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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여행 30일간의 아름다운 추억
D-8 : 2편
천연염색 공장견학 및 쿠스코의 재입성
(코리칸차 탐방)
감사인사
오늘은 남미 페루에서 8일째인 2017. 3. 20(월) 오후입니다. 소중한 분들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 그리고 소중한 이야기를 잊어 버리지 않고 오래 오래 간직하고자 여기 일기장으로 기술해 봅니다. 저의 일기장 내용은 개인적인 감정과 주관적인 느낌을 기술하였기에 아마 여러분들과 견해가 다른 점도 많기 때문에 분명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함께 했던 분들께 저의 이 소감문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20일 農心居士 올림
오늘 오전의 주요 관광내용
♣ 아침 일찍 기상하여 잉카시대의 유일한 계획도시라고 불리우는 오얀타이 마을의 돌담 길과 돌벽으로 쌓은 주택지역을 둘러 보았고, 또 새벽 시장에서 야채와 과일등도 구입했습니다. 이곳 오얀타이 마을은 쿠스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이고 특히 오늘날에는 남미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불리우는 마추픽추를 찾은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거치는 경유지임을 알았습니다.
♣ 한편 이곳 오얀타이탐보는 잉카제국의 마지막 항쟁지였기에 잉카 시대의 유적지가 많았습니다. 어제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를 갔다왔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이곳을 둘러보곤 잉카제국시대 ‘태양의 신전’은 오히려 마추픽추보다 더 거대한 것에 놀랐습니다. 늪은 언덕에 17개의 계단으로 형성된 영농장인 ‘테라즈’에는 털복숭이인 알파인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주변에 만발한 야생화와 어울려 그 전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 오얀타이를 떠나 잉카시대 수도인 쿠스코를 향했는데, 깊은 물이 소리를 내어 콸~콸~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며칠전 비가 많이 왔던 탓일 것입니다만, 이 아름다운 계곡을 보면서 문뜩 잉카시대 망코 2세가 쿠스코에서 탈출하여 본거지를 이곳 오얀타이탐보에 잡고 흩어졌던 부족들을 규합해 저항운동을 펼칠 때, 스페인軍을 이끌고 공격해 온, 에르난도(피사로의 둘째 동생)가 이끄는 70명의 기병들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 지형상으로 볼 때 어쩌면 바로 이 지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스페인軍이 퇴각하는 퇴로를 유적지와 마을 사이를 흐르는 빠따깐차 江의 상류를 막아 댐을 터트려 물에 휩쓸려가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니깐 말입니다. 마치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처럼 말입니다. 곧 계곡 절벽에 있는 세계유일의 허니문 호텔도 보았고, 이어 산 언덕의 사그라도의 광활한 대평야 꽃길의 아름다움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1편의 마지막 내용
곧 이어 2편에서는 '알파카 털에 천연물감을 입혀 옷을 만드는 가내공장 견학'을 비롯하여 이틀전에 떠났던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재입성하여 다시 찾아본 시내의 잉카 유적지에 대한 견학 내용을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알파카 털로 직접 옷을 제작하는 작은 가내공장 견학
♣ 야생화 꽃밭이 감미로운 여운을 음미하기도 잠깐, Am 12시 20분, 곧 이어 우리 버스는 “신채로”라는 농촌마을의 중심지 한 건물 앞에 섰습니다. 이곳은 바로 잉카 원주민들이 알파카와 리마 등의 털을 천연재료로 염색하여 옷을 짜는 작은 가내 수공업공장 겸 관광상품 판매점이었습니다.
♣ 며칠간 페루 일대를 여행하면서 길거리에서 or 버스 차창 밖으로 보아왔던 페루의 원주민 아낙을 직접 곁에서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곳 페루 염색가공공장에서는 남정네가 전혀 없고 몇몇 아낙네들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와 딸 그리고 시누이쯤으로 보이는 가족인 것 같았습니다. 실제 알파카 털을 갖고 나뭇잎과 과일 열매로 천연물감을 드리는 것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인공적인 염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주 예쁜 색깔의 천연색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놀라운 기술이었습니다.
