱 가지 내공을 극
한까지 올려야 했고 둘째로 칠종의 이종진기들이 조합되도록
수준을 맞춰야 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다른 내공에 비해 수준이 높아도 안 되고
낮아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만큼 일원기를 얻는 과정은 아득
했다. 그리고 일원기를 얻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
었다. 일원기는 태을선천강기를 익힐 수 있는 기본이 됐다
는 것에 불과했다.
또한 태을선천강기를 완성했다고 해서 태을지의 3단계를 마
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태을지의 3단계는
따로이 무극지(無極指)라 불리는데 특별한 깨달음이 있어야
익힐 수 있다. 무극(無極)의 힘을 사용한다는 무극지가 어떤
위력인지는 태을지의 전승자인 악삼도 정확히 모르고 있다.
진박노조는 태을지의 진정한 위력은 무극지라며 비급에 유훈
을 남겼다. 그러나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가공스
런 무공인지는 초현을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
을지 2단계로도 십대고수급의 무위를 발휘할 정도이니 그 위
력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도대체 3단계는 어느 정도일까?"
악삼은 태을지의 3단계를 생각하다가 과연 피와 살로 이루어
진 인간이 신선이나 사용할 것 같은 무극지를 익힐 수 있을
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며 고개를 흔
들다가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악삼은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익히고 말리라."
악삼은 태을지의 끝을 볼 것이라며 맹세했다. 태을지의 오
대요결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결심을 굳혔다. 악삼은 촛불
을 노려보다가 손가락을 쫙 폈다.
[휘이잉.]
점의 요결은 촛불을 꺼버렸고 폭의 요결은 불꽃의 회오리를
만들었다. 다른 촛불을 향해 악삼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쓱.]
촛불은 한 점의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악삼이 가리킨 촛
불 뒤에 있는 다른 촛불은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꺼져
버렸다. 투의 요결이었다.
[파바박.]
악삼의 열 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추자 강렬한 파공성이 선
실에 울려 퍼졌다. 꺼졌던 초에 불이 다시 붙고 켜져 있던
촛불이 꺼져 버렸다. 불꽃이 모여 허공에서 화염의 소용돌
이를 만들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공력이 거의 운
영하지 않은 태을지가 요결과 변화만 이용해 이런 위력을 내
자 악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정도면 그 여승과 다시 겨루어도 저번처럼 허망하게 패
배하지는 않겠군."
연화 치른 격전을 악삼은 되새겼다. 공격과 방어가 오가는
격전의 장면이 악삼의 뇌리에서 몇 번이고 돌아갔다. 그러
다가 연화가 펼친 차경미기가 생각나자 악삼은 고민했다.
"적의 공격을 내 힘으로 바꾸어 역으로 적을 친다. 일종의 이
화접목(移花接木)인데... 이 방법을 어떻게 막지..."
악삼은 차경미기를 어떻게 막을까 연구했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상대방에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사용할 필
요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적에게 도움이 되는 공격이라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악삼은 연화와 다시 한번 겨루어 자
신이 맛본 패배를 돌려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화가
사용하는 기술을 모두 파악해야 했다.
"이거 아무래도 한번 익혀봐야 그 방어법이 나오겠군."
악삼은 차경미기를 연구해 자신이 익혀보기로 했다. 연화가
차경미기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지 연구했다. 연화의 움
직임과 자세를 유추해 내공의 운영과 초식의 운영을 검토했
다. 그러나 연화가 펼친 차경미기는 순간적으로 사용해 악
삼은 특별한 묘결을 찾지 못했다. 악삼은 연화의 움직임이
나 자세로는 차경미기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악삼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 중
에 비슷한 초수나 요결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근 반 시
진 동안 자세를 풀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을 뒤지던
악삼은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 나더니 탄성을 질렀다.
"아하! 여기에 있었군."
