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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고백.투~우~(완성!!! 클릭하세요^8^)
.. 번호:676 글쓴이: 머이 사우!
조회:23 날짜:2002/05/09 21:10 ..
.. 햐!
드뎌 나왔습니다.
반쪽 전구 후편이...
신 선생님 글을 보며는 맹한 제가 할 얘기가 막 떠오른답다.
(이거 궁합도 이런 궁합은 이나이 되도록 없었습니다.)
지난번 버뮤다 삼각지대로 사라져버린 백화점의 망태
"지맘대로 하세요" 백화점 아가씨 에게 소비자의 권리를
찾으신 얘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답니다.
자꾸 제가 신선생님 좋은글에 딴지(?)걸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도저히 그냥 넘길수가없내요.
제가 걸레(섬유)장사 를 오래했답니다.
대연각 화제 전 쯤 (년도 기억이 없으니 구전으로 전합니다)
회현동. 가까운 충무로. 명동. 주름을 잡았지요.
예! 깡패냐구요?
아녀요 저처럼 순둥이가 어데요.
양복. 양장 바지 주름을 잡았다는 얘기입니다.하하하
가운데 손가락에 "유비아(골무)끼고 "마도매 이것 잘 해야됩니다.
일본 사람한테 양복일을 배웠으니 모두 일본어 일색이지요.
"와끼(옆구리)"세나까"에리(깃)"마에(앞)"우라까이(뒤집기)
"오비(허리)"고마대(바지앞 지퍼부위)
"고마대" 바지는 여기 모양세가 좋아야 일류 기술자입니다.
"우와기(상의)는 소매 달기가 생명이지요.
지금쯤 용어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내요.
나이든 이들 지금도 쓸것입니다.
변화 싫어하고 바꾸기도 쉽지않지요.
하이고!! 차가 대기중입니다.
비행기 티켓구하러 시내 좀 다녀오겠습니다.
귀국 준비 할려면 시험 전날 벼락공부 하는 꼴입니다.
샘풀. 티켓. 선적서류. 15일동안 자리를 비워야하니.잔소리 굵은소리...
죄송합니다.
항공 회사 시장 좀 다녀오지요.
다녀와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와서보니 아래 왠 살인사건이 났나요?
"주인장이 생사람 잡는다! 꽃사모 6 16:48 .
"생사람 잡은 사람은 따로 있다~~아!! 割微꽃 5 17:16 .
아니 미완성 글에 이렇게 열성으로 목숨 걸어놓고 답글 달아주시니.
허허 작가로 나설거나..(쪽박 차는것은 누구 책임인고?)
각설하고.
아버님께서 양복점 하실때 도시에서 초청한 할아버지.
노래를 12시까지 하셨다는데. 이거 못 말립니다.
말렸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때 양복 기술자 끝발이 요즘 잘 나가는 벤쳐 엔지니어(아이디어맨)
비슷한 대접을 했을때입니다.
그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잘 모셔야 뗑깡 안부립니다.
뭐 다 그런것은 아니구요.
보편적으로 인기가 좋았다는 것이지요.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그러다 보니 양복점 선 후배 군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숯다리미(다리미 안에 숯불을 집어넣어서씀)피우다 보면.
양말은 말짱한것은 하나도 없구요...모조리 구멍이 빵 빵.
너무 뜨겁 다거나 차거우면."나마꼬"(곡자)
"쇼샤브로 하사미(쇼샤브로:상표이름. 하사미:가위)
날아 오지요."시다"(심부름하는 아이)얼굴로..
성질 더러븐 선생님은(모두 선생님이라 불러야됨)
숯불 다리미까지 날아오는수가있지요.
글고 한마디 합니다.
"야! 임마 양복점에서 "시다로 안 도망가고 견디는 놈은.
개병대 가서도 탈영안한다. 얼마나 으시시합니까요.
"개병대(해병대)가서도 탈영 안한답니다...하하하
이것 무섭습니다.
근데요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배고품과 추위....
그때는 양복 기술이 좋은 기술이라고 돈 한푼도 안주고.
쎄가 빠지가 시켜만 먹는 시절이였죠.
그시절 굶주림이야 한사람 건너 였으니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배고푼데 추위까지 겹치면.이것 당할 장사없습니다.
잠 자는곳은 작업 다위 위라든가 아니면 십구공탄 옆이됩니다.
한밤중에 연탄불 갈아 놓으면 죽은 할애비 콧김같습니다.
