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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사 중 유해를 거두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독립유공자의 위패를 모신 무후선열제단이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갖고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위종 열사,1919년 3.1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유관순 열사 대한제국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장군,6.25전쟁 중 납북되었던 정인보 조소앙 조규식 등 독립유공자
131명의 위패를 모셨다.
1920년 역사에 길이 남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홍범도(洪範圖)장군(1868-1943)의 위패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해와 달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행야 에헹야 에헹야 에행 에행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 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 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날으는 홍범도가'이다.
눈에 선하다. 산하를 누비며 일본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는 '비(飛) 장군'활약이 말이다.
당시 조선민중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알려진 ‘날으는 홍범도 장군’이다.
여천(汝千)홍범도(洪範圖) 장군은 그 당시 민중의 우상이었다.
1868년 10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난다.
태여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윈다. 아홉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부잣집 머슴으로 지내다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으로 입대한다.
당시 조선 후기의 군대는 부패하여 군의 제대로 된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범도는 군의 부정부패와 사병에 대한 학대에 실망하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탈영한다.
홍범도는 몇 년간 노동자로 일하다가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한다.
그는 신계사에서 한글을 배우고 역사의식을 깨닫는다.
지담대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 알려진다. 임진왜란 당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과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사명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때 자신 스스로 존재에 대한 자아성찰과
동시에 투철한 항일의식으로 무장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신계사의 승려생활을 마감한다.파계한 후에는 뛰어난 사격솜씨를 활용해 명포수
사냥꾼으로 변신한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와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강원도 철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타도하는데 앞장선다.
의병진을 해산한 후 다시 본업인 사냥꾼으로 돌아갔다가 1907년 군대해산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한다.
사냥꾼으로 조직된 의병진은 지형지물에 밝아 다른 의병 부대와 달리
탁월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 등과 함께 포수단을 조직해 교포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를 결성하자
그 예하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을 가지고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 만포진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도독부와 통합, 500여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 삼둔자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켜 대전적을 올렸으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다.
또한 같은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해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적인 추격을 해옴에 따라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으며 그뒤 간도지방의 김좌진·최진동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
(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무장해제되고,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되어 조직된
고려중앙정청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으나,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후진 양성에만 심혈을 기울이다가 1943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제 때인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 대한북로독군부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월강(越江) 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이자 한반도 바깥 지역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하여 1920년 4월 초 3일(음력) 일병(日兵)과 접전하여 일병 31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후원병(증원병) 100여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뒤에로
영상(嶺上)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싸움하던 남은 군사 퇴진(退陣:철수)하여 오던 길로 못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 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도착)하니까 내려다 총진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맞총질한즉······(일본군병이) 속사포(기관총)로 내려다 쏘니 신민단 군사 한사람도 없이 죽고 일병이 수백명 죽고 서로 코코(나팔)소리 듣고 총소리 끊어졌다. 그 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명 죽었다...."-장세윤의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에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일제는 1920년 5월 독자적인
조선 독립군과 독립 투쟁세력을 소탕 및 토벌을 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고 이때부터 만주 지역에서도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일제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만주 지린 성
봉오동으로 집결하여 한반도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된다.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승첩에서 올린 전과는
일군 사살 1백 57명, 중상 2백여 명, 경상 1백여 명에 달하였다.홍범도장군이 지휘한 봉오동승첩은 독립군들 뿐만 아니라 전독립
운동자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켜 놓았으며 독립군들은 이러한 봉오동 승첩을 10년 이래의 숙원인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부르면서 계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적백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소속의 체코군이 우수한 체코제 무기를 독립군에게 넘겼기 때문에
독립군의 화력은 이전보다 크게 배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소에 독립군을 크게 우습게 보았기 때문에
'기껏해야 화승총이지' 하는 인식 하에 독립군의 매복 가능성마저 무시하고 전술을 전개했다.
독립군의 빈약한 화력으로는 매복 습격을 해와도 금방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산산히 부서지게 된다.
홍범도는 53세의 노인으로서 중키에 뚱뚱한 몸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지만 계급장도 없이 일개 졸병의 차림으로 지휘도나 권총대신 장총을 휘두르며 일반사병 틈 속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1920년 10월 20일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이다.
김좌진과 홍범도 연합부대가 이끈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 130여명 전사하고 220여명이 부상하였다고 기록된다.
