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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 특집】 좌담
백기완의 예술과 노나메기 세상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 · 최열(환경재단 이사장) · 임진택(이애주문화재단 상임 이사) · 맹문재(사회) · 채원희(사진)
일시 : 20021년 4월 21일
장소 : 환경재단 회의실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께서 2021년 2월 15일 돌아가셔서 사회장으로 2월 19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 모셨습니다. 4월 6일 사십구재를 맞아 새긴돌(묘비)을 세우는 행사도 가졌지요. 많은 분들께서 함께해주셨습니다. 이제 백기완 선생님께서 온몸으로 추구해오신 민중해방과 민족통일의 정신을 계승해서 실천하는 일이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지요. 이와 같은 차원에서 오늘 네 분을 모시고 백기완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해요.
유홍준 선배님께서는 백기완 선생님을 언제 처음 뵈었는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겨레출판, 2009)에 실려 있는 「젊은이들이여! 어디선가 그대들 부르는 소리 안 들리는가」라는 글을 보니 1968년 가을 서울대학교 학생일 때 백기완 선생님께 ‘일본,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부탁하러 가신 적이 있네요. 이 글에서는 서중석, 조학송, 유인태, 김덕현, 안양노, 유초하, 유영표 등도 언급하시고 있네요.
유홍준 : 1969년이었어요. 그 무렵을 좀 회상해보면, 김덕현이 4․19 전야제 행사에 백기완 선생님의 강의를 부탁하러 찾아간 적이 있어요. 아마 안양노와 같이 갔을 것이에요. 두 사람이 수유리에서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나는 심우성 선생님을 모시러 이문동에 있는 사무실에 갔어요. 그 무렵 대학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판을 치는 등 서양 문화의 영향이 어마어마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은 상황에 맞서 전통 공연을 계획한 것이에요. 그 당시 심우성 선생님은 양주별산대를 재조직하고, 전국 남사당패를 모으는 등 전통 공연의 회복에 힘쓰고 있었어요. 내가 4·19초혼제 전야제 때 남사당패 공연을 부탁드리자 심우성 선생님은 남사당패를 모아는 놨는데 공연은 해보지 못했다며 정말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1969년 4월 18일 저녁에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처음 공연을 한 것이에요. 남사당패들은 외줄 타기 등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어요. 그때 양주별산대에 속한 어떤 할아버지가 어디 가서 대접을 잘 받으면 답례로 그 집 잘되라고 빌어주는 비나리가 있는데, 오늘 이렇게 훌륭한 자리에 초대받아 너무 좋아 비나리를 해주시겠다면서 징을 치며 나오셨어요. 아주 인상적이었고, 나는 그때 비나리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나는 풍자극과 횃불 데모를 주도하면서 선언문을 쓴 서중석, 최재현과 경찰에 수배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충북 단양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 그해 7월 3선개헌 반대를 주동했다고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1969년 백기완 선생님은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족학교> 운동을 전개했어요. 그 무렵 김도현, 최혜성 선배 등이 민족학교에 많이 드나들었어요. 1971년 3월에 나는 군대에 입대해서 그 이후 백 선생님 동향은 전해 듣기만 했어요.
1973년 12월 26일 백기완 선생님은 민족학교 주최로 ‘항일문학의 밤’을 개최했대요. 명동에 있는 대성빌딩에서 가졌어요. 그때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10여 명의 시인이 시 낭송을 했고, 백기완 선생님의 강연도 있었어요. 그날 행사장에서 장준하 선생님께서는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을 당시 『동아일보』의 이부영 기자와 『조선일보』의 신홍범 기자가 그것을 기사로 썼어요. 그 뒤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 30인이 조직되는데 백기완, 장준하, 함석현, 계훈제, 법정, 젊은 미술평론가 김윤수 등이 참여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께서 민족학교 운동을 할 무렵의 활동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유홍준 : 내가 선배들에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1964년 6․3항쟁이 일어났는데 백기완 선생님은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선생님들과 반대 투쟁에 나섰죠. 김도현, 최혜성, 김지하 등도 함께했지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 격렬해지자 6월 3일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했어요. 그때 김도현은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제적당해요.
그 뒤 1967년 7월 8일 동백림사건이 일어나요. 독일과 프랑스에 건너간 유학생과 교민들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적화 활동을 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것이에요. 이응노 화가, 윤이상 음악가 등이 혐의자였는데, 모두 조작된 것이지요.
또한 중앙정보부는 동백림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간첩 단체로 발표해요. 황성모 교수를 비롯해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박재일 등이 혐의자로 몰렸어요. 한일협정 반대 투쟁과 6․3항쟁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지요. 1965년 9월 1차로 민비연 회원들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고, 1967년 7월 2차로 황성모 지도교수를 포함해 여러 명을 구속해요. 백기완 선생님의 삶을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김도현, 최혜성 선배를 만나보는 것이 좋겠어요.
맹문재 : 네, 잘 알겠습니다. 언제 두 분을 찾아뵙도록 할게요. 백기완 선생님 연보를 보니 1971년 민족학교에서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항일민족시집』을, 1972년에는 『항일민족론』을, 1973년에는 『백범어록』을 출간해요. 항일운동 연구로 단재 신채호 및 백범 김구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것이지요. 한일협정 반대 투쟁과 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 반대 투쟁에도 함께해요. 1972년 유신헌법 공포,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이 높은 시기였는데, 이 무렵 백기완 선생님의 활동을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유홍준 :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면서 백기완 선생님은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구속당해요. 그래서 백기완 선생님의 존재가 신문에 나고 사회화되어요.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은 유신 반대를 막기 위해 긴급조치 4호도 발표하는데 내용인즉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연관해서 “데모하면 사형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어요. 학생운동을 인혁당과 연계시켜 불온세력으로 몰기 위해 강압 수사와 고문으로 용공 조작한 것이 인혁당 사건이죠.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국내외의 비난이 커지자 1975년 2월 15일 인혁당 관계자와 유인태, 이현배 등 몇몇만 남겨두고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이 형집행정지로 석방했어요.
