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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한강을 통하여 한양과 연결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한강이 한양으로 통하는 최고의 통로였고,
한양의 젖줄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속도로인 셈이다.
백두대간의 나무를 공급하고 충주 여주 이천 광주 등
내륙의 생산물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통로였다.
가까운 양주나 광주는 현직 벼슬아치나 공신들이 차지하였기에,
삼남에 고향을 둔 사대부들이 벼슬에서 밀려나면 낙향하는 대신
여주에 자리를 잡고 노심초사 재기를 노렸던 곳이다.
여주는 조정이 발간한 소식지인 조보(朝報)를 받을 수 있을 수
있었기에, 한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었기에
끊임없이 사대부 가문의 유입이 진행되었다.
골골마다 청송심씨, 해평윤씨, 안동김씨, 동래정씨, 원주원씨,
영산신씨, 밀양박씨, 능성구씨, 연안이씨, 전주이씨,
청주한씨, 남양홍씨, 의성김씨, 창녕성씨, 평택임씨, 강릉최씨,
창녕조씨, 한산이씨, 경주김씨, 안동권씨, 평산신씨,
남평문씨 등등 다양한 가문이 이주하여 살았다.
여주 지역은 처음 삼한시대에 마한(馬韓) 땅에 속했다가 삼국이 생기면서
백제땅에 속했다. 그 후 고구려가 세를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역에 속했다.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에 여주에 대한 지명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는 지명으로 기록이 되었다.
골내근현(骨內斤縣)에서 한자어 뼈 골(骨) 자는 음차로 누런색(黃)을
뜻하는 것이고 안 내(內)자는 음차01로 내(川)를 나타내고
도끼 근(斤) 자는 음차로 고을 촌(村)을 나타내는 말로 ‘누런내가 있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골내근현을 통과하던 여강 지역은 점동면의 삼합리
에서부터 도리, 처리, 흔암리, 우만리, 단현리, 연라리, 상리, 하리, 왕대리,
백서리까지 강변으로 다른 강의 유역과는 달리 전혀 평야를 형성하지 않고
모두 강변이 가파랐다. 따라서 그 옛날 홍수가 나면 물이 누런색(누런 내: 黃川)
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지금도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은
홍수 철에는 물이 누런색이다. 따라서 깊은 골짜기에 누런색의 내(川)가
흐르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음을 표기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그 후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여주(당시 골내근현)
땅은 신라의 영토가 되고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황효(黃驍)라고
고쳤다. 황효02란 이름이 어떤 유명한 말(馬)이 원인이 된 지명인지
아니면 늘은(확장된) + 날래(급작히)의 우리말 음을 한자로
표기(누루 황+날낼 효)해 쓴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지명은 계속해서 말(馬)과 관련된 여주(驪州)의 검은말 려(驪) 자를
중심으로 지명이 계속 변천해 나갔다.
그것은 지명변천에 따른 여주군의 연혁을 보면 쉽게 확인이 된다.
어원의 유래에서도 여주의 지명이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여주의 려(驪)는 검은 말 려, 가라말 려,
검은 말 리라고 하며 뜻을 나타내는 말마(馬)와 음(音)을 나타내는
‘려’가 합하여 이루어진 형성 글자이다.
또 「한국 고전 용어사전」에 려(驪)는 “① 고대 우리나라에 있었던 나라 이름.
가야(伽倻)·가락(駕洛)의 다른 이름. ② 가라말, 검은 말. 흑색의 말을 ‘여’라고 하며
속칭 ‘가라’라고 한다.”라고 설명된 것으로 보아 여주의 지명유래는
아무래도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또 말과 관련된 여주의 지명설화가 전해진다.
