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비정규직이 볼모다.
정성식(이리동남초 교사)
누가 누구보고 볼모래?
정규직,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언제부턴가 근로계약 형태에 따라 현재 우리 사회의 직종은 이렇게 나뉜다. 학교도 이런 시스템이 그대로 작동하고 있고 이로 인한 차별과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했는지 공공기관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올해 편성된 국가예산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예산은 한 푼도 반영되지 않았다. 심지어 누리과정 보육비마저 떠넘기는 상황이다 보니 시·도교육청도 재정 압박에 시달리며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급기야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는 지난 3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문에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까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약속하고, 교육부도 학교비정규직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올해 3월 발표한 학교비정규직 처우개선대책에는 차별적인 임금체계를 개선하는 내용이 없다고 성토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임금차별 해소 등을 요구하면서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오는 4~6월 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를 두고 “아이들을 볼모로 파업을 한다”며 이들을 비난하는 여론몰이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이들은 왜 파업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만일 파업을 하게 된다면 언론 보도대로 정녕 이들은 아이들을 볼모로 파업을 하는 걸까?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들의 삶에 얽힌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일화를 읽고 누가 누구를 볼모로 삼고 있는 것인지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첫 번 째 일화 : “미안해서 못해”
학교비정규직의 총파업은 2012년에 처음으로 있었다. 당시 이들은 ‘호봉제’와 ‘교육공무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지만 언론의 보도를 보면 “학교비정규직 파업 강행…933개 초중고 급식중단”(매일경제), “학교 비정규직 파업에 문 닫은 급식장”(한국일보) 등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급식 중단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당시 파업으로 정상적인 급식을 하지 못한 학교는 900여 개 학교였다. 전국의 유초중고특수학교만 해도 2만 여 개인데 파업에 참가한 비중은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이유를 나는 당시 근무하던 학교의 조리사로부터 직접 들었다. 한창 파업이 진행중이던 무렵 우리 학교에 근무하는 조리사들은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수업을 마치고 따끈한 순대와 맥주 두어 병을 사서 들고 학교 급식소를 찾아갔었다. 급식소는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느라 한창 분주했다. 가지고 간 순대를 식탁에 펼치며 따뜻할 때 드시라고 불렀더니 하던 일을 멈추고 조리사 세 분이 내 곁으로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맥주 한 잔씩 권하며 내가 물었다.
“다들 파업에 참가하는데 여사님들은 왜 안 하셨어요?”
한참 고민을 하더니 세 분의 조리사 가운데 한 분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하고야 싶지. 그런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매일 얼굴 보고 사는데 우리 보고 학교에서 자식들 밥 안 준다고 성화댈 학부모들 생각하면 어떻게 해. 애들 보기도 그렇고 미안해서 못해.”
파업에 참가한 이들도 그렇고 뜻은 같이 했으나 참가하지 못한 이들도 모두 이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이들의 마음에는 누구를 볼모로 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두 번 째 일화 : “조리사들의 밥값을 걷느냐? 마느냐?”
지난 2월에 한 초등학교의 학교운영위원회 교원위원인 교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그 무렵 이 학교에서는 학교운영위원회의를 개최했는데 안건 가운데 조리사의 급식비 징수 여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간 조리사의 급식비는 징수하지 않았었는데 학교비정규직 파업이 있은 후에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자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이를 결정하도록 하라는 지침이 있었는데 이 지침에 따라 학운위에서 공식 안건으로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이다.
"자기가 먹는 밥값은 자기가 내야 한다."
“보수도 열악한데 직접 조리를 하는 사람에게 밥값을 내게 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다.”
이날 회의에서는 위와 같은 두 의견이 맞서며 격론이 일었다고 한다. 이 주장 가운데 급식비를 징수하자는 주장을 펴는 사람은 주로 학부모위원들이었다고 한다. 2014년 학교비정규직의 파업 당시 조리사들도 파업에 참여했는데 그로 인해 학교 급식에 차질이 생겼으니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급식비를 징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에 교원위원인 교사는 급식비 징수 반대 의견을 피력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첫째, 당시에 그 학교의 조리사들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사안을 결정하는 이유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둘째, 조리사들의 사기 문제이다. 일하는 것에 대한 마땅한 보수도 열악한 상황인데 근무 여건이 너무 열악하다. 매일 바뀌는 식단에 따라 조리를 하다 보면 종종 늦어지는 날도 있는데 이럴 때면 조리사들은 조리와 배식을 하느라 밥도 제때 먹지 못하는 날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 급식비마저 징수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다. 이들이 일할 맛이 나야 아이들에게 먹는 밥에 더 정성이 들어가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말이다.