나는 백기완 선생님과 영등포교도소에 같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의 여동생 유지연이 백범사상연구소의 여직원으로 들어갔어요. 내 동생이 고등학교 졸업한 뒤 아버님이 실직하여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 있던 이신범이 우리 어머니께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 물어와서 어머님이 딸(지연이) 취직 좀 시켜주면 좋겠다고 하여 백범사상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에요. 작은 월급이었지만 매달 최혜성이 마련해주었대요.
1975년 2월 15일 백기완 선생님이 석방 조치로 출소했고, 나도 했어요. 그런데 8월 17일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이에요. 어느 날 내 여동생이 백기완 선생님께 “장준하 선생님도 잘못한 것이 있다, 이 뒤숭숭한 시국에 누구와 같이 다녀야지 왜 혼자 다녀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셨는가”라는 말을 했대요. 그러자 백기완 선생님이 깜짝 놀라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아느냐”며 그때부터 선생님은 신변 보호를 위해 내 동생과 함께 퇴근했대요.
맹문재 :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백범사상연구소에서는 ‘앎과 함’ 문고 시리즈를 간행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미국 노동운동 비사』도 번역하지요. 백기완 선생님은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울 정도로 영어 천재로 알려져 있는데, 번역을 직접 하셨는지요? 책의 판권에는 번역자 표기가 없어요.
유홍준 : 그건 이신범이 번역 작업을 한 것이에요. 그는 영어를 아주 잘했어요. 미국에서도 살았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미국 망명 생활을 할 때 이신범을 학생운동의 거물로 인정했어요. 그때 최혜성과 이신범이 여러 가지 일을 추진했는데, 그중 하나가 ‘앎과 함’ 문고판 만든 것이에요.
한마디 덧붙이면,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원래 ‘통일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싶었는데,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백범사상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것이에요. 그것이 1970년대 백범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재야 세력과 학생운동 출신들의 모습이었어요. 아직 조직이랄 것은 없었지만 민주화를 위한 지식인 운동의 기초를 그렇게 다지고 있었죠.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평가할 때는 이 시대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저항정신과 용기를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임진택 :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나중에(1984년) 백범사상연구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통일문제연구소로 확대해 설립하지요. 백기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고향이 같고 정치사상도 같고 기질도 같지만, 이후 우리 사회의 변화 및 운동의 변화, 국제관계에 따른 통일문제의 변화를 수용한 것이지요. 백 선생님은 늘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했어요.
맹문재 : 임진택 선배님께서는 백기완 선생님을 언제 처음 뵈었는지요?
임진택 : 1973년 민속연구자이신 심우성 선생님을 뵈러 명동에 있는 ‘한국민속극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그 무렵 탈춤 부흥 운동을 비롯해 우리의 민속 찾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사무실 문을 열자 심 선생님은 안 계시고 안쪽에 백기완 선생님이 계셨는데, 웬 호랑이가 앉아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웃음) 백 선생께서 왜 왔느냐고 묻기에 민속에 관해 심우성 선생께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고 하니,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당신이 나서서 민속 얘기를 좍 풀어놓는데, 그 시각이 놀라운 거예요. 그때 ‘마당굿’이란 용어를 처음 들었어요. 우리나라의 놀이판은 ‘연극’이 아니라 ‘마당굿’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멍석말이춤’에 관한 얘기도 충격적으로 들었어요. 백 선생께서는 요즘 전승한다는 해서지역 탈춤에 웬 중들이 그리 많이 나오냐고 하시면서 다 양반 아전들에 의해 또 일제의 강압에 의해 변질된 거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양반들이 머슴을 멍석말이해서 때리다가 죽으면 그대로 멍석째 내버렸는데, 그렇게 죽은 시신이 일어나서 꿈틀거리며 추는 춤이 멍석말이춤이고, 그것이 해서지역 탈춤의 민중적 원형이라고 했어요. 아주 놀라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머슴 일꾼들이 저고리를 벗어젖히고 웃통을 드러낸 채 탈을 쓰고 크게 뛰면서 불림사설을 외치는데, “낙양동천 이화정” 같은 음풍농월이 아니라 “소나무 장작은 왜(倭) 장작, 저 물레 파도는 왜(倭)파도” 같은 민중의 염원이 담긴 불림사설들을 외쳤다는 것이지요.
백기완 선생님의 문학과 예술 세계는 범상하지 않아요. 민속학자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본질을 대번에 꿰뚫어 보신 분이에요.
유홍준 : 백기완 선생님과의 개인사를 한 가지 더 소개해보고 싶네요. 내가 1975년에 출소했는데, 6남매가 먹고 살아야겠기에 백기완 선생님께 취직을 부탁했어요. 백 선생님은 금성출판사의 편집국장으로 있는 강민 시인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래서 충무로에 있는 금성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처럼 그 무렵 재야운동은 강민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강민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밥을 많이 사주시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셨어요. 백기완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가면 강민 선생님께서 궤짝으로 보내주신 소고기를 쓸 정도였어요. 시민운동 및 노동운동이 조직화되는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는 이렇게 개인 차원에서 연대가 있었어요. 강민 선생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맹문재 : 강민 선생님의 말씀을 이 자리에서 듣네요. 저를 많이 아껴주신 분이었어요. 선생님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를 제가 편집해 간행해 드린 일이 있어요. 시집 출간 기념회를 인사동 ‘포도나무’ 집에서 신경림, 구중서, 황명걸, 민영, 신봉승, 박정희, 서정란 선생님 등을 모시고 즐겁게 한 일은 엊그제 같네요. 조문호 선생님이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언제 추모 시집을 간행해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최열 선배님께서는 백기완 선생님을 언제 처음 뵈었는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 실려 있는 「러시아 어느 찰니(시인)한테 띄우던 글월」이라는 것을 보니 선배님을 당신을 일으켜주는 비나리라고 소개하고 있네요.
