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한국의 색채학
글 쓴 이 : 나야
날 짜 : 2002/11/12 20: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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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색채 사상**
한국인은 색채를 생활속에서 사용할 때에 어떠한 사상에 바탕을 두었던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19세기의 특성은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의 연구에 바탕을 둔 과학기술 시대의 서장으로서 실용주의(기능주의)가 승리하였던 시대이며 신학에 바탕을 둔 정신주의, 신비주의, 역사주의는 쇠퇴하였고 일상적인 생활문화에 대한 가치가 고양되었던 시대였다.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의 시대도 분명히 이러한 19세기의 특 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도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산업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산업화된 시대에 있어서 생활의 에센스까지 비전적(秘傳的)인 전통숭상 사상에의 경도(傾倒)현상 때문에 서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숭상하려는 전통주의 때문에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현 대문화의 장점들을 자주적, 또는 한국적 문화의 반대개념으로 부정하려는 경향 또한 없지 않다.
한국인의 색채의식도 이와 같은 대치개념으로서의 한국문화 속의 색채를 진단하려 는 것은 결코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색채에 대한 발전적인 생활화를 위해서 일차적으로 한국인은 어떠한 색채사상을 가졌으며, 또 어떻게 생활 속에서 색채를 사용했던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1. 색채의 기본
우리의 경우 실용주의 학문이 도입된 것은 1876년경 이었으니 19세기 중엽이 된다.
(1830년대를 19세기의 시작으로 보았을때) 실학(實學)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눈뜨기 시작한 개항전 까지의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였던 것은 화이적(華夷的)세계관으로서 이것은 음양오행(陰陽五行)적 우주관에 바탕을 둔 사상체계였던 것 이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는 모두 이러한 사상 체계에 의한 의식과 깊은 관련을 맺고있는 문화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색채문화 역시 신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러한 사상체계에 따라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구는 자전하고 둥근 것이라는 생각보 다는 오행사상에 의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둘레에 사방이 구성되는 세계관에 의 해 모든 것이 규정되고 의미가 부여되었으니 색채도 역시 이러한 이치에 따라 생각하였 고 사용하였던 것이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천지의 수가 오행을 생성하는 것은 천일(天一)과 지육(地六)이 배합되어 북방에 수(水)를 이루고 천칠(天七)과 지이(地二)를 배합해서 남방에 화(火)를 이루며 천삼지팔(天三地八)을 배합해서 동방에 목(木)을 이루고 천구지사(天九地四)를 배합해서 서방에 금(金)을 이루며, 천오지십(天五地十)을 배합해서 중앙에 토(土)를 이룬다 는 이치 이다. 동방(東方)은 목(木), 청(靑), 좌(左)와 같은 뜻이고,
서방(西方)은 금 (金), 백(白), 우(右), 남방(南方)은 화(火), 적(赤), 상(上), 북방(北方)은
수(水), 흑(黑), 하 (下)로 모아 지는 것은 색채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따라서 오행(五行)에 의한 황색(黃色), 백색(白色), 흑색(黑色), 적색(赤色), 청색(靑色)이 기본색으로서 우주생성의 오원색(五原色)에 해당하며 오정색(五正色), 또는 오채(五彩)라고 부른다. 자연 과학적 색채이론에 근거한다면 검정색과 흰색(黑과 白)은 원색설에서 제외된다. 이것은 우리인간의 눈에 대한 인간과학적인 연구로 부터 발견된 진리이다. 그러나 한국의 색채사상은 오행사상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사계의 변화도 시각적으로 체험하기보다는 오행적으로 관념화하였다.
사시(四時;春夏秋冬)를 짝지어 청춘(靑春), 주하(朱夏), 백추(白秋), 현동(玄冬)으로 관념화 한것도 그 좋은 한가지 예이다. 이 연구에서는 음양오행사상 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깊히 고찰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색채사용과 그 색채의식의 기본이 바로 이와 같은 화이적 세계관과 음양오행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한국인의 색 채 사용에 있어서는 개인, 자기자신의 감정이나 감각, 지각반응과는 깊게 관련되지 않았 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2. 음양오행적 색채체계
음양오행적 사상에 의하면 앞에서 잠시 이야기 한 오원색(五原色; 五正色; 赤, 靑, 黃, 白, 黑)은 양(陽)에 해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양이 있으니 음(陰)에 해당하는 색이 있 어야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다섯가지의 방위, 즉 동서남북, 중앙의 사이에 놓여지는 색이 음색(陰色)으로서 오정색에 대해서 오간색(五間色)이라고 말한다.
녹(綠), 벽(碧), 홍(紅), 자(紫), 유황색(0黃色)을 오방(五方)의 잡색(雜色)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서 동방의 청색 과 중앙의 황색의 간색으로서의 녹색(綠色)과 벽색(碧色)은 동방 청색과 서방 백색의 간 색이며 홍색(紅色)은 남방 적색(朱)과 서방 백색의 간색이며 유황색은 북방 흑색(玄)과 중앙 황색의 간색이며 자색(紫色)은 북방 흑색과 남방 적색의 간색으로서 오정색(五正色), 오간색(五間色)의 10가지 기본색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속에 나타난 색채와 문헌속에 나타난 색채어(色彩語), 색명(色名)으로는 실질적인 색채를 정확하게 재현하기 힘들 때가 많다. 왜냐하면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오정색, 오간색 이외의 색채에 대해서는 자연현상의 변화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한자어의 뜻글자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주토색(朱土色), 청암색(靑暗色), 유청색(柳靑色) 등의 한자표기로 기록하 였기 때문에 그 정확한 색의 차원(色次元)이나 색가(色價)를 알기가 힘들다.
사실 색채는 말이나 단어로써 표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그 변화가 너무 미묘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생활 가운 데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써 색채를 사용할 때에는 이와 같은 기억색(記憶色)이 더 편리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억색명으로는 그 색의 정확한 재현은 힘들다. 오늘날의 과학은 색의 정확한 재현과 표기를 위해서 색을 수치화(數値化)하거나 기호화(記號化)하는 방법을 개발했고 각 나라마다 표준색채체계(色彩體系)를 제정 사용하기도 한다.
