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조 형식의 실험과 모색
―이은상론 “봄처녀 제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중학생 시절에 음악 실기 시험으로 「봄처녀」를 불렀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곡과 가사는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 가사가 鷺山 李殷相(1903~1982)의 시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봄처녀」뿐만 아니다.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금강에 살으리랏다」 「고향 생각」 「思友」 「그리움」 「장안사」 「사랑」 등 아직까지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거나 널리 불리워지고 있는 이러한 가곡들이 모두 이은상의 시조 작품들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곡조를 시조에 붙일 수 있는 것은 우선 그 정형의 형식이 갖고 있는 율격 때문이며, 노산 시조가 지니고 있는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내용이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조의 형식은 고려 중엽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時調라는 명칭이 기록상에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 英祖 때 石北 申光洙의 문집인 『石北集』에서였다. 신광수는 그의 문집에서 2~3백년 전 장안의 명창이었던 李世春이 短歌에 歌曲 외에 새로 창법을 창안하여 불렀는데 여기에서 시조가 비롯되었다고 쓰고 있다. 즉 작품 창작을 위주로 한 영조 이전에는 시조가 新番羽, 永言, 張短歌, 時節短歌, 歌謠, 樂章, 新聲 등(주로 단가라 불리움)으로 불리워지다가, 영조때 많은 歌客들이 단가에 제멋대로 곡을 붙여 부르자 이세춘이 이러한 혼란을 막고자 이를 정리하여 새로운 곡조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時調라고 명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정조대 이후 시조창이 쇠퇴함에 따라 창의 내용이었던 단가가 자연히 떨어져 나왔으며 곡명이었던 시조가 작품 내용을 가르키는 단가를 대신하여 쓰이게 된 것이다. 개화기 이후 현대시조는 창과는 완전히 분리된 상태이지만, 초·중·종장이 모두 4음보씩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마치 4마디씩 반복되는 음악의 악보와 같다. ¾박자를 예로 든다면 4분음표 3개가 들어가든 8분음표가 6개가 들어가든 1마디가 3박자로 이루어지듯이, 시조 역시 1음보 안에 들어가는 字數가 일정한 규칙 안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우리가 시조의 기본형으로 알고 있는 3·4·4(3)·4, 3·4·4(3)·4, 3·5·4·3으로 고정화된 형태가 아닌, 현대시조의 율격은 표현할 수 있는 자수의 폭을 넓혀 놓고 있다. 현대시조의 기본적 율격을 참고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대시조는 3장 6구 12음보의 율격체재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정형화된 듯하면서도 그 정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표현할 수 있는 자수를 확대시키고 있다. 자수의 확대는 시조의 문학성을 한층 상승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문학은 언어가 그 기본 도구가 되는 예술로서 그것이 축소되거나 고정화되어 있다면, 다양하고 깊이 있는 표현이나 문학적 형상화가 어렵기 마련이다. 우리의 고시조 역시 3·4·4·4…와 같은 고정된 틀에 의해 통제받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시조보다 더욱 자유로운 율격 체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조를 定型詩가 아닌 整型詩(이병기)라거나, 定型而非定型 혹은 非定型而定型의 시(이은상)라고도 했다. 시조의 기본 율격을 고정시킨 것은 오히려 시조부흥운동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시조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때였다. 외세의 문화가 물밀듯 밀려들었던 개화기에 전통문학을 보존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문학인·지식인들은 시조의 창작뿐만 아니라 이론의 확립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염상섭의 「시조에 관하여」(1926)·「시조와 민요」(1927), 이광수의 「시조의 자연율」(1928)·「시조의 意的 구성」(1928), 이은상의 「시조문제」(1927)·「시조문제 小論」(1928)·「시조短型芻議」(1928), 이병기의 「율격과 시조」(1928)·「시조원류론」(1929), 안자산의 「시조의 연원」(1930), 조윤제의 「시조의 字數考」(1931) 등 시조의 개념과 연원, 형식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은 논문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시조의 자수 문제는 서로 다른 견해가 대립되면서 이론 확립에 난조를 보이게 된다. 