그 옆에다 작은 작업 의자를 다섯개 쯤 붙이고.
그 위에 굶주린 육신을 올려놓습니다.
추위는 영하권...사방 뚫린 구멍으로 눈발은 솔 솔...
조심해야 합니다. 삐닥 하면 넘어지지요.
문제는 잠 자다가 돌아 누울때 입니다.
어떻게 딱딱한 의자에 한 자세로만 잘수있나요.
조심 조심 이불떨어 질세라.조심 조심 의자 넘어질세라..
이건 잠을 자는것인지. 써거스를 하는것인지...
자는둥 마는둥 내일 아침은 뭘 먹나...
절로 고향 생각 어머님 생각에 눈앞이 뿌해지지요.
고향 어머님은 자식 생각에 잠못이루고..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되었으니 중동에 가면 일을 못 합니까요.
저 "시베리아 에 같다 놓아도 살아 납니다.
싱가폴 "이광요" 수상이 중동에가서 한국 일꾼들 일하는것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뜨거운 사막에서 가족들을 위하여 묵묵히 일하는 한국인...
그때의 그대가 지금은 내 자리가 어두메인지 두리번 거리는..쉰 세대...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3D 라 해서 어려운일은 안할려고.
외국 인력을 쓰고있습니다.부작용도 많지요.
외국 인력은 계속 늘어 나면서 실업자도 함께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참 묘하지요....
남 피해 안주고 자기힘껏 노력해서 벌어 먹고사는 것은 신성한 것입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월급 받고 남의 마당쓰는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있다"고 생각하면 할만하다는
얘기지요.얼마나 거룩한 일 입니까요 ...하하하
"일하지 않은자 먹지도 말라"
쇠도 뜨거운 불과 찬 물속을 들랑거려야 강철이 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보면은 보편적으로 너무 편하고 안일하게 살려고
하더군요. 세상엔 공짜는 없습니다.
목숨걸고 달려들기전에는 이루어지는것이 하나도 없지요.
얘기가 너무 엉뚱한곳으로 갔습니다.
저도 고국에서 제가 하는일을 힘들다고 누구나 안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왔지요.
잘못된 정치. 조그마한 것이라도 할라치면 여기 저기 뜯기는 관행.
죽어도 변화를 싫어하는 관료. 거기에 노사분규로 작업중단사태.
힘든일은 하지 않겠다는 안일함.
앞으로 이런 상항에서는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중중이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이런쪽으로 생산 공장을 이전을 해야.생존할수가 있지요.
한국에서 생산해서는 타국 제품과 경쟁력이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옮기는것입니다. 앞으로 더많은 기업들이 옮길것입니다.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부가가치 놓은제품으로
앞서가면 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있지요.
이문제 때문에 저도 37도 더위 속에서 일하고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그때 양복점 선생님들 말씀이 맞았나 봅니다.
"양복점 꼬마 생활 견디면 개병대 탈영도 안해 임마!!!
--------------------- [원본 메세지] ---------------------
이 카페에 얼굴을(사실은 이름을) 들이민 지 20여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글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을 꽤나 늘어놓은 셈이어서
이거 좀 자제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차에 고백을 계속하라는
압력성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쉰 세대에게 고백을 종용하는 일은 선행 중에 선행입니다.
허공에다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는 쉰 세대가 돼 봐야
절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 카페는 단순한 허공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고백하는 김에 계속하겠습니다. 10년째 묻어 두었던 글입니다.
< 부잣집 냄새에 대하여>
정신이 물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함부로 하지 말일이다. 구 소련과 동구권을 와해시킨 주범은 누가 뭐라 해도 물질적인 생산력이지 정신적인 생산력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내가 동구권의 몰락을 이해하는 키 포인트를 일찍이 부잣집 안방이 풍기는 향기로부터 앞질러 터득해버렸다면 정통파 유물론자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7식구가 방 한 칸에서 기거를 한다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뒤 8식구로 늘어난 우리 가족은 이사온 읍내의 기와집에서 방 한 개로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맏이로부터 젖먹이에 이르는 막내까지 먹고 자고 공부하는 모든 일이 조그마한 방 한 칸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일종의 기록이었다. 우리 식구는 날마다 이런 기록을 갱신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고향 땅에서 농사를 그만 두신 아버지는 청년 시절에 익힌 양복일을 하시기로 작정을 하고 읍내 시장통에다 점포를 구하였다. 점포에 딸린 방은 두 칸이었으나 그 중 하나를 양복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내 주었으므로 우리 식구에게 배당된 방은 자연히 하나밖에 없었다.
