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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호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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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스크랩 이상은/만당의 시인
운정 추천 0 조회 84 14.12.11 11: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상은
 李商隱(唐) 이상은 812■858
중국 당(唐)나라 말기의 시인.

개요
자는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河內: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친양 현[沁陽縣]) 사람이다. 스스로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


생애
어린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829년(太和 3) 18세 무렵 당시의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영호초(令狐楚:765~837)에게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까지 한유(韓愈:768~824)?유종원(柳宗元:773~819)의 고문을 신봉하고 있던 이상은은 영호초가 당시 변려문(騈儷文)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중에 온정균(溫庭筠:812경~780경)?단성식(段成式)과 함께 변려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영호초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문학이 꽃을 피우고 관리로서 출발하게된 반면 그의 생애에 걸친 불운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무렵 당의 조정은 2개의 당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우(牛)?이(李)의 당쟁'으로, 귀족출신자로 이루어진 이덕유(李德裕) 일파와 진사출신의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일파의 파벌투쟁이었다. 영호는 우승유파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고급관료를 지향하는 한 그 당쟁에 개입되었으며, 이상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상은이 진사과에 합격한 것은 837년(開成 2)으로 26세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러 수도를 왕래했으나 번번히 낙제했는데, 영호초의 아들 영호도(令狐?)의 도움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 고개(高?)의 수하직에 간신히 합격했다. 그러나 곧 그의 은인인 영호초가 죽었다. 이듬해 그는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왕무원(王茂元)의 수하로 들어갔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꼈던 왕무원은 그를 막하로 불러들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윽고 왕무원의 추천으로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이 되었으며, 나아가 홍농위(弘農尉)에 올랐다. 그러나 왕무원이 이덕유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상은은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신당서 新唐書〉에는 "유?이의 당인은 이상은을 비웃고 비난했으며, 궤변이 많고 경박하며 도덕관이 결여된 자로서 두 파로부터 배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번째 비호자가 된 왕무원도 843년(會昌 3)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후 이상은은 더 곤궁해지고, 우?이 두 당 사이를 오갔다. 이덕유파의 정아(鄭亞) 아래서 장서기(掌書記)의 직책을 겨우 얻었다가 곧 좌천되어 소꿉친구인 반대당의 영호도에게 애원하여 은혜를 잊은 자로 매도당하면서도, 태학박사(太學博士)의 직책을 맡았다. 858년(大中 12)에 병으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시풍
이상은은 변려문의 대가이자 당대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두목(杜牧:803~852)과 함께 '만당(晩唐)의 이?두'로 불리며, 온정균과 더불어 '온(溫)?이(李)'라고 병칭되었다. 그의 시가 '서곤'(西崑)으로 불리게 된 것은 북송(北宋)의 양억(楊億:974~1020) 등이 열심히 이상은을 모방하여 '서곤체'라는 시체가 풍미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시체는 100가지 보석으로 만든 방과 1,000가지 실로 짠 그물 같으며(百寶流蘇 千絲鐵網), '옷 아래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퇴폐와 권태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이상은의 시는 난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金)의 원호문(元好問)은 그의 시에 주석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겼으며, 두보(杜甫)?이하(李賀:791~817)?왕건(王建)?이상은은 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 난해함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달제어'(獺齊魚)로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수달이 잡은 고기를 먹기 전에 깔끔하게 정돈해놓는 것처럼 시를 지을 때는 책으로 주위를 두르고 나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고(典故)를 시 속에 넣은 것은 육조시대 이래의 상투적인 수법이지만, 이상은은 그 기술을 극단으로 추구하여 흔히 쓰지 않는 전고도 서슴지 않았으며, 나아가 그 전고에 대해 자신의 상상력을 섞어 넣었다. 이상은 시의 난해함은 그처럼 자신을 감추는 수법 때문이지만, 두 당 사이의 정쟁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간 데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율시(律詩)에서 성취가 크며, 영사(詠史) 특히 연애시에 뛰어났다. 두보를 존경하고 이하의 영향을 받았다.

저작으로는 〈번남문집 樊南文集〉 8권과 〈옥계생시 玉谿生詩〉 3권이 전하며, 청대(淸代) 소납언(少納言)의 〈침초자 枕草子〉에 영향을 준 〈의산잡찬 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주석서로는 청대 주학령(朱鶴齡)의 〈이의산시집〉 3권, 청대 풍호(馮浩)의 〈번남문집상주 樊南文集詳注〉 8권, 〈옥계생시전주 玉谿生詩箋注〉 6권이 대표적이며 연보로는 민국(民國) 장차이톈[張采田]의 〈옥계생연보회전 玉谿生年譜會箋〉 4권이 있다.

 

        月   달
             
 
過水穿樓觸處明   과수천루촉처명   穿 뚫을천, 구멍을 뚫다
물 건너고 집안까지 달빛 마냥 밝고
藏人帶樹遠含淸   장인대수원함청 
사람 나무 감싸고 멀리까지 맑구나
初生欲缺虛추창   초생욕결허추창 
초생달 그믐달을 사람들은 공연스레 서글퍼하지만
未必圓時卽有情   미필원시즉유정
둥근 달 휘영청 밝을 때 어디 정답기만 하던가

   ☞   추= 슬퍼할 추. 창= 슬플 창.


 

 

             花下醉   화하취   꽃밭에서 취하여
                          
 
尋芳不覺醉流霞   심방부각취류하  꽃 찾아 나섰다가 나도 몰래 流霞에 취하여
依樹沈眠日已斜   의수심면일이사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든 사이 해가 저물었네
客散酒醒深夜後   객산주성심야후  손님 다 가고 술 깨고 보니 오밤중
更持紅燭賞殘花   갱지홍촉상잔화  다시 촛불 밝혀 남은 꽃 구경하였네.

 


 

                     無題       무제
                                
 
八歲偸照鏡   팔세투조경   여덟 살 때 거울을 몰래 들여다보고
長眉已能畵   장미이능화   눈썹을 길게 그렸지요

十歲去踏靑   십세거답청   열 살 때 나물 캐러 다니는 게 좋았어요
芙蓉作裙차   부용작군차   연꽃 수 놓은 치마를 입고

 
十二學彈箏   십이학탄쟁   열 두 살 때 거문고를 배웠어요
銀甲不能사   은갑부능사   은갑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요

 
十四藏六親   십사장육친   열 네살 때 곧잘 부모 뒤에 숨었어요
懸知猶未嫁   현지유미가   남자들이 왜 그런지 부끄러워서

 
十五泣春風   십오읍춘풍  열 다섯 살 때 봄이 까닭없이 슬펐어요
背面秋韆下   배면추천하  그래서 그넷줄 잡은 채 얼굴 돌려 울었지요

 


               無題  무제     제목 없음
                   
 
相見時難別亦難   상견시난별역난   어렵게 만났다 헤어지긴 더 어려워
東風無力百花殘   동풍무력백화잔   시들어 지는 꽃을 바람인들 어이하리

 
春蠶到死絲方盡   춘잠도사사방진   봄 누에는 죽기까지 실을 뽑고
蠟炬成恢淚始乾   납거성회누시건   초는 재 되어야 눈물이 마른다네

 
曉鏡但愁雲髮改   효경단수운발개   아침 거울 앞에 변한 머리 한숨 짓고
夜吟應覺月光寒   야음응각월광한   잠 못 이뤄 시 읊는 밤 달빛은 차리

 
蓬山此去無多路   봉산차거무다로   봉래산은 여기서 멀지 않으니
靑鳥殷勤爲探看   청조은근위탐간   파랑새야 살며시 가보고 오렴


 
  서로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이별 또한 쉽지 않고
  동풍도 힘이 없으니 모든 꽃들도 시들어 버렸네
  봄 누에는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실을 다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오
  새벽에 거울을 대하고는 머리칼이 희어짐을 염려하고
  밤에 시를 읊고서 달빛이 차거움을 느낀다오
  님 계신 봉래산이 여기서 그리 먼 길이 아니니
  파랑새야, 나를 위해 살며시 찾아가 주려무나


   *당나라 때 이상은과 궁녀 송씨의 슬픈 사랑 이야기*


 

         早起  조기    일찍 일어나서
                          
 
風露澹淸晨   풍로담청신   찬 이슬 바람 이는 이른 봄 아침 
簾間獨起人   염간독기인   발 사이에 혼자서 일어나 보면 
鶯花啼又笑   앵화제우소   꽃 피고 꾀꼬리도 울어 대는데 
畢竟是誰春   필경시수춘   아무리 생각해도 내 봄은 아니어라

 


□당나라 시인 이상은이 떠오른다

그는 살풍경(殺風景)한 짓거리를 “흐르는 물에 발 씻기, 꽃 위에 빨래 말리기, 고요한 숲 속에서 큰소리 지르기 등”을 들었다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가을볕 남아있고 늦서리 날릴 제, 마른 연잎에서 빗소리를 듣네(秋陽不散霜飛晩 留得枯荷聽雨聲)‘라는 시구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라고, 유청각(留聽閣)이라는 정자 앞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이상은 선생의 작품으로 세밀한 감정 묘사가 특징이다.