이 교사의 의견이 있자 일부 학부모위원들은 동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완강하게 징수를 요구하는 운영위원이 있어서 결국 이 사안은 무기명투표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종 투표 결과는 급식비를 징수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하기에 나는 그 교사를 잘했다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교사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당사자들에게 학운위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전해질 텐데 그분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일할 맛이 나겠느냐는 걱정이었다. 그 교사의 걱정이 괜한 걱정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건 이런 진통을 겪으며 조리사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밥값을 자기가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간신히 최저생계비 수준의 보수를 지급하며 여기에 급식비마저 책정되지 않는 상황에 조리사들에게 급식비를 징수하는 것이 마땅한지는 또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들이라고 왜 자신의 밥값을 내고 싶지 않겠나? 정작 이들이 서운해 하는 것은 밥값이 아니다. 그깟 급식비 몇 푼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이들에게는 큰돈이지만 그것보다 더 서운한 것은 따로 있다. 보수의 차별보다 훨씬 더 큰 차별은 바로 인격의 차별이다. 이는 다음 일화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 번 째 일화 : ‘이름 하나 같이 써주면 어때서…’
바로 오늘 일이다. 주말을 맞아 텃밭을 장만하고 있었다. 그때 한 동네에서 학교의 조리사로 근무하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게 인사를 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이야기하다 보니 그 조리사는 우리 학교에 조리사로 근무하는 누구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작은 시골학교와는 달리 시내의 큰 학교로 옮긴지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라 직원들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내는 형편이라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분 이름을 이야기하며 이번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옮기게 되었는데 최근에 만났더니 학교를 옮기고 힘들어 한다면서 내게 잘 좀 챙겨주라는 당부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출근하는 첫날 나는 본 적이 없는데 우리 학교의 교문에는 새로 오는 직원들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나 보다. 그런데 거기에 교사들의 이름만 적혀있었지 새로 오는 조리사들의 이름이 빠져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환영회식 자리에 참석하라는 이야기도 없었고, 행정실 직원들하고만 따로 회식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서운하다고 이야기를 하니 내게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며 잘 챙겨주라는 당부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현수막을 보지는 못했지만 회식 자리에서 조리사들은 확실히 없었다. 무기계약직의 순환전보가 처음으로 실시되다 보니 아마 학교에서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리라. 관행적으로 전년도 업무파일 내려 받아서 연도와 이름 바꾸어 일을 하는 학교의 업무 속성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일은 그렇게 관대하게 넘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근무했던 학교들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이면 입학을 축하한다는 문구와 더불어 새로 오는 교직원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교문에 걸리는데 그 현수막에는 분명 격이 있었다. 교장 또는 교감이 부임하는 경우에는 환영 현수막은 반드시 걸렸다. 즉 교장 또는 교감의 부임은 환영 현수막의 필요조건인 셈이었다. 교장 또는 교감과 같이 부임하는 교사의 경우에도 같은 조건에 속했다. 한 날 한 시에 같이 부임하는데 교장 또는 교감만 환영한다고 할 수 없으니 교사의 이름도 환영 현수막에 같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사만 부임할 경우에는 상황은 달랐다. 교사의 부임은 환영 현수막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단지 선택사항일 뿐이었다. 만약 학교에서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이 있으면 운 좋게 현수막이 걸리고 그렇지 않으면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정규직인 교원도 직급에 따라 부임할 때 이런 차별이 있는데 무기계약직인 조리사들의 이름을 환영 현수막에 써 넣은 학교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올해 우리 학교는 교장과 교감은 그대로 있고 일부 교사들과 조리사들의 전입만 있었는데 환영 현수막을 걸었다는 것을 보면 새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들인 것이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에 이름 몇 개만 더 넣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직원이 많아서 행정실에서 따로 했다고는 하지만 전체 환영회식 자리에서 함께 얼굴을 보며 인사를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일하는 조리사들과 관련된 일화를 몇 개 들어보았다. 이것 말고도 이들이 받는 불공평한 차별대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이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아이들을 볼모로 파업을 한다”고 내몰아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이 땅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볼모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오려면 제도의 큰 벽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제도의 벽보다 더 높은 벽이 이미 우리들 마음에 은연중에 차별의 벽으로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이 벽을 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환대로부터 시작한다. 직급을 떠나서 오는 이들을 뜨겁게 맞아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학교비정규직이 볼모다.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