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譯, 인간사랑(2004)
I. 2판 서문 읽기 : 도구, 아니 무기로서의 철학
그대 불멸을 꿈꾸는 자여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으라 말하는가
왜...왜 너희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신해철 「불멸의 관하여」에서.
형사 가제트와 지젝
들뢰즈/가타리에게 『천개의 고원』이 신비스런 성서가 아닌,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한 도구상자가 되어야 했듯, 지젝의 책들 역시 급박하게 되-돌아가는 세계정세에서 소소한 일상의 알레고리, TV 채널과 영화와 같은 문화 이데올로기로부터 외설스런 농담까지, 이 전체와 부분들을 보다 급진적으로, 또는 슬기롭게 사유해야 할 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도구가 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런데 나의 미달된 독서수준은 마치 긴박한 상황, 이를테면 망치나 용접기를 가지고 상이한 것들을 접속시켜야 할 때 톱이나 직소기가 나와 문제를 가르는, 머리에서 헬기의 역할을 해야 할 프로펠러가 나와야 하는 순간에 우산이 펼쳐져 나오는 형사 가제트의 만능 도구와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지젝의 책들이 만능도구상자라면, 정세와 상황에 맞는, 적재적소에 꺼내어 조이고 기름 치고, 붙이고 오리며 색칠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런데, 만약 그 도구상자의 제작자가 기존의 도구상자에 미흡한 문제점이 있다며, 다시 제작에 들어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에 더하여 기존의 사용 설명서가 마치 고대 이집트의 수수께끼처럼 난해하고 미지의 암호로 되어있어 아직 해독이 불가능한데도 제작자가 도구상자의 내부를 재배치하고 스패너의 사이즈를 더 다채롭게 늘려 놓겠다는 고백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문제를 우회하기 위해 다시 형사 가제트로 돌아가 보자. 언제나 시작은 형사 가제트에게 하달되는 사건 개요서 내지는 명령 하달 메모다. 이 쪽지는 언제나 다 읽으면 5초 후에 자동 폭발하는데, 이 폭발의 수신자는 언제나 수사반장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가제트의 만능 도구들이 오합지졸로 나오고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계의 결함인가? 자기-통제 능력의 불능을 의미하는 건가? 사건 판단의 미숙인가? 대략 여기에는 두 개의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하나는 만능도구가 적재적소에서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다음 편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능도구가 악당과 그의 요원들을 모조리 검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언제나 사건의 해결을 중층결정 시키는 그의 조카-여자 아이와 그의 명민한 강아지의 방해다. 이 두 등장인물은 위험상황에 놓인 가제트를 구하고, 그들이 원하건 말건 악당의 우두머리를 눈앞에서 놓치게 만드는 방해꾼이기도 하다. 사건이 이렇게 대략 마무리되면 비록 악당은 놓쳤지만, 수사반장은 가제트에게 다가와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가제트는 뭐가 해결되었다는 건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책의 제목에 가제트를 전적으로 추가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가제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따라서 성급한 독자(관람자)는 가제트의 만능도구가 적재적소에 튀어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지젝의 이 책 역시 제작자의 말을 따라 좀 더 강화된 도구상자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업그레이드된 도구를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그 도구상자를 다시 열어보고, 제작자의 노고와 선언들이 얼마나 타당하고 쓸모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과, 사용설명서로서의 역할을 하는 제작자의 서문을 음미해보는 것이 순서이리라. 물론 이 사용설명서를 기꺼이 동독의-붕괴 이전(순찰견), 이후(애완견)- 그 6백여 마리의 개들에게 헌정한다는 제작자의 말에 대한 진실타당성을 검증해보는 것 역시 독자에게 부여된 하나의 사건 개요이자 명령 하달이기도 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한다
지젝 스스로 말한 바, 과연 그가『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이하 『그들은』)』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침묵을 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상, 『그들은』을 『이데올로기』로부터 원심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에서 ‘실재’ 내지는 ‘향유의 중핵’을 추출해 내야 하는 문제와 그 실재와의 조우가 일종의 실패로 간주되어야 함은 따로 놓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데올로기가 오인과 환영으로만 매듭지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데올로기』에서 그토록 반복된 주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젝이 라캉적 실재를 드러냄으로서 이데올로기의 자장 내의 인간 본성이 오인과 환영에 의해 조작되는 것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오인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진리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진리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의 ‘실수’, ‘잘못’, 오인이라고 지칭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진리보다 앞서 도달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자체로 오직 실수를 통해서만, 혹은 헤겔의 용어를 사용하면 실수의 매개를 통해서만,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이데올로기』,이수련譯, 인간사랑, 109쪽, 강조-지젝)> 따라서 나는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다. 