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rain이 아끼는 국내 음반들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삼청교육대!!!
벌써 이 앨범이 나온지 9년이나 되었군요.
나온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정작 구한 건 4년 전인가 5년전인가......
씨디 케이스의 앞면에는 이런 글이 씌어있는 스티커가 붙어있어요.
'막가파 3인조의 위험천만 첫나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과격한 음악! 그들의 분노가 음반 전체를 붉게 물들인다. <Pax Americana>, <남경대학살> 등 무려 20여곡. 국내 최초 크러스트 코어 음반!'
부클릿을 꺼내보면 엘범 크레딧과 함께 멤버들의 사진이 나와있는데 사진 가운데에 앉아있는 멤버는 Marduk의 티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당시 라인업은
보컬, 베이스 - 이보람
기타 - 이보현
드럼 - 유한주
였습니다. 특히 이보람 씨는 이런저런 온라인 공간에서 많이 뵈어서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현 삼청의 보컬인 서동혁 씨는 백보컬로 참여했네요.
'反 모던락 이모코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습니다. 지금 검색해보니 아직도 살아있군요. 바로 삼청의 이보람 씨가 운영하는 곳인데 카페 이름에서도 엿보이듯 말랑말랑하고 감성적인 음악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회원 대다수였어요. 이 곳에서 다루는 음악들도 사실 저의 취향 중의 일부분인지라 한동안 여기 가입해서 정보도 몰래몰래 얻고 그랬는데 어느날인가... 카페 사람들의 지독한 폐쇄성과 독단에 진저리를 치면서 홧김에 탈퇴했던 기억이 나네요. 블랙메탈, 그중에서도 패스트 블랙메탈과 스래쉬메탈, 80년대 헤비메탈, 데스메탈, 하드코어와 그라인드코어 등등의 음악 얘기가 주로 언급되던 걸 보면 삼청교육대 멤버가 Marduk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이 앨범... 참 좋아요. 국내에도 빡센 음악을 하는 팀들은 무지 많고 빡센 음악이야 원래 양놈들이 하던 음악이니 해외 밴드들의 좋은 음반들도 엄청 많지만 뭔가 답답한 기분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저는 삼청의 이 앨범을 듣습니다. 이보람 씨는 앨범 녹음을 마친 후 이거 너무 사운드가 깨끗하게 나온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다지만 음질은 충분히 더럽습니다. 그게 이 앨범의 백미지요. 징지지징징 치치직직. 수세미를 귀에다 대고 문지르는 듯한 거칠음!!! 삼청의 두 번째 앨범과 삼청이 13steps와 함께 낸 스플릿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음질이 너무 좋아졌거든요. 거친 맛이 말끔하게 씻겨졌다고 할까... 스피드도 웬만한 빠른 음악에 비하면 오히려 느린 편에 속하고 이보람 씨의 보컬도 서동혁 씨의 통쾌한 보컬에 비하면 무슨 동네 아저씨가 울부짖는 것처럼 들리지만 저는 오히려 이 앨범의 그런 점들이 더 마음에 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지막지하게 달려갑니다.
이 앨범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가사인데요. 밴드가 노래를 통해 표현하는 가사가 바로 밴드 멤버들의 정신 세계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면... 삼청의 정신 세계를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음악은 죽이는데... 가사는, 즉 삼청 멤버들의 사고방식은... 참 유치해요.
지독한 마초근성에... 동성연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적 소수자, 외국인노동자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소수자, 여성과 아이들 같은 약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회변혁운동가들 등등에 대한 삼청교육대의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증오심... 이젠 뭐 유명한 얘기지요? 거기엔 어떠한 기준도, 사상도, 배려도, 양심도 없습니다. <Pax Amerikkkana>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겠습니다.
