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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웹서핑 하다가 발견한 것인데요... 처형인의 증인으로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입증 되었네요. 너무 길어서 어떻게 요약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올려봅니다. 흥미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세요`-`
아나스타샤 공주는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서 당시의 로마노프왕조의 황제와 그 한가족이 전부 공산주의자에게 학살을 당할 때에 함께 죽은 러시아 황제의 막내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전에 독일 베르린운하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려는 챠이코프스키부인 이라고 하는 여자를 물에서 건져 구출 하였는데 자살한 동기를 조사를 하니까 "나는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공주다. 혁명 때 죽음 직전에 탈출하여 목숨을 이어오다가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이래서 세상이 벌컥 뒤집어지는 것처럼 들 끓었다.죽은 줄로만 알았던 니코라이황제의 딸이 살아 있다니 단숨에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매일같이 신문,방송에서는 미주알 고주알 캐내려고 법석이고. 서방측에 피신을 한 구 러시아 왕조의 고관들,장군들 중에 과거 왕궁에서 공주를 본적이 있다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부인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였는데 묻는 말에 척척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그런데 그들 중에서는 어떤사람은 진짜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소문은 더욱 커져만 가게 되었다.그것을 판가름 하기위해서 재판도 여러번 했지만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으니 재판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불란서에서는 "살아 있는 시체 아나스타샤공주"라는 책이 출판되고. 따로 "아나스타샤"라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하고 미국의 20세기폭스사는 잉그릿드 버그만. 율 부리너가 주연을 한 영화도 나오고 이들 두 배우는 그 영화(추상)로 나란히 아카데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혁명 당시 그녀는 우리 3인조가 죽였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3인조라는 것은 당시 학살이 자행된 '에가데린브르그'지방 쏘베트의 유력한 멤버였던 야곱 요로브스키와 비요틀 에루마고프 그리고 바가노프입니다.) 그 중의 한사람이었던 에루마고프는 그베르드롭스크(에가데린브르그를 혁명 후 바꾼 이름)형무소의 소장직에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미국인 리쳐드.하리버튼 에게 로마노프왕조 학살의 진상을 털어 에가데린브르그의 비극 에가데린브르그의비극(로마노프왕조의 학살)이 있은 후 이미 40년이나 흘렀으나 여전히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한 장면으로 앞으로도 몇 년 아니면 몇 십년을 두고 세계에 화재로 등장할 화제거리다. 다음해 18년 4월과 5월 두 차래에 걸쳐 동유럽 우랄산맥의 에가데린브르그로 감금 되었다. 에가데린브르그에서의 생활은 그의 생애 중에서 최악의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에 갇혀 감시병의 허가가 없으면 한 발작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식량 또한 질이 나쁘고 량도 부족했다. 한편 반 볼세비끼의 깃발을 내세우고 이러선 골챡크제독이 이끄는 옴스크정부는 황제파에 속한 시베리아군과 해방된 첵코군 포로로서 조직된 백러군으로 니코라이 2세황제와 그의일가를 구출하기 위해서 전군을 동원 에가데린브르그로 진격을 했다. 7월 16일 밤늦게 황제와 그 가족 그리고 몇 명의 수행원은 자다 말고 위병 사령관 앞으로 불려 갔다. "에가데린브르그에 폭동이 일어나 위험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였는데 자동차가 올 때까지 안전한 지하실에서 대기하시오"하고 위병들의 휴게실로 쓰던 지하실로 데려갔다.병으로 보행이 불편한 황태자는 부왕의 팔에 매달려 지하실로 내려갔다. 일행이 다 모였을 때 자동차가 오는 대신 위병 사령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모조리 총살되었다. 하수인은 누구냐? 역사가들도 "시체는 종내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는 수많은 보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규명되지 않는 규명할 수도 없는 사실이 가지가지의 추측과 낭설의 원인이 된 것이다. 