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다산시문집》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전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중에서 시문집 22권을 국역서 10책(색인 1책 포함)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번역본의 대본이 된 신조선사본(新朝鮮社本, 1936, 활자본) 《여유당전서》는 총 154권 76책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문집은 분량면에서 다산 저작의 약 7분의 1에 해당한다. 그만큼 다산의 저작은 방대하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다산의 주저(主著)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이미 번역 출간한 바 있거니와, 이제 이 시문집을 완역함으로써 다산학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산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시대배경과 다산의 생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이조 후기의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교육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500여 권에 달하는 이 저술들은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우리의 고전이 되고 있다. 다산의 저작들이 이토록 오늘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의 사고가 당시의 민족현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의 민족현실은 어떠했는가?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는 이조 봉건사회의 해체기로서 봉건적 병폐가 누적되어 그 말기적 현상들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의 이조 사회는 전란(戰亂)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또한 국가에서는 고갈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온갖 협잡을 자행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과 이를 둘러싼 지방관들의 부정부패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권층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그 권력투쟁을 통한 자체 분열의 결과 살아남은 소수의 특권층이 국가의 요직을 독점하게 된다. 이들을 벌열(閥閱)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자기네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광대한 토지를 사유화하게 되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무전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고 만다.
학문의 경향도 권위주의화되고 경직된 주자학(朱子學) 일변도로 흘러 비생산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주자학 자체가 원래 강한 보수성과 체제유지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다, 이 시기에 이르면 주자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하고 있어서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용납하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집권층의 자기방어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어 주자의 이름으로 정적(政敵)을 탄압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국과 민족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한 일군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실학자(實學者)들이다. 그리고 다산은 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자였다.
다산의 생애는 대체로 수학기(修學期:1789년, 28세까지), 사환기(仕宦期:1800년, 39세까지), 유배기(流配期:1818년, 57세까지), 해배 이후(解配以後:1836년, 75세까지)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수학기(修學期)
다산은 1762년(영조38)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정재원(丁載遠)과 모친 해남 윤씨(海南尹氏)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명관(名官)이며 학자였고,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다산은 자질이 영특하여 7세 때 오언시(五言詩)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지은 시 중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구절이 있다. 10세 이전의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6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고 평생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하게 되었다.
22세(정조7) 때 증광 감시(增廣監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이것이 정조(正祖)와 다산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후 5, 6년 동안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는 한편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인 반제(泮製)에 여러 번 뽑혀서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28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다.
(2) 사환기(仕宦期)
이후 다산은 정조의 총애 속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31세 때에는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지어 바쳐 활차(滑車)를 이용함으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케 했다. 33세에는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경기도 연천(漣川) 지방을 순찰한 후,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金養直)과 삭녕(朔寧)의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을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게 했다. 이 암행어사 길에서 그가 목격한 피폐한 농민들의 참상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민중지향적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34세에 병조 참의(兵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나,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이 연루된 것을 트집잡아 반대파들의 공격이 심해지자, 정조는 다산을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5개월만에 다시 내직(內職)으로 불러들였다.
36세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노론(老論) 벽파(辟派)들의 모함이 심해져서 이른바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하려 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자신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정조도 하는 수 없이 그를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내보냈다. 곡산 부사로 재직한 2년여 동안 그는 명관(名官)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때 겪은 일선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이 후일 그가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에 커다란 자본이 되었다.
38세에 다시 내직으로 발령받아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형조 참의로 재직한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후일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집필하였다. 그 동안 천주교와 관련하여 그를 무고하는 상소가 잇따르자 39세 되는 해 봄에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처자와 함께 고향인 소내[苕川]로 낙향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1800년)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다산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3) 유배기(流配期)
1801년(40세)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수많은 남인(南人) 시파(時派)들이 투옥되고 참형을 당했는데, 이때 다산의 셋째 형 약종(若鍾)은 옥사하고 둘째 형 약전(若銓)은 신지도(薪知島)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이른바 ‘황사영(黃詞永) 백서(帛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주막집과 보은산방(報恩山房) 등에서 거처하다가 1808년(47세) 다산(茶山)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 해배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강진에서 18년 동안 실로 정력적인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환갑 때 지은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나는 해변가로 귀양을 가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옛날 어진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대도(大道)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야 흔연히 스스로 기뻐하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상 다산의 주요한 저술들은 이 시기에 집필되었거나 구상된 것이다. 말하자면 다산은 어쩔 수 없는 유배지를 창조적 공간으로 활용한 셈이다. 특히 이 시기에, 경세학(經世學)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經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강진에서 이른바 18제자들을 길렀으며, 혜장(惠藏), 초의(草衣)와 같은 고승(高僧)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4) 해배(解配) 이후
1818년(순조 18) 57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다산은 저술을 계속했다. 미완이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흠흠신서》, 《아언각비(雅言覺非)》, 《매씨서평(梅氏書平)》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인 1836년(헌종 2) 75세를 일기로 그는 이 세상을 하직했다.