최 열 : 백기완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0년 12월 춘천에서 열린 강연회에서였어요.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하던 정성헌 선배 등과 함께 강연을 기획했어요. 그 행사는 민족학교 주최였는데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해 신상초, 유광언, 김도현 등이 오셨어요. 행사 구호가 “전 국토를 교육장으로 전 생애를 교육 기간”이어서 눈에 확 들어왔어요. 그 행사로 춘천에 비상이 걸렸어요. 강연 장소도 취소되어 조그마한 다방에서 했어요. 나는 연금 상태로 짧은 시간만 뵐 수 있었어요.
1971년 교련 반대 운동을 하다가 강제 징집되어 교육을 받으러 갈 때 백기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뵈었어요.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꿋꿋하게 잘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1972년 10월 유신이 공포되어 국회가 해산되고 국민투표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나 같은 사람이 부대에 있으면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역할을 할까 봐 파견을 내보냈어요. 그래서 춘천화학교육대로 파견되었어요. 그때는 철원에서 춘천을 가려면 서울을 거쳐야 했어요. 그래서 가는 길에 잠깐 백기완 선생님께 들렀어요. 그런데 내가 철모를 쓰고 M1 소총을 메고 완전무장 상태로 백범사상연구소에 들어서니 백기완 선생님은 당신을 잡으려고 왔다고 생각하고 피하시는 것이었어요. (웃음) 그때 함께 계시던 장준하 선생님을 뵈었는데, 당신 아들을 강하게 군대 생활을 하도록 UDT(해군특수전단)에 보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일제 때 학병에 끌려가 수술한 손가락을 보여주셨어요. 일본놈들한테 마취해서 수술하지 않고 맨살로 받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당당하셨어요.
맹문재 : 선배님의 그 이후 활동이 궁금하네요.
최 열 : 내가 1975년 ‘명동 가톨릭학생사건’으로 구속되어요. 유신정권의 3선개헌을 반대한 일이었어요. 재판을 서소문 대법정에서 했는데, 나와 동료들은 재판을 거부했어요. 나는 사건에 직접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로부터 심판을 받지 당신들로부터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세게 항변했어요. 그것으로 10년 구형에 6년 선고를 받았어요. 선고를 판사실에 가서 한 명씩 받았어요. 그 자체가 헌법 위반이지요. 내가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춘천에 계신 어머니께서 면회를 오셨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서울의 목요기도회에 참석하셨어요. 기도회가 끝나면 광화문 사무실에 가서 백기완 선생님을 뵙고 격려를 받고 하셨어요. 1979년 5월 13일, 나는 4년 형을 치르고 석방되었어요. 몇 차례 검사가 와서 각서를 쓰고 나가라고 유혹해 3년이 넘으니 그럴까 하는 마음도 들기도 했는데, 면회를 오신 어머니가 절대로 각서를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맹문재 : 1975년 ‘명동 가톨릭학생사건’을 찾아보니 긴급조치 9호와 관련된 것이네요. 1975년 5월 유신정권은 체제를 비방하거나 반대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한다고 선포했네요. 그 뒤 선배님께서는 ‘명동 YWCA(기독교여자청년회관) 위장 결혼 사건’에 관련되는데,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사건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신군부 세력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하자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위장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한 것이었지요. 백기완 선생님은 이 사건으로 서빙고 보안사로 끌려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당했지요.
최 열 : 내가 감옥에서 나오니 먼저 나온 동료들이 ‘민주청년협의회’를 구성했다고 함께하자고 했어요. 나는 환경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동료들은 민주화를 먼저 이루고 환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민주청년협의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어요. 조직 사업을 하느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어요.
그러던 중 10·26사건이 일어났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술자리를 하다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지요. 그 사건으로 모두들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기대하며 들뜬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유신헌법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겠다고 발표했어요.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입장을 밝히기로 했어요. 원래는 국장으로 치르는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영결식 때 박형규 목사 등이 밝히기로 했는데, 분위기가 마땅하지 않아 유보하고 있었어요.
많은 궁리 끝에 허가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결혼식을 집회로 이용한 것이지요. 그때는 긴급조치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만 했거든요. 위장 결혼식은 민주청년협의회, 기독청년협의회 등이 역할을 분담했어요. 나는 결혼식 장소로 명동 YWCA를 섭외하고 예약을 담당했어요. 한완상 교수님의 사모님이 그곳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어 그분과 예약했어요. 신랑은 연세대 후배인 홍성엽이 맡았고, 신부는 마땅한 사람이 없어 윤정민(거꾸로 하면 ‘민정’의 뜻)이라는 가공인물로 해서 청첩장을 돌렸어요. 함석헌, 윤보선, 백기완, 박종태, 양순직 등 2천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박종태 준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한다고 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행사를 10여 분쯤 했는데 경찰들이 쳐들어왔어요. 결혼식장이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나는 그때 축의금 받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돈이 엄청나게 들어와 가방이 넘쳤고 주머니에 넣어도 남았어요. 가방은 이재정(현 경기도 교육감)에게 맡기고 주머니의 돈은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뿌렸어요. (웃음)
1979년 11월 24일 서빙고 보안사로 잡혀갔어요. 춘천에 사는 촌놈이 지인의 결혼식에 동동주를 얻어먹으려고 올라왔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훈방을 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어요. 무조건 빨가벗긴 채 두들겨 패고 짓밟고 해서 기절 안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81년 3월 3일 전두환 취임식 날 특사로 석방되었어요.
백기완 선생님도 끌려가 손톱을 빼는 등 엄청난 고문을 당했어요. 80킬로나 되는 체구가 40킬로로 줄어들었어요.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한양대 김광일 교수가 주선해 입원을 시킨 것이에요.
맹문재 : ‘명동 YWCA 위장 결혼 사건’을 직접 들으니 실감이 나네요. 출옥하신 뒤 백기완 선생님과 어떻게 함께하셨는지요?
