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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인간에 대한 천착
저는 드라마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이일을 하고 있는, 말하자면 이 분야에 있어서는 일종의 '노인'입니다. 흔히 노인은 지혜자라는 말도 있듯이 제가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결론지은 재산이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순간 순간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큰일이건 작은일이건 간에.그리고 드라마 작가를 목표로 하거나 아니거나를 불문하고 '나는 어떤 인간의 모습으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가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어떤 모양새의 인간이고 싶은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원하고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결정해서 그 쪽으로 매진하며 길게 살다보면 원하는 그 모습이 될수 있고, 감히 저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다고 여기면서 나름대로 자랑스럽고 옳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중구조의 인간이 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이중구조의 인간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실제의 나' 다르고 원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자신이 다른 경우를 말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혐오합니다. 실제로 저 자신은 하나의 얼굴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의식한 치장이나 분장이 아닌 내 모습을 선택해 살아왔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굳이 내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드라마라는 것이 어차피 인간을 들여다보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인생의 모습이 상당부분 작품에 투영되는 것이기에 가장 가까운 예를 들고자 할 따름입니다.
저는 드라마 작가로 데뷔할 때부터 싸우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싸움'이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어떤 일을 강요받았을때' 결코 참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의견이 다를 때 즉각 즉각 얘기하는 바람에 어른들로부터 충고도 많이 받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인식은 하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의 김수현이고 싶은가'가 저의 유일한 허영이라면 허영이었습니다. 딱딱하고 재미없게 작가가 무슨 교양 선생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저의 경우는 자신에게 엄격한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이것이 곧 작가로서의 자존심과도 결부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꺼낸 얘기입니다.
자존심을 사수하라
저를 굳이 한 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자존심의 결사 사수'입니다. 자존심만큼 자신에게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존심을 사수하라'였습니다. 제대로 된 자존심을 사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에 맞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리정돈하고, 그것에 맞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존심이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힘겨루기나 하는 지극히 졸렬하고 유치한 수준의 자존심이 아닙니다. 열등감이나 피해의식 없는 자존심을 뜻합니다. 제가 말하는 자존심에 있어 열등감은 불필요합니다. 열등감은 피해의식을 불러오고 피해의식은 아무런 쓸모없는 자존심을 부추기게 됩니다. 작가라면 적어도 자존심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존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게 되겠죠.
우선 작품이 자존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라면 자기 작품이 자기 자존심에, 가족에게,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작가로서 당당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당당하고, 앞으로도 계속 당당하기 위해서 작품이 자기 자존심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작가가 제대로 된 작가입니다. 이득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비열하거나 비겁하지 않고, 거짓말이나 속임수 쓰지 않고, 중상모략하지 않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쓰는 작품이라면 충분히 작가로서의 자존심에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자존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캐릭터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에 등장한다면 더욱 감동을 줄 것이고, 인물의 개성과 드라마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살아날 것이며, 실제로 그런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자존심이 없는 드라마들을 보면 등장인물들의 인격장애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겨우 겨우 쪽지대본 내보내면서 시청률이 자존심이라고 믿고, 연출자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면서 작품에 대해 토의하자고 하면 밤중에라도 불려나가 끌려 다니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자존심이 없어서 콩쥐팥쥐에서 신데렐라로 이어지는 작품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전혀 지성과 능력과 실력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이 판을 치고, 그들이 벌이는 행태나 직업 또한 황당하고 허황하기만 하고 3각 4각, 심지어 5각 6각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자아 그렇다면 자존심을 사수하면서 작가로 활동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작가의 재산은 책읽기
균형잡힌 가치관, 건강한 작가 정신
전문적 이야기꾼 되기
'글'쓰기가 아닌 '말'쓰기
드라마는 '내용'이다
다양한 캐릭터 창출이 성공의 열쇠
드라마와 본질의 문제
작가의 재산은 책읽기