색채 표기법(表記法)의 문제는 분명히 과학적 사고의 산물로서 이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이 지각하고 식별할 수 있는 수백만종의 색채를 재현하거나 체계화하기는 힘들다. 필자의 실험에 의하면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10분동안 기억해서 기록하게 한 색명은 거의 30-50여가지를 초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실험에 의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기억색명, 또는 관용색명(慣用色名)으로써는 무수히 많은 색채를 지각하기는 힘들다. 동청과 서백의 합이 곧 벽(碧)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모두 어떠한 청색과 벽색인지 뚜렷이 지각되지 않고 막연히 밝은 하늘색 정도의 푸른색(碧)으로 연상될 뿐이다.
따라서 청과 백이 벽으로 집약되었을 뿐 그 사이의 시각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의식화 되어있지 않다. 이러한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한국인의 생활 가운데에서는 색채를 다양하게 그리고 시각적 으로 변화있게 사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모든 것은 다음의 장에서 고찰되겠지만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설명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즉
우리의 특유한 의식세계의 하나인 감각(감정)부정의 인격지향(人格志向)적 의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 한국인의 생활에 나타난 색채의식**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국의 색채사상은 말할 것도 없이 음양오행적 우주관에 바탕을 둔 오정색, 오간색론이 그 기본으로서 이것이 얼마나 엄격하게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지배하였던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직접 간접으로 현재의 생활 가운데에서도 그 단편을 찾아볼 수 있는데, 권투시합 때 청코너, 홍코너라고 외치는 습관이라든가, 아직까지도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에 대해서는 점잖치 못한 것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등, 이 모든 것은 한국인의 색채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창기(娼妓) 의 표시로 입었던 붉은 치마(계급표시로서의 색채사용의 예)도 적상(赤裳)이라고 표현 하지 않고 홍상(紅裳)이라고 하는 것은 상반신은 양(陽)이므로 양의 색을 사용해야하고 하반 신은 음(陰)이므로 음의 색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정색,상=간색(衣正裳間)이라는 음 양오행의 이치를 철저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1. 색채 생활화의 기본---오방색(五方色)
한국인의 환경에 대한 공간지각(空間知覺)도 이러한 이치에 근거한다면 오방위의 수 평적(또는 평면적) 공간개념으로서 모든 생활공간, 우주공간을 지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공간설정에 있어서 오방위의 개념은 거의 철저하게 생활 공간 개념에 적용되었는데,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북현무(北玄武), 남주작(南朱雀)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오방위 오정색의 설정은 음양오행(風水)의 이치에 맞아야 생활이 길상장수(吉相長壽)하고 국가가 번창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오방위, 오방색의 예는 일일 히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국인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오례(五禮)와 같은 의식(儀式)이 모두 음양오행적 이치에 철저히 따랐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군례(軍禮)때에 사용하는 색채도 그러했다. 적을 공격할 때에 대열에 사용하는 기(旗)를 오채아기(五彩牙旗)라고 말하며 동방 청색기, 서방 백색기, 중앙 황색기, 남방 적색기, 북방 흑색 기로 인도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예들이 있다. 또 중원의 천자인 중국의 임금은 황색(중앙의 색) 곤룡포를 입을 수 있지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고종황제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임금들은 황색 곤룡포를 입을 수 없었다는 것은 화이적 세계관에 의한 오방색 사용의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계급표현 수단으로서의 색채
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채색은 화려, 장엄, 사치, 권위의 상징으로서 권력층의 전유 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백의숭상(白衣崇尙) 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계급표시와 관련이 있다. 서민이 유채색을 입으면 단죄(斷罪), 벌 할 정도로 규제하였다.
韓衣服之制 不聞染色 唯以花文爲禁 故有御史察民服 文羅花綾者斷罪罰物 民庶遵守 不敢慢令 舊俗女子之服 白紵黃裳 上自公族貴家下及民庶妻妾......'이라고 중국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되어 있다.
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대사(大事)라고 해서 혼례 때에는 신랑과 신부에게 화려한 유채 색 옷을 입게한 이외의 모든 서민의 옷은 모두 백색(無色이라고 말해야 옳다)이었으며 권력이나 품계(品階)의 표시로서 또는 신분이 낮은 천민의 표시로서(예를 들면 무당, 기생 등)사용하게 한 이외에 유채색은 극도로 제한하였다(禁彩色 思想). 상층계급은 진채 (眞彩), 화식(華飾)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하층계급은 사용할 수 없었다.
고려도경을 보면 국사(國師)는 자상(紫裳), 율사(律師)는 복자(服紫), 대덕(大德)은 괴색규의(壞色0衣), 재가화상(在家和尙)은 白紵搾衣로써 승려의 계급을 나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대체로 높은 신분 일수록 자색(紫色), 조색(早色), 적색(赤色), 등 이 많고 그 다음으로는 청색, 황색, 백색이 많다.
품계별로도 색채가 다른데 자색, 비색 (緋色), 청색, 황색, 계통이 공복색(公服色)의 주조를 이루었다.계급이 낮은 사람, 공기(工技), 농민(農民), 서민(庶民) 등은 백색옷을 입게 했으며 물들인(彩色) 옷은 금(禁)했으니 (禁彩色) 우리의 백의숭상의 이면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백색은 그래서 서민의 색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한국인의 백색관(白色觀)에는 채색한다는 적극적 인 행동의식(行動意識)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무색개념(無色槪念)의 백색의식(白色意識) 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백색도 사실은 다른 유채색과 대비(對比)되었을 때 독특한 색으로 지각되며 화려하다든가 깨끗하다든가 하는 지각반응을 유발한다. 백색만 허용하는 무색(無色) 천(白紵, 素布) 그대로의 색은 실질적인 색의 개념이 희박하다.