 

"만날 때도 어렵고, 헤어 질 때도 어렵다.(相見時難別亦難)
봄바람도 힘이 없으니 꽃들이 시든다(東風無力百花殘)

 

 [일생]

 이상은의 가족은 그렇게 부유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10세때 부친이 별세하면서, 장남인 그는 가정이란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그때문에 그는 어렸을때는 남의 책을 배껴쓰면서 생활비를 벌었다고 한다. 그런 어려운 유년기는 이상은에게 2가지 큰 영향을 주었는데,
첫번째는 어서 입궁하여, 관리가 되려는 야망이 생겼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의 우울하면서도 민감하고 결정적으로는 그만의 독특한 성격인 "청고(淸高)"를 이룩(?)해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문학을 가르쳐준 것은 그의 큰아버지이다. 이상은의 문학적, 사상적인 지도자였던 그는 이상은에게 여러가지 문학을 가르쳤고, 그의 영향으로 이상은은 "옛 문장에 능하고, 우대를 좋아하지 않는다(能爲古文, 不喜偶對)".

 사상적인 선생이 큰아버지였다면, 생활의 선생은 영호초(令弧楚)였다. 그는 이상은이 벼슬에 오를 당시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였고, 그를 격려하고 많은 도움을 준 절친한 친구였다.

 

[사랑]

 이상은을 얘기하다면, 그의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시 자체가 너무나 감성적이고, 제목없음(무제, 無題)이라는 수많은 사랑의 시를 써온 그이기에,그의 사랑은 지금가지 많은 문학연구가의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그런 수많은 연구로 인해 발켜진 점은 이상은은 몹씨도 불쌍한 로맨티스트라는 것이다. 그와 사귄 여자중에 정말 천수를 누리며 일생을 마감한 여자는 "없다." 이상은의 비극 바이러스의 활약... 무지막지하다.

 하나하나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는 중요한 인물만 집고 간다. 더 상세한 자료를 원하면 소설임(蘇雪林)의 "이의산연애사적고(李義山戀愛事跡考 1927)"라는 책을 추천한다.

유지(柳枝, 버드나무 가지)
유지란 이름은 이상은이 836년에 쓴 "유지오서(柳枝五書)"에 처음 나온다. 버들가지라는 뜻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그녀에게 바친 이시(정말 그녀에게 갖다 주었을지는 몰라도..)는 시보다도 긴 프롤로그를 가진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롤로그에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쓰여져 있어, 그녀가 어떤 여자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낙양의 부자집 딸로, 성격이 매우 밝았다고 한다. 우연히 이상은의 시, "연대시(燕臺詩)"를 듣게된 그녀는 이상은을 향한 존경심이 생기게 되어, 그에게 만나자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상은은 무엇 때문인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후에, 이상은은 그녀가 어느 세력가의 첩으로 들어갔다는 소리만 전해듣게 된다. 만약 "유지오서"가 이상은이 고의적으로 조작해 쓴 시가 아니라면 이 버들가지(유지)라는 여자는 이상은의 첫사랑이 된다. 첫사랑을 권세가에게 빼앗기다니.. 이상은이 벼슬에 집착한 것도 이해가 된다. 허나 첫사랑의 비극은 이상은에겐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송화양(宋華陽)
이상은은 청년시절에 옥양산에서 도술(도가사상)을 익힌 적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나타난 것이 여도사(女道士)인 송화양... 그녀는 이상은의 시 "달밤에 송화양자매에게 쓰는 글(월야중기송화양자매月夜重寄宋華陽?妹)" "송화양진인과 청도유선생에게(증송화양진인겸기청도유선생贈華陽宋?人兼寄?都劉先生)"에 나온다. 이 송화양은 당시 이상은과는 연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조금 과장된 가설중엔 이상은이 송화양 자매 2명 모두와 사랑을 했다는 말도 있다.(사실이라면 이상은은 문학에 능할 뿐아니라 양다리에도 매우 능했던 것이다..-_- b) 위에서 추천한 책을 쓴 소설임의 다른 저서인 "옥계시미(번역하면 옥계시의 미스터리정도가 된다.)"에서 소설임은 무자비(?)한 상상력으로 이 송화양 자매를 파헤친다.(99%픽션..-_- b) 어쨌든 도사와의 양다리라... 이상은에겐 그나마 가장 행복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밑의 비극을 봐라..;;)


금슬(錦瑟)
이상은의 비극적 사랑의 첫 하이라이트.    "금슬(錦瑟)"은 이상은을 대표하는 시이기도 하다. 엄청 유명해서 중국인들은 거의 모두가 알고있는 시이며, 최근의 모가요 가사에도 한 구절 표절되었다는..(퍼퍽) 그렇다면, 이 무지막지한 여자는 누구인가?! 금슬, 그녀는 "금슬(錦瑟)"뿐아니라 다른이의 시에도 한번 등장했다(劉?雲의 中山詩話)! 추측이건만 금슬은 이상은의 은인인 영호초(令狐楚)의 시녀(侍兒)로, 이상은이 영호초에게 신세 질때 그녀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계급제도의 영향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변심일까? 그녀와 이상은은 끝내 서로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채 헤어지게 돠었다. 그녀에 대한 집착과 사랑은 이상은의 금슬이란 시에 확연히 보여진다.
"이러한 마음들 세월 기다려 추억 되지만, 다만 당시의 그 아픔 얼마나 망연하던지.(此情可待成追憶 차정가대성추억 只是當時已?然 지시당시이망연 이상은의 금슬 中)


하화(荷花 연꽃)
이상은의 비극적 사랑의 두번째 하이라이트. 그녀는 민간의 전설중에만 등장하지만, 그녀를 빼놓기엔 이상은의 감성이 울기에, 그녀에 대해 살짝 짚고 넘어간다. 이름부터 연꽃이라는 아름다운 그녀(물론 진짜 예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이상은이 왕씨와 결혼하기전에 사랑했었던 연인이라고 한다. 둘의 사랑은 매우 극심했지만... 이상은이 과거를 보러가기 1개월 전에, 그녀는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녀가 숨을 거둘때까지 그녀와 함께한 이상은은 그 이후 "연꽃"을 옛적의 아름다움, 과거로의 그리움의 상징으로 시에 출현시킨다. 그녀가 이상은에게 남긴것은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충격뿐이었을까...? 어쨌든 이상은, 불쌍하다.


왕씨(王氏)
왕씨는 이상은의 부인으로, 위의 다른 여성과 달리 공식적인(?) 증거가 있는 이상은의 연인이다. 하지만 "제소지녀기기문(祭小姪女寄寄文)"의 내용으로 보면 그녀는 이상은으로써는 재혼상대인 듯한데... 어쩌면 위의 어떤 여자와 이미 결혼을 했었던 것일까? 좀 더 로맨틱하게 만들면 죽은 연꽃(하화)을 자신의 첫 부인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이 부분은 정말 역사학적으로 문학적으로 공백이기에 아무도 진실을 알수가 없다.(진실은 저 너머에..) 뭐 어쨌든 그녀와 이상은은 서로를 몹씨 아꼈었다. 그러나 이상은의 비극 바이러스(?)는 왕씨마저 죽이기에 이른다! 이상은의 충격은 당연히 컸다. 그의 시인 "방중곡(房中曲)"이나 다른 애도시를 보자면, 그의 사랑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애도시중 가장 유명한 것이 "悼傷後赴東蜀?至散關遇雪"  검을 차고 군을 따라 이리도 멀리 가는구나 , 옷을 부칠 집도 없는데 ,  관문에선 삼척의 눈이 흩날리네 , 꿈 속에서라도 가버린 그녀에 돌아가네.
 

[문학적 영향]

 이상은은 당나라 후기의 가장 걸출한 시인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문학가의 견해다.

 당나라 최후, 최고의 시인인 그는 이전의 시인들의 장점을 참 골고루도 받았다.

 전체적인 시의 풍격은 전대의 시인 이하(李賀 790~816)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구법(句法), 장법(章法)등의 시의 구조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별처럼 많은 당나라 시인들중, 이상은보다 뒤어난 시인을 고르라면 그나마 시성(詩聖)인 두보, 시선(詩仙)인 이백(李白), 시마(詩魔) 왕유(王維) 뿐일 것이다.

 또 그의 시의 독특함은 당나라 뿐아니라, 중국역사상의 어떤 시인과 비교해도 전혀 눌리지 않을것이다. 그의 지독히 선명하고 눈에 띄는 시풍은 후세의 시인들이 어떻게 모방하려해도 모방할 수 없던 것

이어서, 그 이후의 이상은의 시풍을 모방한 수많은 시인들중 "이상은 풍격의 시인"으로 인정받은 이의 숫자는 "0"이다.

