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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18일 주일오전예배 - 진정한 승리를 위하여(1)
말씀 : 빌립보서 3장 12-16절
강론 : 김상건 목사 (아름다운교회 담임, YIM 대표)
월드컵 열기가 한창입니다. 온 세계의 관심이 이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자분들 앞에서 축구 이야기 하는 것이 무례한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축구를 하는 날이면 공터란 공터는 열정적인 응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열정적인 축구에 대한 관심은 남미와 유럽의 관심에 비견될만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응원은 세계적인 브렌드가 되었습니다. 2002년 붉은 악마의 응원은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월요일에 토고전이 있는데, 저는 필리핀에 있었잖아요? 못 볼 줄 알았는데, 필리핀에 ‘솔라TV’라는 케이블 TV와 특별히 계약을 해서 볼 수 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북한도요. 우리나라 경기를 녹화해서 보면서 난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온 세계가 월드컵 때문에 난리입니다. 펠레는 ‘축구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 도구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스포츠가 금전적 이익만 추구하는 정신의 퇴색함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많은 연봉을 주는 구단주의 눈에 띄기 위해서 월드컵에서 열심히 뛴다고 합니다. 토고 선수들의 행태를 보았잖습니까?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모든 나라 선수들에게 그런 계약은 있습니다. 장사치들은 승리가 돈과 관련있다는 것을 동물적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뜨는 신성들을 잘 압니다. 지금 잘 키워서 다음에 수천억에 팔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영입을 합니다. 이즈음에 진정한 승리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긴다는 것이 뭘까? 진정한 승리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민이 있습니다. 영적인 삶, 경건한 그리스도 인에게도 승리는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끝부분에는 놀라운 찬양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승리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승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축구에서 ‘포백 시스탬’은 공격적인 축구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매우 박진감 넘치는 축구에 대한 관심은 감독과 모든 관계자들의 관심입니다. 그들은 승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꽤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승리에 대해 꽤뚫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합니까? 그리고 승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에 대한 답이 있어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월드컵 기간 동안에 ‘진정한 승리를 위하여’라는 시리즈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노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것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에게는 경주하는 삶이 있었고, 그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이 본문은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오늘은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나누기 원합니다.
1. 진정한 승리는 패배주의적 삶을 극복함으로 가능합니다.
진정한 승리를 위한 여러 가지 비책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프랑스와의 경기를 내일 새벽 4시에 합니다. 참 곤란한 시간이군요?^^ 우리 한국 전은 다 교회에서 응원을 할까요? 전반전 끝나고 그 사이에 새벽기도 하고, 후반적 시작할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 우리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여...!!’ 그렇게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비길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기려는 전략’으로 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전략은 참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승리의 전략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 이 전략이 너무 중요합니다.
승리하기 원하는 거룩한 백성들은 ‘패배주의적 관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패배하는 것,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고 나면 ‘그럴 줄 알았다..’ 그것은 패배주의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승리를 믿지도, 기대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혹시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 자녀들이 성적표를 가져 왔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험 기간에 유난을 떠는 아이들이 있죠? ‘TV 꺼죠, 맛있는 것 해죠..’ 이러는 아이들, 받아오니까 성적이 꽝입니다. 그 때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것입니다.
축구 이야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월드컵 기간이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2002년에 4강에 올랐습니다. 그 때 그것은 사실 기적이었습니다. 처음에 16강에 만 갔을 때도 만족을 했습니다. 그런데, 8강에 오르니까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4강에 오르고 나니까 축구협회에서 4강 진출 파티를 했답니다. 그런데 히딩크는 못마땅했답니다. 그런데 축구 협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만족하자. 우리나라가 개최국인데, 만약에 결승까지 가면 너무 우스운 이야기다.’ 이것은 패배주의적 태도입니다. 히딩크는 결승까지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객관적인 전력은 물론 4강까지 가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우리의 기대치가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전력도 약하구요. 홈 어드밴티지도 없습니다. 유럽은 사실 한 나라처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웃 나라에서 넘어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서울에서 부산 까지 가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그런 나라들과 우리가 붙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기대치가 다릅니다. 이제는 강팀을 만나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다른 나라하고 붙어서 언제나 ‘골을 먹는’ 팀이었습니다. 이틸리아, 아르헨티나 우리가 거들떠도 볼 수 없는 팀이었습니다. 한 골만 넣어도 좋겠다. 겨우 한조 에 있는 불가리아와 비겨서 승점 1점을 얻은 것 그것이 최고의 성적이었습니다.