위와 같은 무색, 있는 그대로의 백색개념이 한국인의 백색의식임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사지 방인 아랍 문화권에서의 백색옷은 다분히 기능적인 고려가 더 강하지만 한국서민(韓國庶民)의 백색옷 사용은 대단히 타율적(他律的)이며 기능적(機能的)이지 못하다. 조선 태종 6 년 황해도 관찰사 신호(申浩)가 상언하기를 무색(無色)옷은 좀먹기 쉽고 또 만들기 어려 우므로 백색을 청색으로 하고 그 속에 심을 넣으면.....,<12> 하는 탈백색(脫白色) 노력의 기록도 있지만 대체로 백색옷은 한국인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進士-其服四帶文羅巾, 조유爲구, 黑帶革履, 農商-其服階以白紵爲袍, 烏巾四帶, 工技-常服白紵袍조巾, 民長-其服文羅爲巾 조유爲구, 黑角束帶 革句履' 였으니 민중의 옷은 한결같이 백색중심의 무채색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옷의 색채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물건도 역시 색으로써 계 급을 표시하였다.
과녁(射器)의 색채도 잘 보이게 배색한다는 기능적인 고려보다는 사용 하는 신분에 따라 색채를 구별해서 사용했다. 임금이 사용하는 과녁 중에 적색바탕에 정 곡(正鵠)은 백색 곰머리를 그린 것이고, 종친과 문무백관용은 청색바탕에 백색 사슴머리, 무과와 교습용 녁은 청색바탕에 백색 돼지머리를 그린것으로 구별하였다. '熊侯-以赤色布質爲質崇廣文...중략, 侯中畵以熊首用御射(赤바탕에 正鵠은 백색 곰머리, 御射用), 미侯- 以靑色布爲質崇廣文.., 중략, 侯中畵以미首用御宗親文武官射(靑바탕에 正鵠은 백색순록, 종 친문무관용), 豕侯-削如上靑質白皮爲鵠畵以豕首用御武科及敎習)'(靑바탕에 正鵠은 백색 돼지머리) 등이다.
3. 의식주 생활에 나타난 색채의식
국민중의 옷은 모두 백색(무색)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옷은 곧 백색으로 연상되 며 따라서 백색, 무색의 개념이 한국인의 색채의식에 가장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농상(農商), 공기(工技), 민장(民長), 진사(進士)와 같은 일반 민중은 백저(白紵)로 옷을 지어 입었다.官服, 王服, 領官服, 國相服, 近侍服, 從官服, 卿臨服, 韓官服, 庶官服과 같은 公服의 경우에는 그 계급에 따라서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에 속하 는 사람들도 평상시에 입는 옷은 주로 백색 옷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의상의 색은 백색과 흑색으로 이어지는 무채색대(無彩色帶)(회색, 또는 무색의 이미지)이다.
음식 역시 궁중음식을 제외한 민중의 음식은 흰밥, 숭늉의 뜨물색, 탕반(湯飯)의 흰색 이미지, 흰떡, 회녹색의 쑥떡, 끓여서 퇴색한 나물의 색, 송편의 색채 등 모든 음식이 채도가 낮은 회색(灰色)의 기(氣:aura of colour)<16>가 많은 색으로서 서양의 음식이나 일본의 음식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식기, 사발의 색과 수저, 그릇, 과자류 등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색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색 이미지는 회색빛이 많은 백색조(白色調)이다.
그래서 툭 불거져 나오지 않고, 생경하지 않으며 은은하게 가라앉은 회색조(灰色調)의 무색 이미지로서 시각적(視覺的)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주택 역시 회색조이다. 왕궁이나 사찰과 같은 특수한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주택의 옥내외가 모두 인위적으 로 색채를 의식적으로 강하게 사용한 예는 거의 없다.(있는 그대로의 색이다)
옛 우리 조 상들이 살았던 여러가지 집안 풍경을 상상해 보자. 벽이나 창은 창호지, 닥지, 회벽등의 회백색조이며, 벽에 걸린 문인화(文人畵), 옷의 색이 회색, 백색이며, 백자가 그러하고, 장 판이 회황색이며, 문갑, 장농 등이 흑갈색의 무채색이다.
이와 같이 실내의 풍경은 한결같 이 단색조(單色調) 또는 무색조(無色調;colourless)이다. 외의 풍경, 건물 그 자체도 마 찬가지로서(회색, 또는 청회색조의 지붕들) 이와 같은 회색조는 청송녹죽(靑松綠竹)의 자 연의 색(녹색, 청색)과 동화되었으니 한국의 취락풍경은 문자 그대로 자연에 잘 어울리는 동색대비(同色對比)의 평면적 구성(構成)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 강대비(强對比)되지 않기 때문에 공간(空間)이 깊게 지각(知覺)되지 않는 약대비(弱對比)의 평면 구 성이 한국의 취락 풍경인 것이다.
청색조(綠靑色調)는 지각상의 기복현상이 크게 생기지 않으며 여기에 회색조의 건물(취락)이 놓여도 지각상 강한 분리력(分離力)이 생기지 않게 되어 평면적으로 지각된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를 선의 문화라고 특징지울 때 등장 하는 건축의 선, 의상의 선, 백자, 청자의 선, 버선의 선 등과 못지 않게 한국의 문화는 수평적, 평면적 이미지가 강하다. 자연에 대치한다는 개념(强對比/立體的/視覺的)보다는 동화(同化)한다는 개념(弱對比/平面的/情緖的)이 더 짙다.