최 열 : 감옥에서 나와 백기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갔지요. 장충동에 있는 조그마한 2층 적산가옥이었어요. 그런데 가서 뵈니 선생님의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 있었어요. 병원에 가서 치료도 안 받고 계시니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도현, 최혜성, 유광언 선배들을 만나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니 자신감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선 공기 좋고 경관 좋은 데 가서 요양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춘천에 있는 추곡 약수터로 모시고 갔어요. 방을 하나 얻어 내가 밥을 해드렸어요. 군대에서 취사반장을 한 적이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춘천에 나가 부식을 구해왔는데, 주로 스팸과 소고기를 사서 왔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울에 가서 수금을 해왔는데, 그때 돈으로 5천만 원 이상 도움을 받았어요. 선생님을 살리려면 뭐든지 해야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몸을 회복하는 데는 뱀이 좋다고 해서 땅꾼들에게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서서히 선생님의 눈동자가 조금씩 돌아오고, 일어나 걸음도 조금씩 걸으시는 것이었어요.
7월 즈음 날이 더워져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 교수가 소개해줘 강원도 양양 오산리 바닷가로 모셨어요. 가끔 손님(함석헌 선생, 박형규 목사님 부부 등)이 오시기도 하고 사모님도 오시기에 방을 두 개 얻었어요. 바다가 50미터 정도 떨어져 경치도 좋았어요. 집주인이 어부여서 새벽 2시나 3시쯤 고기를 잡으러 나가 6시쯤에 돌아와요. 그래서 잡아 온 참가자미를 바로 떠서 대접에 담아 물회로 먹었어요. 한 대접에 천 원이었어요. 주인은 또 나가 돌문어를 잡아 와 점심은 그 돌문어를 먹었어요.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내다 보니 백 선생님의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왔어요.
맹문재 :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니 백기완 선생님께서 추곡 약수터 가는 길에 쓴 시 작품 「전지요양 가는 길목에서」가 선명하게 이해되네요. 양양 휴양지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최 열 : 어느 날 천영초 씨가 몸이 안 좋아 요양차 놀러 왔어요. 요리를 잘해요. 나하고 공해문제연구소를 창립해 함께 운동했던 정문화의 부인이 되지요. 그해는 9월이 되었는데도 동해의 바닷물이 따뜻했어요. 그래서 백기완 선생님하고 나하고 천영초하고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했어요. 그런데 며칠 전 태풍이 와 바다 밑이 굴곡이 심해진 것을 모르고 수영하다가 천영초가 그만 바다 밑으로 빠졌어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나와 백기완 선생님이 겨우 건져 올렸어요. 그날 저녁 천영초는 바닷가에 나가 혼자 있다가 초소에 있는 군인들이 요구하는 암호를 대지 못해 또 한 번 큰일 날 뻔했어요.
언젠가는 이호웅, 김지하 선배님이 선생님의 병문안을 왔어요. 김지하 선배님은 선생님을 위해 <부용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유행가를 100곡 이상 밤새워 부르기도 했어요.
맹문재 : 서명숙 씨가 쓴 『영초 언니』를 찾아보니 천영초 선배님의 삶을 담았네요. 고대신문 학보사 기자였는데, 모두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고문당하고 구속되었네요. 백기완 선생님의 양양 생활 이후는 어떠했는지요?
최 열 : 그 뒤 날이 추워 아는 분(김오일 씨)이 소개해줘 경기도 남양주의 덕소로 옮겼어요. 그때 백기완 선생님께서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실 때가 많았는데, 토씨도 하나 틀리지 않아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를 좀 더 본격적으로 쓰기도 했는데, 다 외우셨어요. 전채린 교수가 백기완 선생님께 시집을 내 요양비에 보태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젊은 날』 시집이 비매품으로 나온 것이에요.
개인사를 좀 더 얘기하면 그 무렵 천영초가 자기 친구를 소개해주었는데, 저의 아내예요. (웃음) 첫 만남 때 녹색 원피스를 입고 나와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당시 독일 녹색당 의장인 페트라 켈리가 녹색 원피스를 자주 입고 연설했는데, 그 모습이 연상된 것이에요. 다시 만나고 싶어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과 환경문제를 다룬 책을 빌려주었어요. 1982년 3월 6일로 결혼 날짜를 잡고 백기완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물론 주례는 백기완 선생님께서 서주셨지요. 백 선생님의 주례사는 “싸우는 부부가 되라, 대립하는 부부가 되라, 논쟁하는 부부가 되라, 그리하여 화합하는 부부가 되라.”여서 회자되었어요. 나의 결혼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는 결혼식을 명동 YWCA에서 한 것이에요. 한완상 사모님이 그때도 총무 일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진짜 결혼이냐고 물으셨어요. (웃음) 결혼식장 주변에 경찰 버스도 10대나 배치되었어요.
맹문재 : 참으로 재미있고 생생한 말씀이네요. 백기완 선생님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첫 시집 『젊은 날』(1982)을 간행한 상황도 이해가 되네요. 이 시집의 서문을 보면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모습이 역력하고, 이때 도움을 준 최열, 김오일, 황시백, 송재덕, 충북대의 전채린 교수 등이 소개되고 있어요.
『젊은 날』은 비매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1984년 대구에 있는 ‘화다출판사’에서 간행해 2천 원에 판매한 것도 있어요. 이 시집에 들어 있는 「가신 님」이라는 작품은 부제가 ‘장 선생님 무덤에서’인 것으로 보아 장준하 선생님을 추모한 것으로 보여요. 이 작품에는 “사랑도 명예도/흙 한 줌 남김없이” “동지는 간 데 없고/푯말을 쓰러졌는데” “일제히 소리치는/끝없는 함성” 등의 구절이 나와요. 「묏비나리」의 구절을 볼 수 있지요. 「묏비나라-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는 1990년에 재발행한 『젊은 날』(민족통일)에 수록되어요. 이 작품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로 쓰이는데, 상황에 대한 말씀을 임진택 선배님께 부탁드려요.
임진택 : 백 선생님은 시를 쓰는 과정이 다른 시인들과는 달라요. 선생님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시상을 되뇌고 되뇌어서, 입으로 흥얼거리고 읊조려서, 그것이 빚어지면 글자로 옮겨요. 그렇기에 선생님은 당신의 긴 시작품도 다 외울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비나리’라는 개념이 딱 들어맞는 거지요.