개좆 같은 미국놈들 건방 졸라 떨고 있지
자기들은 문화인이고 우리들은 미개인이지
Lord of this world - Pax Amerikkkana
Lord of this world - Pax Amerikkkana
세계는 이미 정복되었지 미국이 그 주인이야
제3세계 착취협박 정말 비열한 씹쌔끼들
대략 미국의 패권주의를 직설적으로 씹고 있지요. 이런 내용은 저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경 대학살>이란 노래의 내용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남경침공
학살 강간 30만명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남경대학살 - 천황을 위해
남경대학살 - 제국을 위해
남경대학살 - 천황을 위해
남경대학살 - 모두가 거짓
최신 무기 도입 자위용 무기라네
육일기가 다시 펄럭일 때 학살은 또 시작된다!!
이것도 뭐...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죠? 이것 역시 전쟁과 살인을 반대하는 삼청 멤버들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나온 가사라고 치고 넘어갑시다. 다음으로 <Lost life>라는 노래를 보면
잃어버린 시간 어디에서 찾나 우리는 더이상 시스템의 개가 아냐
Lost life - Bring me back
Lost life - fuck the system
Lost life - Bring me back
Lost life - fuck the system
사람살이를 억압하는 사회 구조, 즉 시스템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근거나 논리는 없지만 뭐 노래 가사니까 그 정도는 감안해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사실 시스템이 사람살이를 옥죄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거니까요.
이런 가사들만 보면 삼청교육대라는 밴드가 상당히 정치적 의식이 있는, 즉 머리가 깨어있는 진보적 밴드라 여길 수 있을 법 한데... 문제는 다른 곡의 가사들에 있어요. <친구사이>라는 곡의 가사를 보겠습니다. 원문은 영어인데 제가 대충 번역했어요.
좆 빠는 걸 기분 좋아하고
엉덩이에 사정하는 걸 사랑이라 부른다
에이즈를 퍼뜨리는 게 인권이냐?
그런 건 좆 같은 넌센스야.
다 죽어버려!!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격한 증오를 대놓고 토해놓은 그런 가사지요. 에이즈가 동성연애로 인해 전염되는 게 아니라는 건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또 <프로박테리아>라는 곡의 가사를 보면
너희들은 항상 민중을 위한다고 떠벌리고 투쟁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배가 고파
허구헌날 혁명을 외치는 너희들도 알고보면 모두 다
학삐리 부르주아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를 살짝 바꾼 듯한 제목의 이 노래는 불의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사회변혁운동세력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보람 씨는 이런저런 온라인 공간에서 노조나 학생운동을 언급하며 빨갱이라는 시대착오적 극언도 서슴지 않고 함부로 내뱉곤 했지요.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시스템의 개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멤버들이 말이죠, 정작 다른 분야에서는 시스템이 던져주는 먹이를 그대로 받아먹고 있는 개가 되고 있다는 거에요!!!!
생각해봅시다. 동성연애가 에이즈를 유포하고 인륜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건 누구의 주장입니까? 교회와 유생들을 비롯한 보수적인 분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동성간의 결혼은 아직도 합법화 되려면 멀었고, 아마 노동력의 재생산 즉 정상적인 출산이 불가능한 결합이기에 국가가 자꾸 딴지를 걸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동성연애 역시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제도적인 억압 때문에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잖아요. 커밍아웃한 연예인들은 변태 취급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호모새끼야!!", "이런 게이같은 놈!!" 이런 말이 버젓이 욕으로 쓰이는 현실은 분명 깨뜨려야 할 시스템의 벽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삼청교육대의 멤버들은 동성연애까지는 인정하기 싫었나보지요. 성적 소수자들 까지는. 그러면서 시스템의 개가 되기는 싫다고 외치다니.
