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의 갈림길
갈원은 삼남대로와 충청수영로의 갈림길이었다. 한양에서 출발한 삼남대로는 갈원에 이르러 한 길은 청룡동 가내마을과 죽백동 재빼기, 배다리방죽, 소사원을 지나 충청도 직산 땅으로 넘어갔고, 다른 한 길은 동삭동 상서재, 하서재, 통복점을 지나 군물포에서 충청도 평택현으로 건너갔다. 갈원이 삼남대로의 중심 역원(驛院)이다보니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복에 이르기까지 오가는 사람도 많았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도 심했으며, 주요 전란이나 사건에도 자주 연루되었다. 갈원에는 옥수정이라는 좋은 우물이 있다. 옥수정의 우물은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는 석간수다. 조선후기 도성의 반란으로 급히 피난 가던 임금이 갈원에 다다랐다. 목이 말랐던 임금은 곁을 지키는 내시에게 물 한 그릇을 떠오도록 하였다. 임금은 내시가 떠온 옥수정의 맑고 시원한 물을 마시고는 물맛에 감탄하여 당상관이 패용하는 옥관자를 내렸다. 지금도 옛 갈원 터를 지키는 옥수정에 얽힌 이야기다. 갈원이 연루되었던 가장 큰 사건은 이인좌의 난(1728년)과 해방 직후에 일어난 농민폭동이다. 양난(兩難)을 제외하고는 조선후기 가장 큰 사건이었던 이인좌의 난에 진위고을의 양반 사족들은 대부분 가담하였다. 당시 갈원의 토호였던 권진사와 김정현, 박영동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갈원의 백성들도 대부분 김정현의 노복이어서 반란 세력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에 가담한 결과는 참혹했다. 권진사, 김정현은 죽임을 당했고, 백성들도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교통의 요지라서 전란과 반란, 지배층의 수탈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갈원은, 근대 이후에는 농한기의 농민들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아지트로 명성(?)을 날렸다. 그랬던 마을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면서 환골탈태하였다. 30, 40년 전에는 인근에 쌍용자동차공장이 들어서고, 몇 년 전에는 동광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주막거리의 면모도 일신되었다. 현재 갈원은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역사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간난(艱難)의 역사도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 평택시 칠원동, 삼남대로 갈원 옥관자정, 칠원1동 새마을운동 공적비와 진위현감 이혜주 선정비 (평택 자치 신문서 가지고 옴)
거리:16km 도보여행난이도:(○●○○○) 소요시간:4시간30분 경로
평택역2번출구↔평택문화장례원↔안성대교↔소사들↔대동법시행기념비↔쌍용자동차정비소 ↔송전마을회관↔평택대학교↔기남방송↔칠원교↔칠원교차로↔옥관자정(동광아파트) 주요버스노선 갈때: 올때:동광 아파트↔평택행 7,7-1,7-2,7-3,7-4 평택 도보 여행 제1구간 지도 입니다. -옥관자정- 길원은 삼남대로 상의 역원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했다. 인조가 옥관자정의 우물물을 마시고 하도 물맛이 좋아 우물에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길원은 새마을운동의 '메카'이기도 하다. 길원은 옛날부터 가난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마을 개량에 대한 주민들의 의지가 대단했다. 지금은 작고한 故김기호씨의 주도로 새마을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이 직접 찾아올 정도로 성공한 새마을운동 모범마을이 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