1980년 나는 TBC(동양방송)의 피디(프로듀서)로 있었어요.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단행한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그해 12월 31일 동양방송이 문을 닫고 KBS(한국방송공사)에 강제로 통폐합돼요. 그리고는 1981년 전두환의 문화비서관 허문도가 ‘국풍81’이라는 대규모 호국 축제를 기획해요. 1년 전의 광주항쟁을 희석시키기 위한 교묘한 사이비 관제 축제였던 거죠. 3월 어느 날 나는 몇 사람과 함께 청와대 비서실에 불려갔는데, 허문도가 나한테 그 국풍 행사를 맡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어요. 내가 앉은자리에서 거절했더니 전화 두 대를 집어 던지며 난폭하게 화를 냈지요. 다른 사람들은 옆방에 남아서 전전긍긍하고, 나 혼자 방송국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니 동양방송에서부터 모시고 있던 윤혁기 이사가 황급하게 계단을 막 뛰어 내려오면서 날 보고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윤혁기 이사는 나중에 SBS(서울방송) 사장을 지내셨지요. 당시 방송국 안에는 정보부, 보안사, 경찰 할 것 없이 내부에 상주하면서 검열 사찰을 공공연히 하고 있던 때라,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반대편으로 그냥 도망쳤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허문도가 나를 삼청교육대로 집어넣으라고 했대요. 한 달 정도 피신하다가 복귀할 기회를 노리는데, 내부로부터 국풍81에 앞장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답이 왔어요.
그 무렵 백기완 선생님을 뵙고 내 거취에 대해 상의드린 적이 있어요. 선생님은 당시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당한 고문과 투옥의 후유증으로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던 때였는데, 상황을 설명드리니 벌떡 일어나시며 “당장 때려치우라우. 진택아, 이제 때가 온 거이야. 넌 이제 굿쟁이로 나서야 돼.” 이러시는 거에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결국 사표를 내고 그때부터 나는 굿쟁이, 광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국풍81 행사는 당시 국영방송이던 KBS가 주관했는데, 5·18 광주민중항쟁 1주기를 앞두고 축제라는 이름으로 광주의 핏자국을 희석시키면서 신군부 군사쿠데타의 명분을 홍보하고, 거기 더해 대학생 저항세력의 주축이었던 탈춤패 전국조직을 들추어내려는 은밀한 계획도 숨어있었습니다. 그 같은 폭압적인 시대, 숨 막히는 상황에서 좌절과 분노와 슬픔이 농축되어 폭발적으로 솟구쳐나온 불후의 명작이 「묏비나리」이고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련해서 제가 알고 있는 ‘잘 안 알려진’ 내용을 전해드릴게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백기완 선생님의 장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황석영 작가가 노랫말로 취사선택해서 성립된 것이고, 작곡은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종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자면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데, 1978년 광주에 ‘들불야학’이 있었습니다. 그 들불야학을 만든 사람은 당시 전남대 여학생이었던 박기순이었고, 거기에 전남대 졸업생 윤상원이 가담해서 선배 강학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197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야학 활동에 전념하던 박기순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 우연히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 씨가 광주 ‘녹두서점’에 갔다가 서점 주인 김상윤 선배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 돼요. 서울 살던 김민기 씨는 당시 독재정권의 집요한 탄압을 견디다 못해 고향인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짓고 살던 때인데, 광주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문화운동’ 후배들을 만나러 갔다가 궂긴 소식을 들은 거지요. 그 박기순의 장례식에서 김민기가 <상록수>라는 노래를 불러줍니다. 김민기는 사실 서울에서 야학을 창설해서 운영한 최초의 인물로, 야학 활동을 하면서 일종의 교가랄까 노동자 야학생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두었는데, 정작 그 자신이 직접 그 노래를 부른 것은 박기순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학 초년생으로 작곡가를 지향하던 김종률이 김민기라는 대선배를 만나 영향을 받게 되고, 김종률은 이후 작곡에 집중해 노랫말 없이 선율을 먼저 만드는 작업들을 예비해 둡니다. 그러던 중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 윤상원이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하자, 1982년 초 동료 지인들이 망월동 묘역에서 윤상원 박기순 두 사람의 영혼 혼례식을 올려주게 되고, 두어 달 후 광주 문화운동패들이 황석영 작가의 집에 모여 광주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넋풀이굿’ 노래 테이프를 제작합니다. 황석영 선배 집 2층에서 창문을 다 닫고 담요를 치고 북과 장구 치면서 몰래 녹음을 넣으며 작품을 꾸려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절정이 될 수 있는 어떤 노래가 필요했다고 해요. 밤새 작업하느라 지쳐서 주춤하고 있을 때 김종률이 자기가 예비해 놓은 어떤 선율을 들려주며 거기에 가사를 붙여달라고 했대요. 그러자 황석영 선배가 깊이 감춰두었던 누군가의 어떤 장시 원고를 꺼내와 그 자리에서 김종률 곡조에 노랫말로 일치시켰다는 겁니다. 추정하건대 그 원고는 백기완 선생님이 1980년 전후 감옥에 갇혀 한양대병원에 이송되었을 때, 전채린 교수에게 몰래 건네진 육필 원고가 때마침 황석영 작가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후의 명작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한 비화라 할 수 있습니다.
맹문재 :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니 국풍81 행사의 배경과 의도가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 비화도 상세히 알게 되었네요.