♣ 우선 ‘아가 나무뿌리’로 삼푸를 만든다는데, 이것을 물에 넣고 비비면 하얀 거품이 생기는 천연 삼푸가 됩니다. 여기에 더러운 양털을 넣고 싹~싹~ 문데면 금방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흑 옥수수로 자색의 물감을 들게 했고, 선인장은 속이 하얀색이었는데, 이것을 양털에 문지르면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레몬을 조금 넣으니깐 ‘오랜지색깔’로 변했습니다. 아~! 천연물감은 이렇게 만드는구나~!하고 우린 그저 감탄하기만 했지요. 그리고 옷과 모자 그리고 목도리 등 모든 것 실오라기 하나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색깔을 넣은 것은 보통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여기서도 다시금 엿볼 수 있었습니다.
♣ 이곳 염색 가공공장의 벽장식 울타리에는 이틀 前 우리가 우르밤바로 갈 때에 길가의 작은 음식점에서 먹었던 쥐처럼 생긴 ‘쿠이’요리를 먹은 바 있었는데 그 쿠이 요리가 되는 ‘모르모토’를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음식점이 아니기에 아마도 관상용 or 관광용으로 기르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혹시 ‘모르모토’의 털을 이용해 옷감을 짜는지도… 그러나 이곳 페루에는 우수한 털을 지닌 알파카, 야마 등이 많기 때문에 굳이 ‘모르모토’의 털까지는 사용치 않을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천연염색물 시범을 보이던 잉카 원조민 아낙은 우리 일행 몇몇에게 직접 천연염료를 얼굴에 발라 주기도 했습니다.
♣ 나뭇잎과 열매로 각양각색의 천연물감을 들이는 기술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그들이 천연물감을 들여 만든 모자와 마후라, 자켓, 식탁보 등은 마치 예술품 같았습니다. 옷을 짜는 바늘은 원래는 사람의 뼈(허벅지의 뼈)를 사용했었다는데, 지금은 ‘라마의 뼈’로 바느질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파카는 부드러워서 주로 옷을 만드는데 많이 사용하고, 양털과 라마털은 조금 딱딱해 침대보와 요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입한 옷가지들과 모자 등은 모두 알파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 이런 시범을 본 후에 상품을 둘러 보게 했는데, 이곳을 견학한 관광객은 상품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리숙해 보였지만 이들은 진짜 장사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똑 같은 제품을 나중에 시중에서 구입했는데, 이곳 천연염색공장의 제품들이 훨씬 비싼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으니깐요. 아무튼 우리일행은 정말 귀중한 잉카의 문화 현장을 견학하여 가슴이 부듯했습니다.
♣ 약 30여분간 잉카 원주민 아낙의 염색과 옷짜는 시범을 관람한 후, 우리 일행은 귀국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많이 구입했습니다. 상기인도 이곳에서 마나님과 아들, 딸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 또 외손주에게 줄 선물을 한 보따리나 구입했지요. 옷 상의 자켓은 50솔(우리 돈으로 약 2만원) 정도였고, 아기들 모자는 20~30솔(7,000원 ~ 12,000원)이었습니다. 물건을 많이 판매한 이곳 염색가공공장의 원주민 아낙네 가족들은 감사의 뜻으로 우리가 탄 버스에 까지 올라와 인사를 하고 배웅해 주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일행으로 인하여 상상 외의 엄청 큰 매출을 올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고작 10개도 못파는 경우도 있는데, 한꺼번에 50~ 60개를 한자리에서 판매했으니깐요. 우리는 내일이면 이곳 페루를 떠나 볼리비아로 이동해야 하기에 갖고 있던 페루 화폐는 모두 소진 해야 하기에 이곳에서 기념품을 많이 구입했나 봅니다.
쿠스코 시내 입성
♣ Pm 1시 20분, 약 1시간을 머문 이곳 신채로 마을의 염색 가공공장을 떠나 Bus에 승차했고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쿠스코로 향했습니다. 약30여분간 달린 끝에 쿠스코 인근의 마을 앞에 잠시 정차하여 그동안 우리가 타고 왔던 대형버스에서 하차하여 승합차에 갈아탔습니다. 그 이유는 대형버스가 쿠스코의 우리 숙소 근처의 좁은 도로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해발고도 3,400여 m 고산지대로 진입했고 산꼭데기 주변에 집들이 따닥 따닥 붙어있을 정도로 밀집된 마을을 지나 잠시 후인 Pm 2시 20분 드디어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 도착했지요.
