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뒷풀이 때 이샛별 교우에게 한 소리 듣고 반성하면서 다시 설교문 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당분간 매주 한 편 올리다가 회차가 다 차면 한달에 두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25 1 5 말씀
절름발이들의 귀환
<예레미야서 31:1~6>
1 “나 주의 말이다. 그 때가 오면,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 나 주가 말한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에,
3 나 주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겠으니, 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너는 다시 너의 소구를 들고, 흥에 겨워 춤을 추며 나오게 될 것이다.
5 내가 너로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원을 만들 수 있게 하겠다. 포도를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따 먹게 하겠다.
6 에브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어서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하고 외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7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8 내가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리고 오겠으며, 땅의 맨 끝에서 모아 오겠다. 그들 가운데는 눈 먼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9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을사년(乙巳年) 새해가 밝았다. 을사년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먼저 120년 전인 1905년의 을사늑약을 떠울릴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즉각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 먼저 대륙을 향한 교두보가 될 한반도 지배 작업에 착수한다. 이 강제 조약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은 이를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유는 우리에게 역사를 가르친 교사들이 식민사학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친일 청산 작업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나라 공교육은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을사년에 강제로 체결된 불법 조약’이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에게 피식민지 경험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는 “을씨년스럽다”라는 형용사에 담겨있다.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또 “보기에 살림이 매우 가난한 데가 있다”는 뜻도 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데 비해 만들어진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의 유래를 을사늑약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과 직접 연결하는 일반적인 오해에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1897년 선교사 게일이 일본에서 출판한 조선어사전에도 등록되어 있다. 즉 이 단어의 유래는 을사늑약 이전에도 사용되던 말이었다. 이 단어의 진정한 기원은 을사늑약으로부터 120년 전인 1785년의 을사년 기근이다. 1783년과 1784년 조선에는 두 해 연달아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있었다. 그 여파는 이듬해인 1875년 을사년을 최악의 기근에 빠뜨렸다. 이때 조선의 백성이 겪은 고통이 “을사년스럽다”는 말로 이 민족의 상징계에 뚜렷이 새겨졌다.
그러고 보니 을사년은 120년 전에도 240년 전에도 을씨년스러운 해였다. 이 땅의 을사년에는 불길한 기운이 있다. 일부 사이비 지식인들은 60갑자를 한 축으로 하는 명리학이 통계학으로서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고 일견 그럴듯한 주장을 한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이비 지식이 점집 문턱을 닳도록 드나드는 인간들을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게도 하고, 길일을 잡아 내란을 일으키는 대통령이 가능한 현실도 만드는 것이다. 재미로 점을 본다면서도 점쟁이의 말 한마디에 입이 귀에 걸리기도 하고 심장이 쪼그라들기도 하는 바보들이 사회에 넘칠 때, 성서와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아랑곳도 없이 재산상의 성취나 사회적 성공 그리고 건강의 회복과 무병장수를 그 자체로 하나님의 축복이니 은총이니 주절대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일 때, 그런 사회는 육십갑자와 상관없이 을씨년스러워진다.