자존심을 사수하면서 작가로 활동할 수 있으려면 책을 읽으세요. 그것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 너무 너무 책을 안 읽습니다. 적어도 우리 세대의 작가나 우리 선배 작가들은 기본적인 틀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선배 작가들은 기초가 튼튼하고 작가 소양이 풍부하셨습니다. 그 역시 책을 많이 읽은 데서 비롯됐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곧 작가로서의 밑천이고 재산입니다. 어떤 책을 읽느냐 하면 고전을 읽으세요. 동화에서부터 시작해 신화로 넘어가면 더욱 좋습니다. 모든 세계 문호들의 책을 섭렵하세요. 레마르크의 <개선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위와 소년, 아버지가 모욕당하는 것, 셰익스피어의 그 무궁무진하고 화려 찬란한 어휘구사력, 우리나라 작가 이태준, 홍명희의 감성과 문장력은 또 어떻습니까? 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열심히 읽으세요. 그 다음에는 예컨대 1930년대부터의 현대문학을 훑는 식으로 모든 분야의 책을 다 읽으세요. 책이라고 생긴 것은 다 보세요. 드라마 작가로서의 작업에 필요한 책이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분야로 늘려갈수록 더욱 좋습니다. 다만 다이제스트는 보지 마세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으면서 여러분의 창고 숫자와 크기를 늘려가세요. 이것이 곧 작가로서의 내공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 나오는 어느 장면이나 사건, 이름 등을 굳이 기억하려 하지 마세요. 집착하지 말고 잊으세요. 그렇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연기처럼 내 창고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개괄적인 분위기와 냄새만 맡되 그것 속에 들어가 같이 살다 나오세요. 어차피 드라마란 인간탐구와 인생성찰, 그리고 인간연구가 아닙니까. 책을 안 읽으면 작가로서의 재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모든 작가는 무궁무진하게 풀어낼 수 있는 창고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본소양을 갖추지 않고 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짓입니다. 특히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최소한 기본적인 것을 갖추지 않고 쓰겠다고 덤비는 것은 명백한 사기행각입니다.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시청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드라마 작가가 모든 인생을 다 경험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접경험을 직접경험인양 내 것으로 받아들여 소화시켜서 토해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고전으로 남아 있는 책들은 대개가 인간 본연의 문제를 천착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도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본질은 같습니다. 드라마 작가는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든 이 기본을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붙들고 작업해야 합니다. 독서는 닫혀 있던 감성의 문을 열어주고 부족한 사고능력을 확장시켜주며 사물에 대한 이해능력을 깊게 만들어줍니다. 이 모든 것이 작가로서의 창작활동에 반드시 첫째가 되는 귀중한 재산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드라마 작가로서의 기본재산은 가지고 있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책을 많이 봤고, 작가가 되고 나서도 끊임없이 책을 읽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잘 쓰고, 어떻게 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현 시점에서 당장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책을, 그것도 많이 읽으라는 것입니다.
균형잡힌 가치관, 건강한 작가정신
TV 드라마 작가는 뒤틀리지 않은 스스로의 가치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균형 잡힌 성격을 갖춰야 합니다. 작가 나름의 가치관도 없이 작품을 쓰겠다면 작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비뚤어지거나 뒤틀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인간을 꿰뚫어보고 결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가치관을 갖는 것이 작가로서의 첫걸음입니다.
그것은 대개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될 수 없듯이, 바로 그 인간에 대한 애정이 스스로 뒤틀리지 않는 가치관을 확립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작가로서의 균형감각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균형 잡힌 성격에서 인물의 합리성과 작품의 타당성이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작가의 정신이 건강해야 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인간의 삶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경우든 작가의 정신은 건강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인생을 정확하게 볼 줄 아는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 우리가 접하는 드라마 가운데는 너무나 이상한 드라마가 많습니다. 작가의 가치관이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 작가의 가치관이 뒤틀린 경우,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경우, 급기야는 말이 안 되는 드라마들을 보게 됩니다. 도무지 발을 땅에 딛지 않은 그런 부평초 같은 작가들은 자존심이 아니라 오로지 시청률을 신주단지처럼 애지중지 모시고 숫자놀음에 일희일비하며 휘둘리게 되죠.
그 결과 많은 인격장애 드라마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태프들이 일하는데 지장이 없는 좋은 대본을 제때 보내고,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본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작 재벌 2세나 출생의 비밀 따위에 매달려 춤을 추다 보면 작가의 가치관을 찾아볼 길이 아득해집니다. 작가의 정신이 건강하면 절대로 재벌 2세나 출생의 비밀 등등의 함량미달과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들의 양산 속에서 맴돌지 않습니다. 작가가 하는 일은 작가 자신과의 투쟁입니다. 적어도 저 자신은 그렇게 일을 해왔습니다.
연출자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하고, 대본 고치라면 고치면서 작가생활 하지마세요.
재능과 실력과 능력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저는 항상 시청자의 수준을 제 수준에 맞춰놓고 씁니다. '나 같은 사람이 본다'고 생각하고 씁니다. 작품은 곧 작가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준 높은 작품을 원합니다.