♣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쿠스코(City of Cuzco)는 잉카 제국의 지배자 파차쿠텍(Pachacútec, 1438∼1471) 시대의 도시로 종교적•행정적 기능을 갖춘 독특하고 복합적인 중심 도시였습니다. 농업과 수공업, 공업 구역은 중심부와 확실하게 구분되어, 산업 구역이 도시를 둘러싼 형태였지요. 스페인은 16세기에 이곳을 정복한 후, 도시의 기본 구조를 보존하면서 잉카 도시의 폐허 위에 바로크 양식 교회와 궁전을 건설하였습니다.. 현재의 쿠스코의 면적은 617㎢이며, 거주 인구는 450,095명(2015년 통계)인 대도시입니다.
♣ 16세기까지만 해도 페루는 동쪽으로 아마존,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칠레, 북으로는 에콰도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잉카 제국이었으며 그 중심에 쿠스코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호전적이던 잉카인들은 타 부족의 족장을 잔인하게 죽이는 방식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그 결과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인구 2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고 잉카 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쿠스코는 잉카의 고도(古都)라기보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페인의 도시에 더 가깝습니다,
♣ 쿠스코란 말은 케츄아어로 배꼽 또는 중앙을 의미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잉카인들은 이곳을 잉카의 중심이라고 여겼나 봅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사흘전 리마에서 이곳 쿠스코에 처음왔을 때 처럼 약간의 어지럼증과 속이 미식 미식함을 느꼈는데 해발 3,400m 이상인 고산지대인 탓인 것 같았습니다.
♣ 점심시간이 지났고 또 고산증으로 속이 메스껍기는 했지만 민생고를 해결해야만 힘이 날 것 같아서 쿠스코의 중심지인 ‘툴루마요(Tullumayo)거리’를 지나 아주 쌈빡한 페루의 전문식당에 입장했습니다. 식당 내에는 페루의 전통복장을 갖추고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4인 그릅이 있어 분위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식탁에 둘러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데, 한무리의 남녀 서양관광객이 식당에 들어오면서 춤을 추며 난리 부르스 였습니다. 여행객의 자유분망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 음식은 쌀밥에 곁들여 나오는 감자튀김과 소고기 구이였는데,입맛이 없어서 먹는둥 마는둥 하며 그저 잉카콜라만 엄청 마신 것 같습니다. 이곳 식당에서 페루의 전통음악 연주를 듣게 된 것은 또다른 여행의 기쁨이었지요. 페루의 전통악기라고 하는 목관악기 케나(Quena)는 우리의 단소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소리가 정말 감칠맛 났지요. 또 시쿠(Siku)라고 하는 팬파이프(Pan Pipe) 악기의 음색도 가슴을 녹이는 듯 했습니다. 4인주 그룹은 모두 키타와 드럼을 치면서 입으로 케나와 시쿠를 번갈아 불렀지요. 특히 우리를 환영하는 뜻에서 귀에 익숙한 ‘벳사메 무초, 파차마마, 엘콘도 파초라, 왓따나메가’ 등을 반복적으로 불러주어 고맙기 그지 없었습니다.
잉카인들이 태양의 신을 모셨던 코리칸차에 세운 산토 도밍고 교회
♣ 때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Pm 3시 20분, 우리는 식당을 나와 빈몸으로 홀가분하게 걸었습니다. 여행가방과 등산용 배낭은 승합차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흘전에 이곳 쿠스코에 왔을 때 다 둘러보지 못했던 유적지 중 가장 먼저 황금으로 꾸며진 잉카의 신전을 헐고 그 위에 대성당을 지었다는 ‘산토 도밍고 교회’를 향했습니다.
♣ 산토 도밍고 성당(Santo Domingo)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성당입니다. 잉카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던 성전, 즉 코리칸차 위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성당으로 중앙에 독특한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신전의 중앙에 보이는 우물은 잉카시대에는 황금 우물이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매년 동짓날 어둠을 이기게 해달라는 태양의 축제를 이곳에서 지냈으며 스페인풍의 기둥과 회랑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 쿠스코의 오후 한낮은 가을이라고는 하나 햇볕이 따사로운 탓에 아직은. 그러나 산토 도밍코 성당 실내에 들어가니깐 그나마 그늘이기에 견딜만 했습니다. 성당의 실내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엄청 컸습니다. 그리고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긴 통로의 벽에는 성화 그림들이 게시되어 있고 또한 코리칸차(태양의 신전)에는 2kg의 금판 700장으로 천장을 덮었다고 하며 신전의 벽면은 황금으로 씌웠다고 하니 그 화려함이 어땠을지 상상해 봅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 쿠스코에 입성하여 이 신전만 보고도 눈이 뒤집혔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이 신전을 파괴하고(돌로된 초석만 남기고) 산토 도밍고성당을 만들면서 금판 등은 모두 자신의 본국인 스페인으로 가져 갔다고 합니다.