다시 하나를 잃고... 이 순환성. 이것에 대한 반복과 강조가 지젝으로 하여금 라캉에 대한 독해의 실패가 아니라. 라캉 독해 안에 내재된 실패의 징후를 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 대한 방향전환이나 문제의식이『이데올로기』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은 오로지 신중한 독서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지젝은 그 결점에 대한 보완을 군데군데에 삽입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지젝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정신분석에서 지식은 치명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주체가 그것에 다가서려면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한다. 다시 말해 오인을 폐기하는 것은 동시에 오인의 형식-환영 뒤에 가려져 있다고 여겨지던 ‘실체’를 폐기하고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 때 ‘실체’는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에서 인정된 유일한) 향락(jouis-sance)이다. 그러므로 지식으로의 접근은 향락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향락은 그 어리석음 속에서 어떤 비지식을, 무지를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데올로기』, 125쪽, 이하, 강조-지젝, 밑줄-인용자
이로써 오인과 환영의 조작에 의해 내가 잃은 하나는 향락이며, 내가 얻은 하나는 비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정 문제의 발단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에서 일컫는 지식에 다가서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 하며, 여기에 자신의 향락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락은 비지식의 토대 없이는 불가능한데 지젝은 여기서 그 향락을 지지하고 있는 비지식이 폐기되어야 함(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자)을 예고하고 있다. 또 하나,
이데올로기적인 효과(기표의 이데올로기적인 네트워크가 우리를 하나로 묶는 방식)의 최종적인 버팀목은 이데올로기 이전의 차원에 있는 향락의 무의미한 중핵이다. 이데올로기에서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은 그 잉여물이다(『이데올로기』, 217쪽)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전체가 아닌-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절차가 있다고 말한다. 1)‘잉여물’,‘매듭’의 개입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전체화 전략을 드러내기 2)전체화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에서는 대략 이데올로기를 횡단하려는 지젝의 노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상,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장(‘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은 이 책의 서론에서 이미 예고한 ‘헤겔로의 회귀’를 완수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이론적 작업으로서 헤겔에게 라캉 더하기, 라캉에 헤겔를 더하는 데 주력하는『그들은』의 일부 전략은 『이데올로기』에서 미완이었던 ‘헤겔로의 회귀’를 완수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지젝에게 대체 100쪽이 넘는 서문이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로선 그것이 단지 1판 서문에서 발언된 지젝의 주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정신분석학은 기독교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는 것, 향락의 숨겨진 차원을 전달하는 이상 무지는 결코 용서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자 하)지 않는 곳, 그 상상적 우주의 공백 속에서 그는 즐기고 있으며, 이런 공백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지닌 권위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해 줄 어떤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그들은』,146쪽)> 즉 그것은 아버지-대타자가 언제나 내 존재의 일관성을 유지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며 단지 존재의 잉여-향략을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향락과의 조우, 즉 니체를 따라서 금지된 것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것은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2판 서문 후반에 등장하는 바디우에 대한 라캉적 방어를 예고한다.
따라서 『그들은』은 『이데올로기』를 다시 쓰는 작업이 아니라, 정지된 작업을 계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은』과 『이데올로기』를 분리하거나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할 수 없는 이유다.
12시에 구멍 뚫린 반지에 관하여
알렉상드르 꼬제브는 헤겔 철학의 현대적 접근이라는 부제가 내걸린『역사와 현실 변증법』에서 지젝의 논의에 걸맞은 예를 몇 개 제시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를 길게 끌어와 보자.
