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음택풍수와 양택(양기)풍수가 그것이다.
음택풍수는 죽은 사람이 거주하는 묘지 풍수를 가리킨다.
양택(양기)풍수는 주택이나 마을과 같이 산 사람이 거주하는 자리를 선택하는 풍수이다. 그러나 음택 풍수는 단지 묘지 풍수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태를 묻는 태실 역시 음택풍수에 속한다.
왕족의 경우 태를 태우지 않고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그곳이나 인근 마을을 태봉, 태실 혹은 태장(胎藏)부락이라 불렀다.
태봉이나 태실이란 지명이 표기된 곳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명당들이다. 풍수지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명당을 찾아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태봉(태실)을 답사해 보는 방법이다. 지도에 표기된 태봉(胎峰) 혹은 태실(胎室)을 각도별로 대충 열거해 보면 남한 땅에만도 20여개가 넘는다:
태실(태봉)이 우리 나라만의 고유 풍수 현상인지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 풍수에서도 나타난 현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조실록(현종 11년 3 월 19일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태를 편안히 모시는 제도는 옛날 예법에는 보이지 않은데 우리 나라에서는 반드시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선택하여 그 위에다가 태를 묻고 태봉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을 영지로 만들어 농사를 짓거나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마치 왕릉의 제도와 같이하였다. 임금부터 왕자와 공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봉이 있으니 우리 나라 풍속의 폐단으로 지식인들이 이것을 병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풍수지리의 핵심 이론이기도 한 동기감응론을 따른 것이다.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無病長壽)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둘째, 기존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셋째, 왕릉이 도읍지 100리 안팎에 모셔진데 반해 태실은 전국의 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었다.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때문에 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
태실이 어느 지방에 조성되면 태실이 소속된 현(縣)은 군(郡)으로 승격되거나 감세나 감역(減役)의 혜택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당연히 백성들은 왕족의 태실을 자기 마을 부근에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일제가 전국의 수많은 태실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마구잡이로 모아 놓은 것도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이씨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켜 주자는 의도에서였다.
일제가 전국의 많은 태실들 강제 철거한 까닭에 현재 태실과 태봉이란 지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안치된 태가 그 자리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실 가운데 하나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동 선석산에 있는 세종대왕의 자(子) 태실이다.
이곳 역시 대단한 명당으로서 원래 임자는 고려 13세기의 인물 이장경(李長庚)公이었다고 한다. 그는 성주이씨의 중시조가 될만큼 훌륭한 분이었는데 그의 아들 다섯의 이름 또한 특이하다. 큰아들이 百年, 둘째가 千年, 셋째가 萬年, 넷째가 億年 그리고 다섯째가 兆年인데 이들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임금이 그에게 특별히 벼슬을 내렸다. 특히 그의 손자 이승경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큰 공적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가 그의 조부인 이장경公을 롱서군공( 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성주이씨를 롱서이씨라고 부르기도 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공과 이곳 태실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제수천(諸洙千) 성주문화원장이 들려주셨다.
'원래 이곳 태실 자리를 어느 도사가 이장경공에게 잡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에 묘를 쓰고 나면 후손들이 잘 될 것이오. 그런대 아무리 후손이 잘되더라도 재실을 짓거나 묘를 호화롭게 단장해서는 안되오!' 과연 이곳에 무덤을 쓰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이곳에 성묘할 때마다 묘역이 초라함을 보고 이곳에 휼륭한 재실을 지었다. 얼마후 세종대왕의 명으로 지관들이 전국의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지관들이 소나기를 피하려 뛰어든 곳이 바로 후손들이 지어 놓은 재실이었다. 재실에서 비를 피하다가 얼핏 눈에 띄는 곳을 보니 훌륭한 명당이 보였다. 지관은 그 자리를 임금에게 보고하자 임금은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고 그 자리를 태실로 만들었다.'
제수천(諸洙千) 성주문화원장님의 말씀이 아니더라고 '명당 잃은 성주이씨 이야기'는 우리 설화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또한 역사적으로 실재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장경公의 묘소 자리에 태실을 쓴 것은 아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장경의 무덤이 있었던 듯하다.
1444년 정월 초하루에 세종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성주에 있는 왕자들의 태실에서 이장경의 무덤까지 거리가 얼마가 되느냐?'고 물었다. 신하가 '1리쯤 떨어져 있다'고 대답하자 세종 임금은 다시 신하에게 '태실 근처에 오래된 무덤이 있을 경우 길한가 흉한가?'라고 물었다. '태실은 높고 깨끗한 곳에 두어야 한다'고 신하가 대답하자 임금은 이장경의 묘를 옮기도록 명한다. 이렇게 하여 이장경公의 무덤이 옮겨지게 된다.
조선조 성군 세종 대왕은 풍수지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세종 대왕은 왕자들의 태실 선정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지관들을 동원하여 자식들의 태를 묻을 명당을 잡게하여 1439년 이곳에 태실을 조성한다. 원래 19기의 태실이 있었던 듯하나 그 가운데 5기는 본체는 없어진 채 기단만 남아있다. 역시 세종의 아들인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력하지 않거나 반대를 한 금성대군을 위시한 여러 대군들의 태를 철거시켜 산 아래로 밀어뜨려버렸기 때문이다(1458년). 그후 다시 철거된 태실이 제자리에 복구되기도 하였으나 본체가 없이 기단만 남은 것이 5기가 된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의 원손, 즉 단종의 태가 이곳 한 구석에 안치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