♣ 그리고 코리칸차(Qoricancha)은 잉카제국이 번창하던 시절 태양신전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코리칸차는 '황금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벽이 모두 황금으로 둘러 싸여 멀리서도 환하게 빛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코리칸차의 건물 부분은 파괴하고 돌로 된 초석을 남기고 그 위에 산토 도밍고 교회를 건설하였던 것이지요. 신전 내부는 광장을 중심으로 태양, 달, 별, 무지개의 신전의 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방은 아름답고 견고한 석조 벽들로 둘러싸여 있고, 벽에는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는데, 그곳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금이나 은 등의 장식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 이곳에 금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어느 스페인 정복자의 글에서 신전의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때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남아있는 신전의 초석은 수차례의 쿠스코 대지진에도 건재할 만큼 그 튼튼함과 정교함이 증명된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 산토 도밍고 성당 안에 있는 코리칸차 박물관에는 잉카 제국 당시 건설된 유적지와 유물이 여러개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지는 코리칸차의 안뜰에 해당하는 곳으로 실제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장소가 남아있지요. 중앙에 제단으로 사용했던 바위가 있고 사방이 또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데, 바위들 사이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스페인 침략자들은 남의 땅을 침략하여 황금과 보석을 약탈하고 궁전과 신전만 파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 그들이 저지른 가장 잔혹했던 것중에 하나는 잉카 원주민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천연두라는 전염병을 일부러 퍼뜨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희생된 원주민은 에스파냐 군대에 저항하다 사망한 사람보다 수십 배나 많았습니다. 또한 에스파냐의 종교인 가톨릭교를 강요하였고 이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원주민도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등에 엎고 저지른 만행이라서 그 죄가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 ‘태양의 신전’으로 알려진 코리칸차는 케추아 어로 황금을 뜻하는 ‘코리’와 울타리를 의미하는 ‘칸차’를 합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름의 뜻대로 코리칸차의 벽은 황금으로 덮여 있었고 광장은 황금으로 만든 나무와 식물, 동물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광장을 꾸민 나무와 조각들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힘들지만 스페인의 박물관과 자료관에는 당시 스페인 군대를 따라 쿠스코에 왔던 역사학자와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해 놓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이런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마도 이렇게 화려한 정원은 잉카인의 정신적인 고향이었던 코리칸차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산토 도밍고성당의 기초 담벽에서 옛 잉카제국의 태양의 신전의 흔적을 아직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사실 잉카문명의 시작은 AD 12세기 경에 Cuzco 지역을 중심으로 목축을 하던 유목민들이 Manco Capac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도시국가를 만들었는데 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우리나라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기가 됩니다. 가장 발달했던 시기도 1400년~1500년 사이이니 조선중기와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갑습니다.
♣ 쿠스코의 중심은 아우카이파타인데, 신성 광장이라고도 불렸던 아우카이파타는 지금은 아르마스 광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여전히 쿠스코의 중심입니다. 쿠스코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며 잉카인들이 모임을 하고 의식을 올렸던 신성한 장소이지요. 아르마스 광장의 뒷편 언덕에 우뚝 솟은 예수님의 상을 불 수 있는데, 이곳은 이틀전 우리 일행이 탐방했던 삭사이와만입니다.