로마노프왕가 학살 사건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문서는 백러군이 에가데린브르그를 점령한 후 군의 위촉으로 조사를 담당한 특별판사 니코라이 소코로프가 작성한 "러시아황실 학살에 관한 법정 심문서" (1924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을성을 가지고 면밀하게 많은 사람을 심문하고 황제가 학살된 이바체프가를 비롯해 화장했다는 장소 매장했다는 자리 등을 찾아서 적어도 사건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돌 한개,풀 한포기,한사람의 증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상황판단일뿐이고 백러군 점령 하에서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의 즉 사건과는 물론 공산당과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의 종잡을 수 없는 증언들 뿐이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소코로프판사는 그 희미한 증언들을 꿰어 마추어서 사건의 대체적인 개요를 그래도 믿음성 있게 서술 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진실을 얻기는 훗날로 미루어 진다. 그 결정판은 하수인 자신의 고백에서이다. 그 하수인이야말로 비요틀 에루마고프로서 그에게 "참회청문승" 역할을한 사람이 미국의 모험가 리쳐드 하리버튼이다. "청문승" 하리버튼 하리버튼은 스베르드롭스크로 떠나기에 앞서 모스크바에서 로마노프 왕가학살에 참가한 것으로 보여지는 당시의 군인 10명~12명의 행방을 조사했다. 그결과 소코로프판사가 조사서에서 사형집행자의 한 사람이며 화장까지한자로 고발을한 비요틀 에루마고프가 아직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스베르드롭스크에서 살며 공산당의 간부로서 지방형무소의 소장으로 있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하리버튼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통역과 함께 형무소로 직행을 하였다. 그런데 에루마고프소장은 3주전부터 병으로 결근 중인데 병세가 중태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오늘 내일 한 그 에루마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부인과 통화를 했다. 부인의 말로는 에루마고프는 인후암으로 주치의가 하루 두차래 왕진을 오며 그날은 수혈을 했다고 했다.환자는 3주째 병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으며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도 어렵고 음성도 막혀서 말하기도 어렵고 의사는 절대안정을 요구하여 면회도 안된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에루마고프는 황제 처형의 진상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죽을 것이고 그의 죽음과 함께 니코라이황제 일가의 처형 상황은 영원이 묻혀질 것이며 대수롭지 않은 시시껄렁한 유언비어 이상으로는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리버튼은 암담한 심정으로 형무소의 문을 나섰다. 하수인 에루마고프 그리고 다소는 나의 요청을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사정을 솔직히 말하고 그녀가 가능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줄 것을 간청했다. 그녀는 뜻밖에도 시원스럽게 제의를 받아들여 다음날 아침 11시에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에루마고프부인은 40세 전후의 단정하고 상냥한 부인이었다. 그들의 아파트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몇 가지 가구가 있을 뿐인 거실과 작은방이 두개가 있을 뿐이다.하리버튼이 거실로 안내되었을 때 반쯤 열려 있는 방안에서 에루마고프의 가래가 끓는 듯한 호흡 소리를 들었다. 중환자가 있는 집에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리버튼은 간단한 질문만을 하고 물러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댁의 주인께서는 로마노프왕가 일족을 처형한 집행인 중의 한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 어떻게 그걸 아시죠?" 부인은 대답 대신에 반문을 했다. 하리바튼의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목이쉰 허덕이는 듯한 목소리가 병실의 반쯤 열려진 틈새로 들려왔다. "우리는 세사람 뿐이었다고 그래." " 세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되풀이했다. 