먼저 우리 7식구에게 주어진 현안은 잠자리였다. 좁은 공간을 어떻게 하면 넓게 활용하느냐는 문제는 단순한 수학이 아니다. 일단 잠자리에 드는 순서대로 차곡차곡 눕는데 언제나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울 수가 없었다. 일제히 모로 눕지 않으면 방의 면적이 우리 식구를 제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란 것은 모로 눕더라도 서로 방향이 같아야 하는 것이지 어긋나게 되면 그때는 엄청난 공간의 낭비 현상이 생겨난다. 자연히 우리 식구들에게는 처음 잠자리에 든 사람의 자세를 기준으로 그날의 잠자리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었고 이것은 다음날 일어날 때까지 일관되었다.
자는 도중 용변이라도 보기 위해 누운 대열에서 빠져 나왔다면 다시금 자신의 잠자리를 확보하는 데에는 상당한 애로를 겪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웬만하면 한번 잠자리를 확보한 면적을 아침이 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아버지를 사장님이라 불렀다. 정확하게 부른다면 양복점 주인이었으니 점장님이라고 불러야 했겠지만 사장이라는 호칭이 차츰 우리 사회에 존칭의 의미로 부각되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아마도 그렇게 불렀으리라.
어쨌건 명색이 아버지가 사장님으로 불리는 형편이었으니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지 잠자리가 좀 불편하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른 아이들은 어떤 잠자리에서 자고 있는지를 본 바가 없었으니 나는 우리 식구들이 처해있는 잠자리가 그렇게까지 처참한 상황이라고는 생각지를 아니하였다. 원래 한 식구라는 것은 살은 물론 뼈를 부딪쳐가며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누나는 항상 내 뼈가 너무 억세다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내 뼈가 너무 딱딱하여 다른 식구들의 잠자리를 불편하게 한 것이 죄스러웠을 뿐이었다.
잠자리를 옮겨 자 본 일도 더러 있었다. 가정실습 때에나 방학 때면 고향 마을의 큰댁이나 삼촌댁에 다니러 가곤 하였는데 역시 잠자리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렇고 그런 초가집 구조여서 방이랬자 두 칸이 넘는 경우는 없었고 큰댁 할머니 옆자리에 누우면 사촌 형님과 동생들, 이래저래 천상 뼈를 부딪는 잠자리가 되는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잠이란 것은 다른 사람의 몸과 밀착된 상태에서 자는 것이지 혼자서 따로 뚝 떨어져서 자는 그런 고독한 잠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잠들기 전까지는 항상 두런두런 이야기로 흘러나오기 마련이었는데 이야기 솜씨가 좋은 사람 옆에 누운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어른들은 언제나 이야기 그만하고 자라고 야단이었지만 우리는 형님이나 누나, 혹은 사촌들의 구수한 이야기를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듣다가 꿈나라로 가는 것이었고 가끔씩 성냥개비 불침을 맞기도 하였다.
3학년 때인가.
담임 선생님이 색다른 제의를 해 오셨다. 당시 우리 반에 금융조합장 아들이 전학 와서 함께 다니고 있었는데 그 집에 가서 같이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다가 늦으면 그 집에서 자도 좋다고 하였다.
금융조합장 아들은 항상 등짝에 지고 다닐 수 있는 가죽 가방-교과서 그림 속의 아이들이 사용하는-을 소유한 아이였는데 값나가는 필통도 가지고 있었고 상고머리였다. 상고머리는 온돈 주고 반머리를 깎는 대단한 낭비형의 헤어스타일이었는데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좀처럼 시도를 할 수 없는 머리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 금융조합장 아들은 부자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다른 집에서 공부를 하건 잠을 자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워낙 많은 식구라 먹여 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어서 우리들의 공부나 잠자리를 일일이 챙길 짬이 쉽게 나지 않았다.