조별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우리나라를 두고 ‘우리는 무리였어. 이제는 골을 한번 넣었잖아.’ 그걸로 만족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세계적인 축구의 벽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였습니다. 그때 세계 최강팀과 친선경기를 해보고 싶어도 받아 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요? 2002년 평가전에서 프랑스를 불러서 김남일이 지단을 부상 입혀서 2002년에서 프랑스가 힘들었잖습니까? 히딩크는 강한 팀과 붙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어요. 처음에 골을 넣었던 선수도 믿기지 않았던 거예요. 언제나 망설입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이기는 것이 어색할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한국 대표 선수들이 이기는 것이 말이 됩니까? 패배주의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에게 행복한 색깔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경기도 하기 전에 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2002년 이후 한국 축구가 많이 달라졌잖아요? 이제는 너무 기대치가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쉽게 진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어이없이 무너지면 욕을 먹습니다. 이제는 프랑스를 이기고 16강을 확정짓겠답니다. 이전 같으면 웃기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는 그것이 전략입니다. 전략을 수정했데요. 그 말을 하는데, 국민들이 신뢰를 합니다. ‘그래 너희들 할 수 있어!!’ 지고 나면 ‘아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깝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이야기 안한다니까요?
패배주의를 극복하면 방법이 보입니다. 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하는 성도들이여.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도 그러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수레바퀴가 끝날 것을 감지한 바울사도. 이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마무리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더 달려야 할 경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달려간다.’ 잘 보십시오. 이제 그는 노인입니다. 감옥에서 죽을 지도 모를 위치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달려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가지의 성취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사실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는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감옥은 더 이상 뛸 수 없게 만듭니다. 극도로 행동이 제한 받고 사고도 갇힙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죄수는 자신이 여전히 달릴 수 있고, 자유롭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패배주의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달리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경주하는 삶’ 아멘!! 이것이 바울의 삶의 특징입니다. 그는 늙은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 할 때입니다.
감옥에 갇히면 실패한 삶이지,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사실 빌립보서의 배경은 패배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고 늙었습니다. 이제 바울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겁나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패배주의적 상황에 자신을 내벼러 두지 않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해야 되나봐. 이제 지금까지 이룬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내가 어떻게 빌립보 교회 세운 것 알지?’ 이렇게 정리할 것 같은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실은 자신은 해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이미 감옥입니다. 패배주의적 자세를 극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은 갇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름다운 성도들이여 기억합시다. 성도의 삶이란 패배주의적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삶을 힘있게 사는 것입니다.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승리를 원한다면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미리 할 필요 없습니다. ‘나같은 것이 뭘...’ 그런 생각을 내려 놓으십시오. 그것이 패배주의입니다. 주님을 위해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주님을 통해 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낼 수 있다 믿으십시오.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대학을 포기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납니다. 누가 이 아이들 속에서 희망을 빼앗아 간 것인지, 패배주의적 관점을 준 것인지... 우리 대적의 작전입니다. ‘학원 다닐 돈이 있나, 과외를 할 수 있나? ’ 그렇게 생각하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저는 지칠 정도로 공부하고, 병이 날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아이를 가르치다가 졸아서 버리 부딧쳐서 서로 잠이 깨고... 단 한번도 저는 대학을 못 마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믿으십시오. 패배주의적 관점을 내려놓지 못하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자원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내 것만을 가지고 움직이면 내 삶을 위해서만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믿으십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됩니다. 저 교회 다닐 때도 그저 그랬는데... 그러나 아름다운 교회 오면 됩니다.
사정없이 코피 터지고 깨지고, 손가락질 받았던 사람들이 ‘아름다운 교회’만 오면 됩니다. 교회와서 예배만 드리면 간이 커지는 그런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패배주의를 극복하십시오. 그래야 가능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더 뻗어가야 합니다. 패배주의적 관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지금 얻는 승리도 약이 아닙니다. 독입니다. 승리는 거기에서 이루어지지 않아요.
2. 진정한 승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 관점입니다. 누군가 ‘축구는 전쟁이다.’라는 말을 했답니다. 실제로 볼리비아와 콜롬비아는 축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콜롬비아는 자살골 넣은 사람을 총으로 쏴죽인 나라입니다. 정말 전쟁입니다.