하리버튼은 한가지만 더 묻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통역에게 "큰소리로 옆방에까지 들리도록 아나스타샤의일을 물어 봐 주시요." "미국에서는 아나스타샤가 목숨을 건져서 몰래 러시아를 탈출하고 뉴욕으로 데려 왔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말해 주게." 통역은 목소리를 높혀 이말을 러시아어로 말했다.그랬더니 에루마고프부인이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옆방의 문이 침대에서 뻗은 손으로 열리면서 "뭐야! 아나스타사라고!? 이리 들어와 봐 아나스타샤에 대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가르쳐 줄께." 하리버튼은 숨막히는 기분으로 병실로 들어갔다. 가슴이 쿵쿵 뛴다. "나는 그여자의 화장한 재를 오무리 벌판에 삽으로 뿌렸다. 반혁 명파 놈들에게 회수되지 않도록 말이다.만약 자네가 그 여자의 거처를 알고 싶다면 그것이 대답이다. 그걸 뉴-욕으로 알려 다오." 에루마고프는 러시아풍의 딱딱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집이 큰 약간 비만한 53세의 사나이는 숨을 쉴때 마다 거렁거렁 거리고 튼튼해보이는 가슴을 벌렁거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한달 동안이나 면도를 안해서 온통 시커먼 수염이 얼굴을 덮고 머리는 수세미처럼 엉크러진체 귀를 덮고 있었다.입은 열려있는체 피가 흘러 내려서 이부자리를 물들이고 있었으며 눈은 초점이 흐려진체 하리버튼을 바라보고 있다. "앉아. 앉아" 헉헉 대면서 서있는 세사람에게 명한다. "그런데 서서 뚫어지게 보지마!" 하리버튼은 난폭한 목소리와 험악한 눈초리에 무의식적으로 따랐다. "처형에 관한 거라면 나보고 물어라 여편네한테 묻지마.이 여잔 아무것도 모른단 말야." 골이 난 듯한 말투다. 하리버튼은 이곳을 떠나야 하나 아니면 더 있어야 하나 망설였다. 그래서 부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부인은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 한다. 하리버튼은 한가지만 더 묻고 이곳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에루마고프동무. 당신이 어떻게되서 로마노프일가를 사살하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가 한마디 한마디 허덕이면서 말하기 시작한 것은 11시쯤이었고 하리버톤이 작별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온 것은 오후 2시반이었다.그러니까 5분만 예정한 것이 3시간반이나 된 것이다. 그 동안 에루마고프는 기침에 시달리고 숨이 차서 허덕이면서도 그날 밤에 있던 일을 말했다. 밝혀진 진상 모스크바의 지령은 "즉시 처형하라" 였다. 그래서 7월 12일 이 사형 집행의 모든 것을 위병 사령인 요로브스키에게 위임 되었다. 그는 자신과 에가데린브르그의 출생자로 그지방 지리에 밝은 에르마 수형자는 황제,황후,황태자,4인의 황녀,그리고 시의 포드킨, 황후의 시녀 안나, 요리사와 시종 한사람 합계 11명이다.요로브스키는 황제와 황태자를 에루마고프는 황후,포드킨,요리사,시종의 4인을 맡고 바가노프는 4인의 황녀와 황후의 시녀를 맡았다. 오로브스키는 나간연발총,에루마고프와 바가노프는 모젤총을 갖고 탄환도 넉넉히 준비하였다. 요로브스키는 황제의 방문을 노크하였다. 황후와 황태자도 같은 방에 자고 있었다. 요로브스키는 시내에서 전투가 일어 점차로 이쪽으로 확대되고 있으므로 임시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하겠으니 지금 당장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모두가 어두운 아래층을 지나 층계로 지하의 위병소로 내려갔다. 황제가 황태자를 부축하느라 힘겨워하는 것같아서 로마노프가 대신하겠다고 하니까 황제는 거절했다. 위병소에는 의자가 세개 있을뿐 다른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앙 의자에 황태자를 앉히고 황제가 그옆에 앉았다.황후는 오른쪽 피살된 아나스타샤공주 황후는 즉시 그 뜻을 알았다.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전신을 경직시켰다. 다른 사람들도 선언의 의미를 이해했으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황제만이 내용을 깨닳지 못하는것 같았다. "뭐야?.뭐라는거야?."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요로브스키에게 되물었다. 요로브스키는 대답대신 황제의 얼굴을향해서 권총을 발사했다. 총알은 황제의 머리통을 뚫고나가 그는 빙글 돌아서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에루마고프는 황후를 향해 모젤총을 발사했다.총알은 그녀의 입으로 들어갔고 2초후에는 숨이 끊어졌다. 에루마고프는 시의인 보토킨을 쐈다. 그는 두손을 들고 얼굴을 돌리고 있었는데 총알이 목을 꿰뚫어 벌렁 나자빠져서 죽었다. 요로브스키는 황태자를 쏴서 의자에서 굴러 떨아지게 했다.황태자는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체 신음하고 있었다. 쿡은 구석에서 웅쿠리고 있었는데 에루마코프는 그에 가슴과 배에 명중시켰다. 시종은 누가 쏘았는지 이미 죽어있었다. 바가노프는 황녀들을 쏴 죽였다. 그녀들은 바닥에 겹쳐진채 신음하면서 죽어 갔다. 바가노프는 올가와 다치아나에게 총알을 퍼부었다.