♣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소중한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비라코차 신전입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잉카인들이 의식을 올렸던 비라코차 신전을 파괴한 뒤 그 위에 대성당을 건설했지요. 그리고 대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라콤 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도 11대 왕 우아이나 카팍이 살았던 궁전이랍니다. '예수회'에 의해 세워진 이 '라 콤파냐 데 헤수스 교회'(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는 1576년에 착공 되었는데 '잉카'의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 황제의 왕궁터 위에 세워졌지요. 안데스 지역의 전통적 요소와 바로코 양식이 결합된 '안데스 바로크'(Andean Baroque) 양식으로 지어진 전면부가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 쿠스코 시의 웅장한 바로크 대성당은 잉카 시대의 중요한 궁전이었던 비라코차 궁의 토대 위에 세워졌는데, 이 도시에 세워진 두 번째 성당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성당은 더 작고 스페인 점령초기였던 1536년에 세워졌으나. 수십년이 흘러 새 성당을 건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1559년에 초석이 놓였으나 자금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파괴적인 대지진이 일어난 탓으로, 1669년 새 성당의 건축이 완성되기까지는 100년도 넘는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새 성당을 짓는 데에는 최고의 재능을 지닌 식민지 예술가들이 동원되었고, 상당수의 원주민들이 인부로 임시 고용되었다고 합니다. 잉카의 성지에 서 있던 원래 성당은 소박한 교회의 위치로 격하되어 트리운포 교회가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교회는 새로 지어진 대성당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쿠스코 대성당에는 식민지 예술의 훌륭하고 호화로운 예를 보여 주는 요소가 가득합니다. 이중 대부분은 명망 높은 이 지역의 '쿠스코 유파'에 속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입니다. 그중 안토니 반 다이크의 작품으로 알려진 예수의 초상화도 이곳에 있습니다. 한편 쿠스코 시의 초상을 그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도 교회 안에 있는데 이것은 1650년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도시를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그외 견고한 은제 제단을 비롯해 아름다운 돌 세공품과 솜씨 있는 금속 세공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르코스 사파타(쿠스코 유파)가 특별히 성당을 위해 그린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이 그림에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페루인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려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놓인 음식은 예수와 관련이 있는 전형적인 음식이 아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쿠이(페루의 별미인 작고 깡마른 기니아 피그)’고기를 그려 놓았기에 더욱 눈낄을 끈다고 합니다.
제2차로 아르마스 광장과 인근 아툰루미위크(Hatun umiyoc)거리 저녁 나들이
♣ 오후 3시 20분 점식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식당에서 가까운산토 도밍고 성당과 잉카시대 ‘태양의 신전’으로 알려진 코리칸차 유물들을 둘러보고 Pm 4시에 광장근처에 대기중이던 미니버스에 탑승하여 일단 숙소를 들어와 짐을 정리하고 또 새로 배정 받은 Room를 점검 했습니다. 그리고 곧 Pm 4시 50분경 가장 편리한 자유복장을 갖추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다시 나갔습니다. 쿠스코의 야경도 궁금했고 또 고산지대에 아직 적응치 못한 탓으로 환자가 몇명이 발생했기에 뜻이 맞는 동행자들과 석식을 하기 위해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 오랜 세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평범한 도시 쿠스코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9대 왕 파차쿠티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라고 합니다. 파차쿠티 왕과 10대 왕 토파 유판키가 다스리면서 쿠스코는 주변 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이 다스렸던 면적은 한반도의 4배가 넘을 정도였답니다. 물론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중남미 지역에서는 아주 넓은 영토였습니다. 쿠스코의 원래 의미는 우리 몸의 중심인‘배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세상의 중심’이란 뜻도 갖고 있습니다. 쿠스코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파차쿠티 왕과 토파 유판키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15세기였는데, 쿠스코를 제국의 수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로 건설이었습니다.
♣ 주변 나라들을 점령한 파차쿠티 왕과 토파 유판키 왕은 나라를 쉽게 다스리기 위하여 로마제국처럼 주요도로를 쿠스코로 향하도록 만들었지요.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왕의 명령을 전하고 물건을 거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도로였기 때문이지요.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도로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중심이 어느 곳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쿠스코는 몸의 중심인 배꼽에서 세상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 쿠스코는 단순히 몇 곳의 유적지만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돌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장소는 물론, 왕족과 귀족들이 살았던 궁전과 저택,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물건을 교환했던 광장과 시장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길과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집까지 돌을 사용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길이와 높이가 1 ~ 3m에 이르는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지은 건물과 벽은 바늘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졌습니다
♣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에 두고 주변에 쿠스코 대성당, 산토 도밍고성당 등 성당만 13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방사선 모양으로 이어진 도로와 골목에는 잉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로레토 알리(Loreto Alley)에 있는 12각의 돌은 잉카인들의 건축술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지진이 일어 났을 때도 스페인 식민지시대에 다시 지었던 건물들은 붕괴되었지만 잉키인들이 쌓았던 석축은 끄떡 없었던 점은 그 들의 건축술이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는 말만 있었을 뿐 문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쿠스코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인원과 공사 기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기호와 여러자료를 근거로 분석해 볼 때, 약5만여명이 20년 동안 공사를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답니다.