따라서 한국인의 생활 가운데에 서 지배적인 회색조(白,灰,黑)의 무채색 의식은 음양오행적 사상과 중화의식(中化意識) 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색채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명도(中明度) 의 회색은 눈속에서 완전한 평형(平衡)상태를 낳게하며 눈과 뇌는 중명도의 회색을 필요로하며 그것이 없을 때에는 불안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따라서 두가지 이상의 색이 대비 해서 중명도의 회색으로 지각되면 그 색은 가장 안정된 조화상태에 도달한다. 한국의 취 락풍경은 회색조이며 자연의 색(특히 녹/청색조)과 대비했을 때 그것은 조용한 동색조화 를 낳고 튀어나오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유발하는 심리상태가 되며 나아가 한국인의 의 식 가운데에서 가장 보편적인 '모나지 않은 상태'에 이르는 무색중화(無色中和) 의식과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의식주 생활에 나타난 여러가지 색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인의 색채의식은 동적이고 활력적이기 보다는 정적이고 침정적(沈靜的)이며 중성적인 성격이다. 새마을 운동에 의한 농촌주택 개량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초가집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으로 애석하게 생각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한국의 자연풍경 가운데에 울긋불긋하고(색채) 직선적이며 경직된 형태 (개량주택)가 들어섬으로써 생기는 풍경의 변화(强對比)를 파조(破調)라고 생각하는 한국 인의 뿌리 깊은 자연동화 의식과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현대생활을 해 가는데에 불편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초가집에서 직접 생활하기 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풍경(색채)의 변화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 내 보이는 것은 한국인의 동색조 기호(嗜好)반응의 일면을 잘 나타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또 외국인들이 이러한 한국의 풍경을 감탄해 하는 것도 곧 자연에 있는 그대로 동화되어 있는 풍경의 자연성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에 와서도 생활 가운데 에 나타나는데, 즉 무당집(또는 무당옷)같다 라는 말에는 울긋불긋한 색채에 대한 거부반 응이 잠재해 있으며 이것은 곧 점잖지 않다는 뜻이고 비하하는 의미이며 인격적이지 못하고 유치한 것으로 동일시 하는, 침정된 회색조, 동색조에 대한 기호반응의 일면을 나타 내는 말이다.
사실히 지식인일수록 우리의 경우에는 강한 대비(强對比)와 유채색(有彩色) 에 대한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한국인의 생활(일상성)과 색채 는 깊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의 생활 가운데에서 색채, 즉 유채색이 있을때 에는 곧 일상적이지 않은, 범상치 않은 별난 일들이 생겼음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4. 금기(禁忌), 주술(呪術), 의식(儀式)에 나타난 색채의식술적으로 악귀를 쫓거나 예방하는 데에는적색과 청색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백색과 흑색은 흉례(凶禮)때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오행에 따르면 적색은 만물이 무성하는 남방의 색이며 그래서 양에 해당되고 청색 역시 해가 뜨는 동방의 색이므로 양에 해당하는 생명, 생기(生氣)와 같은 의미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음에 해당하는 악귀를 쫓는데 음양을 중화시켜 몰아내거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즉 귀신음양야(鬼神陰陽也) 라는 사상이기 때믄에 양의 색은 음을 쫓는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선시대에 임금의 병환이 위급하면 액정서에서 보의를 설치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붉은 비단에 도끼를 그려넣은 병풍을 말하며,흉귀를 쫓는 의식인 동계난의(冬季0儀) 때에도 동자(童子) 48명이 가면을 쓰고 적색의상을 입었고, 공인(工人) 20명이 적건(赤巾) 과 적의(赤衣)를 입었다는 기록, 또 사자(死者)의 관에도 옷칠을 하고 안에 붉은 비단을 사 방에 붙힌다.(工曹師其屬修비內外遂於비內以紅 ///四方----世宗莊憲大王實錄..,)등의 기록 에서 보듯이 붉은 색(赤色)은 꼭같은 이치로써 악귀를 쫓는 색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적색과 청색을(특히 적색을) 벽사색(僻邪色)이라고도 말한다.
이와같은 색의 사용은 오늘날의 의식에서 보면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며,기능적이지 못한 화이적 세계관,음양오행적 우주관에 바탕을 둔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서 이러한 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 우리의 전통문화였으며 우리의 색채문화였던 것이다. 길례,빈례,가례와 같은 의식에서는 주로 정색 가운데에서도 적색과 청색이 사용되 었으며 (이 경우 혼례를 재외하고는 서민생활과는 관계없는 의식들이다.)흉례 때에는 주로 백새과 흑색이 사용되었으며 황색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적,청,황,백,흑으로 이 루어지는 새채의 세계 가운데에서 백색과 흑색만이 민중에게 허용되었고 그 외의 색(유채 색, 적, 청, 황)은 상층급의 생활, 의식 등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민중생활에는 회 색조(백-흑)의 색밖에 없다는 논리가 된다.
장례 때에는 일체의 인위적인 것은 배제되고 자연적인 것이 사용되며 북현서백(北玄西白)의 음이 주가 되기 때문에 표백하지 않은 그대로의 소복(素服),소혜(素鞋, 신발), 오사모(烏紗冒), 흑각대(黑角帶) 등이 사용되었고 일체의 화식(華飾)은 금하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례식 때의 전형적인 색채풍경은 회 색조인 것이다. 이러한 것 역시 중국적인 사생관(死生觀)에 의한 것으로서 예기에 의하면 부모의 대상(大祥)을 지내고 담제(담祭)를 지내기는 하지만 아직 마음의 슬픔이 남아있기 때문에 갑자기 채색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백색관을 쓴다는 기록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신에게 드리는 예물(폐백),역시 모두 저포(紵布)를 사용했는데 사직(社稷)과 선잠(先蠶)에 는 흑색,종묘(宗廟)에는 백색, 선농(先農)에는 청색을 사용하고 그 외의 신에게는 모두 백 색을 사용하였다.(世宗莊憲大王實錄)부적의 색은 반드시 적색이며,면사포의 색도적색이 며, 사주단자의 청, 홍색, 아들을 낳으면 금(禁)줄에 빨강 고추를 메달거나, 아기가 태어나 서 돐이 되기전 까지는 유채색을 입히지 않고 백색을 입히는 것이나 모두 이와같은 의식에 서 색채를 사용한 것이다.