이런 것들은 작가 자신의 뒤틀리지 않은 가치관 확립에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균형 잡힌 성격과 작가정신의 건강성이 작가로서의 재능과 실력과 능력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확립한 뒤틀리지 않은 가치관과 건강한 작가정신과의 끝없는 투쟁이란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문적 이야기꾼 되기
TV 드라마는 수박 겉핥기나 주마간산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대충 나열해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통한 일종의 심리전입니다. 드라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큐멘터리와 다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심리변화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깊이 들어가 마음 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필요하다면 한 군데 계속 머무르면서 시청자를 꼭 붙들어 메기도 합니다. 한 시대의 흐름이나 한 집안의 흥망과 같은 가족사, 또는 한 사람의 일대기를 충실히 늘어놓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어느 부분, 어떤 상황을 누구를 통해 어떻게 부각시키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러자면 드라마는 치밀하고 또 치밀해야 합니다.
엉성하게 작업하지 마십시오. 드라마는 '세공'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충 큰 줄기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치밀하고 세밀하게 다듬는 것입니다. 보석의 컷팅처럼, 세밀한 공정으로 심리를 묘사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붙이거나 쓸데없는 군살을 붙이는 것으로 행여 착각하거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세공'의 원리를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세공은 엉성하지 않고 치밀할 뿐, 결코 뜸들이거나 빙빙 돌려대지 않습니다. 곧바로 문제를 갖다 대면서 본론으로 직행하고, 잘라낼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내면서 치밀하게 연마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치밀하고 치밀하고 또 치밀하십시오. 이유 없이 비가 내리고 느닷없이 교통 사고가 나서도 안 됩니다. 치밀한 세공인은 차갑고 영리한 머리를 갖고 있습니다. 치밀하다는 것은 자기 작품에 대한 책임과 깊이와 자신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전문적인 이야기꾼의 자세입니다.
이야기꾼이 되십시오. 그것도 그냥 엉성한 이야기꾼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전문적이고 뛰어난 이야기꾼일수록 좋습니다. 그러려면 물론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갖춰야겠죠.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무엇입니까? 어떤 걸 갖춰야 하는 걸까요?
우선 남보다 많은 사연을 갖고 있거나 관찰했거나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이 숱한 사연을 생각해 내거나 꾸며댈 수 있는 재능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이야기꾼이 되려면 인물들을 일단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으세요. 다시 말해
드라마 속 등장인물의 성격과 성장과정, 환경, 목표 등을 입체적으로 잘 만들어놓으면 그 인물들이 살아서 저절로 이야기가 술술 나옵니다. 그들이 각자알아서 뜁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드라마 이전의 인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 거기까지 오는 데는 그냥 오지 않거든요.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라는 것은 나오는 인물 모두가 드라마 시작 이전에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지닌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늘도 있고 양지도 있고, 영광도 있고 오욕도 있고,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고, 좌절도 있고 성공도 있고, 시련도 있고 배반도 있고, 결함도 있고 버릇도 있고, 어리석음도 있고 못 참기도 하고....
그 드라마에 나오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마치 땅에서 솟은 사람인양 만들어선 안 됩니다. 거기까지 오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이 있고 당연히 갖은 사연이 다 있어야죠. 이것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의 모든 행위에 대해 보는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왜?'라는 질문에 작가가 즉각 대답할 수 있어야 됩니다. 끊임없이 이 '왜, 왜'는 되풀이 되어야 합니다. 왜, 어떻게, 아니 어떻게... '왜'가 없는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어느 한 단면만 있고 부피가 없는 작업은 해서도 안되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오는 인물 모두에 대한 이해와 연민과 사랑이 있어야겠는데, 심지어 살인범한테까지도 그가 거기까지 오는데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배려가 곧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오는 인물 모두에 대한 이해와 연민, 애정이 없다면 드라마 작업을 포기하세요. 체온이 없고 향기가 사라진 그런 드라마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뒤를 궁금해 하고, 이해하려 하고, 알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드라마 속에 등장시킨 인물들 모두가 그들이 해야 할 일, 할수 있는 일, 할 법한 일을 찾아서만 놓으십시오. 그러면 드라마는 마치 물 흐르듯이 흘러가면서 때로는 긴장시키고 때로는 풀어주면서 스스로 완급을 조절해 갈 것입니다.