금반지를 예로 들어서 고찰해 보자. 금반지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그렇다면 구멍은 아예 실존할 수도 없으리라)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금은 구멍이 없더라도 실존한다) 또한 반지가 아니다. 원자(Atoms)가 금속에서는 발견되어지는 반면에, 구멍 속에서도 원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다. 또한 어떤 것도 금과 구멍이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물론 ‘구멍으로서의’구멍이 문제이지 ‘구멍 속에’있는 공기가 문제가 아니다). 구멍이란 그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금에 힘입어서만 (어떤 부재의 현재로서) 실존하고 있는 그러한 무(無)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행동인데, 이러한 인간은 그가 ‘부정하는’ 존재에 힘입어 존재 속에서, 무화(無化)하는 그러한 무(無)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무의 무화 작용(혹은 존재를 절멸시키는 작용)에 대한 서술의 궁극적인 원리가 존재의 (현)존재에 대한 서술의 궁극적인 원리와 동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리켜 주는 어떠한 것도 없다. - 『역사와 현실 변증법(이하-변증법)』, 설헌영譯, 한벗(1981), 237쪽
사실 나로선 이 인용문만큼 지젝이 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고 또 드는 엇비슷한 예증과 반증들을 잘 설명하고 관통하는 게 또 있을까 싶다. 가령 지젝이 2판 서문에서 변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오는 사례를 보자. <그렇다면 변별성이란 무엇인가? 구-유고슬라비아에는 각각의 민족 집단들에 저마다 특질-가령, 몬테네그로인들의 끔찍한 게으름-을 갖다 붙이는 조크가 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인 수수께끼식 조크이다. “한 몬테네그로인이 있는데 그는 밤마다 침대 곁에 물이 든 컵과 빈 컵을 갖다놓고 자는데, 왜 그럴까요?” “너무 게르른 나머지 자기가 밤에 목이 마를지 아닐지 결정하는 것도 귀찮기 때문이지요.”부정항 역시 빈 컵의 형태로 등록되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변별성이다.-목이 마르지 않다고 해서 단지 물이 든 컵을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그들은』26쪽)>
이렇게 반지의 구멍과 빈 컵은 단지 아무것도 아닌 무이지만, 어떤 무화 작용을 통해 반지를 반지이게 하고, 게으른 자의 갈증과 갈등을 해소시킴으로서 게으름을 연장시켜 준다. 즉 게으름증을 통한 향락은 무의미한 중핵(오인과 환영으로서의 무)을 통해 지탱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꼬제브의 인용문에서 중요한 문장은 끝부분에 있다. 즉 그 문장을 풀면 ‘반지는 구멍에 의해 반지’라는 궁극적인 원리가 반지를 서술하는데 있어 궁극적인 원리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젝 스스로 『이데올로기』가 실패한 지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이런 지평 속에서 『숭고한 대상』은 헤겔 변증법의 고유한 구조를 정식화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실패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독해하는 데서 분명해진다. 나의 독해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설명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부정의 부정이라는 곤경은 일종의 실체변환trans-ubstantiation을 통한 또 다른 주체도의 이행이긴 하지만 아무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최종적인 비틂twist이 깐 데 또 까는 식으로 이전의 파국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보다 더 큰 파국을 도입함으로써 이전의 곤경을 해소하는 것인지 모호했다(『그들은』27-28쪽)>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지의 구멍에 대한 서술이 또 다른 서술 원리들과 동일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서술 원리들이 무화 작용을 또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반지의 구멍은 물론이거니와 반지에 대한 서술들에 당연히 따라붙는 부정들은 순수한 무가 아니며, 관념적으로 반지의 존재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젝이 <무는 다른 관점에서 본 존재 자체이다(『그들은』32쪽)> 라고 말하는 이유이자. 순환논리의 악순환으로부터 『이데올로기』가 자유롭지 못한다는 증거다.
그런데 다시 문제적인 것은 꼬제브와 지젝이 갈라서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헤겔은 논리적인 것에는 세 가지 형식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1)추상적 혹은 오성적인 측면, 2)변증법적 혹은 부정적-이성적 측면, 3)사변적 혹은 긍정적-이성적인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꼬제브는 논리학에 있어 이 세 측면이 서로 매개항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넓은, 좁은 의미에서 그것은 변증법적 성격(부정적 혹은 부정하는 측면)에 의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것이 변증법적 지평에서 드러나는 것은 2항과 3항이 이성에 의하여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유나 말(로고스)에 의해서 드러나는 데 여기서 정작 드러나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 전적으로 ‘존재’에 의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논리가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가 존재에 귀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23번 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때문에 헤겔 변증법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사물 자체”안에서 일어나는 운동)과 인식론적 과정으로서의(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운동을 계시하는) 변증법 사이의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변증법적 과정은 “인식론적”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파악상의 관점이동을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이런 관점 이동은 “사물 자체”와 관계한다(『그들은』126쪽)
이런 존재론적, 인식론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상황에 따른 변별적인 차이인가? 아님 훗설-하이데거의 현상학과 프로이드-라캉의 정신분석학의 대립인가? 나는 지젝의 존재론적 과정에서 인식론적 과정으로의 관점이동을 추동시키는 계기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 분석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꼬제브가 변증법을 존재론적 과정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인간의 잘못, 즉 오인과 환영의 조작에 의해 잘못을 범하더라도 오직 인간만이 필연적으로 소멸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즉 <인간은 계속해서 실존할 수 있지만 이때에도 실존하는 것에 관해서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지닌 채 <살아갈 수> 있으며 혹은 잘못에 빠져서 <생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잘못이나 혹은 거짓된 것이 인간 속에서는 <현실적>으로 된다(『변증법』203쪽)> 꼬제브의 이러한 논리 역시 지젝에게 오면 ‘이데올로기’적인 증상의 사례가 되는 것이다. 꼬제브의 저서가 1947년에 간행된 것을 감안 한다면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전면적 파급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자들의 논쟁 속에서,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수용소 군도까지 끝장난 인간 존재의 지옥도 내에서 꼬제브가 헤겔을 소위 ‘제국’시대의 변태적 문화 이데올로기적 증상으로 대위법적 독서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과연 존재론(사물 자체 안에서)과 인식론(사물 자체와)이 얼마나 다른 기제로 작동하지 확인하고 싶다. 다시 꼬제브의 책 속에서 헤겔의 질문을 들어보자.
