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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12~20절/목사와 성도에 바른 관계
이번 주는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는 구약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목자나 양이나 고통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관계를 맺음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목회자와 나와의 관계, 성도들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매우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서로 돌아보기 위해서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을 목회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내가 가진 자격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을 반복하게 될 때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변화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보며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 같은데,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대속해 주신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책임 있게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적으로 책임 있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와 갈등은 자기 자신에게서 구원의 조건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자격과 조건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과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고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함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분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복음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통한 구원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4장 12~20절은 교회 안에서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목회자와 성도는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성도들과 자신이 가졌던 관계와 체험을 말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며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켰던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절기들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이후 참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지 못했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 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에서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상대방에게 맞추어 복음을 전함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환경에 휩쓸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사도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때에도 놓치지 않고 비본질적인 형식에 있어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동화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인 갈라디아 사람들이 오히려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의 전통과 절기를 지킴으로 유대인같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너희와 같이 되었던 것처럼 너희들도 율법에 매이지 말고 나처럼 자유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했다’라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처음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음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바울과 영적인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 아래에서 영적으로 일치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이제 다른 복음에 의해 갈라져 갈등이 시작되고 영적인 교제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는 같은 복음과 같은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침례교회이지만 다른 교단에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교단과 신앙의 배경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교파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의 강조점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믿는 주님은 같은 주님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복음입니다. 신앙생활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는 것이 복음의 신앙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렇게 같은 복음과 믿음 안에 있을 때 갈등과 분열이 없이 교회는 평안해지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목회자의 약함을 이해하고 사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완전한 모습의 목회자를 기대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약한 모습을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목회자는 아파서도 안 되고 슬퍼하거나 괴로운 일을 당해서도 안 되며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고 잘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목사가 병에 걸려 있으면서 교인들의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하면 자신의 병도 못 고치면서 다른 사람의 병을 위해 기도해 준다고 낫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만일 목사의 자녀들이 잘못되어 있는데 성도들의 자녀를 위해 축복해 준다면 자녀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 보다 믿음이 항상 좋아야 하고 항상 축복받고 살아야 하며 항상 건강해야 하고 항상 웃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환상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목회자도 한 사람이고 한 사람으로 만나는 현실의 고난 앞에 절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댜,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증거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병들고 약한 모습 그대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시험에 들거나 바울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13~14절에서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육체의 약함이 무엇이었는지 갈라디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후대의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약함이라고 했는데 몇 년이 지난 후에 기록한 고린도후서에서는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를 말하는데 지금의 터키 중부 지방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1차 선교 여행 중에 심한 박해와 고초를 당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과 충동으로 사람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다가 버렸지만, 하나님에 은혜로 다시 일어나 복음을 계속 전했습니다. 이때 당한 고난의 후유증으로 육체의 지병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뇌전증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험 거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15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라는 것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정도로 심한 눈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가 가진 육체의 약함과 질병이 무엇이었든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시험 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예수님처럼 영접했다고 회상하는 것입니다. (14절)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해준 구원의 복음을 받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는 줄 알고 더 좋은 복이 없는 줄로 믿었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해 준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런 영접과 격려가 바울 사도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육체에 약함을 업신여기지 않고 복음 때문에 오히려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관계가 갈라디아 교회공동체 가운데 있었습니다.
셋째로 시험이나 유혹을 당하면 관계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았던 교인들의 태도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이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갈라디아 성도들의 태도가 완전히 변하게 된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전해준 다른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참된 복음을 전해준 바울 사도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에 은혜의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율법주의자들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할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고 절기를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적인 복음을 받고 변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들에게 전하여준 복음이 오히려 불완전하고 잘못된 구원의 도리를 전해준 것으로 오해하게 되자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6절에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바른 관계는 복음 안에서의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복음이나 신뢰를 무너뜨리는 사상이 들어가면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언약한 성도들은 때로 무슨 말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거나 해로움이 되는지 누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아 자신에 눈이라도 빼줄 것 같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빠진 이후로 바울을 대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변질이 되었습니까? 그 배경이 갈라디아서 4장 1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열심을 다해 도움을 주면서 친근하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어려움을 도와주고 아픔을 이해해 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이유와 목적은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관계를 이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수하에 들어와 가르침을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인간적인 친절과 도움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유대들의 주장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친근하게 접근하여 필요를 채워주면서 정통 교회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 성도들을 잘못된 교리에 빠지도록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친근하게 지내게 되면 식사도 같이하고 서로 도와주면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집니다. 이런 교제와 모임이 신앙에 유익을 주고 서로에게 힘과 격려가 되면 좋은데 인간적인 만남이 되면 신앙에 손해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적으로 모이다 보면 영향력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담임목사의 말이나 성경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만남과 모임을 통하여 교회나 목회자에 대한 험담이나 부정적인 말을 전해 들으면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영향을 받으면 말씀을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에 시험이 찾아오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통에도 장벽이 쌓이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가 없어 형식적으로 예배를 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혼이 메마르게 되어 신앙생활을 해도 즐겁지 않고 봉사를 하는 것 조차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신앙생활의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쉽게 짜증을 내고 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리므로 교회 안에서의 만남과 교제는 예수님을 관계 속에 모시고 신앙 중심으로 해야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세워주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지금은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삶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율법적인 노력으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수고와 헌신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갈라디아 성도들을 돌아오게 하고 변질된 신앙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다시 해산하는 사랑의 수고를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하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일그러진 우리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되어가는 성화의 여정에 서로를 섬기고 세우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갈라디아 성도들의 관계는 복음과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목회자인 바울과 교인들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로 그들을 바로 세우고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사랑의 수고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여러분을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다 하고 여러분은 연약한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함으로 이해함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공동체로 서로를 세우고 축복함으로 마지막까지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