악삼은 뇌운십팔타의 초식 중에 소매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되돌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내공을 이용해 상대방의 힘을 마
음대로 사용하는 차경미기와 달리 포운전이(抱雲轉移)는 상대
의 힘을 소매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방법이었다. 악삼은 실
마리 하나를 잡자 두 가지 무공의 차이를 연구하면서 내공에
도 차경미기와 비슷한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태을진결에도 차경미기와 같은 효과를 가진 요결이 있었군...
게다가 태극삼검혜와 삼절창에도 비슷한 방법이 있군."
악삼은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자 안색이 푸려갔다. 찾아낸 무
공 초식과 요결을 생각하며 어떻게 실전에 운용하나 연구했
다.
"그렇군. 이런 방법이 있었어!"
근 두 시진동안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고민하던 악삼이 갑
자기 탄성을 질렀다. 악삼은 각각의 무공에서 찾아낸 요소
들을 모아 하나의 무학을 만들려고 헸으나 실패했다. 잔가지
와 줄기는 만들어 졌지만 뿌리와 기둥이 없으니 활용할 방법
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운용체계와 초식을 완성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악삼은 이론만 완성한 무학체계를 새로운 무공으로 만드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무공 중에 하나
를 골라 새로 만든 무공이론을 흡수할 생각을 했다. 악삼은
태을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새로운 무공체계의 내공 운용방
식이 태을진결이니 태을지가 가장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삼은 태을진기를 조심스럽게 끌어 올렸다. 지금까지 무공
을 수련했어도 선실 안이기 때문에 내력을 담아 무공을 펼치
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무공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실
제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내력을 담아야 했다. 악삼은 태
을진기를 조심스럽게 분배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가는 배
에 구멍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태을진기는 태음수폐경(手太陰肺經)과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
包經),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 ),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 )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악삼은 12개의 촛불을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열 손가락이 촛불을 향해 뻗자 선실 내부는 이상한
진동으로 인해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웅. 웅. 웅...]
촛불은 심하게 떨렸다.
[파박.]
섬뜩한 파열음이 터져 나오더니 초 3개가 가루로 변해 버렸
다. 선실의 벽과 바닥도 미세한 진동을 하더니 균열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태을 진기를 두 개로 나누어 하나
는 태을지를 이용해 새로운 무공 방식대로 운용했고 남은 하
나로 호체진력을 생성시켜 선실과 초를 보호했다.
얼마나 내공을 끌어냈던지 악삼의 얼굴엔 혈관이 튀어 나오
기 시작했다. 땀도 비오듯 내렸지만 악삼은 개의치 않았다.
시작을 했으니 끝장을 내야 한다는 악삼의 사고 방식이 뒤
로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구 결과가 완
성돼야지 나중에 연화를 상대할 때 차경미기로 인해 불리한
사태로 몰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악삼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받았으니 되돌려준다."
악삼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의식이다. 연화에게 받은 패배는
그대로 본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악삼의 생각은 불변이었다.
[퍼버벅. 퍼버벅.]
6개의 초가 한꺼번에 산산조각났다. 악삼은 마음속으로 '실
패인가.' 라는 생각이 들자 참담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
다. 그런데 3개의 초 중에 한 개의 불꽃이 꺼지자 악삼의
안색은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게다가 선실은 심한 진동으
로 균열이 심하게 발생해 악삼이 더 이상 막을 여력이 없어
졌다.
모든 것이 실패라고 생각한 악삼은 내력을 거두기로 했다.
선실을 박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태을지를 운용하는 공력
을 회수하면서 호체진력에 들어가는 내공도 점차 줄이기 시
작했다. 그런데 공력이 회수되자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
經)과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 )에서 이상한 변화가 나타났
다.
두 군데에서 기를 끌어당기는 이상한 내력이 생성된 것이다.
내력이 단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소양삼초경(手少
陽三焦經)과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 )에서 회전하자 악삼
은 당황했다. 아무리 내력을 회수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악삼은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과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
腸 )에서 생성한 내력을 밖으로 배출하기로 했다.
[팍.]