마암(馬巖)바위 전설과 신륵사(神勒寺)의 전설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마암바위의 전설을 보자.옛날 한 어옹(漁翁)이 여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낚싯대를 물에 담그고 물 건너편의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런데 멀리서 손짓하며 달려오는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무척 다급한 듯 사공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 사공이 없던 터라 어옹은 낚시를 거두고 배에 올랐다.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여인의 비명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뒤쪽에서 험상궂은 사나이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옹이 재빠르게 건너가 그녀를 배에 태우려 할 때
뇌성벽력이 치며 바람이 불었다.
그와 함께 어디서인지 누런 말과 검은 말이 나타났다.
여인은 재빠르게 황마(黃馬)에 오르고 뒤이어 달려온 사나이는
여마(驪馬)에 올랐다. 하늘엔 자욱한 물보라가 일고 어옹은
흔들리는 배를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바람은 멎고
물결이 가라앉자 그 광경에 놀란 어옹이 말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니 여인과 사나이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의 자태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 바위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왔다 하여 마암(馬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의 지명도 황려
(黃驪)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 설화에 여강에서 황마와 여마가 출현한 뒤
지명을 황려라고 한 점으로 보아 여주의 지명유래가 말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륵사의 전설에도 말과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여흥으로 불리던 이 지역은 세종이 돌아가신 뒤 여주(驪州)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어느 날 포악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타나 농작물을 마구 짓밟고
사람들이 얼씬만 하면 그냥 물어뜯어 사람들은 이를 피해 집안으로 숨기 바빴고
절 근처도 얼씬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농민의 피해가 심한 것을 절에 와 있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못 들을 리 없었다. 선사가 하루는 포악한 황마와 여마를
다스리기 위해 이상한 굴레[勒]을 씌워 용마를 다스렸더니 이후부터는
양마(良馬)가 되었다. 그 후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 하여
이 사찰을 신륵사(神勒寺)라 부르게 되었고 이 지역의 지명도 황려(黃驪)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마을 형상이 말이 물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여
마래리라고 한 점, 능서면 번도리 말마당, 도장 주변의 마감산(馬甘山) 등의
지명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여주와 말과의 관련성을 더욱 짙게 해준다.
여흥민씨는 줄곧 여주를 지켰다.
여흥민씨 가문에서 네 명의 왕후를 배출하였으나 어쩌면 하나같이 불우하였다.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1365-1420)는 말년에 동생 민무구·민무질이 역모로 엮여
친정집이 쑥대밭으로 변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1701)는 노론과 남인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폐비되었다가 복귀하였으나 소생이 없이 죽었다.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가 노론의 거두 송준길의 딸이었다.
고종의 명성황후(1851-1895)는 을미왜란으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순명황후(1872-1904)는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일찍 죽었으므로
순종이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여흥민씨 출신의 왕후는 조선건국의 주역이었고, 조선중기를
버텼으며 조선패망을 지켜본 유일한 집안이다. 여흥민씨들의 본거지는 여주였다.
인현왕후와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민씨 조상들의 묘가 여주에 많이 산재해 있다.
“주산이란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으뜸이다.
둘째는 주산이 뒤에서 내려온 산맥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들을 건너 갑자기 높고 큰 봉우리로 솟아나고 지맥이 감싸면서
골판을 만들어 궁내에 들어온 듯하며, 주산의 형세가 온중하고
풍대하여 겹집이나 높은 궁전 같은 곳이다.
셋째는 사방에 산이 멀리 있어 평탄하고 넓으며, 산맥이 평지에
뻗어 내렸다가 물가에서 그쳐 들판 터를 만든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큰 들을 끼고 있는 여주는 세 번째의 등급에 드는 땅이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낮게 발달된 구릉은 능선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높지도 않고 수려하지 않으며 청명하지도 않다.
단지 아담한 하기는 하다. 능선이 유순하며 때론 들로 숨어버려
기가 융숭하거나 옹골차지 못하다.
이런 산은 재물복은 많고 벼슬복도 있으나 단지 귀기(貴氣)가
오래가지 못함이 흠이다. 좋은 시절 벼슬을 하고는 시절이 다하면
낙향하여 사는 삶이 제격이다. 대한제국의 첫 황후였던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에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생가 터를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태어날 때 어떤 기운을 받았는지가 인물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있다.