앞서 밝혔듯이 고시조 자체가 고정된 자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구가했기에, 그것을 정형의 틀 속에 고정시키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당시 시조의 율격체재를 음보율이 아닌 음수율로 보았기 때문에 자수의 형태가 기본 연구 대상이었다. 정확한 자수의 제정만이 정형시로서의 시조를 정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시조의 자수율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인 이은상, 안자산, 이병기, 조윤제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1구 2구 3구 4구 초장/ 2~5 2`~6 2~5 4~6 중장/ 1~5 2~6 2~5 4~6 종장/ 3 5~8 4~5 3~4 <이은상>
초장/ 2~4 4~6 3~5 4~6 중장/ 1~4 3~6 2~5 4~6 종장/ 3 5~9 4~5 3~4 <조윤제>
초구 종구 초장/ 6~9 6~9 중장/ 5~8 6~9 종장/ 3 5~8 4~5 3~4 <이병기>
초장/ 7 8(15) 중장/ 7 8(15) 종장/ 8 7(15) <안자산>
위의 예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조의 형태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이은상과 조윤제는 시조의 형식을 3장 12구체로 보았으나 각 구의 음수율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르며, 이병기는 3장 8구체로, 안자산은 3장 6구체로 구분하면서 자수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들을 바탕으로 조윤제는 “3·4·4(3)·4, 3·4·4(3)·4, 3·5·4·3은 시조형의 이념이라 할 만한 것”(「시조 자수고」)이라 하여 이것을 시조의 기본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시조의 기본 율격으로 오랫동안 고정되다시피 해왔다. 이렇듯 시조의 음수율을 찾고자 한 것은 시조가 정형시로서 일본의 시가처럼 고정된 자수를 지녀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3·4·4·4…로 시조의 자수를 고정시킨 것은 시조의 문학적 성취도에 족쇄를 채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제한은 시인의 영혼이 점유할 수 있는 창작의 공간을 협소화시켜 형식이 내용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형에 가장 충실한 작품집이 바로 최초의 시조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로, 108편의 작품 전체가 고정된 자수율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자수를 맞추기 위한 어색한 표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산은 앞의 도표에서 본 바와 같이 각 구의 자수의 신축성을 인정하는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조 창작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시인으로서의 그가 생각했던 시조의 형태가, 학자들의 그것과 다름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노산은 「시조단형추의」에서 그가 제시한 시조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면 혹 ‘그것을 반드시 받아야만 할 制限으로 하는 말이냐’고 反問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筆者의 독단적인 新案이 아니요, 다만 古時調型의 檢討로부터 얻은 歸結인 것이며 그 위에 私私로이 거듭해 본 試驗으로부터 口調朗讀에 適宜하다고 認識된 것을 약간 添加하여 놓은 것 뿐이며 그 外에 더 다른 意味를 캘 것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실상 형식의 ‘규범을 제정’한 것이 아니요, 形式의 ‘歸結을 보인 것이라 함이 더 穩當하다 할 것이다.…
노산의 자수율은 즉, “고시조형의 검토로부터 얻은 귀결”이며, 거기에 다 스스로 새로운 실험을 거쳐 “구조낭독에 적의하다”고 생각한 것을 약간 첨가하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조가 비록 정형시이지만, 정확한 자수로서 그 형식을 정하기보다 옛시조를 현대에 맞도록 그 “형식의 귀결”을 이루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형식보다는 거기에 담겨야 할 내용을 소중히 여긴, 시조의 문학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조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실험적인 자세는 兩章時調를 창안하고 있다.
