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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은 언제 봐도 징그럽다. 배를 땅에 대고 기는 모습하며 혀를 날름거리는 행동들은 사람들의 저주를 받기에 충분하며, 조그맣고 톡 불거진 눈은 간사하기 짝이 없다. 오죽했으면 간사한 사람이 斜視처럼 눈을 뜨고 사리에 맞지도 않는 행동을 할 때 그의 눈을 뱀눈 같다고 표현할까?
그러나 이렇게 징그럽고 인간에게 해가 되는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이 뱀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무분별한 농약남용과 폐수, 생활오수 등의 방류로 시골의 논과 강에는 생명체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결과 뱀의 주 먹이인 개구리나 들쥐 등이 자취를 감추었고 이에 따라 먹이사슬이 파괴되어 뱀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파괴는 인간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땅꾼이다. 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땅꾼들은 뱀의 멸종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지고 따라서 전업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퇴직하면 운동 삼아 등산하면서 뱀으로 잡비나 벌어 볼까 생각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다른 부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생태계가 다시 회복되어 뱀이 다시 등장한다면 모를까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이러한 현상은 불가능해 보인다.
각설하고, 내가 뱀을 잡는 땅꾼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점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의 진사오 동지들이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고3인 1974년 결핵성 늑막염을 앓아 그 해 시험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2학기 들어서자 기침은 점점 심해지고 더 이상 책상에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어 당시 진주우체국 옆에 있던 박준기 내과에 가서 X-Ray 사진을 찍으니 늑막염으로 인해 한쪽 폐에 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팔뚝만한 주사기로 물을 빼낸 적이 있다. 그 다음 해인 1975년, 동지들이 돈 벌고 있거나 대학 다니면서 미팅하고 술먹고 깽판칠 때(대표적으로 연구기, 탤보, 시나니, 갱식이, 똥가리 등등) 나는 고향에서 실의에 빠진 채 우선 병부터 치료하야 하는 상황이었다. 1년 가까이 치료하고 나서 완치도 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다시 공부하여 결국 대학에는 합격했으나 입학 신체검사시 학교 보건진료소에서 만난 한용철 교수(초대 삼성의료원장, 서울의대 결핵학 전공)의 당시 청천벽력같은 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폐결핵 활동성 중등증 공동성인데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요건이지만 1년 휴학하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가하겠다."
또 1년 늦어지나 분하기도 하고 병이 그렇게 악화되었나 걱정되기도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낙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77년 1월 일지감지 고향으로 내려와 이젠 생사를 건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학칙에 의하면 군입대 휴학 외 일반휴학은 2년 연속 할 수 없으며 계속 휴학하면 제적된다고 했다. 따라서 어쨌든 1년 동안 병을 치료해야 대학에 복학할 수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치료에 매달렸다. 잘 알다시피 결핵은 잘 먹고 휴식을 취해야 나을 수 있는 병인데 그 당시 휴학을 했을지언정 대학은 합격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나 육체적 고통은 없었으나 시골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홀어머님 밑에서 형제들은 모두 공부한다고 학교 다니는 상황이어서 집안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 때 잘 먹이지 못해 아들이 병에 결렸다고 자책하시는 어머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자꾸 이야기가 길어져서 미안. 하여튼 1977년도 결핵치료를 위한 영양보충을 하기 위해 뛰어든 것이 뱀 잡는 일이었다. 당시 80호 쯤 되는 고향의 우리 집 이웃에 초등학교 3년 선배와 동기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미 두 사람은 뱀의 저주를 받아 요절했음)은 술 생각이 나면 뱀을 잡아 팔아서 한 잔씩 하곤 했다. 뱀 잡는 일이 신기하기도 하고 영양보충도 할 겸 그들을 따라 나선 것이 땅꾼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비를 챙겨 뱀사냥에 나섰다. 장비라 해봐야 긴 철사로 된 갈고리(보통 말아 다니는데 뱀 잡을 때는 펴서 끝을 ㄱ 자 형태로 구부림), 갈아입을 옷이 든 피크닉 가방, 뱀을 담을 신주머니 같은 베로 만든 가방(비닐봉지 등에 넣으면 뱀이 질식해 죽음) 뿐이었다. 그날의 코스는 문산에서 시작하여 금산면으로 이어지는 야산이었다. 우리는 문산 I/C 를 지나 오른쪽 산을 타고 이동하면서 주로 산소 앞의 상석을 찾아 뱀을 잡기 시작하였다. 뱀이란 놈이 더운 여름에는 상석 밑에 잘 숨어있는데 이는 한낮의 공기는 더운 반면 상석아래에는 밤에 차가와진 돌의 냉기가 아직 남아 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보통 상석밑에는 서너 마리, 재수 좋은 경우에는 열 마리 가량의 뱀이 똬리를 틀고 피서를 즐기고 있다가 우리에게 꼼짝없이 당하곤 했다. 일단 상석을 찾으면 선배가 엎드려 상석 속에 어떤 종류의 뱀이, 몇 마리가 있는지 파악해서 나머지 두 사람에게 알려준다. 만약 독사사 포함되어 있으면 지체 없이 갈고리를 꺼내 편 다음 상석을 들고 독사의 목부터 갈고리로 눌러야 한다. 이 때에는 고도의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독사를 잡아 보자기에 넣고 나면 나머지 능구렁이(구렁이와 다름), 너불따위(화사 즉 꽃뱀) 등은 독도 없고 이빨도 없기 때문에 맨손으로 마구잡이로 주머니에 주워 담는다.