고산지대인 해발 3,400m인 쿠스코에서 겪은 고산병 증세의 후유증
♣ 우리 일행은 Pm 5시경 숙소를 나와 쿠스코 시내를 약 2시간 정도 둘러보았으나, 몇몇분들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단 모두 숙소를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이곳 쿠스코가 해발 고도가 3,400m나 되는 고지대이므로 산소가 부족한 탓으로 고산병 증세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어제 우리가 머물렀던 마추픽추는 해발 2,800m 정도 였고, 오얀타이탐보와 그 일대의 경우는 평균고도가 해발 2,000m 정도인데 반하여 이곳 쿠스코는 이보다 무려 1,000m 정도가 더 높은 곳이기에 갑짜기 높은 지대에 왔기에 어지러움증과 답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고산병 증세로 힘들어 하는 분들은 대부분 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단체 저녁식사는 생략했지만, 씽글로 참석한 소장파의 형제들 몇몇은 내일이면 이곳 쿠스코를 떠나야하기에 가볍게라도 저녁만찬을 하기 위해 Pm 8시경 늦은 시각이었지만 다시 쿠스코 시내로 나왔고, 의기투합한 우리 4인의 건달들은 저녁 식사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 한잔씩을 나누었고, 내일 이후에는 사용할 수 없는 페루 화폐로 이것 저젓 기념품을 구입한 후 야심한 밤 9시 30분 숙소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숙소로 들어왔고, 그때서야 졸음이 몰려왔기에 피로감 때문에 몸을 씻지도 않고 그냥 쭉~ 뻗어 꿈나라로 갔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이만 총총 맺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
내일의 일정표는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사항
페루의 화폐 이야기
♣ 페루의 화폐단위는 공식적으로 누에보 솔(Nuevo Sol)인데, 보통 솔이라고 말합니다. 솔의 하급개념으로 센티모(Centimos)가 있는데 센티모는 솔의 1/100이지요. 즉 USD 달러 / 센트로 나눈것과 비슷합니다. 남미에서는 주로 "페소"라는 단위를 많이 쓰는데 비해서 페루는 솔(Sol)이라고하는 조금은 페루만의 독특한 화폐단위를 쓰고 있습니다.
♣ "솔"은 스페인어로 "태양"을 뜻하며 1863년부터 1985년까지 통용된 페루의 통화이기도 했으나, 1985년에 도입한 인티의 인플레이션이 심해지자 1991년7월 1일에 1,000,000 인티스 = 1 누에보 솔(nuevo sol)의 화폐 개혁을 시행했지요. 2015년11월 13일 페루 의회는 자국의 통화 명칭을 누에보 솔에서 솔로 변경하는 안건을 통과시켰으며 이 안건은 2015년 12월 15일을 기해 시행되었습니다.
♣ 페루가 현재의 Nuevo Sol를 사용하기 까지에는 한때(1985 ~1990년)에 물가상승율이 연 최대 8,000%까지 오르면서 종전에 사용중이던 Inti는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일본계 이민 2세로 1990년 대통령 당선, 1995년 재선 당선, 2000년 3선에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로 그해 10월 사임됨) 시절 화폐개혁을 해서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데, 지폐로서는 10 Sol, 20 Sol, 50 Sol, 100 Sol, 200 Sol이있는데, 제일 큰 단위인 200 Sol은 페루에선 일반인들에게 워낙 큰 돈이고 귀해서 잘 통용이 안되고 일반인들은 집 장롱에 잘 보관한답니다.
♣ 동전으로는 1, 2, 5솔(Sol) 짜리가 있고, 센티모(Centimos)는 5, 10, 20, 50센티모가 있습니다. 100센티모가 1솔이지요. 1솔은 우리돈(₩)으로 환율이 현재 370~380원에 해당되지만, 우리는 그냥 계산하기 쉽게 400원으로 머릿속에 그렸습니다. 페루의 물가수준은 우리 한국과 비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재화와 서비스, 공산품과 농산품 등의 가격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즉 페루의 물가는 농산물로 말하면 한국에 비해서 1/10수준도 안되지만 공산품은 우리 한국의 물가와 비슷한 정도이기에 비교가 쉽지 않습니다.