성서는 점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간주했으며, 가차 없이 처벌하라고 명령한다. 성서가 재미도 없는 경직된 삶을 강요하는 것일까? 아니다. 성서는 점술이 하나님을 사리사욕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진정한 의미의 신성모독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성서는 이러한 깨달음의 기록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점복은 관용해도 좋은 흥미 거리도, 존중해야 할 전통문화도 아니다. 성서에 근거하는 신앙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고, 결국 심판과 멸망에 이르는 길임을 잘 알고 있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점술이 불러내는 신들이 우상임을, 신을 부리는 교만과 반역의 술수임을, 결국 타인의 희생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부도덕하고 배타적인 정신의 발로임을 파멸을 통해 깨달았다. 점술이 횡행하는 사회는 망조가 든 것이다. 공동체가 그런 정신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며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은 진리에 대한 믿음, 실재와 대면하기를 회피하지 않는 삶과 세계에 대한 꿋꿋한 자세다. 기독교 신앙은 원시 신화와 같은 망상 의거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환상이지만, 이 환상은 현실에의 접근을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변화시키는 실재적 환상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폄하된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치명적인 망상에 빠져있다는 반증이다. 신앙을 원시적 세계관에 붙박아 두려는 기독교도 반드시 망할 것이지만, 자기가 망상에 빠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유대-기독교 전통을 함부로 폄훼하는 사회도 망할 것이다. 멸망을 위해 치닫는 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권력을 휘두르는 삶을 바라는 자들은 몹쓸 망상에 찌들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망상을 과학이라고 강변하거나 정의라며 요설을 휘두른다. 그리고 넋 빠진 사람들이 그들을 따른다. 이런 사회가 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회의 일상이 정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삶이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서 남쪽 유다왕국 사람이면서도, 이미 망한 나라인 북쪽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망한 나라의 백성들, 그들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망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고위층은 모두 포로로 끌려간 폐허의 땅에 남은 사람들,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전쟁에 참여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약자들, 적국이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 사나 죽으나 무시해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의 권력자들에게도 자신들이 경작한 포도나무 열매의 맛도 보지 못하고 빼앗겨 온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시온’ 즉 하나님의 성전으로 상징되는 율법을 연모하며, 소박한 마음이나마 하나님을 흠숭해 온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그들이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이라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멸망으로 치달은 사회 속에서 거의 인간 취급받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 당하던 장애인들, 그럼에도 임신한 여인과 해산한 여인처럼 자신들의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 공동체의 존속을 지탱해 온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들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람들이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될 날을 구원의 날로서 선포한다. 이 날은 기득권자들과 지배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그들에 의해 업신여김을 받던 사람들에게는 흥에 겨워 춤을 추게 될 기쁨의 날이다.
갑진년에서 을사년으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우리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권력 야욕과 주술의 망상에 빠진 자가 내란을 일으켜 자기는 물론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선택을 한 것이다. 몸살은 그간의 잘못된 생활로 누적된 독소로 인해 몸이 위기에 빠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요즈음의 정치적 위기는 문제가 내란 세력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그를 지도자로 선택한 공동체 전체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공동체는 요즈음 민주주의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는데, 마치 몸이 열을 내서 독소를 빼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과정을 잘 견디면 몸은 회복되며, 생활을 개선하고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독소를 빼낸 몸은 이전보다 더 강건해진다. 다행히 이 땅의 남은 자들은 저들을 향한 울분을 공동체를 향한 열정으로 표출하고 있다. 을사년에 이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허투루 여기기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나라의 멸망을 통해 망상에서 벗어났듯이, 우리 또한 공동체를 위기로 이끈 망상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公),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은 개인의 특별함과 만나신다. 그러나 이 개별성은 공을 깨뜨리는 사(私)가 아니라, 공을 세우는 저마다의 고유성이다. 을사늑약에는 을사오적이 있었다. 공을 버리고 사를 취하려는 이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배역하는 자들이었다. 우리 선배 신앙인들은 이를 잘 알았다. 그들은 신앙을 공을 세우는 버팀목으로 여겼다. 그때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을사년을 맞아 그때의 을씨년스러움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날의 독소를 공동체에서 제대로 빼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원수들을 제대로 심판하고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나라가 망했어도 망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올해 2025년 을사년은 우리에게 이 독소를 제거하는 은혜로운 기회로 주어졌다.
이 땅의 남은 자들, 오늘 거리에서 뜨거운 입김과 함께 이 열망을 외치는 대중들, 갑남을녀 약자들은 이 과제를 넉근히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다. 주께서 이들에게 힘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이 대열에 동참하자. 불안과 한탄을 떨쳐버리는 승리의 춤을 추자. 2025년 을사년을 이 땅의 남은 자들이 벅찬 승리를 노래하는 환호와 감격의 해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