마리아와 아나스타샤는 시의의 옆에 쓰러져 있었다. 방은 채광이 나쁘고 탄환 연기로 인해 죽은 자를 그 자리에서는 일일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시녀인 안나는 구석에서 두개의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쿠션 속에서 보석 상자가 나왔다.위병 하나가 그녀의 목을 총검으로 찔러 버렸다. 방밖에서 대기 중이던 지구 위원들을 불러들였다.그들은 곤봉과 총검으로 한사람 한사람 확인하면서 완전히 저승으로 보냈다. 황태자는 아직도 마루바닥에서 신음하고있었다 요로브스키가 그의 머리에 권총을 두발 먹여서 숨을 끊어 놓았다. 아나스타샤도 아직 안 죽었었다. 위병의 한사람이 그녀를 굴리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위병장 메도우에프가 라이플의 개머리판으로 그녀를 때려죽였다. 처형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나머지는 유류품의 정리와 시체의 뒤처리뿐이다. 요로프스키는 위병들에게 시체로부터 모자,코트를 벗기게 하고 목걸이,시계,반지 등 모든 귀중품을 한곳으로 모으게 했다. 그런 다음 시체를 모포에 싸서 대기 중인 트럭에 실었다.처형이 집행된 방안은 피가 흥건히 흘러 그 속에 슬리퍼나 쿠션.핸드백 등이 떠 있는 것 같았다. 요로브스키는 뒤처리를 위해서 남고 시체의 처리는 에루마고프와 바가노프가 맡았다. 시체를 실은 트럭이 출발할 때는 시계는 2시가 지나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미리 준비하였던 폐광까지 18킬로의 도로는 길이 나빠서 2시간 이상이나 걸렸다.폐광에 도착하였을 때는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체의 소각 - 후일담 벗겨낸 의류는 솔가지를 잘라서 쌓아놓은 위에 올려지고 거기다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였다.시체는 트럭에 실어 그곳으로부터 2킬로 떨어진 또 다른 폐광으로 운반되었다. 옷가지와 시신을 따로 불태운 것은 왕실을 뒤쫓는 백러군의 눈을 속이기위한 것이었다. 시신을 태우기위해 제 2의 폐광입구에 장작을 높이 쌓아놓고 시신을 그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개솔린 5통과 황산 두통을 붓고 불을 붙였다. 에루마고프등은 손톱 한개 뼈 조각 한개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주의깊게 재로 만들었다. 만약 백러군이 그런 것이라도 발견한다면 마치 불사리와 같이 신성한 유골로 받들어 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태운 찌꺼기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김없이 다시 불에 넣어 재로 만들었다. 두개골을 태우는데는 상당한 개솔린과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모든 것이 새하얀 재가될 때까지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삽으로 가솔린과 황산이 들었던 통에 재를(시체와 장작의 재)담았다.시체를 불태운 자리 마져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재를 담은 통을 트럭에 싣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로마노프왕가의 한사람과 만났다던가 시신의 일부라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재와 바람과 비얘기를 해주라고" 이야기를 마친 에루마고프는 침상에 벌렁 자빠졌다.세계적으로 번져있는 황녀 아나스타샤공주의 탈출에 관한 논쟁은 이 에루마고프의 고백으로 확실히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시치미를 뚝떼고 내가 아나스타샤라고 주장을 하고 수많은 러시아 제정 복고주의자들에게 아나스타샤로 떠 받혀지고 있는 여성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가짜임에 분명하다. 황태자의 가정교사이고 아나스타샤가 네살때부터 학살되기 석달전까지 로마노프왕가의 한사람으로 있었던 비엘 지리알은 문제의 부인과 만나고나서 그녀가 공주가 아니라고 밝히고 이를 증명하기 에루마고프의 고백은 지리알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겠다.'살아있는 아나스타샤공주'를 믿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시나리오는 다음과같은 것이다. 이 막내공주는 그 무서운 학살의밤에 위병으로부터 개머리판으로 맞아죽은것이 아니라 기절을 했을 뿐이고 두명의 위병이 시체를 운반할때 그 사실을알고 그녀를 트럭에 실는 대신 몰래 자기집으로 데려다 놓고 나중에 그중 한사람과 결혼하여 루마아로 탈출 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마르셀 모렛트의 희곡 '아나스타샤'가 나왔고 르네 에스카이슈의 '살아있는시체 아나스타샤공주'가 나오고 미국영화 잉그릿드 버그만주연의 영화가 나왔던 것이다. 추기 : 하수인 에루마고프로부터 자백을 얻어낸 미국인 모험여행가 하리버튼은 1940년 범선으로 태평양횡단을 기획하고 홍콩을 출발한후 태평양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S.O.S를 보내면서 실종되었다.