***한국인의 색채의식에 예***
1. 지각장의 상대적 가치란 예를 들면 같은 노랑색이라도 빨강(순색) 바탕의 노랑색은 휘도가 있어보이지만 밝은 분홍색(빨강순색+흰색) 바탕의 노랑색은 휘도를 잃어보이는 현상으로서 노랑색 고유의 가치를 부정하는 인지설(認知說 ; cognitive theory)에 바탕을 두고있다.
2. 빨강 순색은 물감의 경우 백색의 함유량에 따라 여러가지 밝기의 분홍색이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는 곧 시각적이라고 말한다. 이때 여러가지 분홍색은 빨강 순색보다 상대적으로 부드럽 게 지각되는 것은 심리적 반응, 또는 심리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이다.
3. 이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며 그 외의 사방은 오랑캐(東夷北狄西戎南蠻)라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말한다(禮記). 이러한 세계관 속의 동이(東夷)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4.나라에서 지내는 다섯가지 의례(儀禮)로서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이다.
5. 비단 군례의 경우만 아니다. 嘉禮序例, 齒簿에 사용되는 旗 역시 중앙에는 황룡기(黃質畵龍), 오른쪽에는 백호기(白質畵白虎)와 玄武旗(黑質畵龜蛇), 왼쪽에 청룡기(靑質畵靑龍)와 朱雀旗(赤質畵朱雀) 그리고 紅門大旗(赤質畵靑龍)를 사용했다. 嶽과 海에도 각각 방위색을 사용했는데 동해에는 청, 삼각산은 황, 남해는 적, 鼻白山은 현(玄), 송악산과 서해는 백으로 나타냈다. (世宗莊憲大王實錄 132권,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3.)
6. 高麗 忠烈王은 黃袍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7. 모든 사물에는 氣가 있는 것처럼 색깔에도 氣가 있다. 이것을 色의 氣(aura of colour) 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언어 의미로 色氣라고 하면 곧 欲情, 性慾, 色慾을 의미한다. 따라서 色慾과 欲情으로 대표되는 五慾은 色으로 동일시되는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화려한 色을 멀리하는 것은 곧 五慾을 멀리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여러가지 색깔중에서 회색은 그 氣가 없거나 약한 색이다.
9. 임금이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은 陽에 대한다는 의미이고(임금은 곧 태양의 상징이다.) 신하가 北面을 하는 것은 임금에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君之南向,答陽之義也,臣之北面 答君也)-禮記. 주술적으로 악귀를 쫓거나 예방하는 데에는적색과 청색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백색과 흑색은 흉례(凶禮)때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오행에 따르면 적색은 만물이 무성하는 남방의 색이며 그래서 양에 해당되고 청색 역시 해가 뜨는 동방의 색이므로 양에 해당하는 생명, 생기(生氣)와 같은 의미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음에 해당하는 악귀를 쫓는데 음양을 중화시켜 몰아내거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즉 귀신음양야(鬼神陰陽也) 라는 사상이기 때문에 양의 색은 음을 쫓는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병환이 위급하면 액정서에서 보의( )를 설치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것은 붉은 비단에 도끼를 그려넣은 병풍을 말하며,흉귀를 쫓는 의식인 동계난의(冬季0儀) 때에도 동자(童子) 48명이 가면을 쓰고 적색의상을 입었고, 공인(工人) 20명이 적건(赤巾) 과 적의(赤衣)를 입었다는 기록, 또 사자(死者)의 관에도 옷칠을 하고 안에 붉은 비단을 사 방에 붙힌다.(工曹師其屬修비內外遂於비內以紅 ///四方----世宗莊憲大王實錄..,)등의 기록 에서 보듯이 붉은 색(赤色)은 꼭같은 이치로써 악귀를 쫓는 색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적색과 청색을(특히 적색을) 벽사색(僻邪色)이라고도
말한다. 이와같은 색의 사용은 오늘날의 의식에서 보면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며,기능적이지 못한 화이적 세계관,음양오행적 우주관에 바탕을 둔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 한 것으로서 이러한 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 우리의 전통문화였으며 우리의 색채문화였던 것이다. 길례,빈례,가례와 같은 의식에서는 주로 정색 가운데에서도 적색과 청색이 사용되 었으며 (이 경우 혼례를 재외하고는 서민생활과는 관계없는 의식들이다.)흉례 때에는 주로 백새과 흑색이 사용되었으며 황색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적,청,황,백,흑으로 이루어지는 새채의 세계 가운데에서 백색과 흑색만이 민중에게 허용되었고 그 외의 색(유채 색, 적, 청, 황)은 상층급의 생활, 의식 등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민중생활에는 회 색조(백-흑)의 색밖에 없다는 논리가 된다.
장례 때에는 일체의 인위적인 것은 배제되고 자연적인 것이 사용되며 북현서백(北玄西白)의 음이 주가 되기 때문에 표백하지 않은 그대로의 소복(素服),소혜(素鞋, 신발), 오사모(烏紗冒), 흑각대(黑角帶) 등이 사용되었고 일체의 화식(華飾)은 금하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례식 때의 전형적인 색채풍경은 회 색조인 것이다. 이러한 것 역시 중국적인 사생관(死生觀)에 의한 것으로서 예기에 의하면 부모의 대상(大祥)을 지내고 담제(담祭)를 지내기는 하지만 아직 마음의 슬픔이 남아있기 때문에 갑자기 채색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백색관을 쓴다는 기록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신에게 드리는 예물(폐백),역시 모두 저포(紵布)를 사용했는데 사직(社稷)과 선잠(先蠶)에 는 흑색,종묘(宗廟)에는 백색, 선농(先農)에는 청색을 사용하고 그 외의 신에게는 모두 백 색을 사용하였다.(世宗莊憲大王實錄)부적의 색은 반드시 적색이며,면사포의 색도적색이며, 사주단자의 청, 홍색, 아들을 낳으면 금(禁)줄에 빨강 고추를 메달거나, 아기가 태어나 서 돐이 되기전 까지는 유채색을 입히지 않고 백색을 입히는 것이나 모두 이와같은 의식에 서 색채를 사용한 것이다.