하늘 기운의 대표적인 것은 시간이다. 시간에 따라 기운이 변한다.
그러므로 태어난 연월일시인 사주에 따라 사람의 기운이 달라질 수 있다.
땅 기운의 대표적인 것은 생가 터다.
곡식을 어느 땅에 심느냐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도 태어난 장소가 중요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유명한
인물이 태어난 생가 터는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생가 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맥이다.
맥은 산 능선에서도 땅의 기운이 전달되는 통로다.
“논두렁 맥이라도 받아야 면장이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맥을 받는 집과 못 받는 집은 차이가 크다는 뜻이다.
따라서 집터를 볼 때는 반드시 그 뒤로 가서 맥을 확인해야 한다.
맥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집터 뒤로 가서 산에서 내려오는
능선을 바라본다. 그리고 등성이로 이어지는 줄기가 어디로
뻗어내려 오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맥을 구분하기 어려울 때는
능선에서 빗물이 갈라지는 분수령을 찾는다.
명성황후 생가에서 맥을 보면 황후가 태어난 건넌방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조선의 국모가 됐다.
우리나라 역사상 왕비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른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아들이나 손자가 왕이어서 수렴청정을 하면서였다.
또는 집안이 세도가인 경우였다.
명성황후처럼 스스로 권력을 만든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대를 이을 자손조차 없어서 몰락지경에 이른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제자매는 물론 사촌조차도 없었다. 제사는 모셔야 하기 때문에
12촌인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했다.
명성황후에게 21살 차이의 오빠가 있는 이유다.
민승호의 누나는 흥선군 이하응의 부인으로 후에
고종이 되는 명복을 낳는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이 12살의 나이로 제26대 왕위(고종)에 올랐다.
대원군이 된 흥선군은 친정이 단출한 며느리 감을 골랐다.
그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외척 세도정치에 치를 떨었다.
때문에 외척들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힘이 돼줄
사람이 없는 왕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된 게 명성황후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면 20세 성인이 될 때까지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한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 조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다스렸다. 그런데 고종이 22세가 돼서도
섭정을 계속하자 명성황후는 주변 사람들을 규합해 대원군을
탄핵하도록 했다. 결국 대원군은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했다.
이후로 대원군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또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여흥 민씨들을 끌어들여 요직에 앉혔다. 당시 관직의 절반정도를
여흥 민씨들이 차지했다고 했을 정도로 세도정치가 심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엇갈리고 있다.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여걸이라는 평가까지 다양하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을 생가에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렵다.
사람은 잉태한 곳, 성장한 곳, 현재 사는 곳,
조상 묘 등에서 영향을 받는다.
생가만 가지고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지만 명성황후의 힘은
생가의 기운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생가 주변을 살펴보면 백호자락이 청룡보다 훨씬 더 길게 감싸주고 있다.
풍수에서는 청룡을 남자, 백호를 여자로 본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힘을 받는 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문 밖으로 보이는 안산은 야트막하지만 초승달처럼 생겼다.
이를 ‘아미사’라고 한다.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을 초승달에
비유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아미사가 있으면 여자들이 귀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태어나 8살까지 살았다.
본래 이 집은 황후의 6대조인 민유중의 묘막이었다.
민유중(閔維重,1630년~1687년)은 서인으로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다.
생가 바로 뒤편 언덕에 그의 묘가 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종4품 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언제부터 여주에서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명성황후가 8세 때 서울 안국동에 있는
감고당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여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민유중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인현왕후의 친정 아버지이며 숙종의 장인이다.
명성황후의 6대 조할아버지이다. 그는 예문관검열, 사헌부감찰, 병조정랑, 성균관대사성,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위인 숙종의 지원으로 권력을행사하다 조야의 비판을 받고
실권하였다.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배웠으며,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들의 예론(禮論)을
지지했으며, 경학에 매우 밝았다.