촛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러나 촛불이 꺼졌다가 켜진
것이 아니라 이상한 변화가 있었던 것을 악삼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촛불에 있는 불꽃이 꺼진 것이 아
니라 다른 초로 상호 이동을 한 것이었다.
또한 내부를 들끓게 하던 진기들도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
經)과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 )에서 생긴 공력이 방출되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악삼의 조율 아래로 들어가 자연
스럽게 움직였다.
"성공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성공으로 끝나자 악삼은 기쁨을 금
치 못했다. 악삼은 자리에 주저앉아 방금 전에 사용한 운공
방식을 유추해 나갔다. 기의 운행과 손가락의 움직임, 주
변의 환경까지 세밀하게 기억을 곱씹었다. 악삼은 기억한 내
용대로 기를 운행했다. 내력이 움직이자 악삼은 손가락을 좌
에서 우로 움직였다.
[팍.]
두 개의 촛불 중에 한 개가 꺼졌다. 하지만 악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악삼은 손가락을 우에서 좌로
이동시켰다.
[휙.]
우측에 촛불의 불꽃이 도깨비불처럼 날아가 좌측에 있는 초
에 옮겨졌다. 꺼진 초가 불꽃을 피어내며 선실을 밝히기 시
작했다.
"성공이군. 이 요결을 인(引)이라고 불러야겠군. 이것으로 태
을지의 요결은 여섯 개로 늘어난 셈이군."
악삼은 모든 시간을 무공연마에 투자했다.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것조차 아깝다고 생각했다. 혼자 선실에서 무학
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이 과연 큰 효과가 있을까 고민도 했
다. 그러나 악삼은 선실에서 수련한 결과는 놀라웠다. 태을
지의 오대요결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됐을 뿐 아니라 인이라
는 여섯 번째 요결까지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인결(引訣)은 겉으로 보기엔 단 몇 시진만에 만들어 진 것처
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태을지를 수년간 수련하는
데 혼신을 다하면서 기반을 잡았고 뇌운십팔타와 태극삼검혜,
삼절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인결을
만들어 내기 위해 15년 이상의 세월을 투자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결이 탄생될 수는 없었다.
연화와 격전을 치르지 않았다면 인결은 고사하고 현재 이룬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년은 기다려야 했다. 악삼에게 있어 연
화와 치른 격전은 엄청난 도움이었던 것이다. 패배를 당했
지만 악삼에게는 좋은 약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어떤 영약
보다 연화와 치른 격전이 악삼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내공이 한 단계 이상 증진됐고 자신이 아는 무학의 대부분을
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결이라는 새로운 무공을 만들게
하는 촉매제역할까지 한 것이다. 악삼은 하나의 벽을 넘었다
는 생각이 들자 긴장감이 풀렸다. 특히 인결을 만드는 몇
시진은 몇 달간 소모해야 할 체력과 지력을 한꺼번에 사용한
것과 같아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피로를 느끼는
순간 악삼은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악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량을 쌓아 둔 곳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악삼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서있는 것도
아니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
았다. 악삼은 선실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선실바닥은 얼마나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
여 있었다. 게다가 태을지의 여섯 번째 요결인 인을 만들려
고 뿜어낸 내력으로 인해 갈라지고 부셔진 흔적이 가득했다.
하지만 악삼이 보는 것은 선실바닥에 쌓인 먼지도 아니고 갈
라진 틈새도 아니었다.
악삼이 본 것은 자신이 찍어 논 발자국이었다. 먼지로 인해
발자국은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발자국의 절반은 무
영수 진삼에게 얻은 귀영종에 수록된 운신법을 익히면서 생
긴 흔적이었다. 악삼은 귀영종에 수록된 모든 무공을 모두
익혔다. 공령(空靈)이라는 단 한가지 무공을 제외하곤 신법
과 보법, 암기술까지 모조리 터득했다.