5. 의미(意味) 중심의 색채의식
한국인 만큼 의미에 민감한 민족도 없는 것 같다. 길상문(吉祥文), 십장생문(十長生 文)을 생활속에 가까이 사용한 것은 사용하는 물건의 실용적인 가치나 조형적인 특성(또 는 시각적인 특성)보다는 어떤 의미성을 더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규수들이 사용했던 주머니에 박쥐무늬를 수놓았던 것은 박쥐가 천년을 장수한다는 의미를 강조했기 때문에 박 쥐무늬가 수놓아진 주머니를 사용함으로써 장수한다는 의식에 동일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日), 구름(雲), 물(波), 소나무(松), 대나무(竹), 불노초(不老草), 사슴(鹿), 거북(龜), 학(鶴), 바위(岩) 등의 십장생문이 거의 대부분의 생활용품이나 건물등에 중요한 형태로 등장하였던 것이다.(壽, 福, 康, 寧, 囍와 같은 문자문양도 등장하였다.) 사용한다는 실리적 인 의식보다는 길상의 관념을 더 의식하고 동일화함으로써 실제로 복되고 장수한다는 의 식세계에 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색채의 경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색 채에 있어서도 직접 감각적으로 쾌(快), 불쾌(不快), 또는 미적 감수성에 반응한다든지 하 는 심리적 반응보다는 오히려 그 이면에 내재하는 관념(의미, 또는 상징성으로서 주로 음 양오행적 우주관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이다)을 더 중요하게 의식하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의식 가운데에서도 색채를 생활화함에 있어서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색을 사용하는 맹목적인 의미를 찾는 버릇이 있다. 색채를 사용할 때에 그것이 직접 우리의 감각에 와 닿는 감정이나 느낌에 순수하게 또는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어떤 선입관화된 지식, 또는 관념(의미)와 결부시켜 어떤 의미를 확인하려는 버릇이 있다. 국 민학교때 부터 고등학교때 까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초록색은 희망, 빨강은 정열, 사 랑, 따위로 지식주입식의 잘못된 미술학습과도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더 근원적으로 는 한국인의 비실리(非實利)적인 사고방식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이 붉으스레한 사람은 입술이 파르스름한 사람보다 더 친근감이 가고 그래서 붉은색 계통은 분명히 찬색 계통보다 가깝게 느껴지며(色의 進出性)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의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의 그 어떤 비애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하게 된다. 김영랑의 시 "가늘한 내음" 가운데에서 "오- 수심뜬 보라빛" 이라는 싯귀는 애잔한 슬픔 의 이미지를 전해주는 색채어이며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소월시의 분홍색은 서정주 의 시, "문둥이" 가운데의 "붉은 울음"이 전해주는 피빛 빨강색 보다는 훨씬 애틋한 사랑 의 이미지를 전해주는 색채(色彩語-意味性)라고 해서 푸른색은 비애, 분홍색은 애틋한 사 랑, 보라색은 애잔한 슬픔,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색채의 의미성도 생활 가운데에서 직접 감각적 체험이 발전하여 어떤 의미에 동일화하는 것이므로 지식화하거나, 관념화된 의 미에 구애되어서는 안된다. 색채는 먼저 지각의 장(知覺場)에서 상대적 가치와 그 경험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직접체험(感覺的 體驗)에 바탕을 둔 색채생활화를 강조해야한 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색채를 연구한 결과 빛의 파장의 차이에 따라 눈에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동양사상에서도 색은 곧 각(覺)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 나 한국인의 색채사용에 있어서는 이 감각적이라는 것이 중요시되지 않았다.
한국인의 의식에 자리잡고 있었던 "감각적"이란 점잖지 못한 것, 심지어 부도덕한 것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에 한국인의 색채생활화 가운데에서 민감한 감각적 색채변화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의미를 좋아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예에서만이 아니다. 집터나 집의 방향을 따지는 의미, 흰옷을 입는 의미, 결혼 때 청단 홍단에 동심결(同心結)하는 의 미, 제사상에 아무 음식이나 올려서는 안되는 의미, 북쪽을 보고 절하는 의미 등과 같이 한국인의 생활 속에는 의미투성이 였으며 이러한 의미부여는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하였고 감정을 억제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의미과잉이 형식주의를 낳았고 의견대립을 조 장시켰으며 당파 싸움으로 까지 번지기도 했던 것이다. 의미를 감정이나 감각보다 더 강 조한 의식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던 음양 오행적 사상에 더 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대부의 여기(餘技)로 발달했던 문인화 (文人畵)에서나 사대부의 거실, 그 어디에서도 색채가 거의 없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을 지배했던 유교적 사고방식이란 인간적인 감각이나 감정은 멀리하고 인격과 형식, 규범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상이었기 때문에 색(色)이 있는 것은(有彩色) 곧 육욕(肉慾, 色氣)이며 천하고 품위가 없고 인격적이지 못한 것과 동일시 하였던 것이다. 백색을 숭상했던 백의민족이라는 의식의 심층에는 탈감각(脫感覺) 으로써 고매한 인격에 이른다는(禁慾的 人格完成) 한국인 특유의 인생관이 엿보인다. 오 늘에 이르러서도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원색조(原色調), 유채색 계통의 색채는 유치한 것 으로 편견반응을 나타내 보인다. 고고한 인품, 인격, 청백리(淸白吏), 정절(貞節)로 지향하 려는 한국인의 이상적 인간상의 이면에는 "학(鶴)처럼 산다", 라는 학의 아날로지 (analogy)로서의 백색기호(嗜好)반응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은 직접 감 각적으로 색채에 감정이입 하거나 감정투사(感情投射) 하지않고 어떤 의미부여를 통해서 은근히 표현하였고 그래서 은근은 한국인의 전형적인 심성(心性)이 되었으며 탈색채(脫色彩), 금채색(禁彩色)이 의식화 되었던 것이다.