1630년(1세, 인조8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조참의,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며,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며,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배웠으며,
서인(西人)에 속했다가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자 노론(老論)에 속했다.
1651년(22세,효종2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설서, 성균관전적 등을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56년(27세,효종7년)에 병조정랑,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재해에 대처하는 일에 대해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처음 시작하는부분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 재이(災異)에 대한 보고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가운데 큰 것을 열거할 것 같으면,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가
옥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진동시키고 사람과 물건이 날렸다고 합니다.
또 우박이 갑자기 내려 백성이 죽거나 다친 이가 백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고,
큰 비로 강물이 불어 농민이 빠져 죽은 자가 40여명 이라고 말한 것도 있습니다.
밭에 쌓아둔 곡식이 저절로 발생한 화재로 모두 탔다고 말한 것도 있고,
심지어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며 벼락이 쳐서 성묘(聖廟)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방파제가 무너지고 뱃사공이 떠내려가 실종되기도 하였답니다.
그 동안에 목숨을 잃은 자를 따져보면 이미 수천여 명에 이른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을 듣자니 마음이 놀라고 말하자니 뼈골이 오싹합니다.
이는 실로 지난 역사에 없었던 바이고 국조(國朝) 3백 년간 듣지 못했던 바이며,
전하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래 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또한 오늘날처럼 참혹한 경우는 없었습니다.(중략)
하늘이 바야흐로 노여워하여 갖가지 흉포함이 이르게하니,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근심과 보전하기 어렵다는 염려는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서 묵묵히 계시면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계십니다. 군신들은 전하를 우러러 받드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답답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끝내 하늘을
감동시킬 한마디 말이나 재앙을 그치게 할 한가지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지 않은 업무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역사를 날마다 경영하여 힘쓰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염려하는 것은 진실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수양 반성하는 것이 바로 그 실질이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바로 그 형식입니다.
실질을 보존하지 못하고 형식 또한 따라서 폐지하시어
이 양자를 잊어버리고는 조금도 경계하거나 조심하는 뜻이 없으니,
신이 감히 모르기는 하지만 천재와 시변이 정말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단 말입니까?”
효종은 이러한 상서문에 “말을 올린 정성이 가상하다” 고 답하였다.
1665년(36세,현종6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몇 달 뒤에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승지, 이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즈음에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과 다툰 끝에
관직을 떠나 광주에 은거하였다.
1671년(42세,현종12년) 이해에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1674년(45세,숙종원년) 이해조선의 제19대 왕숙종(肅宗,1661-1720)이 14세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 송시열과 그 당파인 산당(山黨)이 실각하였다.
민유중의 당색은 크게는 서인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이 주축이 된 산당(山黨)에 속했다.
산당은 서인의 한 당파인 한당(漢黨)과 대립하고 있었다.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사직하고 충주로 내려가 지냈다.
이후 탄핵을 받아 흥해(興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에 유배되었다.
1680년(51세,숙종6년)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왕이 사용하는 천막을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사용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로 남인의 고위관료들이 실각되고, 마침 역모사건까지 발생하여
숙종이 남인들을 대거 몰아내고 서인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 민유중은 이 일로 다시 등용되어, 송시열의 측근이었던
친형 민정중을 도와 남인을 추방하는데 앞장 섰다. 공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인정권을 주도하였다. 서인은 이후에 노론(노장파)
소론(소장파)로 분열되었다.
1681년(52세,숙종7년) 이해병조판서 의직에 있었는데,
둘째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숙종은 원래 즉위한 뒤에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인경왕후仁敬王后)로 맞이했다.
이해 10월에 왕비가 사망하여 다시 부인(계비繼妃인현왕후仁顯王后)을
맞이한 것이다.숙종의 부인이 된 인현왕후은 민유중의 둘째 딸로
민유중이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송준길의 딸은 진송씨가 낳은 딸이다.