 이상은의 시가 "옥계시玉谿詩"로 불리는 것도, 단지 그의 호 때문이 아닌, 그의 시가 가진 세상에서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함 때문이 아닐까?
 

 이상은은 일생동안 594수의 시를 썼다는 것이 공식적인 연구기록이고, 열댓개의 시가 더 있다는 말이 있으니, 약 600수의 시를 쓴 셈이다.

 

 

 강물에 달 그림자가 비치는 걸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극을 많이 본 탓인지 난 갑자기 옛 선비나 명기를 흉내내서 달을 보며 한시漢詩를 읊어보고 싶어졌다. 근처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좀 떨어져 있어서 소리 내 외어도 거기까지 들리진 않을 것 같았다. 읊을 시는 뻔했다. 내가 외울 수 있는 한시는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온 것 중에서도 제일 짧은 몇 개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 달밤에 맞는 건 딱 한 개였다. 그건 당나라 말기 시인인 이상은李商隱 (812~858) 이 상아에 대해 노래한 시였다.

 

   雲母屛風燭影深  운모병풍촉영심
   운모 병풍에 촛불 그림자 짙어지고
   長河漸落曉星沈   장하점락효성침
   은하수 점점 기울어 새벽별 잠긴다
   嫦娥應悔偸靈藥   항아응회투령약
   상아는 영약 훔친 일을 후회하겠지
   碧海靑天夜夜心   벽해청천야야심
   푸른 바다 하늘에서 밤마다 지새는 마음

 


금호애사(金瓠哀辭)
           조식
 

金瓠, 余之首女. 雖未能言, 固已援色知心矣. 生十九旬而夭折, 乃作此辭. 辭曰:
금호(曹金瓠)는 나의 큰 딸이었다.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얼굴을 살피기도 하고 마음을 아는 것 같았는데,
태어나 190일만에 요절해버렸으니 이 글을 쓴다.

 
在?褓而撫育, 尙孩笑而未言.
포대기로 들쳐업고 어루만지고 얼르면,
비록 말을 배우지는 못했어도 아이가 늘 웃었는데


不終年而夭絶, 何見罰於皇天.
한 해도 다하지못하고 요절했으니
내가 하늘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로구나.


信吾罪之所招, 悲弱子之無愆.
내 죄야말로 죽어 마땅한 것을 알지만,
갓난아이는 허물조차 없으니 슬프지 않으랴.


去父母之懷抱, 滅微骸於糞土.
부모 품안에서 떨어져
그 작은 몸둥이가 썩은 흙 속으로 사라지네.


天長地久, 人生幾時?
천지는 장구하게 지속된다는데,
인생살이 몇 해나 되던가?


先後無覺, 從爾有期.
생사의 경계를 넘어섰으니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너를 따라갈 날이 있으리라.

 

 

행녀애사(行女哀辭)
                    조식

行女生于季秋, 而終于首夏. 三年之中, 二子頻喪.
둘째 딸(行女)이 가을에 태어나 초여름에 죽었다.
삼년사이에 아이 둘을 잃었다.


伊上帝之降命, 何修短之難裁?
이것이 하늘(上帝)의 뜻일진데,
수명의 길고 짧음(修短)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或華髮以終年, 或懷妊而逢災.
흰머리(華髮)가 새도록 장수하는가 하면,
어머니의 태중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재난을 만나기도 하네.


感前哀之未?, 復新殃之重來!
슬픔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또다른 재앙으로 닥쳐오기도 하지.


方朝華而晩敷, 比晨露而先晞.
무궁화는 이른 아침에 피어 저녁이면 시들고,
새벽이슬은 볕이 나면 순식간에 말라버리네.


感逝者之不追, ?情忽而失度,
죽은 아이를 따라가지 못하니
마음 아득하고 정신마저 놓아버릴 것 같네.


天蓋高而無階, 懷此恨其誰訴?
하늘은 높고 오를 길조차 없으니
이 가슴에 품은 한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당나라때의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무제(無題)>와 조식(曹植)의 <금호애사(金瓠哀辭)>와 <행녀애사(行女哀辭)>입니다.

『신조협려(神雕俠侶)』에서 양과가 치명상을 입은 소용녀와 팔 잘린 자신의 처지를 촛불에 비유하면서 도화도의 황약사(黃藥師) 서재에 걸린 대련의 싯구를 떠올리는 대목에서 이상은의 <무제(無題)>의 구절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에서 황약사가 도화도에서 곽정을 따라가버린 황용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황용인듯한 소녀의 시신을 보았다는 영지상인(靈智上人)의 거짓말에 비통한 심정으로 읊는 부분이 조식의 두 작품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상은

이상은(李商隱 812~858)은 만당(晩唐)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작품성향이 두보에 가까워 두목(杜牧)과 더불어 '小李杜'로 불리기도 했다는 애정시가의 대가죠. 그는 독특하게 <무제(無題)>라는 제목의 20수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양과가 인용하고 있는 칠언율시 <무제(無題 - 相見時難別亦難)>는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정시가의 정수라 할만한 그의 대표작입니다. <무제>는 그 대상이 누구냐에 대해서 정치적인 해석을 비롯한 다양한 설이 있는 것 같은데, 이상은이 40세가 되는 851년 서주(徐州)의 막부에 있을 때 부인 왕씨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지은 것이라는 설에 무게를 두고 싶군요.『신조협려』에서 황약사를 언급하며 이 싯구를 인용하는 작가의 의도에도 부합할 것 같기도 하고...^^ 파랑새(靑鳥)는 서왕모(西王母)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로 등장하는 전승이 많은데, 삼족오(三足烏)라는 주석(三足烏, 靑鳥也, 主爲西王母取食)도 있더군요.

 

 

 야우기북 (夜雨寄北 : 밤비는 내리는데)


君問歸期未有期   군문귀기미유기
그대는 언제 돌아오는지 묻지만, 아직 기약이 없다오.
巴山夜雨漲秋池    파산야우창추지
이곳 (쓰촨성 남강현(南江縣)) 파산(巴山)에는 내리는 밤비에 가을 연못이 넘실거린다네.
何當共剪西?燭    하당공전서창촉   窓=?
어느 때라야 함께 서쪽 창가(西窓 침실)에 촛불을 돋우며
?話巴山夜雨時    각화파산야우시  ?=却
파산에 밤비 내리던 시절을 이야기하게 될까.

 

 

이상은이 쓰촨성에서 장안에 있던 부인 왕씨에게 보냈다는 칠언절구 <야우기북(夜雨寄北)>입니다. 원래 몰락한 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상은은 828년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해서 837년에야 진사에 급제하는데, 그 과정에 당시 사륙변려문(四六?儷文)의 대가였던 영호초(令狐楚)과 밀접한 교유를 가지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진사가 되고나서는 절도사 왕무원(王茂元)의 막하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하게되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왕무원의 눈에 들어 838년 그의 딸과 혼인을 하게됩니다. 당시의 당나라는 환관들의 전횡이 극에 달해서 835년에는 감로지변(甘露之變)이 발발하기도 했고, 진사과를 통과한 신흥문벌과 특권층을 형성하고 있던 과거관료의 대립이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일파간의 우이당쟁(牛李黨爭)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는 분위기였답니다. 그런데 영호초(令狐楚)일가는 우당(牛黨)에 속해있었고 이상은의 장인 왕무원은 이당(李黨)과 가까웠다는군요. 그러다보니 서로 적대적이던 양대파벌들로부터 배척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이상은은 당쟁의 희생자로 전락하여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평생을 유랑하듯 외지로만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떨어져 지내며 부인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지 많은 작품을 보내기도 한 모양인데, 부인 왕씨의 이른 죽음으로 그 애뜻한 그리움이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더불어 한층 한과 처절한 서러움으로 변모하는 애절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위의 <야우기북>은 이상은이 장쑤성 서주(徐州)에서 쓰촨성 재주(梓州)로 옮겨와있던 851년 7월에서 9월사이에 지은 작품으로 인편으로 보낸 詩가 장안에 도착했을
 부인 왕씨는 이미 숨진 뒤였다는군요.

 

철학을 담은 신주(神酒), 막걸리
고구려주(高句麗酒)와 신라주( 新羅酒) 는 고대 중국의 맛좋은 명주(名酒)로 소문나 있었다.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李想慇)이 "한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 바람에 수이 사라질까 두렵구나"하고 읊은 걸 알 만하다.
또 일본에 빚는 법을 처음 일러준 것이 백제 사람인번( 仁繁)이라고 했다.
이 유명했던 삼국 시대의 술들이 지금의 약주나 막걸리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문헌상 누룩을 담는 양조 주라는 것만은 추정할 수가 있다.
막걸리가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 때 부터다. 이규보의 시대에 '나그네 창자를 박주로 푼다." 는 대목이 있고, 이달충 ( 李達衷) 의 시에 "뚝배기 질그릇에 허연 막걸리"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술로서 막걸리 이미지는 불변임을 알 수가 있다.

