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속고내 체포 논쟁' 관련해서 잠깐 등장했던 병조 판서 유담년이 이런 말을 했지요,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속고내 체포작전에 강하게 반대하는 조광조에게 화가나서 중종에게 이런일은 군무에 대해 밝은 자신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실제로 유담년은 성종 년간 부터 활약한 무관이었으며 중종년간 발생한 삼포왜란때도 활약한 베테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결국 무관이었던 유담년의 의견이 아닌 젊은 '유학자'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중종이 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국방과 관련 된 정책에 있어서 무조건 무관의 손 만을 들어주지 않는 다는 사례중의 하나지요.
근데 그렇다면 조광조는 정말 군무에 문외한이었는가? 한다면 속고내가 함경도를 침입 할 당시에 종성판관으로 활약한 최희정이란 '무관'이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사실을 본다면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전쟁, 전투, 국방 같은 분야는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기에 비록 문치중심의 무관통제를 한 고려 조선도 평시의 일반분야와는 달리 반영하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예종조에 금나라가 막 성장하려던 시기 요나라와 힘을합쳐야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구할때 문신들은 물론 대장군이상 고위 무관들도 참여시켰던 것이나(이때 금나라를 치는 것에 반대한 사람중에는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있습니다)
조선조 세종이 북방개척을 위해 최윤덕, 이천, 이순몽 등의 국방분야 전문무관을 키우고 문제가 발생 했을때도 보호하며, 전투 실행등에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 사실에서도 확인 할 수 있지요(물론 돌려보내달라는 말은 들어주지 않지만. 하경복 : 저 이제 할만큼 했잖아요;; 이제 좀 서울 돌려보내줘요ㅜㅜ, 세종 : 널 내가 왜 키웠겠니???)
그렇다면 그 분야 전문가들이었던 무관들의 국방정책은 항상 옳았을까?
고려조 '무신정권'의 시절 국방이 뚫려 몽골에 패한 거란 반군들이 개경 앞까지 밀고 내려왔던 걸 보면 딱히.....
'강화천도'와 '해도입보'를 봐도 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강화천도가 단순히 단기 전투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옳은 부분도 있을 것이지만 그 강화천도가 종당에는 고려전체에 어떤 파국을 가져왔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몽골과 싸우기 위한 목적만'에서라면야 당연히 섬으로 가는게 유리했겠지요.
하지만 고려라는 '나라'와 '백성'들이 몽골과 싸우는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때문에, 당연히 당시 집권자는 그것을 같이 생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당시의 무신정권의 집권자와, 소수의 양식있는 무신들을 제외한 그 휘하 군인들에게는 그런것이 중요하지 않았겠지요.
또한 무관들이라고 해서 전쟁과 전략에 있어서 '당연하겠지만' 같은 판단을 내리지도 않았고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게 바로 정유재란 직전 논쟁인 '부산진격'.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전쟁을 모르는 조정문신들이 원균에게 선동되어서 부산진격 반대하는 이순신을 해임하고 부산진격해서 말아먹었다는 인식은 잘못 된 것 입니다(유성룡 내가 무관이었나).
부산진격을 주장했던 사명당 유정, 요시라와 접촉했던 김응서(김경서), 원균에게 곤장친 권율 등은 임진왜란 내내 굴렀던 현장 베태랑들이었죠. 참고로 원균도 어쨌든 '현장에서 구른 무관'이지요(솔직히 이 사람은 논할 가치도 없지만..... 근데 왜 이 사람하고 현재 누군가가 오버랩이 되는 걸까요;;).
당연히 저 '다양한 의견들 속에서' 국가 통치권자는 여러 다른 분야에 미칠 파장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해야 했지만, 이때는 잘못된 선택을 하여 비극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지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최대한 반영 해야 합니다만, 극단적으로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 하거나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때는 바로 잡는 것 또한 국가 통치권자가 해야 할 일일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