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관주의(spoils system; 엽관제)
개념
엽관주의(獵官主義, spoils system) 또는 정실주의(情實主義, patronage system)는 인사권자
와의 정치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관계를 기준으로 공무원을 임용하는 인사행정제도이다. 일반적
으로 엽관주의와 정실주의는 실적주의에 반(反)하는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혼용되고 있다. 그
러나, 이들을 엄격하게 구분할 경우, 엽관주의는 정치적 신조나 정당 관계를 임용기준으로 하
는 인사제도로 정의되는 데 비해, 정실주의는 인사권자와의 개인적인 신임이나 친소(親疏) 관
계를 기준으로 하는 인사제도로 정의된다. 인사권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귀속적 요
인들로는 주로 혈연, 학연, 지연 등이 지적되고 있으며, 군(軍)과 같은 특수집단에의 멤버십
(membership)도 거론되고 있다.
발달배경
엽관주의는 민주정치의 발달에 따라 선거를 통하여 집권한 정당과 정당지도자에게 관료의 임
면(任免)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정치지도자의 국정지도력(executive leadership)을
강화하고 관료기구와 국민과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엽관주의
의 구체적인 발달 배경이나 과정은 국가에 따라 서로 다르다. 여기서는 엽관주의가 공식적인
인사행정의 기본 원리로서 확립되었던 미국과 정실주의를 대표하던 국가인 영국을 중심으로 엽
관주의(정실주의)의 발달배경과 과정을 살펴본다.
(1) 영국
유럽 대륙 국가에서는 절대군주제의 성립을 계기로 하여 근대적인 관료제가 발달하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절대군주제가 확립된 이후에도 체계화된 관료제가 발달하지 못하였
다. 당시의 영국 국왕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확대하거나 반대세력을 회유하기 위하여, 자신이
개인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의원들에게 국왕의 특권으로 고위 관직이나 고액의 연금을 선택적
으로 부여하였다. 마찬가지로 장관들도 하급 관리의 임명권을 이권화함으로써 정실주의를 확대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정실주의를 은혜적 정실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국왕에 대한 의회의 우월성이 확립되었으며, 내각책임제의 실시를 계
기로 관리의 임면에 대한 실권이 국왕에게서 점차 의회의 다수당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의회를 장악한 유력 정치인들은 선거운동에 대한 대가로 그들의 지지자에게 관직과 연
금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영국의 정실주의는 국왕에 의한 은혜적 정실주의로
부터 의회를 장악한 귀족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적 정실주의로 전환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의 정실주의는 양대 정당에 의한 의회정치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정실주의는 "정권담당 정당과 관료기구와의 동질성 확보를 위한 관
직의 교체"라는 엽관주의적 성격보다는 "개인적 은혜에 따른 관직과 연금의 종신적 부여"라는
정실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2) 미국
건국 당시의 미국은 북부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자와 남부 지주(地主) 세력을 중
심으로 한 분리주의자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심각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연방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직자로서의 적격성(fitness of character)과 적재적소의 배치(fitness for the post)를 관직
임명의 원칙으로 삼아 공정한 인사를 실시하였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정부내의 정책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과 동일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연방주의자들로 그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 때부터 미국의 인사정책은 당파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의하여 더욱 강
화되었다. 분리주의자인 제퍼슨은 연방주의자에 의하여 독점되어 있던 연방정부에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국민과의 약속을 실현한다는 명분 하에 대통령 임명직의 25% 정도를 경질
하였다. 이때부터 정당에 대한 기여도를 공직 임명의 기준으로 하는 엽관주의가 발달하기 시작
하였다. 1820년에 제정된 4년임기법(Four Years' Law)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자의 임기를
대통령의 임기와 일치시켜 공무원의 운명을 정권의 진퇴와 연결시킴으로써 엽관주의에 법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엽관주의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미국 연방정부는 동부 출신의 신흥 상류계층
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상류층의 공직 독점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실제로는 고등교
육으로 정의되던 공직임용기준으로서의 적격성은 좀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직순환(rotation
in office) 원칙으로 대치되었다. 1829년에 취임한 서부 개척민 출신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은 동부 상류계층에 독점되어 있던 관직을 서부 개척민을 포함한 일반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하여, 엽관주의를 "민주주의의 실천적인 정치 원리"라고 선언하고 미국 인사행정의
공식적인 기본 원칙으로 채택하였다. 그는 모든 공직은 건전한 상식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기 때문에 공직의 장기 점유는 그에 따른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욱 크다고 지적하면서, 엽관주의를 통하여 공직의 대중화를 추진하였다.