 

고려때 시인 윤소종( 尹紹宗)의 시에서는 막걸리에 뼈아픈 가난이 감전( 感電)되듯 엄습해 온다.
"슬프도다 유월에 심은 조 익으려면 멀었는데/
/아이들은 병들어 나무 뿌리 씹고 있다/
/천장을 보고 누워 한숨만 쉬고 있는데/
/아낙은 머리털 잘라 지게미와 바꿔온다/

그나마 쉬어서 먹을 수가 없고녀."술 지게미는 막걸리를 거르고 난 찌꺼기인 것이다.


'술'의 어원은 범어( 梵語)의 쌀로 빚은 술을 뜻하는 aura에서 비릇됐다고 본다.
따라서 어원상 곡주( 穀酒)를 뜻하며,막걸리의 조상인 셈이다.
곡주가 익어 청주와 술 지게미를 나누기 이전에 막 걸러서 술이라 해서 막걸리다.
문헌에는 탁주(濁酒), 백주(白酒), 박주(薄酒),나오고 모주(母酒)라고도 했다.
비운의 인복대비에 연류되어 제주도에 유배당한 대비의 어머니 노씨(蘆氏) 부인이 술 지게미를 재탕한 막걸리를 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웠던 것이 연유가 되어 왕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 해서 모주(母酒)라 불렀다고 한다.

 

-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

 

세상엔 번영과 쇠락이 반복한다는데,
나만 홀로 산골짝에서 사년을 보냈노라.
 

비록 아름다운 꽃과 달이 있다고는 하지만,
같이 즐길 술과 친구가 없구나..
 

청포는 해마다 그대로이고,
흰 머리칼은 나날이 새롭구나..
 

바람과 파도 타고 천만리 나아가고자 하나,
어느 길이 등용문에 이르는지 정녕 알지 못하겠네..

 

 

回鄕偶書 其二  賀知章   고향에 돌아오니
회향우서 제2수 하지장

少小離家老大回   소소이가노대회
젊어서 고향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鄕音無改?毛衰   향음무개빈모쇠
사투리는 여전한데  귀밑머리 희어졌네
兒童相見不相識   아동상견불상식
아이들은 마주봐도 알아보지 못하고
笑問客從何處來   소문객종하처래
웃으며 묻네 "손님,어디서 오셨어요?"

 


瑤池(요지)


瑤池阿母綺窓開    요지아모기창개      
요지의 서왕모 아름다운(비단) 창을 열었는데

黃竹歌聲動池      애황죽가성동지애
부르는 황죽가 땅을 울리듯 애닮구나.

八駿自行三萬里     팔준자행삼만리
여덟 필의 준마 하루에 삼만리를 간다는데

穆王何事不重來     목왕하사부중래
목왕은 무슨 일로 다시 아니 오시는가.

 


요지는 주나라에서 3만 리라고 한다. 다시 방문해 달라는 서왕모의 권유에 목왕은 3년 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준마 8마리를 앞세운 목왕의 마차는 하루에 3만 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요지까지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목왕은 두 번 다시 그 곳에 가지 못했다. 여기에서 황죽가(黃竹歌)는 목왕이 서왕모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큰 눈을 만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를 애도하여 읊은 노래라고 한다.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곤륜산은 중국의 신화나 전설 가운데 가장 이름난 선산(仙山)이다. 중국 서쪽에 있으며 서왕모가 살던 낙토(樂土)라고 한다. 산의 바깥쪽은 밤낮으로 계속 불타고 있는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그 화산에는 불에 타지 않는 나무가 자라고 있고 강한 바람이 불어도 화세(火勢)는 더 강해지지 않고 또 동이로 물을 붓는 정도의 비가 쏟아져도 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물체라도 그 큰 불에 접근하게 되면 금방 재로 변해 버린다. 또 곤륜산 정상에 있는 궁궐 문 앞에는 개명수(開明獸)라고 하는 신수(神獸)가 지키고 있다. 신체는 호랑이와 같이 크고 머리가 아홉 개나 되며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물과 불에 의한 장애물을 돌파하고 엄중한 감시망을 뚫고 곤륜산의 궁전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직 서왕모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또 서왕모의 서신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청조(靑鳥)만이 약수 삼천리를 넘나들었다.

서왕모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주나라의 목왕도 있다. 목왕은 기원전 9세기에 실재했던 왕으로 천하를 주유했는데 특히 서역까지 나아갔다고 한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는 “서왕모의 손님이 되어 요지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만당의 시인 ‘이상은’은 이 전후의 사정을 <요지(瑤池)>라는 시에서 읊고 있다.

 

            무제
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상견시난별역난  동풍무력백화잔
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恢淚始乾
춘잠도사사방진  납거성회루시건
曉鏡但愁雲빈改  夜吟應覺月光寒
효경단수운빈개  야음응각월광한
蓬山此去無多路  靑鳥殷勤爲探看
봉산차거무다로  청조은근위탐간
                   

 


중국 당나라 말기 걸출한 시인 의산(義山) 이상은의 애정시 한편을 탑재하니 감상(鑑賞)하기 바란다.

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상견시난별역난  동풍무력백화잔)
春蠶到死絲方盡  蠟燭成灰淚始乾 (춘잠도사사방진  납촉성회루시건)
曉鏡但愁雲?改  夜吟應覺月光寒 (효경단수운빈개  야음응각월광한)
逢山此去無多路  靑鳥殷勤爲探着 (봉산차거무다로  청조은근위탐착)

 
서로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이별 또한 ?지 않고
동풍도 힘이 없으니 모든 꽃들도 시들어 버렸네
봄누에는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실을 토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네
새벽에 거울을 보니 머리칼 희어짐이 염려돼도
늦은 밤 시를 읊으며 달빛 차가움을 느낀다네
님 계신 봉래산이 여기서 그리 먼길 아니니
파랑새야, 날 위해 살며시 찾아가 주렴.

 

 

일생을 애정이 깊고 변함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 이를 두고 금슬이 좋다고 하는데, 사실 평생을 두고 금슬 좋은 부부는 참으로 드물다.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인생을 무난히 항해하기 위해서, 만나서는 곤란한 커플의 유형에 대해 명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 전에 금슬이란 어휘가 워낙 아름답고 아취가 있으니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금슬(琴瑟)이란 거문고를 말한다. 거문고는 예로부터 선비의 악기이기도 하지만, 부부의 정이 두터운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 유래는 시경(詩經)이다.

“아내가 마음에 맞는 것이 마치 거문고를 켜는 것과 같고(妻子好合 如鼓琴瑟)”란 글귀와 “요조숙녀는 금슬로서 벗한다(窈窕淑女 琴瑟友之)”란 문구가 그것이다. 좋은 아내를 선비의 친한 벗인 거문고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나라 말기의 유미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거문고는 원래 줄이 오십 가닥이었으니, 가닥가닥마다 내 젊고 좋았던 날의 일들을 생각나게 하네”로 시작되는 시가 떠 오른다. 독자분의 흥취를 위해 원문을 옮겨 놓는다.

“금슬무단오십현(錦瑟無端五十絃) 일현일주사화년(一絃一柱思華年)”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거문고는 원래 줄이 오십 가닥이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슬프다 여긴 어느 임금님이 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거문고는 여섯 줄이다.) 시인이 이 시를 지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예닐곱 무렵이었는데, 거문고의 원 줄이 50 줄이라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비겨서, 방안에 둔 거문고를 보니 한 줄 한 줄이 마치 자신의 인생에 얽힌 사연들을 말해주는 것 같다는 표현이다.

 


살풍경(=웃음경) 


'살풍경'이라는 말. 아는 분도 있겠지만. 비가이. 처음 보는 말이었지요.
"살풍경(殺風景)" = 경치를 파괴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은 풍경, 기분을 망쳐 놓은 경우(무드를 깨는 경우)
이 말은 당나라 유미주의(唯美主義) 시인 '이상은'이
'잡찬(雜纂)'(이름도 머찐)에서 분위기를 깨는 6가지의 살풍경을 제시했네요.

"청천탁족(淸泉濯足)" : 맑은 샘물에서 발을 씻는 행위
"화상건군(花上乾裙)" : 아름다운 꽃 위에 빨래를 널어 말리는 경우
"배산기루(背山起樓)" : 산을 등지고 집을 지어 산세를 감상할 수 없게 됨
"분금자학(焚琴煮鶴)" : 거문고를 불쑤시개로 하여 학을 삶아 먹는 것
"대화상차(對花嘗茶)" : 꽃을 감상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차만 마시는 행위
"송하갈도(松下喝道)" : 청아한 소나무 숲에서 쉬고 있는데 불현듯 사또 행차
                     지나가는 소리 등이다.