1978년 백범사상연구소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공동으로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지요. 그 행사 전체를 박태순 소설가가 시디에 담아 놓은 것을 이승철 시인이 발굴해 『푸른사상』(2020년 봄호)에 소개한 적이 있어요. 임진택 선배님께서 이 행사에 김지하의 담시 <소리내력>을 창작판소리로 만들어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임진택 : 민족문학의 밤은 1978년 4월 24일 성공회 지하 강당에서 3시간 가까이 펼쳐졌던 행사입니다. 그 당시로는 거의 유일한 집회 성격의 문화행사였지요. 백범사상연구소는 백기완 선생님이 소장이었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고은 시인이 대표였어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총무이던 박태순 소설가가 행사 전체를 기획했고요. 제1부 행사는 항일 시 낭송이었고, 제2부 행사는 반독재 투쟁 시 낭송이었어요. 1부 행사를 고은 시인이 포효를 하며 열었고, 2부 마지막에 백기완 선생이 다시 폭포 같은 강연으로 행사를 끝냈어요. 그날 나는 백 선생님 강연 바로 앞서 김지하 시인의 담시 「비어」 중 한 편인 <소리내력>을 판소리로 공연했어요. <소리내력>은 나에게는 최초의 창작판소리 작품이지요. 그 행사에 제일 애쓰셨던 분은 박태순 형님이었어요. 그 현장녹음이 카세트테이프로 보급되어 남아 있던 것도 박태순 형님 덕분이었구요. 이승철 시인이 발굴했다는 그 CD가 바로 내가 갖고 있던 카세트테이프 3개를 CD로 복원해서 몇 해 전 작가회의 최원식 이사장과 사무총장에게 전달한 물건입니다. 그날 진행된 민족문학의 밤에서 김지하 시인의 석방 문제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해서, 담시 <소리내력> 강창은 반향이 대단했지요. 그 당시는 나도 판소리가 서툴렀지만, 재야 판소리꾼의 북을 쳐줄 전업 고수가 없어 풍물패 북잽이 중 누군가가 마구잽이로 북을 쳐줬지요.
유홍준 : 그 당시 김지하 시인의 영향이 아주 컸어요. 나를 비롯해 이애주, 임진택, 홍세화, 채희완, 김민기 등은 김지하 시인의 후배이면서 백기완 선생님의 제자인 셈이지요. 그만큼 우리는 두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은 1979년 4월 19일 산문집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시인사)를 간행해요. 선생님이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딸에게 들려주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이 산문집은 나오기도 전에 판금되어 대학가와 노동운동의 필독도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92년 ‘도서출판 한울’에서 7편을 추가해서 증보판으로 간행되기도 해요. 증보판에서는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꾸어 쓴 점이 주목되지요. “자주 고름을 입에 물고 옥색 치마를 휘날리며 기름진 초원을 달려가는 꿈” 이런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딸(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길 응원하고 있는데, 좀 더 소개를 부탁드려요.
임진택 :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는 백기완 선생님이 글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운동권 지식인들이 널리 알게 된 최초의 계기이지요. 나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 대학생들이 그 책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어요. 유신의 암흑시대를 밝혀주는 촛불을 넘어 횃불을 들고 나타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앞서 백기완 선생님의 시는 ‘비나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는 분석을 했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백기완 선생님 역량은 정말 대단하지요. 황석영 소설가가 『한국일보』에 연재한 대하장편소설 「장길산」의 프롤로그인 ‘장산곶매’ 이야기에 원전 설화가 따로 있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백기완 선생님이 낸 책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를 읽고는 장산곶매 원전 설화의 전승자가 백기완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황석영 선배는 백기완 선생과는 고향이 황해도로 같고 또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질과 역량이 맞먹는지라, 장산곶매 이야기의 소설화나 묏비나리 장시의 노랫말화는 ‘조선의 3대 구라(口羅)’로서 두 분의 숙명적인 관계가 필연적으로 접목된 한국문학예술사의 쾌거라 할 수 있지요.
유홍준 : 백기완 선생님의 구비문학은 정말 엄청난 것이에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를 정도지요. 선생님은 어마어마한 구비문학의 본체를 집대성해요. 내가 미술의 길로 들어서서 장승과 민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 컸어요.
맹문재 : 1987년 백기완 선생님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요. 이애주 춤꾼(서울대 교수)이 엮은 『가자! 민중의 시대로』(민족통일, 1988)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987년 6·29선언 뒤 백기완 선생님이 민중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연설한 원고 등을 엮은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백기완 선생님께 민중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한 시와 서간문이 실려 있기도 해요. 6·29선언 뒤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는데, 백기완 선생님의 출마 또한 국민의 큰 관심거리였지요. 백기완 선생님은 김영삼 후보가 이끄는 보수 야권인 민주당과 김대중 후보가 이끄는 평민당이 민중 세력과 연대하는 ‘민주연립정부수립’을 제시했지요. 그렇지만 무산되자 책임을 지고 선거 이틀 전에 사퇴하지요.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최 열 : 1987년 6월 항쟁으로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 선거가 직접선거제로 바뀌었어요. 군부 독재를 끝내고 정권교체를 이룰 기회를 마련한 것이지요. 그런데 YS(김영삼)와 DJ(김대중)는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않는 것이에요. 서로 네 후보(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노태우)가 나와도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백기완 선생님이 민중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에요. 선생님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어요.
6월 항쟁 때만 해도 백기완 선생님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양 김의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노동자들이 추진한 것이에요. 그 상황이 부담도 되고 위험할 수도 있어 안정된 조직의 역할이 필요한 것 같아 우리가 참여했어요. 선거 비용 문제, 유세 문제, 전략 문제 등이 대두되어 우선 선거 본부를 구성했어요. 선대본부장 박용일 변호사, 명예본부장 이애주 교수, 비서실장 김용태 화가, 비서실 차장 송운학, 경호실장 이윤태, 특별보좌관 임진택, 대변인 김도현, 사무처장 최열, 정책실장 홍성엽, 상황실장 유인혜, 기획국장 황광우, 홍보국장 오영섭, 조직국장 염만숙, 지역국장 문재훈 등이었어요. 선거 운동원으로 등록할 때 보니 가명으로 쓰던 사람들의 실명을 알게 되었어요. (웃음)
12월 6일 1차 선거 유세를 대학로에서 가졌어요. 선거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는데도 최선을 다해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대학로가 꽉 찼고, 시위대가 시청광장까지 행진했어요. 백기완 선생님은 거기에서 당신의 시작품 「백두산 천지」를 낭송했어요. 아주 긴 시를 다 외워 낭송하니까 사람들의 호응이 매우 뜨거웠어요. 12월 12일 대학로에서 다시 유세 행사를 했는데, 그때도 시민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의 텔레비전 유세가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좀 들려주세요.