뵈오려 못뵈는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 지이다 ―「소경되어지이다」 전문(『노산시조집』)
위의 예시와 같이 양장시조는 초장과 종장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의 시조로서, 노산은 첫시조집에서 양장시조편을 따로 마련해 모두 6편 12수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양장시조의 이론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兩章時調란 것에 대하여는 2, 3년 전부터 詩友간에 논의되어 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조창작의 실제 경험상 그 詩想이 양장으로 이미 족하고 더 쓸 필요가 없는 것, 만일 더 쓴다면 결국 군더더기가 되는 것밖에 그 시의 생명과 가치를 도로 損하게 되는 것 등은 항상 느낌에서 출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내용이 3행까지는 부족한 점에 있어서 四章時調가 있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삼행까지는 불필요하게 되는 경우에 양장시조가 있을 수 있는 것은 觀火의 이론이다. 종래의 고시조는 그것이 음악과 병행한 것, 즉 반드시 창하게 된 관계상 양장의 성립을 못본 것이나 창과 관계가 없는 오늘에는 이론과 필요에 위반함이 없다고 하면 양장시조가 신형식을 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노산은 시조가 창과 분리되고 있는 현실에서 굳이 3장을 고집할 필요 없이 시상에 따라 적절하게 장의 수를 조절할 수 있는 신형식이 필요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양장시조의 이론적 배경으로 첫시집에서 실제 창작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양장시조론에서 더 나아가 單章時調까지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종장은 ‘초·중장과는 전연 다른 별개의 趣, 별개의 味를 가져 독립한 존재로 前章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종장 하나로도 충분한 뜻을 지닌 시조를 쓸 수 있다고 주창했다. 그러나 시조의 3장이 절대불변의 정형이라는 반대 의견을 넘어서지 못한 채 노산의 이러한 시도는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시조 역시 우리의 고대 詩歌 중 어느 장르에서 변형되어 문학적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의 형식에 이르렀을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이 그대로 답습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 적합하도록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오히려 그 전통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문학은 형식이 아닌 그 내용에 담긴 문학성이 중요하다. 내용보다 형식을 더욱 중요시한다면 그 문학 장르는 퇴보하거나 사장되기 마련이다. 시조가 일반 대중에게 낡고 고루하게 여겨져 자유시에 밀려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형식에의 집착이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노산이 주창한 대로 시상의 전개에 따라 3장 형식, 2장 형식, 단장 형식 등 다양하게 그 표현 양식을 가지고 이를 발전시켜 왔다면 오늘 우리의 시조 위상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노산이 최초로 쓴 시조 작품은 1922년 19세 때 쓴 「아버님을 여희고」 「꿈깬 뒤」 등이 있지만, 그는 스스로 「고향생각」(1923)을 처녀작으로 꼽고 있다. 이것은 작품의 문학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며, 그 전문을 인용해 본다.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로 나갓드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개를 숙으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오. 배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때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고향생각」 역시 우리의 가곡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작품으로 노산의 처녀작이라고 하지만, 그 문학적 성숙도가 이미 완숙기에 이른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 시기 依古的 정서에 기대고 있는 다른 시조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시적 발화가 현대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습작 초기부터 그는 고시조를 답습하기보다 시조라는 고답적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고자 한 것 같다. 이러한 의도는 그의 첫 시조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시조가 현대문학 속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실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노산의 첫 시조집 『鷺山時調集』은 1932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되었며, 靑田 李象範이 장정과 面畵를 맡고 徐恒錫이 題字를 쓰고 있다. 시조집은 국판 고급 양장에 199면으로, 시조집 첫 장에 「序」가 있고 전 8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가는 곧마다’에는 「삼개에서」 등 12편, 제2부 ‘흐르는 봄빛’은 「봄」 등 12편, 제3부‘달알에 서서’는 「溪月頌」 등 12편, 제4부 ‘쓸쓸한 그날’은 「가윗날에」 등 8편, 제5부 ‘꿈은 지나가고’는 「꿈깬 뒤」 등 9편, 제6부 ‘松都노래’는 「觀德亭」 등 11편, 제7부 ‘金剛行’은 「金剛을 바라보며」 등 41편, 제8부 ‘兩章時調試作篇’는 「소경되어지이다」 등 6편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 편수로는 111편이지만, 「삼개에서」 「가윗날에」 「朴淵」 등 10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조와 9수로 이루어진 「萬瀑洞九曲」, 그외 많은 연작시조까지 포함시킨다면 총 270여 수로 이루어졌다. 수록된 작품 수가 매우 많은 것 같지만, 노산은 시집 첫머리 「序」에서 그동안의 勞作 중에서 선별하여 고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지나간 十年동안 내 떠려진 광주리에 모인 時調가 모두 七百四十餘首. 어느것인들 甦棄를 免할者 되리오 마는 부끄러운 그대로 五百쯤은 모아 보고도 싶은 그나마 一卷에 다 실기 어려운 事情으로 이제 爲先 三百首쯤만 추렷거니와 요거로도 나딴은 여러 色趣의 것을 골고로 編次하노라 하엿습니다.