♣ 어떻든 이곳 페루에서 약 1주일간 머물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1/10에 해당하는 포도, 사과, 바나나, 망고 등 열대과일은 원없이 먹었습니다. 그동안 주로 과일과 음료 정도를 사먹었으나 환전하고 남은 돈은 내일이면 이곳 페루를 떠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어서 오늘과 내일에 사용해야 했기에 주로 이곳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알파카로 짠 옷과 모자, 스카프 등을 구입하였지요.
페루 화폐의 구분
10 Nueves Soles
♣ 10솔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4,000원에 해당되는데, 현지에서 밥한그릇을 충분히 사먹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은 페루의 항공영웅으로 불리우는 호세 아벨라트 도키뇨네 곤잘레스(Jose Abelardo Quin ones Gonzales, 1914 ~ 1941)입니다. 그는 에콰도르와의 전쟁 때, 비행기를 몰고 적진에 뛰어들어 자폭을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기에 이를 기리고자 가장 많이 사용하는 10솔의 화폐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지요. 그리고 화폐의 뒷편에는 페루 최고의 문화유적지로 불리우는 바로 ‘마추픽추’의 전경이 담겨있습니다.
20 Nueves Soles
♣ 20솔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8,000원에 되는 이곳에서는 좀 큰 돈에 해당됩니다. 택시기본료가 3솔임을 감안하면 계산하기 쉽습니다. 20솔에 등장하는 인물은 라울 포라스(Raul Porras 1897 ~ 1960년)인데, 가톨릭대학 총장, 리마의 상원의원, 스페인대사,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국가의 기틀은 확고히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 페루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화폐의 뒷편은 잉카 치무왕국의 수도였던 찬찬유적지가 담겨있습니다.
50 Nueves Soles
♣ 50솔은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2만원에 해당되는 비교적 큰 돈입니다, 이번에 오얀타이탐보에서 쿠스코로 향하던 중에 들린 ‘알파카 털을 염색가공하여 옷을 만드는 가네공장에서 50솔에 알파카로 짠 자켓을 하나 구입했는데, 그 가격이 50솔이었습니다. 이 화페에 등장인물은 페루의 유명한 작가 아브라함 발델로마 핀토(Abrabam Valdelomar, 1888년~ 1919년)입니다. 1888년 해안도시인 피스코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이 시기의 추억이 그의 소설과 시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1911년 죽은 도시와 폐병환자들의 도시’의 소설이 유명잡지에 게재된 것을 계기로 작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 길레르모 빌링허스트 당시 대통령은 발델로마의 선거운동 지원에 감사 표시로 그를 엘 페루아노라는 신문사 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913년에는 그를 다시 주 로마 페루대사관에 파견하였지요. 그 해에 발델로마는 ‘기사 까르멜로’라는 소설로 명예로운 국가상을 수상하였으나 천제에게 따라오는 숙명적인 비극처럼 그는 불의의 사고로 1919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후세 문인들은 그를 ‘페루의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시대를 앞서간 과감한 작품들 그리고 독창적인 역사를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결국 화폐에 인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 화폐의 뒷면에는 차빈 데 우안타르(Chavin de Huantar) 유적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차빈 유적지는 안데스 문명의 최초 문명입니다. 해발 3,185m 고원에 위치한 차빈문명의 발상지는 BC 1,500년~BC300년 시기로 추정되는 유적지 입니다.
100 Nueves Soles
♣ 100솔은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에 해당되는 화폐입니다. 페루의 근로자의 한달 최저임금은 500솔이었는데, 최근 600솔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했다고 하는데, 600솔이면 한달 우리 돈으로 24만원이 되지요. 그렇게 생각할 때 100솔의 화폐는 페루 근로자들에게는 아주 큰 돈입니다. 이 100솔의 화폐에 등장인물은 호르게 바사드레(Jorge Basadre, 1903년~1980년)로 페루 남주지역의 Tacna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역작 ‘페루공화국 역사(Hstoria de la Republica delPeru 〈History of the Peruvian Republic History of the Peruvian Republic〉)’는 1939년에 처음 발행된 이래 이미 여섯번이나 재발행 되었습니다. 그는 행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고, 화재로 폐허가 된 페루국립도서관의 관장으로 이를 재견하기도 하였지요.