6. 청색지향(靑色志向) 및 백색지향(白色志向)의 색채의식
국인이 사용하는 색채어 가운데에서 집약적으로 가장 잘 쓰이는 것이 청색과 백색이다. 예를 들면 청자(靑磁), 청송녹죽(靑松綠竹), 청산(靑山), 독야청청(獨也靑靑), 백자 (白磁), 백운(白雲), 백로(白鷺), 백미(白眉), 청백리(淸白吏) 등 한국인의 이상적 인간상의 이미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백색의 대표적 아날로지는 학이며, 청색의 대표적 아날로지 는 송죽이다. 이것들은 모두 숭고(崇高), 고귀(高貴), 고절(高絶), 선(善)등의 이미지와 같 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사실 청자의 시각적 색채는 비색(翡色), 즉 밝고 은은한 녹색에 가까운 색임에도 불구하고 그 독특함, 품위, 우수함, 뛰어남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청 자(靑磁)라고 말한다. 중국은 고려청자의 색채를 비색(秘色)이라고 하였다. "청산에 살으 리랏다" 의 청산도 시각적인 푸른(blue)색의 이미지는 아니며 오히려 상징적인 푸르름의 이미지이다. 푸른 산, 푸른 들, 푸른 하늘과 같이 청색과 녹색에 대한 시각적인 차이에 대 한 지각보다는 모두 상징적인 푸르름의 의미로 더 의식화 되어있는 것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넉넉한 것이고 하늘을 보니 푸 르다. 그러하니 어찌 신선의 경지가 아니냐 라는 푸르름 지향의식이 청색(靑色) 기호반응 (嗜好反應)을 나타내는 것이다. 청색계(녹색계까지 포함한 것) 기호반응은 오늘날 까지 잠재적으로 의식화 되어 버스의 색채도 푸르고(밝은 청색) 택시의 색채도 푸르며(녹색), 담장의 색채, 건물 내부의 벽면(옥색), 의상의 색채(특히 남성정장)가 푸른 것도 또 자가 용 승용차의 색채가 무채색 빛이 많은 점잖은 색이 지배적인 것도 역시 이와 같은 한국 인의 의식과 깊히 관련이 있다. 백색에 대한 한국인의 기호(嗜好) 또한 대단하다. 한국인 은 태어나자 마자 흰옷을 입는다.(돐때에 처음 채색옷을 입힌다.) 그리고 평생을 백색옷 만 입고 살다가 죽어서 흰옷을(수의, 壽衣) 입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백의(白衣)는 곧 무 색(無色; 素;있는 그대로의 의미)의 이미지이며, 무색으로 살다가 무색으로 돌아간다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사상과 일치한다. 무색은 곧 자연에의 동화(同和)이며 중화 (中和)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한국인은 자기 감정을 즉각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점잖지 못한 것으로 의식화되어 있다. 먹고싶어도 먹고싶지 않은 체 본능을 억제한다. 경상도 방 언에 "어언제예", "어디이예", 라는 말의 이면에는 속으로는 하고싶고 결국 하게되지만 먼 저 겉으로 체면치례 해보이는 의식이 숨어있다. 본능억제는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발전 하였다. 본능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예를 들면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하는 것은 유색(有 色, 彩色)을 의미하며 이러한 것은 점잖지 못하고 심지어 부도덕하다는 의식 곧 유채색을 금기(禁忌)로 생각하고 무채색(백, 무색) 지향적, 다시 말해서 본능 억제적 인격지향 의식 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색은 자연에 귀의(歸依)하는, 자연과 중화하 는 아날로지이며 결과적으로 탈원색, 금채색의 의식이 생겼고 나아가 오늘날에 이르러서 까지 회백색조(灰白色調)의 무채색계에 강한 기호반응을 나타내는 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점에 비추어 볼때 한국인의 백색지향 의식과 청색지향 의식은(회백 색 빛의 청색, 녹색까지 포함) 그 뿌리가 깊은 한국인 특유의 대표적인 색채의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 한국인은 음양오행적 우주관에 바탕을 둔 오정색-적, 청, 황, 백, 흑, 오간색-홍, 벽, 녹, 유황, 자의 10가지 색을 기본색으로 인식하였다.
2. 한국인은 색채를 감각-지각적 체험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음양오행적 우주관의 이 치에 따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색채를 생활화 하였다.
3. 한국인은 이러한 이치에 따라 색채를 선별적으로 생활에 사용하였는데 한국인을 지배한 금채색 사상(禁彩色) 때문에 백색과 흑색에 이르는 회색조의 무채색이 생활 가운 데의 주된 색이 되었다.
4. 한국인은 푸른색(靑,綠)과 백색(무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백색지향과 청색 지향(푸르름 지향)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한국인의 뿌리 깊은 금욕적 인 격지향의 인생관으로부터 나온 의식이다.
5. 따라서 한국인의 생활속에서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의식은 대단히 희박 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어나면서 백색 옷을 입고 백색 옷을 입고 살다가 백색 옷을 입고 죽는다(壽衣)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한국인의 색채의식의 세계는 곧 백색, 또는 무색의 이미지인 것이다. 색채가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색채의 심리적 영향 때 문이다. 색은 그 자체 하나만으로는 가치가 없다. 반드시 놓여지는 지각의 장(知覺場)의 성질에 따라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다. 색채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 고 행동에까지 영향을 준다. 이것은 물리적 경험이라기 보다는 심리적, 정신적 경험이다. 즉 우리의 마음의 원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나 색채를 보고 여러가지 반응을 할 때 마치 그 색채의 다양한 구성 그 자체가 심리적 또는 행동적 반응을 유발하는 것처 럼 인식하게 된다. 때문에 나는 이것을 색채의 생태성(生態性)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말하고 싶다. 즉 색채의 생태성은 우리 마음의 생태이기도 한 것이다.