송시열과 김석주가 적극 추천하여 숙종의 두번째 부인이 된것이다.
덕분에 민유중은 국구(國舅,왕의장인)이 되었으며,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에 임명되었다.
1682년(53세,숙종8년) 금위영 창설을 주도하여 금위대장에 임명되었다.
1686년(57세,숙종12년) 친인척이 병권과 재정권을 독점 장악하고
국가 대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관직을 독점한다는 비판의
상소가 쇄도하였다. 소론파 윤증은 숙종이 내린 관직까지 사양하면서
외척의 위세를 비판하였으며 같은 노론파 이징명도 외척의
세도를 비판하며 인현왕후에게 주의를 주라는 상소를 올렸다.
덕분에 이징명은 국모의 명예를 훼손한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
민유중은 사위인 숙종을 만나 자신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일로 그는 모든 관직을 내놓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였다.
이해 ⌈숙종실록 ⌋ 8월 6일자에는 민유중이 숙종에게 올린 상소문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이 지난번에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의 응지(應旨)에 대한
상소를 삼가 보았었습니다. 그가 첫머리에서, ‘과거의 역사에
지진의 재변은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어, ‘거처와 봉양이 습관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등의 말로써 신을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왕비를 경계시키고 외척을 주의 시켜야 한다고까지 청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경계하도록 한 것은 엄격해야하고 또 간절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글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서 마음과
뼈가 함께 섬짓 할 정도였습니다. 또 삼가들으니, 윤경교(尹敬敎)가 상소를
올려 ‘총애가 지나쳐서 교만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니, 신의 죄는 이지경에
이르러 한층 더 첨가 되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서 종전의 범죄가
어떠했는지를 스스로알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죽게 된 때에 이르러서
이렇게까지 좋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이징명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참으로안타깝다.
그대에게 무슨 털끝 만큼이라도 인책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 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관은 실록의 중간에 민유중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민유중(閔維重)은 조정에 벼슬한 지30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 하였었는데, 국구(國舅)가 되고서는 더욱 더 조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외척(外戚)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숙종이 사적(私的)으로 편전(便殿)에서 민유중을 만나,
외부의 일을 물어보았다. 민유중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늙고 병들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적으므로 무릇
조정의 의논에 대해서는 참여하여 들은 것이 없습니다.
가령 한 두가지 들은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만약에 신을 통하여 들으신다면 이는 바로 부정(不正)한 길입니다.
어찌 성조(聖朝)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숙종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고 헤어졌다.
이때부터 다시는 민유중과는 사적으로 만나지 아니하였다.
사관은 다시 민유중을 두둔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이징명의 상소의 뜻은 어찌 민유중이 참으로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대체로 그 말을 엮어갈 적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임금이 이징명을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장인 어른이 되는 민유중을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것이다.”
1687년(58세,숙종13년)에 사망했다. 6월 29일 <숙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졸기가 실렸다.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졸(卒)했다.
나이가 58세였다.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여 방정하고
총명하여 통달했었다. 형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경술(經術)을
가지고 진출하여 사림(士林)들의 두터운 인망(人望)을 받았다.
조정에서 벼슬하면서는 언론이 준엄하고 단정하여 업적이 융성하게 나타났고 ,
집에 있을 적에는 행의(行誼)에 독실하여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제어하였으니,
임금이 왕비(王妃)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문이다. 이때 민유중이 바야흐로 서전(西銓)의 장관(長官)으로
있으면서 위계(位階)가 보국(輔國)에 올랐으므로 순식간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국가의 제도에 얽매여 기밀(機密)한 요직을 모두내놓고
마침내 등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었다.”
숙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년간 녹봉을 주도록 명하였다.
시신은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과 벽동의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권10책이있다.
민유중이 사망한 다음해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새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한 뒤,
인현왕후는 폐비하였다. 송시열과 노론계 관리들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하고 사약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민유중으로서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던 주위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몰리는 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참으로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