최 열 : 텔레비전 1차 유세는 12월 3일 10시 30분에서 50분까지 20분간 MBC에서 했어요.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12월 7일 KBS에서 진행한 2차 텔레비전 유세는 더욱 그랬어요. 20분 동안 출연료가 5천5백만 원인데, 녹화 시간이 임박해 겨우 마련했어요. 그래서 촉박하게 20분간 유세했는데, 한 번도 안 틀리고 완벽하게 마쳤어요. 방송사 피디들이 모두 놀랐어요. 다른 후보들은 편집을 여러 번 하느라고 하루 종일 걸린다고 했는데, 백기완 선생님은 단번에 끝낸 것이에요.
12월 4일 MBC에서 이애주 교수가 찬조연설을 했는데, 민정당 쪽에서 시비가 있었어요. 이애주 교수가 입은 치마저고리가 북한 사람들과 비슷한 데다가, 고향이 황해도라서 말투가 북한 아나운서와 유사해 이북 방송을 보는 것 같다며 모략한 거예요. 그래서 백기완 선생님이 2차 텔레비전 유세 때 적극적으로 방어하셨어요.
그렇지만 끝내 양 김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어요. 김영삼 후보는 외교구락부에서 만났는데,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어요. 그때 받은 인상적인 장면이 있어요. 김영삼 후보가 차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가는데 어떤 대학생이 침을 얼굴에 뱉은 것이에요. 보통 사람 같으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를 낼 상황이었는데, 김영삼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얼굴을 닦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대중 후보와도 만났는데 협상이 결렬되었어요. 그래서 김영삼을 지지해야 했는데, 조직 내에 김대중 지지자도 워낙 많아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사퇴했어요. 나는 선거 비용을 마련하느라고 상당한 빚을 지기도 했지요.
1992년 대선 때에도 백기완 선생님은 출마하셨어요. 나는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내 동생 최윤이 대신했어요.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께서 민중 후보로 출마한 1987년의 대선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었네요. 다른 이야기도 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최 열 : 백기완 선생님께서 2015년 고관절이 부러져 수술을 받으셨지요. 퇴원 후 통일문제연구소에 인사차 오셨던 박재갑 서울대 의대 교수님께서 그 당시 평생 앉은뱅이책상에서 글을 쓰시던 선생님을 위해 지금의 연구소에 있는 소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를 마련하라며 직접 봉투를 보내온 적이 있어요. 평소 두 분이 친하게 지낸 계기가 된 것은 박재갑 교수가 국립암센터장으로 있을 때 중앙일보에서 매년 각 분야에서 업적을 세운 인물을 선정해 상을 주는데, 2002년 사회부문 ‘새뚝이’ 상을 수상했어요. 그 상 이름을 백기완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어요. 새뚝이 상을 받은 박재갑 교수께서 그 이름을 지어준 분이 백 선생님이란 사실을 알고 그리 기뻐했다고 해요. 새뚝이란 기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장을 여는 사람을 의미해요. 백기완 선생님은 과격한 분으로 알고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말 정도 많고 친화력이 있는 분이세요.
임진택 : 나는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의 특별보좌관으로 참여했어요. 사실 6월항쟁 때까지는 민중 대통령 후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요. 모두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그해 10월이 되기까지 김대중 선생과 김영삼 총재 두 후보가 서로 양보하지 않아 이대로 가면 선거에 지겠다는 우려가 생겼어요. 양 김 선생이야말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대안 세력으로서 반드시 합쳐야 하고 또 합칠 수 있다고 희망했지만, 실제는 양측의 정치공학적 계산이 복잡했어요.
10월 30일 『한겨레』신문 발기인 대회가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렸는데, 거기서 긴급전단이 돌았어요. “민중의 지도자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 후보로!”라는 유인물이 배포된 것이지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행동 총책은 송운학 씨였고, 급진적 노동운동권으로 알려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학생운동권의 CA그룹(제헌의회파) 등과 관련이 있었지요. 소위 말하는 PD(민중민주주의) 그룹이었습니다.
마침 연단에서 축사를 하고 있던 박형규 목사님은 장내에 전단이 뿌려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즉석에서 “지금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또 다른 후보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공작일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우려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다음 연사가 백기완 선생이셨는데, 연단에 올라간 백 선생이 “방금 존경하는 박 목사님께서 민중 후보의 추대가 누군가의 공작일 수 있다고 우려하셨는데, 맞습니다. 이것은 공작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거에요. 다들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데 그다음 말씀이 “그러나 여러분, 이 공작은 무슨 정보기관 따위의 공작이 아니라 이 질곡의 상황을 타개하라는 우리 민중의 공작입니다.”라고 포효하시는 거였어요. “이대로 가면 대선에서 패배하고 6월항쟁은 거품이 된다, 죽 쑤어 개 준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박형규 목사님이 말씀하신 ‘후보 단일화’와 백기완 선생님이 말씀하신 ‘민중 대통령 후보’는 당시 큰 틀에서 한 방향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수의 노동운동권과 학생운동권이 나서고, 거기에 최열(환경운동가), 이애주(춤꾼), 김용태(화가), 박용일(변호사), 임진택(소리꾼) 김도연(문학평론가) 등 넓은 의미의 문화패들이 앞장섬으로써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민중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이 시작된 것이에요. 백기완 선생님 언표를 따르자면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상황이 실제로 재현된 것이지요. 백 선생님이 늘 말했던 최고의 민중적 전형상 ‘새뚝이’가 바로 선생님 자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스스로 ‘새뚝이’가 된 것이지요. 정말 어려운 조건에서 대학로 선거 유세 때 엄청난 군중이 모였고,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양 김 선생 단일화를 추동했던 그 선거시위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맹문재 : 이애주 춤꾼(서울대 교수)이 백기완 선생님의 선거에 참여한 것도 참으로 주목되는 일이지요.