색채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이러한 색채의 생태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한다는 뜻이다. 색채의 생태적 구성이(직접 감각에 바탕을 둔 색채계획)어떠한 것인가에 따라 그것은 우 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인의 색채의식은 인간의 마음의 생태성에 촛점을 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 밖에 더 촛점을 맞춘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생활 가운데에 사용한 색채에서는 시각적인 변화나 감각적, 감정적인 느낌을 충분히 읽을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부여된 관념적 의미 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변하고 있으며 생활양식과 그 의식도 크게 변해 색채에 대한 의식도 분명히 달라져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전통문화에 대한 계승운동에 편승하여 우리의 옛 유물에 나타난 색채를 맹목적으로 한국의 색채로 규정하 고 오늘의 사회에 피상적으로 옮기는 것을 전통문화의 계승이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생각 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색채의식의 일면이 그대로 오늘에 전용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예를들면 尺貫法을 전통적인 것이라고 오늘날에 고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색채를 생활에 지혜롭게 사용하는 의식을 색채의식이라고 정의 할 때 오늘날 우리의 생활감각과 생활의 편의에 적합하도록 모든 색채를 적극적으로 생 활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색채는 우리의 생활감각에 맞아야하고 민중의 생활의 질을 향상 시키는 데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과거의 생활속에서 사용되었던 것보 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기능적인 색채의식으로 생활화 해야한다.
* 이논문은 1981년 정신문화, 겨울호(한국정신문화 연구원발행)에 게재되었던 내용을 보완 하여 1983년 국민대학교 환경 디자인연구소 조형논총에 발표되었으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발행 코리어 저널(1983)에 영문으로 번역 게재되었음.
1. 지각장의 상대적 가치란 예를 들면 같은 노랑색이라도 빨강(순색) 바탕의 노랑색은 휘도가 있어보이지만 밝은 분홍색(빨강순색+흰색) 바탕의 노랑색은 휘도를 잃어보이는 현상으로서 노랑색 고유의 가치를 부정하는 인지설(認知說 ; cognitive theory)에 바탕을 두고있다.
2. 빨강 순색은 물감의 경우 백색의 함유량에 따라 여러가지 밝기의 분홍색이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는 곧 시각적이라고 말한다. 이때 여러가지 분홍색은 빨강 순색보다 상대적으로 부드럽 게 지각되는 것은 심리적 반응, 또는 심리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이다.
3. 이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며 그 외의 사방은 오랑캐(東夷北狄西戎南蠻)라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말한다(禮記). 이러한 세계관 속의 동이(東夷)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동양의황색
기독교에 있어서 황색은 제일 싫어하는 색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럼 동양에서는 어떠한지. 사실은 동양과 서양의 황색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반대입니다. 황색은 힌두교, 도교, 불교 등에 있어서 제일 좋은색 입니다. 스님의 의복이나 사원이나 불상에도 황색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 전한(前漢)의 말기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음양오행설에서도 황색은 중심의 색이라고 하여 황색의 의복은 황제의 심볼이였습니다. 수(隨)의 시대부터 천자(天子)는 황색의복을 착용하여야 했으며 평민, 농민에게는 착용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도 존·론이 황색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천자가 출입하는 문을 [황문]이라고 명칭하였으며 중국대륙을 흐르는 강을 [황하(黃河)]라고 하며 지하수를 [황천(黃泉)]라고 합니다. 고귀한 것, 소중한 것에 대한 이름에 이 [황]은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풍습은 일본에도 전해졌습니다. 718년 황태자의 의복으로 약간 적색끼가 있는 [황단(黃丹)색]이 만들어져 천황의 탁한 황색과 같이 일반인의 착용을 금하는 금색(禁色)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현대에서도 정식적인 예복으로서 착용하기도 합니다.
태극의빨강
태극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전 우주만물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태극으로부터 음(陰)과 양(陽)이 생기고, 이조화에 따라 오행이 생긴 것이다.일반적으로 양의 핵은 태양을 의미한다. 태양과 달은 음과 양의 상징적 표현이지 태양이 곳 양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 만물과 땅을 상징하고 남녀를 상징하는 우리의 태극기는 우주 전체의 함축된 의미를 갖고 있다.
태극기의 빨강은 우선, 동양의 오행사상 중 양(陽)색에 해당한다. 태극기 구성의 다섯요소 중 하늘과 태양을 상징하기도 하는 양은 단순하게 동방의 태양을 상징하는 일본의 상징과는 전체 포괄적 의미를 갖는 우리의 양과는 의미상 구분될 수 있다. 물론 표현된 색채도 다르다.우리나라의 태극기 빨강은 먼셀기호 6.0R 4.5/14 로 정의 되었다. 색의 기호로 볼 때 육안으로는 빨강의 표준색 인 5R 4/14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징적인 빨강의 색을 사용한 것인데 의미상 양을 상징하는 빨강의 대표색을 선정한 것이다.보다 확장적이고 실물 태양을 상징하는 색채인 일본의 상징색 보다 깊이 있고 다소 어두운 색이다.
표준화되기 이전에는 도료의 특성과 기타 염료의 특성에 의하여 정확히 표현되지 못했거나 기준이 없이 의미상으로 적색계열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한계나 정확성과는 별개로 의미상 양을 상징하는 의식은 변화 하지 않았다.
미국의 5성기에 나타나거나 구 소련의 국기 그리고 기타 공산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적색의 의미는 무었일까? 당연히 피와 정열 그리고 혁명을 상징하는 역동적이고 파괴적인 의미이다.우리의 양은 그렇게 순간적이고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의미가 아닌 양의 본체 즉, 살아움직이는 우주의 근원인 것이다. 따라서 표현된 적색도 깊이 있는 양의 커다란 실체를 상징하는 색상이다. 다소 높은 명도와 활동성이 강한 중국의 적색이나 태양을 상징해서 표현된 일본의 상징색과는 의미에서나 표현된 결과 모두 다르다. 그러나 결과보다는 의미상에서 우리의 태극기 빨강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