▣ 아나스타샤 * 페테스부르크의 제국령에서부터 얼음덮힌 시베리아대륙과, 아시아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렸던 러시아제국은 300여년간 로마노프왕실에 의해 다스려 졌다. 그러나 다른 유럽국가와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왕족간 내부분쟁, 정치적인 갈등, 다른나라와의 전쟁 등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로마노프 황실은 19세기 말까지도 절대권력을 유지했고, 화려하고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다. * 그러나 이런 로마노프의 영광도 짜르 니콜라스 2세로 끝을 맺었다.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남편이었던 니콜라스 2세는 정치적으로는 그리 유능한 리더는 아니었기에 많은 정치적인 중유한 문제들을 신하들에게 미루었던 것이다. 권력이 남용되었고, 국민은 왕족의 부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황태자인 알렉세이를 고치기 위해 왕궁으로 초대되었던 사제 라스푸친이었다. 1차대전으로 황제가 비운 궁에서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친은 1916년 암살될 때까지 독단적인 조언과 권력을 휘둘렀고, 러시아는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들었고,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으로 마침내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 2세는 퇴위하였다. 전황제와 황제일가는 이후 찰스코의 궁전에 연금되었고, 이후 1년여 연금생활을 전전하던 황제와 일가는 다음해인 1918년 7월 시베리아의 에카체린부르크에서 처형되었다 -공식적으로는. * 그러나 일가의 실종이후 백계 러시아의 조사관들과 유럽각계에서 보낸 사설 조사관들에 의한 수년여의 현장조사와 검증에도 불구하고, 시체 하나 찾지 못한채, 몇군데의 총흔적과 피흔적, 불타버린 의상이나 보석류를 단서로 발견하는데 그쳤을뿐인 미스테리로 남았다. 20년 공식공표된 황제일가의 처형설 이후에도 일가의 전원, 혹은 몇 명이 살아남아 있었다는 증거나 가설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 로마노프 실종이후 유럽각지에서는 로마노프의 생존자를 사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우선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황제와 황후보다는 일가의 자녀들이 많이 도용되었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아나스타샤가 가장 인기있었다. 아나스타샤를 주장한 여러 사람들 중 '안나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 진 한 여성의 경우가 특히 눈을 끄는데, 1920년 베를린의 한 다리에서 투신하려다 발겨된 20여세의 여성은 이후 몇십년간이나 이어진 아나스타샤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 어제밤 9시, 20세정도의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반틀라 교에서 란트벨 운하로 뛰어들었다. 여성은 경찰에게 구조되어 류초우 스트라세의 엘리자베타 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녀의 소지품에서는 신분을 표시하는 서류나 귀중품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 본인은 신분이나 자살의 동기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다. * 발견된 여인은 6주간 입원하는 동안 자신의 신상에 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달돌프 정신장애자 요양원에 입원한채 공식적인 검사에 응하지 않는 완고한 태도로 2년여를 지냈다. 1922년경 같은 요양원에 있던 환자들에 의해 그녀가 황족 - 아나스타샤라는 소문이 퍼졌고, 이어서 그녀자신도 아나스타샤 황녀임을 인정했다. 이후 각계의 많은 방문객이 생존황녀의 진위여부를 가늠하려 하였고, 1928년이후 니콜라이 황제의 어머니인 마리아 황태후가 살고 있던 코펜하겐의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진 이래 1970년까지 단계적으로 계속되었다. ¶ "폐하의 가족들 중, 앞으로 2년까지 살아남을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 백성의 손에 의하여 남김없이 살해될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이 벌컥 뒤집어지는 것처럼 들 끓었다.죽은 줄로만 알았던 니코라이황제의 딸이 살아 있다니 단숨에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매일같이 신문,방송에서는 미주알 고주알 캐내려고 법석이고. 서방측에 피신을 한 구 러시아 왕조의 고관들,장군들 중에 과거 왕궁에서 공주를 본적이 있다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부인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였는데 묻는 말에 척척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그런데 그들 중에서는 어떤사람은 진짜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소문은 더욱 커져만 가게 되었다.그것을 판가름 하기위해서 재판도 여러번 했지만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으니 재판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불란서에서는 "살아 있는 시체 아나스타샤공주"라는 책이 출판되고. 따로 "아나스타샤"라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하고 미국의 20세기폭스사는 잉그릿드 버그만. 율 부리너가 주연을 한 영화도 나오고 이들 두 배우는 그 영화(추상)로 나란히 아카데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혁명 당시 그녀는 우리 3인조가 죽였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3인조라는 것은 당시 학살이 자행된 '에가데린브르그'지방 쏘베트의 유력한 멤버였던 야곱 요로브스키와 비요틀 에루마고프 그리고 바가노프입니다.)