10년 동안 쓴 740여 수에 이르는 작품 중에서 선별하였다고 하니 노산의 시조에 대한 열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노산은 전 생애에 거쳐 2100여 편에 이르는 시조를 창작하여 현대시조 사상 최다의 작품을 생산한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노산시조집』에 실린 그의 작품 몇 편을 감상해 보도록 한다. 쓸쓸한 저녁이다
쓸쓸한 저녁이다 산으로 오를까나 올라서 마른 나무와 나란히 서볼까나 석양에 여윈그림자보고 싫건울어 볼까나 문닫고 꿀어앉아 옷깃을 바로하고 노래를 읊을까나 어려운글 찾아볼까 뒤끓른 온갖시름을 쓸어눌러 볼까나 철없는 어린것이 달려와 웃는구나 오냐 네눈에야 내괴로움 웨보이나 껴안고 얼굴돌리니 마음더욱 아파라 (1931.12.28)
그리움
뉘라서 저바다를 밑이없다 하시는고 百千길 바다라도 닿이는곧 잇으리만 님그린 이마음이야 그릴스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이엇다 끝잇는냥 알지마소 가보면 멀고멀고 어늬끝이 잇으리오 님그린 저하늘같해 그릴스록 머오이다 길고먼 그리움을 노래우에 얹노라니 情懷는 끝이없고 曲調는 짜르이다 曲調는 짜를지라도 남아울림 들으소서 (1931.9.11) 사랑
탈대로 다타시오 타다말진 부대마소 타고 다시타서 재될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는동강은 쓰을곧이 없느니라
半타고 꺼질진덴 애제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타고 생콆으로 잇으시오 탈진댄 재그것조차 마자탐이 옳으니다 (1931.4.20)
위의 세 편의 시조는 모두 감상적이고 애조를 띤 시편들이다. 「그리움」과 「사랑」은 가곡으로서 지금도 애창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움, 사랑 등을 제재로 하였지만, 그것을 직설적인 감상의 배설이 아닌 사물에 의탁하여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한층 격조 있는 시적 표현을 성취해 내고 있다. 「쓸쓸한 저녁이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롭고 쓸쓸한 시인의 내적 상황을 마른 나무, 석양의 여위 그림자로써 사물화하여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움」의 경우 끝없이 밀려오는 그리움의 정회가 바다보다 깊으며 하늘처럼 끝이 없음에 비유하고 있다. 「사랑」의 경우, 시조의 첫머리에 부연설명을 달고 있는데 “친구와 ‘청춘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친구의 말이 ‘사랑은 타는 것이라고’고 했”지만, 노산은 끝까지 다 못타는 사람의 마음을 탄식하면서 즉 ‘信과 義와 熱이 불변하는 사랑’을 이 땅에서는 찾을 길 없음을 탄식하며 노래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촛불처럼 자신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는 열정적인 사랑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갈망이며, 따라서 문학의 영원한 소재와 주제가 되어 왔다. 노산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태운 재마저 ‘마자 탐이 옳’은 사랑,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한다. 재마저 타고 말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즉 죽음조차도 넘어설 수 있는 절대불변의 사랑, 그럴 자신이 없을진대 차라리 태우지 말기를 간구하고 있다. 『노산시조집』은 1932년 초판을 간행한 후 1933년에 再版, 1937년에 3판, 1939년에 4판을 찍을 정도로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이것은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정감의 시적 술회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노산은 시조집 序에서 “나는 이제 생각하노니 우리 中에 情을 같이 하신이 이 노래로 지팽이 삼아 그 마음의 世界를 밟으신다면 노래의 意義― 진실로 거기에 있고 또한 내게는 더 큰 榮光이 없겟습니다.” 라며 읽는 이들과 시적 울림을 공유할 수 있는 시조집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의 바람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朴淵
불타는 紅葉(홍엽)길에 분별없이 醉한몸이 靑靄(청애)로 깨고나니 앉은곧이 泛楠亭(범남정)을 어늬새 그리든 仙境을 저도몰래 들었더라
聖居山 가을저녁 검고붉고 누를으고 山넘어 긴하늘은 쪽푼듯이 푸를은데 떨어진 힌빛한줄기 朴淵이라 하더라 (1931.10.28) 만폭동 팔담가(萬瀑洞八潭歌)
右序 흐르고 매치고 감돌고 구비치고 솟고 질리고 고이고 넘처나고 꺾이어 萬번도더하니 萬瀑洞인가 하노라
右黑龍潭(우흑룡담) 一曲은 어디에오 꼬리치는 저 黑龍아 이 좋은 雲山에서 너만혼자 놀단말가 물어도 대답이 없이 제興겨워 하더라
