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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5
‘화진포의 성’ 1~24회까지
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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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이신 황연옥 권사님은 강원고성신문에 전기소설 <화진포의 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이어서 올려둡니다.^^
화진포의 성 [25]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5]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4월 09일(금) 11:19 [강원고성신문]
1911년 셔우드는 아버지 월리엄 제임스 홀 모교인 마운트 허몬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마운트 허몬 고등학교는 그 유명한 트와이트 무디 목사가 창립한 학교다. 그 당시에도 무디 목사는 복음 선교사로 명성이 높았다.
이 학교는 ‘학생 자원 운동’(SVM)을 일으킨 곳이다. 셔우드의 아버지 닥터 홀도 마운트 허몬의 가르침으로 ‘학생 자원 운동’(SVM)의 영향을 받아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젊은 날 닥터 홀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제 셔우드에게는 낯선 환경에서 혼자 풀어가야 할 ‘학업’과 새로운 환경의 ‘적응’이라는 커다란 두 과제가 직면하였다. 지금까지는 보호자였던 어머니 닥터 로제타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조선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낸 셔우드는 조선 생활과 미국 생활의 다른 점과 중요한 관습의 차이를 잘 몰랐다. 어머니는 종일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했으므로 형제가 없는 셔우드의 놀이 상대는 거의 조선 아이들이었고 행동이나 생각도 조선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조선에서는 서양 사람들 같은 시간의 긴박감과 철저한 시간개념을 배울 수 없었다. 조선 사람들의 생활철학은 서두르지 않는 태평함에 있다. 하던 일을 오늘 다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하는 식이었고 셔우드는 그런 여유와 태평함이 좋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보니 사람들은 항상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하루의 생활을 시간대에 따라 규칙적으로 생활하였다. 지금 하는 일을 다 못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셔우드에게 정확한 시간개념이 있는 미국 생활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무엇이든지 해 주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한동안은 “아주머니, 이것 좀 해 주세요”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오래도록 친절하게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그 같은 경험을 쌓는 일에 셔우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쏟았다.
마운트 허몬 학교는 ‘노동시간’이라 부르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하루 두 시간씩 일하게 하고 그 임금을 수업료에 보태게 했다. 주일에는 일을 못하므로 월요일에 한 시간 반을 더 일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많이 했다. 훗날 셔우드는 학교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힘들었던 경험과 유익함을 이렇게 일기에 기록하였다.
“첫 번째로 내가 한 일은 학교 농장에서 금방 자른 옥수수 대를 위에서 떨어뜨리면 사일로(사료 저장고) 안에 펴 놓는 일이었다. 이 일은 보기에는 아주 단순해 보였다. 사일로 안은 먼지가 가득했고 열탕 같았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사료들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잠시라도 일을 쉬면 사료 밑에 묻혀버리게 되므로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허리도 펴지 못한 체 온 힘을 다해 골고루 펴 놓아야 했다. 사일로 안에서는 “내일은 없다”라는 말이 진리 같았다.
농장 감독은 내가 이 일을 완수해 내는 걸 보자 다음에는 우유 짜는 일을 시켰다. 나는 이 일이 훨씬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유를 짜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일이 어떤 것인지 말할 자격이 없다. 암소에게 부드럽게 손을 대었는데 암소는 나를 발로 차 버렸다. 더러운 발 한쪽을 우유 통에 넣기도 했다. 어느 정도 젖 짜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생각했는데 농장 주인이 내게 와서 암소의 젖을 다 짜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이런 식으로 짜면 암소의 젖이 말라붙는다고 하였다. 젖 짜는 방법을 다시 확실하게 배워 농장 주인의 마음에 들게 일했다.
다음에 한 일은 토마토를 따는 것이었다. 허리가 아픈 것 외에는 그래도 할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은 몹시 지루하였다.
농장 일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기숙사 중 한 건물의 청소 일을 맡게 되었다. 이런저런 청소 일과 어려운 부엌에서 관리 수습 기간이 끝나자 감독을 총괄하는 급사로 승진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승진 이외에도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득이 있었다.
마운트 허몬 모교 기숙사 부엌에서 나는 비로소 서구식 시간에 대한 가치와 일의 보람과 정확한 시간 약속의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이 학교는 학구적인 면에서도 셔우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필수 과목의 하나로 해리슨(M. C. Herrison) 박사의 성경 반을 수강했다. ‘학생 자원 운동’이 탄생되었던 바로 그 교실에서 강의를 들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가 있는 존 포먼 목사의 아들도 한 반이었다. 1887년 셔우드 아버지 닥터 홀을 ‘학생 자원 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한 사람이 바로 존 포먼 목사였다. 셔우드가 마운트 허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서 선교사 자녀들이 이 학교로 왔는데 그 중 단짝이었던 존 베어드도 있었다.