그는 말한다 ; 당신의 시계를 보시요. 그리고 12시라는 것을-우리가 말한-확인하세요. 그것을 말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그와 더불어 진리를 언표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 즉 “이제 12시다”를 종이 위에 쓰시오. 이때에 헤겔은 진리가 문자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그 진리가 참 된 것이기를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다시 당신의 시계를 보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당신이 쓴 문장을 읽어 보시요. 이제는 12시 5분이기 때문에 그 진리가 오류로 변화해 버렸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변증법』202쪽)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현실적 존재가 갖는 진리치가 다시 현실이 시간에 매개되어 있다면 오류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적 존재의 진리치는 가변적인데, 문제는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진리치를 매번 12시 5분으로 수정할 수 없어도 실존하는데 하등의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의 잘못이 단지 그 현실적 시간의 진행 속에서 정정되어 진리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 존재의 진리는 언제나 불가피하게 잘못을 포함한 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젝에게 오면 어떻게 되는가?
이와같은 관점의 이동은 또한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동이 아닌가? 현상들과 사물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현상들 자체 내의 비일관성/간극으로의 이동 말이다. 통상적인 관점에 따르면, 현실은 개념적 파악에 저항하는 견고한 중핵이다. 헤겔이 한 것은 이런 현실관을 보다 축자적으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비-개념적 현실은 개념의 자기-전제가 비일관성에 봉착해서 스스로에 대해 투명해지지 않을 때 출현하는 어떤 것이다. 요컨대 한계는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진다.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개념이 비일관적이기 때문에, 스스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런 한에서이다. 요컨대 현상들 간의 다양한 관점상 불일치는 초월적인 사물이 일으키는 효과가 아니다. 반대로 사물 자체가 현상들 간의 비일관성이 존재화된 것뿐이다(『그들은』36쪽)
꼬제브가 12시에서 12시 5분으로의 간극을 진리치가 값을 잃는 견고한 중핵으로 읽지 않고, 그 간극을 비-개념적 현실로 읽기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변증법의 인식론적 과정이 일종의 거리-두기를 일컫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12시라는 언표가 개념적 파악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그 저항을 통해서 비일관성에 봉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꼬제브에 따르면 현실적 시간 과정은 다시 나의 진리 값을 돌려줄 터인데도 말이다. 지젝이 문제 삼는 것은 언제나 일관성이 비일관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지젝의 통상적인 헤겔-독해에서나 머무르는 논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지젝은 이러한 ‘부정성과 머물기’에서 일단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꼬제브에게 <...이제 구별이 만약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구별은 현실적인 구별이 아(『변증법』204)>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지젝에게 현실의 일관성과 비현실의 비일관성의 도입은 이를테면 한계가 외부에서 내부로 향할 때, 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2판 서문에서 다종다양한 사례들에 지젝이 천착할 때 밝혀지는 것은 결과가 원인을 앞선다거나 대답은 이미 질문에 포함되어 있다는 기괴한 역설들이다. 이 역설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외부가 내부로 향하는 것, 그 반대로 향하는 것 등이 결코 문제의 해설에 도움을 줄지언정, 문제의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역설적인 동어반복 속의 환영 자체의 환영적 위상이다. 즉, 어떤 초감각적인 본체적 존재가 있다는 환영은 정확히 “환영”, 즉 헛된 허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결코 우리가 접하는 현실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만약 우리가 현실과의 대면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면 그 중 일부는 유령같은 허상임을 경험해야, 즉 “탈-현실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들은』42-43쪽)> 결국 우리는 지젝-랜드에서 청룡열차를 타고 한 바퀴 빙 돌아 제자리에 도착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번엔 지젝이 안내하는“행위”라는 바이킹을 타보기는 것이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