어떤 경우는 뱀 잡으려고 상석을 들어 제끼고 있는데 산소 주인이 나타나 "여보시오. 왜 남의 상석을 손대요?" 하고 고함을 친다. 유고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조상 산소에 손대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여보시오. 상석 밑에 뱀을 넣어놓고 뱀보고 절할꺼요?" 하고 되레 큰소리 치면 주인은 말인즉슨 맞다 싶어 많이 누그러지곤 했다.
뱀을 몇 마리 잡고 방향을 왼쪽으로 돌려 지금의 공교사 쪽으로 올라갔는데 그 곳은 당시 경상대 축산실습장으로 초지가 조성되어 있어 뱀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다시 월아마을(금산에서 진성으로 향하는 도로 옆 마을)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빵 3개(삼립팥빵이었던 것으로 기억됨)를 사서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선배가 "빵에 곰팡이가 피었네" 하길래 자세히 보니 빵 전체가 푸른곰팡이 투성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가게에서는 빵을 들여놓으면 팔릴 때까지 절대 버리지 않기 때문에 곰팡이가 피는 것은 예사고 구더기가 득실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도 돈 주고 산 빵이 아까워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용하다. 다시 뱀 수색을 위해 월아마을 뒷산으로 올라서는데 한참 올라가니 소나무가 빽빽해지고 약간 어두운 산등성이로 무덤 하나가 나타났다. 가까이 가서 상석을 들어 보니 뱀은 한마라도 없었다. 허탈하여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산소 옆에 앉았는데 옆에 있던 선배 왈,
"어이 또라이(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들은 나를 또라이로 불렀다), 저게 무슨 소리고?"
선배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산소 옆 내 키만한 비석에 한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는 게 아닌가?
"政憲候太朗 吏曹判書 迎逸鄭公之墓"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는 느낌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그냥 높은 사람의 산소라고 했다. 우리가 방금 상석을 뒤진 산소가 이조판서의 묘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옛날 같으면 우리는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가다듬어 산소와 그 주위를 살펴보니 어딘지 모르게 엄숙하고 위풍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다. 월아산 기슭의 금산면 일대에는 아직도 정씨들이 많이 사는 집성촌이 있는데 이들이 이조판서의 후손일 것이다.
뱀이란 동물의 간사함이 여기서도 증명되는데 뱀은 일반 민초들의 산소 주변에는 우글거리고 살고 있지만 이조판서와 같은 힘있고 빽이 든든한 고관대작의 산소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행태를 보면 뱀보다도 못하다. 선거철만 되면 당선가능한 후보자 곁으로 온갖 정치사기꾼, 협잡꾼들이 부나비처럼 모여든다. 이들은 선거가 끝나면 한 줄기의 권력을 움켜쥐고 또다시 어떤 횡포를 부릴지 모른다. 권력을 무서워할줄 알아야지 그것을 부귀와 영예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온 사실로도 입증된다.
여하튼 그날도 우리는 뱀보자기를 잔뜩 채운 후 계곡에서 말끔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뱀을 팔기 위해 공교사 후문 진주동중학교 옆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버스 속에서 나는 꿈틀거리는 뱀보자기를 숨기기 위해 신문지로 보자기를 싼 다음에 무릎 위에 올려 놓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옆 자리의 사람들이 내 무릎 위의 신문지 뭉치속에 뱀이 든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2012. 음 8월 19일. 56년생이 56회 생일을 맞이하여
첫댓글 오늘은 본인 생일. 마눌님은 또 한국나가고 혼자서 복숭아 ,바나나 한개씩으로 생일아침상 때움. 아직 한낮 기온이 38, 39도까지 올라가 꼼짝못하고 실내에 갇혀 머리도 식힐 겸 옛 생각을 더듬고 있음. 재미없으면 패스하고 혹시 눈길이라도 주면 제 2 탄 "강의시간에 활용하는 뱀잡는 이야기" 준비함
박교수..
멀리서 생일 축하하네.
나보다 나흘뒤에 탄생하셨구만...
그런 일들이 있은 줄은 몰랐네!
충분히 재미있으니 2탄 내어주시게~~
박교수^^
생일을 추카하네...