 


祝大家中秋節快樂!!(여러분!!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시길 빕니다.)


추석을 중국인들은 중추절((中秋節 or 仲秋節)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중추절과 관련된 중국사람들의 이야기 함께 읽어 볼까요.....(이 부분은 同門 한양대학교 이인호 교수가 정리한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중추절(中秋節)

음력 7,8,9월이 일년 중 가을에 해당하고 그 중에서 8월이 중간이며, 또 8월중에서 15일이 그 중간이다.
바로 이 음력 8월 15일이 가을철의 한 가운데다 하여 중추절이라 하는데, 음력으로 15일 보름날은 예나 지금이나 보름달이 뜬다.
따라서 중추절은 달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명절이다.
해가 서산에 지고 온 누리가 컴컴해지면 원시인들은 주위를 분간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달은 그들에게 안도의 빛을 던져주는 위안이었으며 특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경이롭기까지 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물론 보름달은 매달 한번씩 뜨지만 날씨가 선선하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철에 나타나는 보름달이야말로 더욱 밝고 둥글어 보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숭배 대상도 자연스럽게 중추절의 보름달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지혜가 차츰 깨이면서 불을 사용하게 되자 옛사람들의 숭배의식은 점차 희미해져 갔지만,
오곡을 무르익게 해주는 것은 여전히 월신(月神)의 덕이라 믿었으므로 추수가 끝난 후 제사를 올리는 의식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렇듯 불가침의 숭배대상에서 은혜로운 감사대상으로 옮겨간 달님은 세월이 흐르며 점차 감상의 대상으로 변해 갔다.
감상은 상상을 낳고 상상은 또 환상을 부추기며 마침내 신화와 전설을 잉태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항아(嫦娥)라는 선녀의 이야기다.
교교히 흐르는 달빛(月光)은 여성스런 부드러움이었기에 선녀가 되어 달로 날아갔다는 항아의 애절한 이야기는 우주인이 달에 착륙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간에 구전되고 있다.

항아의 남편은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어느 날 하늘에는 열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대지를 태우자 온 누리에 기근에 휩싸였고 모든 생물은 고사 직전에 빠졌다.
이때 항아의 남편이 화살을 당겨 태양 9개를 떨어뜨리자 세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이를 어여삐 여긴 신선은 불로장생약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기고만장한 항아의 남편은 날로 포악해졌고 견딜 수 없었던 항아는 남편의 불로장생약을 훔쳐먹고는 양어깨에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 은하수 저편에 두둥실 떠오른 아름다운 달로 날아가 버렸다.
허나 정작 달에 도착해보니 사람이란 자기 혼자뿐 계수나무 아래 토끼 한 마리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항아는 광한궁(廣寒宮)을 짓고 달에 군림한 월신(月神)이 되었지만 남편을 속인 죄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보기에도 끔찍한 두꺼비[蟾(섬)]로 변해 버렸다.
우리가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 가사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니 선녀가 광한궁에 살고 있다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모두 중국의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이상은(李商隱)의 작품 <항아(嫦娥)>를 읽어 보도록 하자.

雲母屛風燭影深  운모병풍촉영심
운모 병풍 앞 촛불 그림자 깊어만 가고
長河漸落曉星沈  장하점락효성침
은하수 너머 새벽 별 기울어 갈 때 
嫦娥應悔偸靈藥   항아응회투령약
항아는 영약 훔친 일 후회하고 있으리
碧海靑天夜夜心    벽해청천야야심 
푸른 하늘 밤마다 홀로 지새는 마음

한편 바로 이런 전설 때문에 중국인들은 달을 그냥 월(月)이라 하지 않고 월궁(月宮)이니 섬궁(蟾宮)이니 계궁(桂宮)이라 불렀으며
보름달의 모양이 쟁반같다고 하여 섬반(蟾盤)이라 하였고 수레바퀴같다고 하여 계륜(桂輪)이란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토끼와 두꺼비에 착안하여 금토(金兎), 옥토(玉兎) 혹은 섬토(蟾兎)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科擧)가 있던 시절, 가을 시험이 마침 음력 8월에 있었으므로 장원급제를 월중절계(月中折桂)니 섬궁절계(蟾宮折桂)로 표현하였던 것은 바로 과거급제를 하늘로 날아갈 듯 출세한다는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달에 얽힌 이런 이야기는 중추절이 돌아올 때마다 온가족이 마당에 둘러앉아 하늘에 걸린 명월을 바라보며 오손도손 나누던 레퍼터리로 정착되었다.
보름달의 모양은 둥근 원(圓)이다. 어느 곳 하나 구겨진 데가 없이 온전한 모습이며 구심점을 향해 가지런히 모이고 있다.
이런 외형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비약시켜 중국에서는 매년 중추절이 되면 온 가족들이 모두 부모님 곁으로 모인다.
이를 중국어로 '투안위앤'(團圓)이라 하며, 중추절을 '투안위앤지에'(團圓節)라 부르고 있다.
중국 시인들이 고향에 못 돌아가고 객지에 떠도는 신세를 한탄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달(月)도 알고 보면 이런 속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나라 때 시인 이태백과 두보의 작품을 한번 읽어 볼까요?
먼저 이태백의 <靜夜思>

床前明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明月, 低頭思故鄕.(추앙치엔밍위에꽝, 이스디쌍쑤앙, 쥐터우왕밍위에, 디터우쓰꾸시앙)
상전명월광, 의시지상상. 거두망명월, 저두사고향

대략 번역해보면, "침대 머리 밝은 달빛, 땅에 서리가 내린 걸까?
        고개 들어 명월을 바로보곤,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타향으로 떠도는 어느 가을밤, 유달리 밝은 달님... 서리가 내린 걸까.. 불현듯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객지에 홀로 남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보니 더욱 생각나는 고향.. 고개를 들었다 내리는 그 짧은 시간과 동작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
불과 20자로 어려운 한문도 아닌데 너무도 절절하고 자연스럽게 달과 고향의 이미지가 연결되고 있지 않은가? 역시.........

다음으로 두보의 <月夜憶舍弟>(달밤에 아우 생각하며) 중 한 구절--
露從今夜白, 月是故鄕明..

너무나 유명한 구절을 읊조렸지요. 이슬은 오늘밤부터 하얗게 될 터인데... 즉 이슬이 추워져서 서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달은 고향이 밝으련만.. 물리적인 달은 어디서 봐도 그 모양이 그 모양이고 그 명도가 그 명도겠지만 그러나 심리적인 달은 고향에서 볼 때 비로소 푸근한 마음에 둥글게 보이는 것입니다. 역시........

중추절의 주역은 당연히 보름달이므로 일반 민중들은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음식을 장만하여 달님께 차례를 올린다.
이것을 '빠이위에(拜月)'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절차나 장소는 우리가 조상께 차례를 드리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차례의 대상 자체가 틀리고, 중국의 경우는 달이 음기(陰氣)로 이루어졌다 하여 여자들만 절을 하고 남자들은 절을 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의 경우 차례 장소도 누각(樓閣)이나 마당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안방이나 대청마루에서 지낸다.
물론 차례를 지내며 축원도 하는데 여자들은 의례적으로 항아(嫦娥)같은 용모를 기원하고 남자들은 앞에서 언급했던 「월중절계(月中折桂)」를 빈다.
'빠이위에'를 마치면 온가족이 음식을 즐기며 달 놀이를 간다. 이것을 '상위에(賞月)'라고 한다.
달을 감상한다는 뜻이다. 대개는 집 마당에서 하기도 하지만 높은 누각이나 산으로 가기도 하고 운치 있는 문인들은 비늘처럼 반짝이는 잔 파도에 일엽편주를 띄우고 그윽하게 흐르는 월광(月光) 아래 시조를 읊조리기도 한다.
한편 어린 아이들 경우는 중추절만은 어른들의 간섭 없이 온 동네를 누비며 밤새도록 장난질을 한다.

대만 TV에서 제작한 프로그램 '빠치앤리루 윈허위에(八千里路雲和月)'나 일본 NHK에서 제작한 '대황하(大黃河)'를 보면 전당강(錢塘江) 입구에서 내륙으로 밀려오는 태산같은 파도에 경악과 함께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당강 입구는 나팔 모양이므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수로가 좁아지는 데다 특히 이곳은 간만의 차이가 커서 밀물이 들어올 때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지축을 뒤흔들 듯 굉음과 함께 10여M의 파도가 4-5초 간격으로 밀려오며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이런 경관은 물론 매일 있기는 하지만 특히 중추절을 전후로 각지에서 유람객들이 앞다투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다.