엽관주의는 잭슨 대통령 이후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1845년부터 남북전쟁이 끝나는 1865년 사
이에 절정을 이룬다. 이 시기는 엽관주의를 상징하는 "전리품은 승자에게 속한다(to the
victor, belong the spoils)“ 는 슬로건이 공공연하게 미국의 공직사회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엽관주의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의 엽관주의는, 개인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영국의 정실주의와는 달리, 집
권정당과 관료기구와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공직을 일반국민에게 개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실현
하기 위한 실천적인 인사원리로서 채택되었다. 미국에서 엽관주의가 공식적인 인사원리로 채택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민주주의의 발달 이외에도 당시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는 점과 그에 따라 정당도 비교적 동질적이었고 행정업무도 단순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평가와 전망
발달 배경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엽관주의는 정부관료제의 민주화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엽관주의의 장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특권적인 정부관료제를 일반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민주정치의 발달과 행정의 민주화에
공헌한다.
② 정당에 대한 공헌도나 충성도를 임용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정당의 대중화와 정당정치의
발달에 공헌한다.
③ 선거를 통하여 집권한 정당에 정부관료제를 예속시킴으로써, 정부관료제가 특권집단화하
는 것을 방지하고 국민의 요구에 대한 관료적 대응성(bureaucratic responsiveness)을 향상시
킨다.
④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정치지도자의 국정지도력을 강화하여 줌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
는 선거공약이나 공공정책의 실현을 용이하게 해 준다.
그러나 엽관주의는 내재적인 특성과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
으며, 그 결과 실적주의의 수립을 위한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엽관주의의 부작용으로 제기되
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소수의 간부에 의한 정당의 과두적 지배를 촉진하여 공직의 사유화상품화 경향을 야기함
으로써, 매관매직이나 뇌물 수수 등의 정치적행정적 부패를 초래한다.
②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되어 감에 따라 행정업무의 처리에도 전문성과 능률성이 요구되
기 시작하였으나, 엽관주의는 능력 이외의 요인을 임용기준으로 함으로써 이러한 변화에 대응
하지 못하고 행정의 비능률성을 야기한다.
③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적인 인력 교체가 일시에 이루어질 경우, 행정의 계속성, 일관
성, 안정성 등이 훼손될 수 있다.
④ 공직에의 취임이나 신분의 유지가 전적으로 소속 정당이나 집권자에 대한 충성에 의존하
므로 행정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사회가 다원화되어 감에 따라 정당의 국민대표성이 약화되어, 더 이
상 특정한 정당이 국민의 전체적인 이익을 대변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국민대
표성을 상실한 정당에게 정부관료제를 예속시키는 것은 정부관료제를 특정한 정당이나 소수 정
당 간부의 특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위와 같은 비판으로 인하여 실적주의가 수립된 1880년대 후반 이후 정실이나 엽관에 의한 임
용은 상당히 약해졌다. 그러나, 비록 약해진 상태이긴 하나, 엽관주의는 아직도 모든 정부에서
지속되고 있다. 엽관주의의 지속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발전된 실적주의의
부작용에 기인한다. 즉, 실적주의에 따른 강력한 신분 보장으로 인하여 직업공무원들은 점차
관료주의화되어 갔으나, 이와는 반대로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정치지도자와 집권당의 관료에
대한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되지 아니하고, 정
치적인 해고로부터 강력한 신분 보장을 받는 직업공무원들이 어떻게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엽관주의는 선거를 통하여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선출직 정치지도자들의 직업공무원들에 대
한 통제를 용이하게 해 준다. 따라서 국민에 대한 관료적 대응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엽
관주의는 계속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엽관주의는 종래와 같이 광범위하게 이용되지는
않으며,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지닌 정책결정을 담당하는 고위직이나 인사권자의 특별한 신임
을 요하는 직위 등에 한하여 한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첫댓글 1번 읽음..복잡하네..대강 이해 ㅇ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