책보따리를 들고 금융조합장 집으로 갔다. 금융조합 건물의 관사인 조합장의 사택은 일본 사람들이 지은 왜식 가옥이었는데 복도도 있고 얇은 여닫이가 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그런 집이었다. 긴 낭하를 지나 조합장 아들의 공부방으로 안내되었다. 책상도 있고 공부하기에 너무 좋은 전기불이 바로 책상 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책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였다. 꿈만 같았다. 7식구가 우글거리는 비좁은 방에서 반쪽밖에 비치지 않는 백열등으로 숙제를 해야 했던 내가 이렇게 으리으리한 곳에서 책을 펴놓고 앉았으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조합장 아들은 숙제는 하지 않고 쉴새없이 이야기를 걸어왔다. 무슨 얘기였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만 계속하는 바람에 숙제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숙제를 채 반도 못했는데 공부방 여닫이가 소리 없이 열리더니 조합장 아들의 어머니가 쟁반에 과일을 담아 들고 들어오셨다. 나는 너무나 황송하였다. 아직 공부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맛있는 것을 주시니 도무지 그것을 먹을 염치가 생겨나지를 않았다.
-우리 상호가 자꾸만 괴롭히지? 잘 타일러서 같이 열심히 하거라 응? 그리고 이것은 먹어가면서 공부하라고 주는 것이니 남기지 말고 먹도록 해.
공부를 이렇게 대접을 받아가며 한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하기만 하였다.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하였다.
우선 전기불이 확보되어야만 했는데 이것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초저녁에는 방안이 제법 밝았다가 옆방 주인이 백열등의 위치를 옮겨버리면 그날 공부는 서서하든지 포기하든지 하여야 했다. 또 공부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밝았다고 하여도 어머니나 누나가 '마도매'(양복이나 두루마기의 마무리 손질)를 해야 할 때면 공부할 장소가 마땅찮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집의 소리꾼 박노인의 노래 소리가 멈춰주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도회지에서 높은 임금을 주기로 하고 특별히 아버지가 뽑아 온 일류 양복일 기사인 박노인은 한시도 노래를 하지 않고는 일을 못하는 분이었는데 '홍도야 우지 마라'에서부터 '처녀사공' '청춘의 봄'까지 이어지는 노래는 끝이 없는 것이어서 양복일 끝나는 12시까지 조용해지기를 기다릴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12시는 일반선 전기 수용가의 단전시간인 것이다.
이래저래 내가 우리 집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 복잡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금융조합장 아들의 공부방은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조합장 아들은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고 담임 선생님은 특별히 나와 함께 공부하라고 주선을 해 주었다.
이윽고 잘 시간이 되었다.
조합장 아들의 어머니는 또 소리나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이부자리를 깔아주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까지 깔아주시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각각의 베개까지 요 위에 놓아주시면서 편안히 잘 자라고 하였다.
요를 깔고 잠을 자는 것은 고향에 계시는 할머니같이 노인이 되어야 요를 깔고 잘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같이 어린아이들이 요 위에 누워 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다. 더구나 베개까지 베고 자다니......
이 모든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 잘 못된 것 같이 생각되어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조합장 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만 요를 깔고 자나, 안 그라마 맨날 이래 자나?
그러나 상대방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동문서답이 되었다.
-우리 엄마가 니만 좋다면 앞으로 영영 우리 집에서 살아도 된다 했다.
솔깃한 제의였다. 이런 별천지에서 영영 살아도 된다니. 요를 깔고 잔 금융조합장 관사에서의 첫날밤은 진기한 경험이었다. 푹신푹신한 요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거칠 것이 없는 넓은 공간은 마치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해방감이었다.
그랬었다. 그것은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잠자리의 해방이었다. 밤마다 사방에서 간단없이 밀려드는 7식구의 체중과 짓눌리는 뼈마디,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와 형제자매-중간인 나에겐 형, 제, 자, 매가 고루 갖춰져 있었다-들의 다양한 잠꼬대와 뿌드득거리며 이빨 가는 소리 등으로 영과 육이 극도로 피곤했던 지금까지의 잠자리에 비하면 이것은 정적과도 같은 휴식이었다. 경탄할만한 쾌적함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서 우리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오려던 나는 그만 조합장 아들 어머니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조합장네 식구들과 함께 안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내 앞으로 한 그릇의 쌀밥과 고기국이 놓여져 있었다.
생일날 외에는 내 몫으로 별도의 밥그릇을 배당 받아 본 일이 없었던 나는 또 한번 부자의 풍요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감동적인 휴매니즘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난한 7식구를 거느린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의 공동의 밥그릇인 커다란 양푼에다 밥을 퍼 담으실 때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셨다. 거의가 보리밥이기 마련인 밥이었을지라도 아버지를 위해 별도로 준비한 약간의 쌀밥이 어쩌다가 우리 형제들의 보리밥 속에 잘못 섞이는 날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집중적인 숟가락질의 표적이 되어 사라지곤 하였는데 쌀밥을 먼저 떠먹으려는 과정에서 언제나 분쟁이 발생하였다.