그 중의 한사람이었던 에루마고프는 그베르드롭스크(에가데린브르그를 혁명 후 바꾼 이름)형무소의 소장직에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미국인 리쳐드.하리버튼 에게 로마노프왕조 학살의 진상을 털어
에가데린브르그의 비극 1918년 7월 16일밤 로마노프왕조 최후의 황제 니코라이 2세와 그의가족 6명을 학살한 볼세비키 3인조의 한사람인 비요틀 사바로빗치 에루마고프는 중병으로 고통중에 있으면서 무서운 학살의 진상
에가데린브르그의비극(로마노프왕조의 학살)이 있은 후 이미 40년이나 흘렀으나 여전히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한 장면으로 앞으로도 몇 년 아니면 몇 십년을 두고 세계에 화재로 등장할 화제거리다. 1917년 3월 혁명군에 의해서 부시킨시의 궁전 안에 감금되었던 니코라이 2세 일가는 그해 8월 서 시베리아의 드보르스크에 옮겨졌다.
7월 16일 밤늦게 황제와 그 가족 그리고 몇 명의 수행원은 자다 말고 위병 사령관 앞으로 불려 갔다. "에가데린브르그에 폭동이 일어나 위험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였는데 자동차가 올 때까지 안전한 지하실에서 대기하시오"하고 위병들의 휴게실로 쓰던 지하실로 데려갔다.병으로 보행이 불편한 황태자는 부왕의 팔에 매달려 지하실로 내려갔다. 일행이 다 모였을 때 자동차가 오는 대신 위병 사령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모조리 총살되었다.
하수인은 누구냐? 로마노프왕가 일족의 학살 사건은 실제로 형을 집행한자는 누구냐? 아무도 사실을 말하는 자가 없었고 조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후일 추측과 낭설이 생기는 원인으로 되었다. 그때 함께 희생된 왕의 수행원 마져 이름이나 숫자도 여러 가지로 전해져서 혹은 2명이다 또는 6명이다라는 등 일정치가 않았다. 모두 9개 또는 11개의 시체가 시에서 18킬로 떨어진 곳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역사가들도 "시체는 종내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는 수많은 보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니코라이 2세의 막내 공주 아나스타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서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밝히는 서적도 몇 권인가 나돌았고. 동시에 그녀는 목숨을 건지지도 못했고 살아 있지도 않다고 하는 책도 몇 가지가 나왔다.
로마노프왕가 학살 사건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문서는 백러군이 에가데린브르그를 점령한 후 군의 위촉으로 조사를 담당한 특별판사 니코라이 소코로프가 작성한 "러시아황실 학살에 관한 법정 심문서" (1924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을성을 가지고 면밀하게 많은 사람을 심문하고 황제가 학살된 이바체프가를 비롯해 화장했다는 장소 매장했다는 자리 등을 찾아서 적어도 사건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돌 한개,풀 한포기,한사람의 증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상황판단일뿐이고 백러군 점령 하에서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의 즉 사건과는 물론 공산당과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의 종잡을 수 없는 증언들 뿐이었다.
"청문승" 하리버튼 1935년 세계의 경이(驚異)순례를 하던 하리버튼은 베를린에서 공로로 모스크바로 도착해서 스베르드롭스크(전 에가데린브르그)로 가 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방문자들은 하리버튼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1920년대부터 외교관,역사학자,기자들,특파원들이다. 이들은 처형이 집행된 이바체프가의 지붕 꼭대기서부터 지하실까지 샅샅이 조사를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하리버튼은 스베르드롭스크로 떠나기에 앞서 모스크바에서 로마노프 왕가학살에 참가한 것으로 보여지는 당시의 군인 10명~12명의 행방을 조사했다. 그결과 소코로프판사가 조사서에서 사형집행자의 한 사람이며 화장까지한자로 고발을한 비요틀 에루마고프가 아직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스베르드롭스크에서 살며 공산당의 간부로서 지방형무소의 소장으로 있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하리버튼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통역과 함께 형무소로 직행을 하였다. 그런데 에루마고프소장은 3주전부터 병으로 결근 중인데 병세가 중태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오늘 내일 한 그 에루마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부인과 통화를 했다.
부인의 말로는 에루마고프는 인후암으로 주치의가 하루 두차래 왕진을 오며 그날은 수혈을 했다고 했다.환자는 3주째 병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으며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도 어렵고 음성도 막혀서 말하기도 어렵고 의사는 절대안정을 요구하여 면회도 안된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에루마고프는 황제 처형의 진상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죽을 것이고 그의 죽음과 함께 니코라이황제 일가의 처형 상황은 영원이 묻혀질 것이며 대수롭지 않은 시시껄렁한 유언비어 이상으로는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리버튼은 암담한 심정으로 형무소의 문을 나섰다.