우리의 추석 특별 메뉴는 송편이다. 멥쌀에 쑥을 넣어 녹색으로 만들기도 하고 솔잎을 깔고 쪄서 솔향도 들게 한다.
송편 속은 깨소금이 대부분이나 일부는 밤 혹은 콩도 넣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워낙 먹거리를 밝히는 민족이라 우리의 송편 격에 해당하는 메뉴도 어지간히 다양하다. 이름하여 달떡, 중국어로 '위에삥(月餠)'이 바로 그것.
우리 송편은 반달 모양인데 비해 중국 '위에삥'은 그야말로 보름달같이 원형이 대부분이며 간혹 각이 부드럽게 다듬어진 사각형도 있다.
우리의 송편은 찌지만 중국의 '위에삥'은 빵처럼 구워 만든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만두는 속을 먹고 송편은 살을 먹는다고 하는데 중국 '위에삥'은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속을 먹는다.
'위에삥'의 살은 만두피같이 아주 얇아 이빨이 채 닿기도 전에 바삭 부서지며 곧바로 먹음직스런 속이 나온다.
물론 '위에삥'의 속은 지방마다 특색이 있지만 통틀어 말하자면 팥, 대추, 달걀노른자, 야자열매, 연근 등이 대종을 이루고 있고, 최근에는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카레나 햄버거 고기가 들어간 것도 목격했다.

중국의 추석은 보름달을 위시하여 관계되는 풍물이 모두 둥글둥글하다.
차례 상에 올리는 과일도 둥근 것만을 선택하고 특별 메뉴인 '위에삥'은 말할 것도 없이 둥글다. 흩어졌던 가족들도 부모님 곁으로 둥글게 모이고 옥토끼의 절구공이도 둥글기만 하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도록 기원하는 마음이 하늘에 걸린 둥근 보름달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수 천리 떨어졌던 부모형제가 단란하게 모인다는 저쪽 중국의 중추절에, 우리의 남북 이산가족 방문이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쩌면 우리의 송편이 반달 모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끝)
 

 


        <次韻高子勉>(其四)

君不居郞省  군부거랑성  그대는 郎官의 관청에 있지 않고,
還應上諫坡   환응상간파  마땅히 諫院의 직위에 올라야 하리.


才高殊未識   재고수미식  재능은 있으나 알아주는 이 없고,
晩歲喜無?    만세희무타   늦은 나이에 재난이 없음도 기뻐하네.


?馬羸難出   역마리난출  천리마는 마굿간에서 여위어 나오기 어렵고,
?鷄凍不歌   인계동부가  옆의 닭은 너무 추워 소리를 내지 못하네.


寒爐餘幾火   한로여기화   차가운 난로에는 얼마의 불이 남았는가,
灰里拔陰何   灰里拔陰何   재 속에서 음견과 하손을 찾아낸다.

 


  高子勉의 이름은 荷이고, 荊州사람으로 호를 還還先生이라 칭하고 있다. 그는 황정견에게 시를 배웠는데, 이 시에서 작가는 高子勉의 재능과 학식을 찬양하고 있다. 즉 첫 聯에서 시인은 고자면이 당연히 중요한 관직을 맡아야한다고 그의 재능을 칭찬하고 있으며, 3구에서는 그가 재능과 학식을 갖추고 있으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을 설명하고, 4구에서는 그가 비록 중용되지 못했지만 또한 큰 재난을 당하지 않았기에 이것으로도 위안으로 삼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頸聯에서 천리마 등에 비유하여 뜻은 있으나 펴기 어려운 고자면의 불우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상은 고자면의 재능에 대한 찬양과 불우함에 대한 탄식인 동시에 또한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정감의 묘사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五燈會元≫속의 禪法으로써 시론을 개괄하고 있다. 당나라의 百丈懷海禪師가 ?山靈祐禪師에게 “난로속에 불씨가 있는지 찾아보아라?”고 말하니 영우선사가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백장선사가 직접 일어서 친히 난로 속에서 약간의 불씨를 찾아 들고 “너는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이냐”라고 다시 물으니 위산선사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선가에서 온갖 妄念을 제거하고 내심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노력을 하면 어느 순간에 空明하고 淸淨한 禪定에 도달하게 되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불성을 찾을 수 있다는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들이나 예술가들은 항상 창작의 靈感이나 激情을 강조하고 있는데, 황정견의 주장은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바로 선가에서 말하고 있는 ‘그 자연스러움에 순응(順其自然)’ 해야하며, 그렇게 행하는 어느 순간에 마음과 경계가 서로 합해지는 공명하고 청정한 頓悟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어, 비로소 마음으로 만물을 받아들여 생동감 있게 자유스러운 창작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고로 시인은 백장선사가 난로 속에서 불씨를 찾아내어 영우선사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도 차가운 난로 속에서 陰何과 何遜등의 창작경험을 뽑아내어 고자면으로 하여금 詩作의 깨우침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深明閣>

象踏恒河徹底  상답항하철저
코끼리는 갠지즈강을 철저히 밟아 건너가고,
日行閻浮被冥  일행염부피명
태양은 이동하며 염부나무의 어두움을 뒤덮네.


若問深明宗旨  약문심명종지
만약 깊고 밝은 주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風花時度窓?  풍화시도창령 ?=?격자창령
바람에 꽃잎이 창살 앞에 흩날릴 때이다,

 


  이 시는 완전히 순수하게 선리를 논한 작품으로 그 의미는 만약 선종의 종지를 깊이 밝히는데 투철하다면 곧 곳곳이 모두 佛性이고 眞如라는 禪理를 설명하고 있다. ≪涅槃經≫에 이르기를 “성문연각 및 대보살들이 부처님 전에 모여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는데 각기 그것을 증명함에 각각 깊고 얕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코끼리와 말, 토끼가 강을 건넘에 있어 토끼는 물위에 떠서 건너고 말은 반만 잠기어 건너고, 오직 코끼리만 철저히 물의 흐름을 막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첫 구절에서는 이것을 인용하여 참선을 하려면 반드시 철저하고 투철히 행해야만 그 속의 요지를 깊이 체득할 수 있다는 선리를 설명하고 있다. 제 2구절은 바로 ≪華嚴經≫을 인용하여 참선으로 선리에 투철하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이 밝아지고 영롱하게되어 마치 태양이 공중에서 움직이며 일체의 어두움이 파괴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3,4구에서는 만약 부처의 깊고 밝은 종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꽃잎에 바람이 불어 창살 앞으로 자유자재롭게 흩날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 이 시는 심명각을 주제로 첫 구에서는 참선할 때의 심오한 깊이(深)를 비유하고, 이어서 2구에서는 깨친 이후의 밝음(明)을 비유하며, 마지막 구에서는 심명각의 창살(閣)을 가르키고 있다. 이렇게 선리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러나 심명각의 의미와 형상을 매우 교묘하면서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로 錢鍾書선생은 ≪談藝錄≫에서 “볼수록 교묘함이 생겨난다(以生見巧)”라고 이 시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寄黃龍淸老>(其三)

騎驢覓驢但可笑  기려멱려단가소
당나귀를 타고 당나귀를 찾으니 가소롭고,
非馬喩馬亦成痴   비마유마역성치
말도 아닌데 말에 비유함도 어리석음이리라.


一天月色爲誰好   일천월색위수호
한 하늘의 달빛은 누굴 위해 아름다운가,
二老風流只自知  이로풍류지자지
두 늙은이의 풍류는 단지 스스로만 알리라.

 


이 시는 작가가 옛 선사의 고사를 빌어서 스스로의 깨달은 바를 시로써 적고 있다. 첫 두 구절에서 선종의 깨달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선종에서는 ‘自性’을 버리고 밖을 향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당나귀를 타고 당나귀를 찾는다(騎驢覓驢)”고 말하고 있다. 즉≪傳燈錄≫에 “마음이 곧 부처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당나귀를 타고 당나귀를 찾음과 같다(不解卽心卽佛, 眞似騎驢覓驢)”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悟)이 곧 마음(心)에 있음을 모르고 밖을 향하여 추구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3,4구에서도 선종의 공안을 인용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馬祖大師가 西堂, 百丈, 南泉禪師와 함께 달을 감상하고 난 뒤 마조는 각각 세 사람의 느낌을 들었다. 그 중에서 마조는 西堂이 달에 대해 ‘供養’을 추구한다는 대답을 듣고, 서당이 너무 經敎에만 치중함을 비판하였으며, 또한 百丈이 달에 대해 “修行”을 하고 있다는 대답을 듣고 백장이 선의 수양에 만 치중함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南泉이 소매를 털고 가버린 행위에 대해서는 “홀로 모든 사물 밖으로 초연하였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고사를 인용하여 시인 스스로가 선은 밖을 향하여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 밖으로 초연한 내심으로 추구해야 만이 오도의 경지에 이른다는 도리를 깨닫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로 3,4구는 바로 馬祖와 南泉이 선에 있어서 마음이 서로 합해진 兩心相印의 상황, 즉 두 사람 모두의 마음과 몸이 일체의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 無物無我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시인과 惟淸禪師와의 우의가 매우 깊다는 것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시인과 惟淸禪師도 서로 마음이 합해진 兩心相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황정견과 惟淸선사와의 관계와 시인 자신이 선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느낌을 묘사한 매우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題槐安國>

曲閣深房古屋頭   곡각심방고옥두
누각은 깊숙한 방 마지막 안쪽에 위치하며,
病僧枯幾過春秋  병승고기과춘추
병든 승려는 참선으로 얼마의 세월을 보냈는가.