♣ 화폐의 뒷면에는 차차포야(Chachapoya Culturre) 유적지를 담았는데, 이 유적지는 Abise River 유역에 있는 페루의 北 아마존 지역 고고학 유적지인 Gran Pajaten입니다. 이 고고학 유적지는 해발 2,85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Abiseo River 국립공원의 일부입니다. 2000년대 초에 아데스산 피찰라마봉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적지는 페루 아마존 정글의 가장 중요한 문명이었던 Chachapoyas 문명에 의해 기원전 200년경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차차포야는 구름 속에 사는 콜라족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차차포야족은 스페인의 남미 정복 이전 잉카제국에 맞서 싸웠다고 알려진 부족으로 비교적 하얀 피부를 갖고 있어서 '구름의 전사들' 또는 '구름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화에서 우리 한반도의 발해와 고려 문화와 비슷한 점이 많아 우리나라 일부 역사학자들은 놀라고 있는게 현실이지만 역시 그 당시 아쉽게도 기록 문자가 없었기에 이를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뿐입니다.
200 Nueves Soles
♣ 200솔은 페루 화폐중에 가장 큰 돈으로서 우리 돈으로는 8만원에 해당됩니다. 워낙 큰돈이라서 200솔은 잘 통용되지 않고 있으며 주로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할 정도의 화폐라고 합니다. 이 200솔 화폐에 등장인물은 페루의 성인이자,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성인으로 품위 오른 이사벨 플로레스 올리바(Isabel Flores de Olive, 1585년~1617년) 성인입니다. 이 성인에 대한 내용은 워낙 유명한 분이기에 아래 다시금 상세히 기술하겠습니다. 그리고 200솔 화폐의 뒷면에는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카랄(Caral)유적지가 담겨있습니다.
200솔의 화폐에 등장하는
페루의 성인 ‘이사벨 플로레스 올리바”는 어떤 삶은 살았는가?
♣ 성인의 품에 오르는 분들은 모두가 환난 속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을 희생한 분들입니다. 궂이 옛 로마시대와 중세의 박해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하신 성인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국천주교 초대교회가 1839년 기해년부터 시작하여 1846년 병오년 그리고 1866년 병인 등 수십년을 걸친 가혹한 박해를 받는 가운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하여 성인의 품위에 오르신 분들이 103위나 되며, 그 외에도 지난 2014년 8월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체스코 교황님에 의해 124명의 순교자들이 복자의 품위에 오른 것으로도 한국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하느님을 믿기 위해 피흘리며 지킨 순교사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못지 않게 스페인 침약자들이 남미를 침공할 시에는 그들의 폭정과 억압, 약탈 그외 온갖 탐욕의 범죄가 만연한 상황에서 우리와는 정반대로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영구한 집권을 위해 잉카 인디오들에게 종교를 강요 당하는 가운데 태양을 숭상하던 곳에서 하느님을 믿는 새로운 종교가 정착된 이곳 페루에서도 성인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 우리나라는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서민중심으로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운 나라이고, 이곳 남미는 외부 침약자들이 통치수단을 이용한 강요된 교회를 세운 것이었지요. 그런데 오늘날 남미의 대다수 나라의 국민들이 90% 이상이 카톨릭 신자라는 것이 아이러니컬 할 뿐입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가 너무나 많았고 그들이 신앙심이 높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특히 오늘날 남미는 가장 많은 성직자들을 배출하는 나라가 되었고 또 현재의 프란체스코 교황님께서도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남미에서 탄생한 것은 어쩌면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페루의 성인 ‘이사벨 플로레스 올리바', 리마의 성녀 로사 성인으로 인하여 ‘한알이 밀알이 썩어 큰 열매를 맺듯’ 태양의 신전에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던 DNA를 갖고 있던 그 인디오 원주민의 후손들도 그녀의 삶에 감화되고 영향을 받아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오늘날 남미가 카톨릭 국가가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참고사항
위의 여행 기행문은 저의 '농부의 마음'이라는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eesk0523 에서 발췌하여
이곳 히말라야 산악회 카페로 옮겼습니다.
널리 해량(海量)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재경강릉중앙고 44회 李相卿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