하수인 에루마고프 이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거리를 정처없이 걸어가던 하리버튼은 퍼뜩 그렇다 에르마의 부인이다. 그녀는 전화에서 당황하면서도 의외로 상냥하였다. 그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에루마고프와의 면회를 못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사 직접 면회를 못한다 해도 그녀는 남편의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에루마고프부인은 40세 전후의 단정하고 상냥한 부인이었다. 그들의 아파트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몇 가지 가구가 있을 뿐인 거실과 작은방이 두개가 있을 뿐이다.하리버튼이 거실로 안내되었을 때 반쯤 열려 있는 방안에서 에루마고프의 가래가 끓는 듯한 호흡 소리를 들었다.
중환자가 있는 집에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리버튼은 간단한 질문만을 하고 물러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댁의 주인께서는 로마노프왕가 일족을 처형한 집행인 중의 한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 모스크바에있는 어느 신문사의 특파원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사람 뿐이었다고 그래."
" 세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되풀이했다. 하리버튼은 한가지만 더 묻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통역에게
"큰소리로 옆방에까지 들리도록 아나스타샤의일을 물어 봐 주시요."
"뭐야! 아나스타사라고!? 이리 들어와 봐 아나스타샤에 대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가르쳐 줄께."
하리버튼은 숨막히는 기분으로 병실로 들어갔다. 가슴이 쿵쿵 뛴다.
"나는 그여자의 화장한 재를 오무리 벌판에 삽으로 뿌렸다. 반혁 명파 놈들에게 회수되지 않도록 말이다.만약 자네가 그 여자의 거처를 알고 싶다면 그것이 대답이다. 그걸 뉴-욕으로 알려 다오."
에루마고프는 러시아풍의 딱딱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집이 큰 약간 비만한 53세의 사나이는 숨을 쉴때 마다 거렁거렁 거리고 튼튼해보이는 가슴을 벌렁거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한달 동안이나 면도를 안해서 온통 시커먼 수염이 얼굴을 덮고 머리는 수세미처럼 엉크러진체 귀를 덮고 있었다.입은 열려있는체 피가 흘러 내려서 이부자리를 물들이고 있었으며 눈은 초점이 흐려진체 하리버튼을 바라보고 있다.
"앉아. 앉아" 헉헉 대면서 서있는 세사람에게 명한다.
하리버튼은 이곳을 떠나야 하나 아니면 더 있어야 하나 망설였다. 그래서 부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부인은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 한다. 하리버튼은 한가지만 더 묻고 이곳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에루마고프동무. 당신이 어떻게되서 로마노프일가를 사살하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가 한마디 한마디 허덕이면서 말하기 시작한 것은 11시쯤이었고 하리버톤이 작별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온 것은 오후 2시반이었다.그러니까 5분만 예정한 것이 3시간반이나 된 것이다. 그 동안 에루마고프는 기침에 시달리고 숨이 차서 허덕이면서도 그날 밤에 있던 일을 말했다.
밝혀진 진상 그가 털어놓은 로마노프왕가 학살의 진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볼세비끼에 반대해서 옴스크시에 수립된 콜챡크제독의 반혁명군은 날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시베리아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격해서 이미 우랄산맥을 넘어 유럽 러시아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혁명정부는 백러군이 너무 가까이 오기 전에 로마노프일가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에가데린브르그의 지방위원 한사람은 중앙위원회에 그 지령을 받기 위해 이미 모스크바를 향해서 출발하고 있었다. 지방 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던 사람은 야곱 스베르드로프 였다. (혁명후 그의 공로를 표상키 위해 에가데린브르그를 스베르드롭스크로 개명하였다)
모스크바의 지령은 "즉시 처형하라" 였다. 그래서 7월 12일 이 사형 집행의 모든 것을 위병 사령인 요로브스키에게 위임 되었다. 그는 자신과 에가데린브르그의 출생자로 그지방 지리에 밝은 에르마
피살된 아나스타샤공주 요로브스키는 로마노프왕가사람들과 대치하는 위치에 서서 엄숙한 어조로 황제에게 말했다. "당신은 백러군이 구원해주기를 기대하지만 그들은 아니오." "우랄 쏘비에트위원회는 당신이 러시아 인민에대해서 범한 죄과로 당신과 그 가족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한 것을 선언하오."
"뭐야?.뭐라는거야?."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요로브스키에게 되물었다.
쿡은 구석에서 웅쿠리고 있었는데 에루마코프는 그에 가슴과 배에 명중시켰다. 시종은 누가 쏘았는지 이미 죽어있었다. 바가노프는 황녀들을 쏴 죽였다. 그녀들은 바닥에 겹쳐진채 신음하면서 죽어 갔다. 바가노프는 올가와 다치아나에게 총알을 퍼부었다.마리아와 아나스타샤는 시의의 옆에 쓰러져 있었다.