셔우드는 시각 장애인 패니 크로스비를 만났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찬송가 작가였다. 아버지가 뉴욕 메디슨가의 의료선교사였을 때 사귀었던 훌륭한 친구였고 조선으로 떠날 때 송별가를 지어 주었던 분이다.
패니 크로스비는 셔우드를 반갑게 맞아 주시며 아버지가 의료선교사로 일했던 시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글 찬송가에도 실린 ‘후일에 생명 그칠 때’를 비롯한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곡했을 때의 일들을 행복에 젖은 얼굴로 회상하는 그녀는 시각 장애인일지라도 성자처럼 훌륭해 보였다.
1915년 셔우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운트 허몬 학교는 조선과 미국이라는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을 연결하는데 필요한 적응력과 지식을 쌓는 아주 소중한 학교였다. 대학 진학에 관해서 상의할 겸, 부모님의 친구인 서머스톤 목사님을 만나려고 뉴로셀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서머스톤 목사 사위인 윌슨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윌슨 목사는 오하이오 주의 알리언스에 있는 마운트 유니언 대학을 졸업했는데 작은 대학의 장점에 대해서 셔우드에게 설득력 있게 이야기했다.
셔우드는 규모가 큰 종합대학에 갈 계획이었는데 그의 적극인 자신의 모교에 대한 소개로 그 학교에 대한 신뢰가 생겨서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의 의견을 듣기를 얼마나 잘한 일이었던가. 셔우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그의 첫사랑이자 아내인 메리언을 이 학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또 한 사람, 대학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프레드 부래튼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그는 문장력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훗날 그는 『특출한 친구들』(Feiends Unique)이라는 책을 썼는데 셔우드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셔우드는 양심적이고 신중했으며 대학의 여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오하이오 대학연합회의 ‘학생 자원 연합회’ 회장이기도 했다. 홀은 비교적 말이 적었지만 그의 의견은 언제나 존중되었다. 꼭 필요한 말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 단체나 친지들의 모임에서 조선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위치, 역사, 풍습, 부모님의 선교사업과 그 밖의 경험들을 이야기했고 그의 강연은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이 다재다능한 친구는 내 인생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 셔우드는 아더 던톤이라는 친구로부터 자신의 고향에 있는 ‘루츠타운 교회’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교회는 학교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으므로 이번 초청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받아들였다.
강연을 하며 자신의 아버지는 이 ‘루츠타운 교회’와 크기가 비슷한 캐나다 온타리아 주 아덴에 있는 작은 교회의 신도였으며 선교 초창기(1891년)에 조선으로 파송된 닥터 월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였다는 말을 했다.
강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찾아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하였다. 그중에 메리언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메리언은 루츠타운 교회 노리스 라인 위버 목사님의 처제였다.
그날 첫 만남의 자리에서 지금의 아내가 된 매리언 버텀리는 셔우드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했다.
화진포의 성 [26]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26]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5월 06일(목) 11:58 [강원고성신문]
강연이 끝나고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메리언 버텀리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캐나다 아덴의 감리교회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에 계신 분이 당신 아버님이신가요?”
셔우드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국 시골의 작은 교회에 다니는 자매가 어떻게 캐나다 시골 교회에 걸려 있는 아버지 사진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 저는 당신 아버지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비숍 밀즈(Bishop Mills)의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어요. 주일이면 당신 아버지가 다니신 교회에서 예배드리지요.”
셔우드는 의외의 만남에 깜짝 놀랐다. 메리언 모녀는 성직자 회의에서 돌아온 노리스 라인 위버 목사 부부에게 셔우드를 소개하였다. 목사 부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셔우드의 강연을 들을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지역 교회의 예배시간에 셔우드를 초대하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 초청 강연이 있던 날 라인 위버 목사님 댁에서 셔우드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다. 셔우드는 내심 메리언을 또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마음이 부풀었는데 식사가 시작되어도 메리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캐나다 근무하는 학교로 떠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메리언이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언니의 음식 만드는 일을 돕느라 부엌에 있었다고 하였다. 셔우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셔우드는 자신이 메리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식사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 위버 부인은 마실 우유가 없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날마다 가까운 목장에서 우유를 날라다 먹고 있었는데 그날은 바빠서 가져오지 못했다.
“언니, 제가 목장으로 가서 우유를 가져올게요.”
매리언이 우유통을 가지고 일어서자 셔우드도 엉거주춤 일어서며 말했다.
“우유가 담기면 통이 무거울 텐데 저도 함께 다녀오면 안 될까요?”
목사 부부는 웃으면서 그러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목장을 향해 걸었다. 초저녁 바람이 홍조로 달아오른 두 사람의 볼을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셔우드는 메리언이 캐나다 교회의 아버지 친구들, 친척들, 친할머니까지 알고 있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학이라 미국 본가에 왔으나 그녀는 곧 캐나다 학교에 돌아간다고 하였다.
셔우드는 머뭇거리고 말했다.
“저……우리 할머니께 작은 선물을 보내려고 하는데 좀 전해 주시겠어요?”