 
垣衣蛛網蒙窓?   원의주망몽창유  ?창유, 창문 남쪽으로 난 창
이끼 낀 담장과 거미줄로 가득찬 창문,
萬象縱橫不絲留  만상종횡부사유
우주만상을 종횡하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白蟻戰?千里血   백의전감천리혈  ?즐길감
전쟁 속에 흘린 천리의 피는 개미굴속의 꿈이며,
黃梁炊熟百年休   황량취숙백년휴
백년의 부귀영화는 황량이 익기 전의 한 바탕의 꿈.


功成事遂人間事   공성사수인간사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룸이 인간세상 일 이지만,
欲夢槐安向此游   욕몽괴안향차유
이곳으로 유람 와서 괴안의 꿈을 꾸고 싶네.

 


  이 시는 작가가 元豊4년(1081) 太和縣의 임지로 부임할 때 虔州에 묵으면서 지은 시이다. 이 시에는 序言이 있는데 東禪僧人進文이 침실 동쪽으로 하나의 작은 누각을 지어 황정견이 이 누각을 “槐安閣”이라고 명명해주고 바로 이 작품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의 전 4구에서는 進文승려가 이러한 작은 누각에서의 생활하는 환경과 그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즉 이 누각은 아주 오래되고 깊숙한 건물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병든 승려는 이미 참선에 의지하여 수많은 세월을 흘려 보냈으며, 담장 위에는 이끼가 끼고 창문에는 거미줄로 가득 차 있으나, 작은 누각의 주인은 오히려 모든 세상사를 잊어버리고 마음은 삼라만상을 자유로이 종횡하며 얽매임이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 5,6구에는 각각 당의 傳奇인 ≪南柯太守傳≫과 ≪枕中記≫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간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名利와  일체의 영화부귀는 바로 일장춘몽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5,6구를 계승하여 이러한 인간세상에서 명리를 다투는 것 보다 여기의 槐安閣에 와서 한 차례의 꿈을 꾸는 편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의 꿈을 꾸면 영화부귀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金剛經≫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바로 꿈, 환상, 거품과 같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인생은 “如夢”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金剛經≫을 선종에서는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五祖弘忍이 ≪金剛經≫으로 제자들을 거두어 들였고, 六祖慧能도 ≪金剛經≫을 통하여 도를 깨우친 것으로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곡절 있는 인생역정을 겪었고, 또한 불교 선종사상에 심취한 황정견으로서는 결국에는 인생의 철리를 깨달았기에 이러한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시를 적지 않게 남기고 있다.

  그러기에 이 시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첫 째로는 동선승려 진문이 세속을 초월한 자유자재로운 淡泊한 정신을 찬양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세상사람들의 영화부귀에 대한 환상과 명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바로 뜬구름과 같은 것, 즉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 실상이 아닌 것과 같이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지는 한바탕의 꿈, 환상, 거품이라는 선리를 설명하고 있다.

 

           <蟻蝶圖> 의접도

蝴蝶雙飛得意   호접쌍비득의
나비가 양 날개로 의기양양하게 날다가,
偶然畢命網羅   우연필명망라 
우연히 거미줄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네.


群蟻爭收墜翼   군의쟁수추익
무리 지은 개미들이 떨어진 날개를 거두어,
策勛歸去南柯   책훈귀거남가
槐樹아래의 개미굴에서 논공행상을 한다네.

 


  이 시의 창작연대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紹聖2년(1095)에 작가의 나이 51세에 검주黔州에 유배되었을 때 하나의 병풍을 보았는데, 그 위에는 날아가던 나비가 거미줄에 걸려 있고 그 밑에는 한 무리의 개미들이 기어가고 있는 그림인데, 작가가 바로 이 시를 그림 위에 썼다고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주장은 崇寧元年(1102) 58세의 나이로 호남과 호북, 강서에서 지낼 때 지은 작품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 두 주장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이 작품의 내용이 황정견의 불우한 운명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현실을 잊어버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그것을 “如夢”이나 “如幻”으로 보는 것이다. 고로 작가는 위의 <題槐安國>시와 마찬가지로 ≪南柯太守傳≫을 인용하여 “人生如夢”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즉 부귀영화에 기대어 의기양양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또한 어떠한 공을 세워 논공행상을 행하는 그 자체도 하나의 남가일몽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道元禪師(1200-1253)가 이야기한 사람의 일생은 바로 말하는 것과 같이 모두 허무한 것이며, 또한 형형색색의 꿈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즉 선가에서는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두 實相이 아니라 꿈과 같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정견이 벼슬길에 있어서 겪은 여러 차례의 좌절이 그로 하여금 불교선종에서 말하는 모든 세계에는 ‘常性’이 없는 ‘無常’의 세계를 깨닫게 하여 공명과 부귀에 대한 관념을 점점 엷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인생의 철리를 깨달아 “人生如夢”의 禪理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池口風雨留三日>


孤城三日風吹雨   고성삼일풍취우
외로운 성 삼일 동안 비바람에 휩싸이고,
小市人家自菜蔬    소시인가자채소
작은 도시 사람들은 채소로서 생활하네.


水遠山長雙屬玉   수원산장쌍속옥
산과 물이 이어지는 곳 한 쌍의 물새 있고,
身閑心苦一?鋤   신한심고일용서  
?찧을용, 찧다. 절구질하다. 해가지다.  鋤 호미서, 김을 메다
백로 보니 몸은 한가하나 마음은 괴롭도다.


翁從舍旁來收網   옹종사방래수망
늙은이는 집으로부터 나와 그물을 거두고,
我適臨淵不羨魚   아적임연부선어
나는 물가에 있으나 고기를 탐하지 않는다.

俯仰之間已陳跡   부앙지간이진적
눈 깜작할 사이에 이미 옛일이 되었으니,
莫窓歸了讀殘書   막창귀료독잔서
돌아가서 저녁 창 아래서 독서를 하고싶네.

 


  이 시는 작가가 매우 담담한 필치로 마치 일상생활에 대한 느낌을 서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황정견이 처음 벼슬길로 들어서서 북경국자감교수를 역임하다 烏臺詩案 발생 후 36세에 太和로 좌천되었다. 이 시는 바로 태화로 부임하던 도중에 비바람으로 안휘성 池口에서 3일을 머물면서 스스로의 소회를 서술한 것이다. 즉 하나의 외로운 성이 비바람에 휩싸이고 사람의 행렬이 거의 보이지 않는 길거리, 이 작은 도시의 사람들은 이 때문에 겨우 채소로 연명을 하고 있음을 첫 두 구절에서 서술하고 있다. 3, 4구에서는 성밖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큰산이 끝없이 이어지고 푸른 강물도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을 때 그 옆에 있는 한 쌍의 물새와 한 마리의 백로를 바라보면서 그 자신의 몸은 비록 이렇게 한가하나 그러나 내심 깊은 곳에는 고통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여기의 “苦”는 바로 烏臺詩案이후 蘇軾의 유배와 이로 인한 정치적인 환경의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유배로 인한 복잡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첫 4구는 주로 경치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속에는 약간의 개인적인 감정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4구는 주로 자기자신의 서정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한 명의 노인이 그물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록 물가에 임하여 있으나 그러나 물고기를 탐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淮南子.說林訓≫: “물가에서 고기를 부러워하기보다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그물을 짜는 것이 낫다.(臨河而羨魚, 不如歸家織網)” ≪漢書.董仲舒傳≫:“물가에서 고기를 탐하기보다는 차라리 물러나서 망을 짜는 편이 낫다(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入世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황정견은 여기에서 이러한 것을 飜案하여 오히려 스스로 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벼슬길에서의 욕심과 집착을 끊어 버린 듯한 담담한 심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바로 불교 선종의 淡泊하고 自適하며 본심이 청정한 사상경계와 유사하다. 즉 석가모니가 29세에 부귀와 명예, 부모와 처를 모두 버리고 수행의 길로 들어서서 일체의 고난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오로지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을 행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을 선종에서는 “放下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趙州和尙(778-897)의 고사가 있다. 어느 날 수행을 행하던 嚴尊者가 조주화상에게 묻기를 ‘일체의 모든 것을 포기하여 두 손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조주화상이 답하기를 ‘모든 것을 놓아버려라(放下着)’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엄존자가 다시 묻기를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했는데 지금 나의 두 손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또 다시 무엇을 포기하란 말입니까?’라고 하니 조주화상이 다시 대답하기를 ‘그러면 모든 것을 다시 짊어져 보아라’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바로 놓아 버린 마음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체의 모든 생각과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모두 버리고 포기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에서 ‘물가에서 고기를 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하라는 선종의 경계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왕희지의 ≪蘭亭集序≫를 인용하여 세상사의 무상함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속세의 다툼을 벗어나 창문 아래에서 독서로 소일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싶음을 추구하고 있다. 고로 이 시는 초연하고 탈속적인 그의 인생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서정에 있어서도 고요하고도 한적함을 추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불교적인 언어가 들어가지 않았어도 선종의 사상경계를 명확하게 나타내어, 매우 풍부한 선취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牧童>

騎牛遠遠過前村   기우원원과전촌
소를 타고 천천히 앞마을을 지나가니,
吹笛風斜隔壟聞   취적풍사격롱문 
피리소리 바람따라 언덕넘어 들려오네.
多少長安名利客   다소장안명리객
많은 장안의 명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機關用盡不如君   기관용진부여군
온갖 짓 다해도 그대만 못하네.