사실 군비 경쟁을 하기 위해서 보다, 축구를 잘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것이 더 많은 경쟁과 투자를 합니다. 프랑스에는 대단한 연구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연구를 해 놨다고 합니다.
월드컵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을 치루듯 경쟁하는 선수들을 봅니다. 태클을 하고, 파울을 합니다. 위배되는 스포츠 정신에도 불구하고 승리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물론 성경도 승리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바울도 경주 끝에 받을 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부름의 상을 좇아 달려간다.’ 그렇게 말합니다. 매달 받으려고 간대요. 바울은 상받고 싶은 열망을 가진 rjte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월드컵 축구선수들과는 다른 것 같아요. 바울은 절대로 경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1장부터 전체의 문맥을 보면 바울은 경쟁을 해야 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복음전도 사역’에 대해 부정적이던 사람이 바울이 잡히고 나니까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바울의 지지자와 후원자들은 이것이 못 마땅했나봐요. 그래서 바울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선생님이 못하니까 저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못봐 주겠습니다.’ 바울이 밀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다가 바울 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지지자들은 유력한 지도자이다. 그런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진짜 승계를 받아야 할 적자다..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하나 외모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상대편이 싸우는 것 처럼 일을 합니다. ‘그래 바울이 꼼짝 못할 때, 우리가 이겨 보자.’ 분쟁하듯 투기함으로 일을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마자 지도력을 회복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경쟁 보다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다.
바울은 관심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의 전파였습니다. 그들은 다투듯이 하는데, 바울은 다투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자신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경영학을 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경쟁 구도’로 경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이야기 합니다. 작년에 읽은 책중에 ‘블루 오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블루 오션의 반대는 ‘레드 오션’ 인데요. 피바다라는 의미입니다. 너무 경쟁을 치열하게 하니까 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장이 좁은데 거기에서 경쟁하면 점점 자기 살만 뜯어 먹는 것이고, 오히려 경쟁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블루 오션’ 아직도 창의적인,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깊은 심해에서 경영하라는 것입니다.
이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전파 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상관 없다..’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의 삶에서도 ‘경쟁’ 해야만 하는 삶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쟁은 승리가 없습니다. 얻고 나서도 지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한 가족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친구가 잘하는 것을 내가 잘 하고 싶습니다. 결과는 다치기만 하고, 상처만 입습니다. 여러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열등감만 늘어갑니다. 끝이 없어요. 그런 사람은요.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경쟁 하면 안식도 없습니다. 이미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힘이 가득합니다. 반드시 경쟁해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영혼이 황폐합니다.
그의 삶에 경주는 있지만, 경쟁은 없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는 경주하는 사람은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하고, 상급을 얻어야 합니다. 칭찬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경쟁하지 마세요. 시기하게 되구요. 삐지구요. 분파가 일어납니다.
사역 공동체든, 직장이든 다 한결 같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윈윈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경쟁하지 않으면 가능합니다. 함께 어떻게 이깁니까? 경쟁하지 않아야죠. 우리는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지, 경쟁이 목적이 아니다.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하면 되지, 나는 다른 것 찾으면 되
말씀을 맺겠습니다. ‘8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광고 카피가 마음을 참 숙연하게 합니다. ‘함께 뛰지 못하지만, 꼭 이겨 주십시오.’ 카피라이터가 만들었겠지만, 만약 그 선수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선수는 정말 승리자입니다. 그는 뛰지 못하지만, 이미 함께 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경쟁하지 맙시다. 수영로 교회는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훨씬 덩치가 크다구요? 그래서 경쟁이 안 된다구요? 아니면 우리 교회가 잘 되고 커지면 수영로 교회를 압도할 것이니까요? 그래서 경쟁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수영로 교회는 교회대로 할 일이 있고, 우리는 우리 교회대로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손잡고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점과 달란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 성도들 제발 서로 경쟁하지 마십시오. 임직 투표하고 교회가 쪼개어질 지경입니다. 자기가 분명히 장로가 될 줄 알았답니다. 권사가 될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안됬어요. 교회 옮긴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지금은 조그만해서 그런 말일 필요 없다구요? 아닙니다. 시작부터 마음을 잘 잡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목사부터 그 마음을 잘 붙잡겠습니다. 경쟁하기 시작하면 너무 고단합니다. 얼마나 바보같은 일입니까? 사랑하는 사람들 경쟁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승리를 기대하고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