“네 전해 드릴게요.”
메리언은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었고 매사가 분명하였다.
셔우드는 다음 주일, 할머니께 보낼 선물을 준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루츠타운으로 갔다. 메리언이 다니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는데 뜻밖에 그날 메리언의 독창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정원에서’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전에도 여러 번 들었으나 지금처럼 아름답게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신선하고 황홀한 선율이 셔우드의 마음을 울렸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얼굴, 매력적인 성격의 메리언에게 셔우드는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메리언의 어머니와 언니는 셔우드를 좋게 보았지만 형부인 라인 위버 목사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메리언도 형부 라인목사가 선을 보라고 권고한 어느 청년을 보기도 전에 이미 셔우드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셔우드는 메리언에게 캐나다에 가서 편지를 자주 보내달라고 했다. 선물을 받은 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도 듣고 싶다고 하였다. 처음 몇 편의 편지는 일상적인 내용이었으나 편지가 몇 차례 오고 가자 가족들의 신상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 보냈다.
메리언은 1896년 6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태어난 영국의 엡위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언니 엠마는 처녀 시절 고향 마을에 찾아오는 저명인사나 관광객들의 안내역을 자원했는데 이때 미국에서 방문객으로 오게 된 라인 위버 목사를 만났다. 그들의 우정은 사랑으로 발전했고 결혼하게 되었다.
메리언의 부모는 웨슬리 기념 교회에서 첫 번째로 결혼 한 부부였다. 어머니는 교회 오르간 반주자였고 아버지는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하였으며 직업은 사진사였다. 그런데 자매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메리언의 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온타리오 주 아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셔우드의 아버지 닥터 홀의 고향 마을이었으니 셔우드와 메리언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버텀리 여사는 사진관을 개업하였고 메리언은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사진 찍는 일은 메리언의 취미가 되었고 후에 선교사 활동을 하면서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진 찍는 일로 그는 훗날 일본군부에게 스파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조선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메리언은 1917년 가을, 미국의 루수타운 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왔다.
메리언은 더 공부하고 싶어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동안에 모직물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공장 여공들은 안타까운 동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딱하군, 잘못 들어왔어. 이 기계 일은 복잡하고 감독은 지독하고, 이제 곧 눈물을 흘리고 도망갈 거야. 여긴 여선생님이 일할 만한 데가 아닌걸!”
메리언에게 방적 기계가 맡겨졌다. 감독은 사용법도 자세히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계가 고장이 났다. 메리언은 감독을 찾아가 기계 도면과 사용 설명서를 달라고 했다. 처음엔 거절하던 감독이 그녀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도면과 지침서를 주었다.
메리언은 도면과 설명서를 숙지하여 기계 사용법을 터득하고 기계를 고쳐서 다시 능숙하게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당찬 성품과 솜씨에 모두 놀랐고 감독은 후에 더 복잡한 기계를 그녀에게 맡겼다. 개학하여 메리언이 공장을 떠날 때 감독은 아쉬워하며 방학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거리상으로 가까운 곳으로 왔는데도 셔우드와 메리언은 자주 만날 수 없었다. 평일에는 학교생활로 바빴고 주말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을 내어 ‘학생 자원부’에서는 꾸준히 활동하였다.
메리언도 이 ‘학생 자원부’활동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1918년 3월, 오하이오주 베레아의 볼드윈 윌러스 대학에서 학생자원봉사회 총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셔우드는 마운트 유니언 대학의 대표로 참석하게 되어 메리언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다. 메리언이 승낙하여 그 행사에 함께 참가하였다.
그날 총회에 참석한 메리언은 설교를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 이른 새벽에 기차 시간이 남아서 크리블렌드 기차역의 식당에서 두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메리언은 자신도 의과 대학에 다시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의료선교사가 되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나라에 가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셔우드는 마음이 뜨거워져서 메리언 곁으로 다가앉으며 말했다.
“메리언,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이 조선에 가지 않겠어요?”
메리언은 직답을 피하고 익살스럽게 말하였다.
“같이 가는 건 무리일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우린 서로 남남인 남녀 사이인데.”
셔우드는 당황해서 메리언의 부드러운 눈웃음은 보지 못하였다. 신중하게 말했는데 묵살을 당한 터라 몹시 무안했다. 뒤늦게 자신의 풋내기 같은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해뜨기 전의 새벽에 프러포즈를 한 것은 적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생 클럽의 친구가 귀띔해 주었다. 프러포즈를 하려면 클럽의 상징인 글자 장식 핀을 준비했다가 여자가 사랑의 고백을 받아주었을 때 재빨리 핀을 꽂아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메리언은 야생 동물을 무척 사랑하였다. 셔우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루츠타운 숲속에 사는 새들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느 날, 메리언이 셔우드에게 이번 주말에 숲속으로 야생동물을 보러 가자고 하였다. 셔우드는 프러포즈를 할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지난번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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