방은 채광이 나쁘고 탄환 연기로 인해 죽은 자를 그 자리에서는 일일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시녀인 안나는 구석에서 두개의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쿠션 속에서 보석 상자가 나왔다.위병 하나가 그녀의 목을 총검으로 찔러 버렸다. 방밖에서 대기 중이던 지구 위원들을 불러들였다.그들은 곤봉과 총검으로 한사람 한사람 확인하면서 완전히 저승으로 보냈다. 황태자는 아직도 마루바닥에서 신음하고있었다 요로브스키가 그의 머리에 권총을 두발 먹여서 숨을 끊어 놓았다. 아나스타샤도 아직 안 죽었었다. 위병의 한사람이 그녀를 굴리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위병장 메도우에프가 라이플의 개머리판으로 그녀를 때려죽였다.
처형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나머지는 유류품의 정리와 시체의 뒤처리뿐이다. 요로프스키는 위병들에게 시체로부터 모자,코트를 벗기게 하고 목걸이,시계,반지 등 모든 귀중품을 한곳으로 모으게 했다. 그런 다음 시체를 모포에 싸서 대기 중인 트럭에 실었다.처형이 집행된 방안은 피가 흥건히 흘러 그 속에 슬리퍼나 쿠션.핸드백 등이 떠 있는 것 같았다.
요로브스키는 뒤처리를 위해서 남고 시체의 처리는 에루마고프와 바가노프가 맡았다. 시체를 실은 트럭이 출발할 때는 시계는 2시가 지나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미리 준비하였던 폐광까지 18킬로의 도로는 길이 나빠서 2시간 이상이나 걸렸다.폐광에 도착하였을 때는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체의 소각 - 후일담 날이 밝을 때까지 시체를 태우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루를 연기하기로 하고 폐광 속에 숨기고 바가노프와 위병 1개소대가 남아서 지켰다. 그날밤 10시경 부터 에루마고프 등은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체의 의복을 모조리 벗겼다. 황후의 속옷에는 많은 다이아가 꿰메져 숨겨져 있었다. 황녀들의 시체에서도 넥크레스,금십자가, 등이 모아지고 이것들은 로마노프일가의 숙소에서 나온 보석,귀금속,성상,일기,서한등과 함께 모스크바의 볼세비끼 본부에 보내기로 되어있었다.
벗겨낸 의류는 솔가지를 잘라서 쌓아놓은 위에 올려지고 거기다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였다.시체는 트럭에 실어 그곳으로부터 2킬로 떨어진 또 다른 폐광으로 운반되었다. 옷가지와 시신을 따로 불태운 것은 왕실을 뒤쫓는 백러군의 눈을 속이기위한 것이었다.
시신을 태우기위해 제 2의 폐광입구에 장작을 높이 쌓아놓고 시신을 그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개솔린 5통과 황산 두통을 붓고 불을 붙였다. 에루마고프등은 손톱 한개 뼈 조각 한개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주의깊게 재로 만들었다. 만약 백러군이 그런 것이라도 발견한다면 마치 불사리와 같이 신성한 유골로 받들어 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태운 찌꺼기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김없이 다시 불에 넣어 재로 만들었다.
두개골을 태우는데는 상당한 개솔린과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모든 것이 새하얀 재가될 때까지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삽으로 가솔린과 황산이 들었던 통에 재를(시체와 장작의 재)담았다.시체를 불태운 자리 마져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재를 담은 통을 트럭에 싣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로마노프왕가의 한사람과 만났다던가 시신의 일부라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재와 바람과 비얘기를 해주라고"
황태자의 가정교사이고 아나스타샤가 네살때부터 학살되기 석달전까지 로마노프왕가의 한사람으로 있었던 비엘 지리알은 문제의 부인과 만나고나서 그녀가 공주가 아니라고 밝히고 이를 증명하기
거기에서 마르셀 모렛트의 희곡 '아나스타샤'가 나왔고 르네 에스카이슈의 '살아있는시체 아나스타샤공주'가 나오고 미국영화 잉그릿드 버그만주연의 영화가 나왔던 것이다.
추기 : 하수인 에루마고프로부터 자백을 얻어낸 미국인 모험여행가 하리버튼은 1940년 범선으로 태평양횡단을 기획하고 홍콩을 출발한후 태평양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S.O.S를 보내면서 실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