'글'쓰기가 아닌 '말'쓰기
어떤 경우든 드라마 작가가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필력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말 장사'가 아니라 '글 장사'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 아닌 글을 팔아먹는 사람한테 기본적인 필력이 없다면 처음부터 그 사업은 망하는 사업이니까요.작가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에 대한 모든 평가는 글에서 나오고, 작가의 자부심도 글이 지켜줍니다. 그런데 텔레비전 드라마의 글은 일반적인 글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은 글이되 엄격한 의미에서 글이 아니라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방송문장의 특성이 대두됩니다. 특히 드라마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말의 형태를 갖춘 대사로 이뤄지기 때문에 더욱 더 방송문장의 특성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만인 글, 일회성이 갖는 단점을 충분히 감안한 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쉬워야 하고 짧아야 하고 다분히 시각적인 글이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대화의 리듬을 유지해야 하고 생활언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이 아니라 말이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말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는 글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적인 필력이란 그런 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형형색색의 미사여구로 꾸민 글은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콩을 마구 쏟아놓는 것같이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야기의 진행과 감정과 마음이 실린 '말로 된 글'을 쓰는 재능이 필요한 것이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력적이며 적확한 표현, 살아 숨쉬는 품위 있는 말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본적인 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만약에 말로 된 글을 쓰기가 힘든 사람은 일찌감치 드라마가 아닌 다른 글 장사를 해보는 편이 한결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방송 글은 좀 다릅니다. 글이 아니라 말, 즉 언어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글보다는 말의 묘미와 매력을 잘 살리는 쪽이 훨씬 더 유리하겠죠.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거짓된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마세요. 어떤 글을 쓰든 작가에게 있어 그 원리는 다 해당됩니다. 이 역시 작가로서의 부끄러움과 자존심과 연결되는 아킬레스건입니다.
드라마는 '내용'이다
한 사람의 작가가 제대로 검증받으려면 평생이 걸린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겨우 작품 한 두개로 교만하지 말고 늘 겸손해야 합니다.
한 두 작품 혹은 서 너 개 드라마가 잘 나갔다고 해서 대가연하거나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제대로 된 작가인가 아닌가의 평가에는 보다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로서 기본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가 결정합니다.
드라마를 가지고 폼 잡지 말고 쓸 데 없는 짓 하지 마세요. 드라마는 어떤 경우든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어느 드라마가 제법 무리 없이 나간다 싶었는데 겨우 몇 회째인가에서 장난을 치더군요. 이야기가 궁해서 그런지 음악을 깔면서 화면만 흘리더라고요. 벌써 이야기가 궁해서가 아니라면 이런 것은 겉멋이고 폼 잡는 일입 니다. 감각적이 아니라 유치한 짓입니다.
시청률과 작품의 질은 별개입니다. 시청자의 문화적 지능지수와 작품의 질은 왕왕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가 쓴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경우, 제가 갖고 있는 온갖 지능지수를 총동원해 썼기 때문에 저로서는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청률면에서는 결코 안전하지 못했고 역시 다르게 나왔습니다.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가족 중심의 홈드라마보다 시청률이 떨어졌습니다. 죽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시청자의 수준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는 적어도 시청자의 수준을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시청자 모두가 나만큼은 된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오기가 아니라 작품은 이렇게 쓰는 것아 옳다고 믿습니다. 작가의 수준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굳이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면 시청률이 올라가겠지"로 나가서도 안 되겠지만, 그런다고 오르는 것이 시청률이 아닙니다. 시청률이 낮고 싶은 작가가 어딨겠습니까? 그러나 시청률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과적으로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드라마니까'라는 말에 저항하십시오.
"드라마니까 저렇지", "드라마는 다 쓰레기야"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인간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혹은 유쾌하게, 혹은 아름답게 그려내서, 보는 이들에게 휴식과 기쁨 혹은 감동을 주면서, 그들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유도하고 활력을 주는 작업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든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인생을 날로 먹는 풍조나 세태에 영합하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되게 그리는 것 등은 악성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입니다.
작가는 생각이 멋있어야 됩니다. 시청자의 모든 지능지수를 높이는 작업이 드라마라고 믿고 하십시오. 이런 걸 우리가 사명감이라고까지 말할 거야 없지만 그런 믿음조차 없다면 일찌감치 작가를 걷어치우고 다른 일을 하면서 사는게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무지 공동작업을 할 수 없는 작가가 되십시오. 드라마를 쓰는 것은 혼자 하는 일입니다. 구조적으로 혼자거 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을 여럿이 모여서 합동으로 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입니다. 혼자서 작업할 수 있는 작가가 되십시오. 합동으로 하는 것은 모자이크에 지나지 않습니다.
드라마라는 것은 음악과 같이 흐름인데 어떻게 이 사람 저 사람이 함께 작업을 한다는 것인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혼자서 하기 위해선 역시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겠죠. 자칫 공은 나에게 과는 남에게 돌리는 그런 작업은 창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창작이 아니라 조립이 되기 십상이면 순수한 의미의 작가의 작업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에 상처 내는 거래는 하지 마세요. 자존심을 내놓고 거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작가가 되십시오. 그러려면 갖추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양한 캐릭터 창출이 성공의 열쇠
저는 비교적 단순하게 작품을 시작합니다. 시작은 간단하게, 아주 심플한 데서 출발합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명료한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새엄마>는 대가족 집안에 재취로 들어온 여자는 어떻게 살아갈까?