'빨갱이'나 '운동권'이라는 단어 역시 누가 유포해낸 말들이었지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남한에 단일정부가 수립되면서 남한에 남아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싹 쓸어낼 필요가 있었을 때 사상이라는 걸 잣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죽인 이승만 친미정부가 썼던 말 아닙니까.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개무식 군사독재정부에서 정부에 자꾸 딴지 거는 진보세력들을 무차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 아닙니까. 독재하고 정권 잡으려는 데에 방해하면 무조건 빨갱이라 뒤집어 씌우고 잡아가서 죽이면 끝나는 그런 시대가 바로 지금까지 50여년 동안 이어져왔지요. 시스템은, 그 잘난 권력자들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나 운동권으로 몰아서 늘 족쳐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시스템의 세뇌에 우루루 영합하며, 뭔가 '불온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시 빨갱이나 운동권으로 몰았습니다. 그 말의 가장 큰 무서움은, 사회변혁세력들을 사회와 격리시키면서 간단히 무슨 죄인처럼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어요. 가끔은 조롱거리로 만들기도 하고. (개콘 봉숭아학당의 '운동권' 캐릭터 기억하시나요. 사회의 진보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과 억압은 완전히 은폐시킨 채 단순히 웃음거리의 소재로 쓰기만 했던)
정말 시스템을 깨부수려고 했다면 삼청교육대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었어요. 사회진보세력은 곧 빨갱이이며 학삐리 부르주아지라고 하는 건 바로 시스템이 지난 수십년 동안 되풀이해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늬들은 민중을 위해 투쟁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늬들이 바꿔놓은 게 뭐가 있어?" 뭐 이런 논리지요. 봉건제도 없애는 데만 수백년이 걸렸는데 세상을 바꾸는 일이 어디 쉽겠습니까. 멀고 먼 길이겠지요.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조직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표현해보려는 사람들의 작은 노력일테고. 하지만 시스템의 개가 되어버린 삼청은 그런 노력들을 다 빨갱이들의 한심한 짓거리라고 생각하겠지요.
이 모든 것으로 무슨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삼청은 모든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를 토해내고 있다는 거에요. 막말로, 좋아하는 것 빼고는 다 싫어하는 거죠. 거기에는 어떤 기준도, 사상도, 배려도, 양심도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자꾸 힘자랑만 하니까 싫고, 시스템도 뭔가 갑갑하니까 싫고, 동성연애자랑 운동권들은 재수없으니까 싫고... 이러한 증오의 궤적에는 어떠한 일관성도 없어요. 그냥 싫으니까 싫은 겁니다. 시스템이란 추상적인 권력체가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것들에 어느정도 파고들어 있고 무엇을 얼만큼이나 억압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음악의 가사가 밴드 멤버들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도구라 가정한다면, 삼청 앨범의 가사에 멤버들이 모두 동의했다고 가정한다면 삼청은 결국 자위행위하고 정액을 아무데나 내질르듯 자신들의 증오를 아무렇게나 토해놓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이들이나 흔히 그러는 유치한 짓이지요.
친일 친독재 시인이자 천재 시인인 서정주를 보면서 느끼는 착잡한 감정을 그래서 삼청을 보면서도 느낀다는 거에요. 음악은 정말 죽이게 잘 만들면서 왜 생각들이 이 모양인지. 근데 사실 일관성없는 증오로 뒤범벅된 가사는 삼청의 초과격 개무식 음악에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리긴 해요. 크러스트 코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삼청의 이 앨범에 담겨진 음악들에는 그 어떤 기준도, 사상도, 배려도, 양심도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배설, 그야말로 완전한 감정의 배설인 셈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 정도의 가사로 삼청을 호되게 몰아세우는 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어쩌면 삼청 멤버들 역시 생각은 가사처럼 하지 않지만 음악에 어울리는 가사를 쓰다보니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착잡합니다. 음악이 구리면 말이라도 안 할텐데...
생각난 김에 간만에 이 앨범 들어봐야겠네요. 국내에서 나온 빡센 밴드들의 앨범은 웬만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사로나 음악으로나, 가장 과격하고 무식한 앨범을 한 장 고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삼청의 이 앨범입니다. 어서 빨리 재발매되어야 합니다. GMC에서 재발매한다는 소리가 꽤 오래전부터 나왔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끝으로 이 앨범을 관통하는 한 줄의 명 가사를 소개하지요. <Fucked up system>이라는 곡입니다. 가사 떨렁 한 줄이에요.
Education - Brainwashing
교육과 세뇌의 가장 큰 피해자들인 삼청을 기리며. 어서 빨리 세번째 풀렝쓰를 발표해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