비록 공령은 익히지 못했지만 무영수 진삼보다 오히려 더 뛰
어난 경신법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공령은 진삼이 태극삼
검혜를 연구하면서 만든 무공으로 일종의 꿈과도 같은 경지
를 말하는 것이다. 악삼조차 공령을 보고는 익히기를 포기
했다.
그 정도로 공령은 이해불가능의 무공으로 무극지보다 더 어
려운 무학이었다. 게다가 원리와 이론만으로 구성돼 있을뿐
제대로 된 구결조차 없어 익힐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악삼
이 보고 있던 발자국은 귀영종의 운신법을 익힐 때 생긴 흔
적이 아니었다.
악삼의 시선을 잡은 것은 운보(雲步)와 뇌보(雷步)가 남긴 발
자국이었다. 구름처럼 느린 듯 하지만 한순간에 방위를 점
해버리는 운보와 벼락같이 빠른 움직임을 구사하게 만드는
뇌보는 뇌운십팔타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보법이다. 악삼은
운보와 뇌보를 보면서 지난 며칠 동안 뇌운십팔타를 재해석
해서 다시 익힌 것이 기억난 것이다.
뇌운십팔타는 악삼이 태을궁에서 출궁한 후부터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익힌 무공이었다. 악삼은 스스로 백타에 관해서는 뛰
어났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뇌운십팔타의 요결이나
초식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악
삼의 오산이었고 자만이었다. 악삼은 태을궁에서 나온 이
후로 제대로 된 고수와 겨룬 적이 없었다.
항상 하수들과 겨루었을 뿐이지 맞수가 될만한 고수와 겨룬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권장법의 운용이 백타의 달인에 비
해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악삼이 백타에 대해 새로
운 눈이 뜬 것은 연화에게 패배를 당한 뒤였다. 연화십팔법
이라는 아미창의 정수에 패배를 당하기 전에 연화의 현란한
권장의 운용에 말려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악삼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악삼은 연화와 격전을 치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연
화와 겨루면서 얻은 공수(攻守)의 요결과 실전(實戰)의 허실
(虛實)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든 소득이었다. 무공의 운용
중에 고저장단(高低長短)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값진 깨달음
이다.
악삼이 뇌운십팔타를 재해석하면서 고저장단을 체득한 것과
인결을 만든 것이 수련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그만
큼 연화를 만난 것은 악삼에게는 커다란 이익이었다. 물론
연화와 겨루다 패배했음에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내 수련을 한 불요불굴의 정신도 악삼이 무공을 향상하
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화는 아미산을 떠난 후부터 처절한 혈전을 뚫고 낙양까지
왔다. 비록 강호에 발을 내민 시간은 비슷하지만 혈전의 강
도나 위험성은 악삼보다 더한 험로를 돌파했다. 특히 연화
는 십대고수 중에 한 사람인 독수여래 당세진과 겨루었고 사
천당문의 정예와 아미파, 살막과 숨막히는 혈전을 치렀다.
하나같이 흉험하지 않은 싸움은 없었다. 항상 생사가 갈리는
혈전을 치러온 연화의 경험은 악삼보다 농도가 진했다.
악삼은 운보와 뇌보가 왜 시선을 뺏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격전이 벌어질 때 생길 수 있는 수많은 설정을 예상하고 움
직인 운보와 뇌보였다. 더 이상의 변화나 숨은 뜻은 없으리
라 생각하고 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선을 뺏는다면 분
명히 문제가 있으리라.
"도대체 뭐가 문제지?"
악삼은 운보와 뇌보가 만든 발자국을 하나 하나 생각했다.
머릿속에 수많은 동선(動線)이 그려졌다. 하지만 어느 동선
도 문제가 없었다. 운보와 뇌보의 조합이나 운보나 뇌보의
독단적인 움직임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운보와 뇌보의 발
자국은 악삼의 시선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악삼은 한 걸음
도 내밀지 못하고 멈춘 채 고민했다. 사색은 깊어가고 시간
은 흘러갔다. 하지만 악삼의 고민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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