 


  옛 부터 많은 사대부 문인들은 목동을 소재로 시를 짓기를 좋아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목동의 한가롭고 고요하며, 유유자적하고 속박되지 않은 생활정취와 세상과 다툼이 없고 세속을 초월한 듯한 선종의 사상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황정견의 이 시도 세속의 모든 일을 초월한 은일 생활에 대한 바램을 농후한 선취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즉 저녁 무렵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 소를 탄 목동은 천천히 앞마을을 지나가고 목동의 피리소리는 바람 따라 저 멀리서 고요히 들려온다. 이렇게 속세의 온갖 풍상을 벗어난 듯하고 자유자재롭게 걸림이 없는 듯한 목동은 세속의 울타리 속에서 명리를 쫓아가며 생활하는 장안의 객들과 명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선종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고요하고 幽靜한 심경이 있으면 비로소 본심이 청정한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속의 공명과 명리를 추구하는 것이 곧 바로 청정한 본심을 가로막는 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안에서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는 많은 객들은 어떠한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閑寂安逸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의 정취를 깊이 터득한 목동의 유유자적한 은일의 생활에 미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목동이 처한 환경과 삶이 세속의 명리와 다툼을 벗어나 고아하고 한적하며 고요하고 寂靜한 대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은 바로 선종의 정취와 일맥상통 하다고 할 수 있다.


 

            <鄂州南樓書事>(其一) 악주남루서사

四顧山光接水光   사고산광접수광
南樓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산과 물이 접하고,
憑欄十里?荷香   빙란십리기하향  ?새발마름기,수초의 한가지
난간에 기대니 십리에서 연꽃 향기 전해오네.
淸風明月無人管   청풍명월무인관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상관하는 이가 없고,
幷作南風一味凉   병작남풍일미량
아우르니 남풍은 하나의 청량함을 만든다네.

 


  앞의 두 구절은 남루에서 바라본 사방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즉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산과 물이 서로 접하여 지고, 저 멀리서 연꽃의 향기가 전해져오는 시각과 촉각의 감각을 적절하게 묘사하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제 3구에서 작가의 광달함과 대자연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소요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위의 밝은 달을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 것을 내 뜻대로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취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만물과 나 자신이 일체가 되고, 천지와 내가 서로 함께 하는 물아일체의 정신 경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蘇軾이 <前赤壁賦>에서 말하고 있는 “그것을 취함에 금하는 것이 없고, 그것을 사용함에 끝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구에서 앞 3구에서 이야기한 산의 빛, 물의 빛과 십리 밖의 연꽃 향기, 청풍명월을 모두 아우르니 일종의 청량함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凉”이 주는 감각은 단순한 형식적인 청량함이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와 선종에서는 온갖 잡념을 버리고 모든 번뇌가 없는 경지에 이름을 칭하여 “淸凉”이라고 한다. ≪大集經≫에 이르기를 “삼매가 있으매 청량이라고 이르는 것은 애증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有三昧, 名曰淸凉, 能斷離憎愛故)”≪華嚴經.離世間品≫에서도 “보살은 청량한 달로 하늘의 끝으로 유람을 한다.(菩薩淸凉月, 游于畢竟空)”즉 육조 혜능이 말한 “애증이 생기지 않고, 머무름을 취함도(취함과 버림도) 없으며, 어떠한 이익이나 성공과 실패의 일도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고 고요하며 한적하고 비어있고 화합하며 고요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로 淸凉界인 것이다. 고로 이 시에서 “청풍명월”등 모든 자연물상을 합하여 하나의 청량한 맛으로 만든다는 것은 바로 작가가 바라본 세계가 마치 청정하면서 세속을 초월한 듯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작가의 마음이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청량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고 있다.


 

 

    낙유원(三)
        
 

날 저무려니 마음 편치 않아
수레 타고 옛 행락지에 오르네
석양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데
다만 황혼이 가깝구나

 

 

당(唐)나라는 크게 4가지로 구분합니다. 1)초당(初唐). 2).성당(盛唐). 3)중당(中唐). 4)만당(晩唐)이 바로 그것입니다.

 

1)초당=초당사걸(初唐四傑)이 있었는데 왕발(王勃). 양동(楊[火+同]?). 노소인(盧昭隣). 낙빈왕(駱賓王)등이 초당사걸이라고 알려져 있고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 진자앙(陳子昻), 장구령(張九齡) 등이 시단을 대표했는데 대부분 제. 양(齊. 梁)때의 가볍고 아름다운 구습을 버리지 못하다가 심전기. 송지문은 근체시(近體詩)를 정립하는데 힘썼고 진자앙은 처음으로 청신하고 건실한 풍격을 세워 오랫동안 답보하던 경염(輕艶)한 기풍을 쇄신(刷新)하는데 노력했습니다.

 

2)성당=성당때는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이백(李白), 두보(杜甫), 고적(高適), 잠참[삼] (岑參), 왕창령(王昌齡), 왕지환(王之煥) 등 당시를 주름잡은 대형 시인들을 배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국詩의 절정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강조할 것은 그들 모두가 뚜렷한 개성으로 문학(文學)의 극치를 창출함으로써 각각 중국詩의 한 유파를 형성하고 그 비조(鼻祖)적 지위를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소박하고 진실한 언어로 자연을 그려 자연파 시인의 전형으로 꼽히는 맹호연과 불가(佛家)의 영향으로 詩 속에 선미(禪味)와 화경(畵境)을 함입(陷入)시킨 불교시인 왕유가 있는가 하면 비장한 필력으로 변새시(邊塞詩)를 쓰던 고적과 잠참, 그리고 칠언절구의 명수로 알려진 왕창령, 왕지환 등이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소개할 이백과 당대의 최고의 시인 두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가의 영향으로 선기(仙氣)를 띤 이백은 유가(儒家)의 영향으로 침울한 두보와 많은 상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백이 기(氣)를 주로 삼고 자연을 그 소재로 삼는다면, 두보는 의(義)로 주를 삼아 사회를 그 소재로 삼았고, 이백이 표일(飄逸)과 재기(才氣)로써 오언절구나 칠언가행에 능하다면 두보는 침울과 학력으로 오,칠언율시에 능하여 각각 시선(詩仙), 혹은 시성(詩聖)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3)중당=중당때는 한유(韓愈)를 비롯하여 유종원(柳宗元), 맹교(孟郊), 가도(賈島), 이하(李賀), 원진(元[禾+眞]), 백거이(白居易), 장적(張籍), 왕건(王建), 유우석(劉禹錫) 등이 시단을 대표하는데 대체로 한유, 맹교, 가도, 이하 등의 현란한 표현의 예술적 경향과 원진, 백거이, 장적, 왕건, 유우석 등의 평이하고 사실적인 사회詩 경향으로 나누어 집니다. 그 중에서도 오, 칠언고시에 능하면서도 웅혼(雄渾)하고 난해한 詩의 한유, 자연과 사회를 적절하게 융합한 유종원, 냉철한 감각의 맹교, 가도, 처참하면서도 아름다운 귀시(鬼詩)를 썼던 초현실파 시인 이하, 풍자적이면서도 평이하고 토속적인 언어의 사회시인(社會詩人)원진, 백거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4)만당=만당때는 이상은(李商隱), 온정균(溫庭筠), 두목(杜牧), 한악(韓[人+星]악), 허혼(許渾), 피일휴(皮日休), 육구몽(陸龜蒙), 두순학(杜荀鶴), 등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유미(唯美)풍이 강해서 퇴폐적이란 평가를 듣기도 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몽롱한 심상(心象)을 운용하면서 [무제(無題)]詩를 많이 써서 탁월한 예술의 마력을 보인 이상은과 미사여구를 잘 구사해 여성적인 심상을 보여 주고 있는 온정균, 아름답고 운율적인 詩로써 퇴폐성마저 보였던 두목 등이 이 시대를 대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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