갈치 한 도막이라도 상에 오르면 그것은 매우 미묘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형의 젓가락이 갈치 도막에 닿기 전에 내가 건드렸다가는 형을 놔두고 동생이 먼저 고기 반찬을 건드렸다는 윤리적 제재를 받기 마련이었고 형은 형대로 혼자 한 입에 털어 넣어도 시원찮을 갈치 도막을 여러 동생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젓가락질이 결코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의 쌀밥과 고기 반찬에 대한 갈증을 일년에 한번 생일날을 맞이하여 해갈을 시켜주시곤 하였다. 새하얀 쌀밥을 별도의 밥그릇에다 소복이 담은 생일밥은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신성불가침, 그것이었다. 따라서 생일은 결핍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다.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자신의 몫으로 공인된 쌀밥은 양도 많아서 하루 세끼를 나누어서 두고두고 먹었다.
우리 형제들이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결핍을 두려워 할 어떠한 견제와 긴장도 수반되지 않는, 풍요로운 자신만의 몫이 보장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융조합장네의 아침 식사는 매일 매일이 우리 집의 생일을 능가하는 풍요함이었다. 정갈한 수저와 반짝이는 식기, 기름기가 흐르는 쌀밥과 고깃국, 이 모든 것들이 부잣집 식탁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확실히 부자는 많은 것을 예사로 가지고 있었다. 넓은 방과 푹신한 요, 거기다가 밤 12시가 넘어도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전기불, 공부만 하도록 되어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쌀밥과 고깃국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풍요해 보이는 것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상한 아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쉴새 없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뭘 먹고 싶니? 잠은 잘 잤니? 이것 더 먹어볼래? 와 같은 꿈같은 질문을 해주시는가 하면 놀랍게도 같은 어른들끼리인 남편에게도 아들을 주제로 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우리 상호가 좋은 친구와 공부를 하더니 봐요, 얼마나 점잖아 졌는지....
나긋나긋한 표준말씨로 남편에게 아들 칭찬을 하자 조합장인 상호 아버지도 결코 그 대화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관심의 여분을 나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럼, 우리 상호가 언제는 점잖지 못했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선생님이 네 칭찬을 많이 하시더구나.
비록 남의 아버지였지만 내가 어른으로부터 질문의 대상이 된 순간은 흔하지 않는 감동이었다. 그것은 어린 우리도 어른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구나하는, 진기한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생물학적인 생존에만 급급하였던 우리 부모님은 금융조합장과 같이 나를 감동시킬만한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부모님들의 화제란 항상 외상값 수금이 부진한 것에 대한 걱정과 다름모시(낙찰계) 불입금, 아니면 어떻게 하면 새로운 양복지를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었지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하며 선생님이 내한테 뭐라고 하셨건 그런 것은 화젯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 형제들은 그 치열한 생존의 틈바구니에서 최소한의 잠자리와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견제와 긴장이 사실상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나 부잣집에서는 이러한 견제와 긴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서둘러 아랫목에 눕지 않아도 잠자리는 언제나 푹신한 요까지 깔려져 기다리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자기 몫의 밥그릇이 있었고 마치 환자를 돌보는 듯한 따뜻하고도 인간적인 관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운치가 있었고 향기를 풍겼다.
그랬다. 진짜로 그랬다.
부잣집에는 지금까지 내가 맡아 본 적이 없었던 이상한 향기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반들반들한 부잣집의 방바닥에 묻어서 풍기는 듯도 하였고 보드랍고도 푹신푹신한 이부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기도 하였다가 정갈한 식탁 위의 쌀밥에서, 고깃국에서 물씬물씬 풍겨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상호에게 물어보았다.
-너거 집에 가마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 그기 무슨 냄새고?
-냄새는 무슨 냄새, 오히려 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
-내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니가 목욕을 자주 안 해서 그런 냄새가 난다고 엄마가 그러시더라.
그 날 이후, 다시는 조합장 관사엘 가질 못했다. 상호가 나를 데리러 와서 우리집 앞을 며칠간이나 맴돌았어도, 형 또는 누나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부잣집에 가서 공부도 하고 자고 오라고 윽박질렀어도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내 가난의 냄새도 제대로 맡지 못한 주제에 부자의 냄새에 먼저 심취해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