右琵琶潭(비파담) 二曲은 어디메오 비파의 맑은소리 仙樂을 듣고서서 淸興을 겨워할제 千?에 數萬送柏도 우줄우줄 하더라 (1930.7.21)
노산은 서경과 서정의 조화로운 합일을 이룬 시조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박연」은 제6부 ‘松都노래’, 「만폭동 팔담가」는 제7부 ‘金剛行’에 수록된 작품으로, 제6와 제7부는 모두 개성과 금강산을 기행하면서 쓴 기행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행시들이 범하기 쉬운 자연풍광의 예찬을 노산은 시적 기교를 사용하여 이를 피해가고 있다. 「박연」은 모두 10수로 이루어진 연작시로서 1연과 2연만을 인용했다. 불타오르듯 단풍이 절정에 이른 산의 경치에 취해 분별심마저 잃고 오르다가, 맑고 차가운 산안개가 자욱한 범남정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속에서나 보던 仙境이 눈 앞에 있음을 깨우친다. 우거진 숲의 어둡고 침침한 검은 그늘과 붉고 누런 빛깔로 물든 단풍, 가을 하늘의 푸르디 푸른 쪽빛, 그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쏟아지고 있는 박연폭포의 풍광을 풍부한 색채어를 사용하여 한폭의 그림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만폭동 팔담가」는 서시를 비롯해 모두 9수로 이루어져 있다. 만폭동은 수많은 층암절벽과 폭포, 담, 수정 같은 벽계수, 짙은 녹음 등으로 금강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지이다. 만폭동은 흑룡담, 벽하담, 분설담, 진주담, 구담, 화룡담 등 8개의 담이 층층으로 거느리고 있는데, 노산은 이 절경을 각각 8수의 작품으로 감상하고 있다. ‘서시’에서 그는 시조의 율격을 이용하여 ‘흐르고 매치고 감돌고 구비치고/ 솟고 질리고 고이고 넘처나고’ 등 동적인 시어를 가져와 웅장한 폭포의 이미지를 역동감 있게 살려내고 있다.
달
그 언제 님의 아호 ‘月’ 넣어 지어주고 지금도 달을 바라면 그님 생각 합내다
소식이 끊이오매 안부를 알 길 없어 저달로 점치는 줄은 님도 아마 모르시리
흐린 달을 보면 무삼 걱정 계시온가 내맘도 깊은 구름에 싸이는 줄 압소서
하마 밝아지신가 창밖을 보고 또 보고 새벽만 환하시오면 그제 안심 합내다
어느땐 너무 밝아 너무 밝음 밉다가도 그 기쁨 생각하옵고 도로 축복 합내다 (1932.3.20)
「달」은 각 장이 3장이 아닌 2장 형식의 양장시조로서, 5수의 연작시조로 이루어져 있다. ‘달’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떠올라 먼 옛날부터 멀리 헤어져 있는 사람들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서로를 만나게 해주는 원초적인 심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노산 역시 멀리 떨어진 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을 바라보며 달래고 있으며, 달이 흐리면 님에게 무슨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다가도 달이 너무 밝으면 님만이 혼자 즐거워 할 일이 있는 것 같아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혼자만의 즐거움마저도 축복하는 것이다. 이상과 『노산시조집』에 나타난 그의 작품은 이상과 같이 풍부한 정감과 다양한 기교로써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아름다운 가곡으로도 작곡되었다. 그러나 6·25동란 이후 그의 작품은 현실적이면서 사상적인 면으로 기울게 된다.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난 후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직시하고 동족에 대한 안쓰러운 동정심과 함께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지표를 시조를 통해 희망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 전환점이 되는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高地가 바로 저긴데」(『푸른 하늘의 뜻은』 수록)
노산은 가람 이병기(1891~1968)와 함께 한국 현대시조의 양대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사학자, 수필가로도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마산 창신학교, 연희전문 수료, 조도전대학 사학부 수학, 조선일보 편집고문 및 출판국 주간, 이화여전교수, 청구대·영남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예술원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건국포장,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노산시조집』 외에 『노산문선』(영창서관, 1942), 『노산시조선집』(남향문화사, 1958), 『푸른 하늘의 뜻은』(금강출판사, 1970), 『祈願』 (경희대 출판국, 19982) 등의 작품집을 남겼다.