임진택 : 이애주 교수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승무 예능 보유자이고 당시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였지요. 1987년 6월 27일 이한열 장례식이 벌어진 민주화 대행진 출정식 때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맨발로 ‘썽풀이춤’을 추었어요.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베를 갈라 열어젖혀 구천으로 떠나보내는 살풀이춤이면서, 죽은 시신이 참나무 장단에 맞춰 꿈틀거리며 일어난다는 멍석말이춤을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춤사위를 펼쳐 보였습니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잠언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애주 교수는 백기완 선생님의 「묏비나리」 첫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았던 것으로 압니다. “맨 첫발/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중심이 안 잡히나니/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가 그 대목이에요. 6월항쟁 중 이한열 장례식에서 썽풀이춤을 춘 것이나 그해 12월 백기완 민중대통령 후보의 명예본부장을 맡은 것이 다 백 선생님의 「묏비나리」에서 충격과 영감을 받고 스스로의 결단으로 나선 행동이었다고 봅니다.
유홍준 : 6월항쟁 때 이애주의 춤을 보고 모든 언론들이 극찬했는데, 그런 이애주가 백기완 민중 후보의 선거 본부에 뛰어들자 모두 놀랐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백기완 선생님의 산문집 『통일이냐 반통일이냐』(형성사, 1987)에 실린 「민중문학의 나아갈 길은 이렇다」의 구절이 다시 떠오르네요. “민중의 힘이 가장 교착에 빠졌을 때에는 예술이 혁명을 앞지르는 법이다”. 백기완 선생님의 묘소를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 사이에 모셨는데,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유홍준 : 선생님의 무덤을 만들 때 겸손하면서 넓은 품을 느끼도록 했어요. 질경이의 이기연이 디자인한 것이에요. 모란공원은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크기와 높이의 제한이 많았고, 다른 민주열사의 무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평장 수준으로 봉분을 낮게 했고, 새긴돌에는 둥근 차돌에 ‘백기완 묻엄’이라고만 썼어요. 아름답고 힘 있는 훈민정음체를 집자한 것이에요. ‘무덤’이 아니라 ‘묻엄’이라고 한 것은 한글학자로 독립운동가인 김두봉 선생이 백범 김구 선생의 부인인 최준례 여사의 묘비를 그렇게 쓴 것을 따른 것이에요. 임진택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백기완 선생님은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등의 선생님과는 다르게 예술을 갖고 있어요. 민중의 마음에 남는 차원이 다른 것이에요. 선생님은 항상 젊으셨기 때문에 여러 세대와 함께하셨어요. 1987년 대선까지 함께한 우리는 2대쯤 되지요. 이후 선생님의 삶은 함께했던 또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 필요해요.
맹문재 : 세 분 선배님의 귀한 말씀을 들으니 언제 또 뵙고 좀 더 듣고 싶네요. 끝으로 백기완 선생님을 기리는 활동 계획이 있으면 들려주시길 부탁드려요.
유홍준 : 저는 언제나 그랬듯이 문화유산과 함께 살면서 통일문제연구소에 하는 일에 뜻을 같이하고 마음으로 지원하는 열성 회원으로 지내겠습니다.
임진택 : 백기완 선생님은 살아계실 때 정치적인 위상에서 보면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학벌이나 세력 등 소위 뒷배가 없어 늘 외면당하고 배제당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선생은 그와 같은 불리한 국면을 극복하고 오히려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 노나메기 세상을 열었어요. 다른 재야인사들은 하지 못했고 또 가기 어려운 길을 백기완 선생님이 해내고 길을 낸 것이지요.
백기완 선생님은 기득권자들로부터 덕담을 듣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도리어 기득권자들의 탐욕과 위선을 깨뜨려야 한다고 굳게 믿었지요. 근래에는 일하다 목숨까지 잃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품으면서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인 노나메기 세상을 줄곧 외치셨어요. 이것이 새뚝이 정신이고, 쇠뿔이 정신이고, 곧은목지 정신이지요.
백기완 선생님은 속된 현실정치와는 다른 더 큰 경세의 품위를 가진 분이어서 현실에서는 무시당하고 푸대접받았지만, 길게 보면 민족의 자부심과 민중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주와 해방의 자원이 되고 역사가 되고, 후대 세대들을 위한 양심과 정의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노나메기재단이 설립되어 활동을 제대로 시작한다면 나도 거들어 함께하면서 백기완 선생님을 기리고자 합니다.
맹문재 : 백기완 선생님의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요』(아침, 1991)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장면이 눈에 선하네요. 통일문제 강연을 하고 서울역에 도착한 뒤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일화 등을 담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한 요원이 백 선생님의 귀싸대기를 올려치며 “너 무엇하던 놈이가?”라고 물어요. 그러자 “나도 한때 젊은 날 사랑을 해본 놈 아니요.”라고 대답했어요. 박정희와 맞선 선생님의 배짱과 여유가 정말 감동적이요.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귀한 말씀들을 들려주신 세 분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려요. 사진을 찍어주고, 사실관계도 확인해준 채원희 씨께도 감사해요.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약력
유홍준 :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 영남대 교수. 명지대 교수. 제3대 문화재청장.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저서로 『한국 미술사 강의』(1∼3)『유홍준의 국보순례』『나의 문화유산답사기』(1∼10), 평론집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정직한 관객』 등 있음. 금마문화예술상, 간행물윤리상, 만해문학상 수상. 현재 명지대 석좌교수.
최열
1949년 경북 경산 출생. 강원대 농화학과 졸업. 한국공해문제연구소, 공해추방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을 창립. 저서로 『한국의 공해지도』『살아 숨쉬는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최열 아저씨의 지구촌 환경이야기』 등이 있음. 골드먼 환경상(아시아 대륙 수상자), 시민인권상 등 수상. 현재 환경재단 이사장.
임진택 :
1950년 전북 김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마당극 연출가. 창작 판소리 명창.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세계인 장보고> <안중근> 등. 저서로 『민중연희의 창조』『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이야기와 소리로 만나는 전태일』. 현재 창작판소리연구원 예술감독. 이애주문화재단 상임이사.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있음.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