그러고 보니
나도 땅군이네 그려...
... 부동산 땅꾼 ^^
박 교수..
생일 축하하네..^^
이국 땅에서의 생일을
마눌님 고국으로 떠나보내고
혼자서 외로이 맞았네 그려..ㅉㅉ
흥미진진하게 잘 봤으니
다음 편을 준비하게나.
PS> 지난 번 옐로스톤 사건(?)은 어찌 되었나??
홍사장, 같은 업종에 종사하구만...Yellowstone에서 마눌님 후송되었을때 모금운동을 제의한 제안에 대해 홍사장의 첫마디가 집을 팔아라고? 분당에서 부산집도 취급하나? 동지의 딱한 사정을 그대로 돈벌이에 활용하는 그대의 직업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하오. 같이 동업합시다.
강원장 축하해줘서 고맙소. 아직 청구서 기다리고 있는데 통상적으로 보험전 금액의 10~20%가 본인부담이라고 하니 잘하면 $3,000 정도에 끝낼 수 있겠다. 또 한가지 여기서는 본인부담 의료비를 한 푼도 내지않는 경우 문제가 되지만 일단 조금이라도 내고 나면 그 이후로는 천천히 갚아도 된다니까 미국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내면 될 것 같음. 걱정해줘서 감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심했구먼... 미안하이 ^^
그나저나 잘하면 400만원 선에서
마무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니까... 안심이 되네...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박교수는 미국에서 Two Jobs 로 외화를 획득하고 (...잘생긴 외모, 큰 키, 인품과 오리지널 한국어...^^)
마님에게는 ... 세상사 알 수 없다 ... 는 핑게로
경제적으로 도움되는 일에 나서게 하는 ...은근압박...전술도 효과가 있을 듯 하네 그려...^^
이번 사건의 교훈 -
2년 후 엘로우스톤 트래킹 갈 때는 반드시
여행자 보험 비싼것 넣자... ^^
음력 8월 20일은 엥구기 마누라랑 내가 잘 아는 정신연령이 나랑 동갑내기 열아홉인 가슴 큰 할매 생일이다.
홍사장, 모금운동이나 위의 댓글 모두 웃자고 한 소리를 가지고 미안하다 하면 내가 되레 미안하지...하여튼 위에 지적한 대로 해외여행시 여행자보험은 필수. 돈 몇푼 아끼려다 기둥뿌리 뽑히는 수가 있다.
텔보샘 어부인 생일 추카하며 생일파티 성대하게 해 주기 바람.
내 마누라는 가슴이 아스팔트에 껌 붙여 놓은 모양이다.
우선 생일 축하하고
아주 훌륭한 값진 이국 경험을
해서 다행이고
잘 마무리 될 것 같다고하니
더더욱 다행이네
청년기에
땅꾼이 된 내력에
가슴아픈 추억이 있었구만
이국땅에서 쓸쓸 단촐한 생일.... 추카함다...ㅋㅋ
기억은 오래가겠구먼...
비얌얘기 가끔씩 대충대충 한마디씩들었는데....상세한 내력이.....
'젊은 시절고생' 밑거름이 현실의 에너지가 된 것같고
앞으로도 쭉~~~~~~
총무님 안녕, 부산동지들도 잘 있는지. 이제 약 3개월 후면 다시 만나겠네. 97년 이곳에 왔을때는 한국 들어가기 싫더니만 이젠 입국날짜가 기다려진다. 그만큼 우리도 잘산다는 예기일 것이고 무엇보다 여기 생활은 일상적인 일들의 연속이니 재미가 없다. 입국하면 월별 모임에 가끔 참석하겠음
그때 고생하던 네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하다.
타국에서 건강 조심하고 생일 축하하네
축하는 여기까지
고향 주변 그 많은 배암이 왜 한마리도 보이지 않나 했더니 그린 사연이 ....
그것도 모르고 박교수가 훑고 지나간 자리 나도 몸보신하려고 우리 골목 친구들과 헤매고 다녔으니 쯧-쯧
우리 산도 모자라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는 힘의근간이 분명 내보다 앞서 잡은 배암의 힘인가?
암튼 잘 지내고 좋은 사진도 많이 올려주게
사진은 새몰 코스모스축제 사진임.
신촌(새마을->새몰)에서 동물리로 가는 도로주변이구만. 왼쪽 상단 파란 집은 고향 후배가 배나무 과수원을 경작하면서 살고 있는 집. 경전선 KTX 노선이 이 산 아래로 지나 개양으로 이어짐. 이 곳도 땔감하고 뱀잡기 위해 무지 많이 누볐던 곳. 휴학하던 해인 77년 4월 24일, 갑작스런 아버님 별세로 장례치르던 중 상여가 문산사거리에 잠시 쉬고 있을 때 찾아와서 위로하던 일 아직 잊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