▣참고시
개나리 ―피는 꽃 앞에서(4)
梅花꽃 졌다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다 「봄」이란 말을 차마 쓰기 어려워서.(1926) ―『노산시조집』
가고파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내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든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데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든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지라 내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나고저 그날 그 눈물 없든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어 별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든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가 알아보나 내몫에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천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은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이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오라 치를 잡고 한 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저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 (1932. 1. 5. 한양 행화촌(杏花村)에서 ―『노산시조집』(1932. 4)
금강에 살으리랐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운무(雲霧) 더리고 금강에 살으리랐다 홍진(紅塵)에 썩은 명리(名利)야 아는 체나 하리로
이몸이 쉬어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댄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랐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과저 (1930. 7. 27) ―『노산시조집』(1932. 4)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저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나무에 몸을 지혀 눈감고 섯노랄 제 뒤에서 나는 소리 행여나 그대신가 솔방울 떨어질적마다 돌려 보는 이 마음 (1931. 10.18) ―『노산시조집』(1932. 4)
장안사(長安寺)
장하든 금전벽우(金殿碧宇) 찬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하니 더욱 비감 하여라 (1930. 7. 20) ―『노산시조집』(1932. 4)
` 슬픈 행장
피를 먹은 능선과 능선 아우성 삼킨 골짜기다 안개는 저기 몇 번 덮이고 흰 눈은 저기 몇 번 쌔던고 오늘은 비 속에 엎딘 산들 슬픈 행장을 씻는다 (1930. 7. 20) ―『노산시조집』(1932. 4)
밤
검은 박쥐떼같이 밤은 날개를 펴고 회한은 파도같이 일어 가슴 기슭을 부딪는다 수묵색 짙은 안개 속에 외로운 나의 항로여 옥문인 양 닫혀진 가슴 적막한 빙산처럼 쌔고 추억이란 한 모금, 한 모금 쓰디 쓴 약맛 같구나 바위냐 고목 등걸이냐 멍하니 앉은 모습이여.
산에는 이밤에도 부엉이가 밤을 샐거다 우리도 쪼그리고 앉았다 나랑 겨울밤이랑 모두 다 잠을 잃어버린 슬픈 족속들이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설움에 두 눈을 그에 적시고야 마나 세월의 파편을 안고 밤이 역겨워 내다본다 지금 쯤 산 너머 어디 태양이 솟고 있을 거다.(1961)
새 지도를 그려 본다
인간의 역사란 묘표도 없는 옛 무덤 폐허의 남은 지역마저 산불처럼 타고 있다 어디서 조종소리라도 들려 올 것만 같다.
산도 끝났네 물도 다했네 다만 빈 하늘 빈 바다 빈 마음 시인은 막대 끝으로 새 지도를 그려 본다. (1964.7. 삼척 바닷가에서)
가람의 무덤을 찾아
옛 집에 옛 뜻을 지녀 옛 사람처럼 사옵다가 세상이 지루턴가 눈을 문득 감더니만 흙이랑 풀이랑 쓰고 얼굴마저 가렸구려.
집 뒤 아기 대밭 대밭 너머 무덤이라 잠깐 뒷방으로 옮겨 누우신 건가 이따금 기침을 하면 귀를 돌릴 자리에 님 심은 산수유 백목련 앙상한 가지 끝에 봄바람 불어오면 꽃 피고 잎 퍼지리 저 뒷날 찾아오는 이 슬픈 생각 더하리. (196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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