일본군은 약 1200명이 죽고 2100여명이 부상하는 등 치욕적인 대참패한 전쟁이다.
청산리 항일대첩은 1920년 6월께에 벌어진 봉오동 전투로 촉발됐다.
일제 하 우리나라 독립전쟁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봉오동 전투에서 의병부대인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백 명에게 사상 피해를 입혔다. 이에 분노한 일본군 수뇌부가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동원된 일본 정규군의 규모는 무려 2만5000명이다.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 각급 부대는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성해 맞서 싸웠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독립전쟁인 청산리 항일대첩은 북로군정서가 단독으로 수행한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등과 함께 홍범도
연합부대가 단독 수행한 완루구 전투, 북로군정서와 홍범도부대가 공동 수행한 어랑촌 전투 등을 포괄해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엿새 동안 청산리 일대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일본군 정규군과 독립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뜻하기도 한다. 4개월 전 봉오동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독립군 진원지로 알려진 조선인촌을
습격하며 무자비한 살육행위를 저지른다. 이에 대비한 독립군 대장 김좌진과 홍범도는 각자 자기가 거느린 군대를 이끌고
일단 청산리에 숨어든다.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삼림 속에 은신한 독립군을 독 안의 쥐로 생각하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다.
정예 1개 연대 병력이니 거칠 게 없었다. 이에 비해 독립군은 병력과 화력에서 절대 열세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지형을 이용한 작전을 구사하기로 한다.
이때 이범석은 일본군과 직접 대결할 선두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이범석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을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그의 자질을 안 백전노장 김좌진과 홍범도가 선두를 맡겼다. 이범석은 비상한 결심 하에 불과 260여 명의 중대 병력을
산골짜기 위쪽에 배치했다. 그의 예상대로 일본군 정예 1개 연대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범석부대의 매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첩첩산중으로 스스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포위됐고, 독립군의 총부리는
이범석의 사격명령에 불을 뿜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벌어진 싸움 결과 독립군은 일본군 약 1200명을
사살하고 수천 명을 부상케 하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2001년 세운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의 건립 취지문과
이 기념비 건립의 경위를 밝힌 글이 석판에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내외를 진감한 청산리 항일 대첩은 항일투쟁사상 천고에 빛날 력사적 전역이어늘
1920년 10월 21 - 26일 김좌진 홍범도가 통솔하는 항일련합 부대는 화룡시 2 - 3도구에서
연변 각 민족 주민의 대폭적 지원하에 협동 작전으로 백운평 와록구 어랑촌 874고지 고동하반전투 등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침략군을 섬멸하였거늘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전과는 연변 내지 동북 지역 반일무장 투쟁사상 새로운 시편을 엮음은 물론,
조선 인민의 반일 민족 독립 운동을 주동한 력사로서 청사에 새겨졌어라.
청산리 대첩은 "일군 무적" 의 신화를 깨뜨리고 연변 내지 전국 각 민족 인민의 항일투지를 지대히 고무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위풍을 추풍 락엽처럼 쓸어버렸거늘,
그 실패를 달가와 않은 일본침략군은 연변 지역 무고한 백성에 대하여 선후로
2,600명을 참살한 보복의 "경신녀 대학살"을 감행하였은즉 그 죄 하늘에 사무치고 그 참상에 치가 떨리는도다.
청산리 대첩 80 주년에 즈음하여 연변 지역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렬들의 충혼을 기리고 위 위업 천추 만대에 전하노라
경신년 대참안 중 조난 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 중 피흘려 분전하신 항일 열렬들이여, 영생불멸하라!
연변 각 민족 인민 삼가 드림
2001년 8월 31일 준공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와 화룡시인민정부의 령도하에
주내 여러 민족인민들의 공동한 노력에 의하여 오늘 여기에 세워지게 되었다.
50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넓이 25메터, 놓이 17메터 60센치로 된 이 기념탑은
연변 건축설계원에서 설계하고 화룡시태달건축유한공사에서 시공하였다.
이 기념비 수전중 연변국제공공관계협회와 연변해외문제연구소가 일상사업을 주최하고 처리하였다.
우리는 각계 인사들의 여러면으로 되는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특히 한국광복회의 정성어린 지지를 받았다. 이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연변여러민족인민청산리항일
대첩기념비수건위원회
2001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