<강남가족>은 한없이 선량한 아버지와 착하고 생각이 건강한 자식들의 사
는 이야기.
<신부일기>는 똘똘한 시골처녀가 서울로 시집오면 어떻게 될까?
<사랑과 진실>은 신분 바꿔치기.
<사랑과 야망>은 형제이야기.
<사랑이 뭐길래>는 진보와 보수, 두 집안의 충돌.
<은사시나무>는 이 세상에 외롭고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부모님 전상서>는 옛날로 돌아가자.
다만 제가 작품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캐릭터를 만드는 일입니다. 캐릭터는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디가 달라도 조금씩 다 다르듯이 캐릭터는 다양한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캐릭터 창출의 다양성에 실패한다면 그 작품은 이미 틀렸습니다. 다양한 캐릭터 창출을 위해선 끊임없고 날카로운 관찰력이 요구되겠죠. 대본을 쓸 때 컴퓨터 자판에 글자를 찍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물들이 그림으로 다 잡혀야 됩니다. 그래야 작업이 겉돌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다양한 캐릭터 창출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제가 쓴 대본은 아무도 못 고칩니다. 애드립도 용납하지 않아요. 재미있는 사실은 굳이 제가 요구하지 않아도 남이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 작품은 누가 토씨 하나 고쳐도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하는 배우들이 아예 손대는 것을 포기합니다. 배우가 왜 대본을 고칩니까. 작가는 어디까지나 난데. 배우는 내가 쓴 것을 최선을 다 해 표현하는 역할을 해야 할 뿐입니
다. 연출자도 안 됩니다. 연출자도 못 고칩니다. 연출자는 연출자지 작가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자면 연출자는 지휘자이지 작곡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근데 왜 남의 곡을 함부로 고치려고 덤비느냐구요. 이것은 결국 어떤 얘기입니까?
각자 자기의 역할 또는 자기가 하는 일에 충실하자도 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거기 나오는 인물들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말 한 마디 토씨 하나는 오로지 작가가 만든 캐릭터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흔히들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느냐고 합니다. 둘 다 갖춘 드라마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드라마를 보는 동안 그 어떤 무엇인가의 끌어당기는 힘, 즉 흡인력이 없다면, 그것을 편의상 재미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채널이 돌아가기 않게, 채널을 고정시킬 수 있는 흡인력이 없다면 감동도 없다는 겁니다. 드라마의 재미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추리는 추리대로, 법정드라마는 법정드라마대로, 멜로드라마는 또 그것대로. 그러면서 또 법정드라마의 재미와 홈드라마 또는 멜로드라마의 재미가 다릅니다. 실로 수백 가지의 재미가 있을 수 있겠죠.
저는 이 수많은 재미와 감동의 한 복판에 캐릭터의 다양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캐릭터 창출의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캐릭터의 인물이 내뱉는 단어 하나 토씨 하나도 함부로 못 고치게 합니다. 어떻게 창출된 캐릭터이며, 그 캐릭터에 대해 작가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드라마와 본질의 문제
드라마란 무엇인가? 드라마 작가가 끝까지 붙들도 매달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 드라마 작가들이 천착하야 할 것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들이 고전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본질에 대한 탐구였기에 두고두고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종교는 왜 몇 천년씩 존속되는가? 이 역시 본질 문제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작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방송현실의 변화에 따라, 사회현실의 변화에 따라, 인간군상의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드라마가 흔들려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회현실이 어떻든지 간에 드라마는 인간에 대한 천착이기 때문에 변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이 작가라면 시대가 망가질수록 망가지기 이전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썼던 일련의 특집극들은 인간을 말하는 것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풍조나 시류를 신경 쓰지 마세요. 좋은 대본이면 됩니다. 가끔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게 되는 이른바 '엽기'라는 것이 왜 나올까요? 자극 때문에 나온 것이겠죠. 자극으로 한판 승부를 보자는 건 그만큼 자기 작품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런 엽기적인 것으로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버리세요. 결코 되지도 않고 되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해 창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능이 낮은 콩쥐팥쥐,인생을 날로 먹자고 덤비는 신데렐라 같은 것을 써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수 있을까요?
작가는 작가다워야 하고 작가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질을 파고들고 끝까지 본질에 매달려야 합니다.
드라마를 얕보지 마세요.
그것은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