2. 다산사상의 개요
다산의 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실학자로서의 다산의 면모는 실학시대 이전의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朱子學) 또는 성리학(性理學)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성리학은 주로 철학적 제 문제를 관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지만, 우리나라 중세기의 성리학은 단순히 철학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중세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성리학에 도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리학의 최대 과제는 천리(天理) 또는 도(道)를 체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천리는 무형의 추상물로서, 모든 현상을 있게 했고 또 현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각활동 너머에 있는 선험적(先驗的)인 어떤 섭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모든 도덕질서나 사회제도 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지 않고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천리의 구현으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사회제도를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되며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이 성리학의 세계관이다.
다산은 이와 같은 성리학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섰다. 그는 무형의 추상물인 천리 또는 이(理)를 세계의 최고 지배원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理)의 구현이라 생각되는 모든 사회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로 연장된다. 여기에는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지주와 전호(佃戶) 등의 종적(從的) 신분관계도 바뀔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불합리한 사회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다산사상의 중심에는 개혁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사상의 핵심은 개혁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의 우리나라를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로 진단하고,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를 심각히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의 궤적이 방대한 저술로 응축된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제도의 개혁이다. 각종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다산의 개혁안을 담은 대표적인 저술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이다. 《경세유표》는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가기구 전반에 걸친 개혁의 청사진이고, 《목민심서》는 당시의 법질서 안에서의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안이다.
3. 《다산시문집》에 대하여
다산이 환갑 때 쓴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경집(經集) 232권, 문집(文集) 126권, 잡찬(雜纂) 141권, 총 499권인데, 그의 후손이 기록한 〈열수전서 총목록(洌水全書總目錄)〉에는 경집 250권, 문집 126권, 잡찬 166권 등 총 542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환갑 이후의 저술들이 추가된 결과일 것이다. 이를 신조선사에서 76책 154권의 활자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신조선사본은 시문집(詩文集) 22권, 잡찬집(雜纂集) 3권, 경집(經集) 48권, 예집(禮集) 24권, 악집(樂集) 4권, 정법집(政法集) 39권, 지리집(地理集) 8권, 의학집(醫學集)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역 다산시문집》은 이 신조선사본의 시문집 22권을 완역한 것이다.
이 시문집은 전형적인 문집의 형태로 시(詩)와 서(序)ㆍ기(記)ㆍ발(跋)류의 각종 문체의 글을 수록한 것으로 다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시문집을 통하여 우리는 다산사상의 전모를 조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문집은 다산사상의 축약판이라 말할 수 있다. 이제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1) 정경사상(政經思想)
시문집에 나타난 정경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론(田論)〉이다. 다산이 제도 개혁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토지제도의 개혁이었다. 그가 진단한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농민의 굶주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다산의 방대한 개혁안도 농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농민들을 굶주리게 한 토지소유의 실상을 〈전론〉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지금 국중(國中)의 전지(田地)는 대략 80만 결(結)이고, 백성이 대략 8백만 인구(人口)인데, 시험삼아 10구(口)를 1호(戶)로 쳐본다면 1호마다 전지 1결씩을 얻은 다음에야 그 재산이 똑 고르게 된다.
지금 문관(文官)ㆍ무관(武官) 등의 귀신(貴臣)들과 여항(閭巷)의 부인(富人) 가운데는 1호당 곡식 수천 석(石)을 거두는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1백 결(結)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9백 90명의 생명을 해쳐서 1호를 살찌게 하는 것이다. 국중의 부인(富人)으로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 같은 경우는 곡식 1만 석을 거두는 자도 있는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4백 결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3천 9백 90인의 생명을 해쳐서 1호만을 살찌게 한 것이다.〔국역본, Ⅴ책, P.81〕
이러한 토지소유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다산은, 원칙적으로 토지는 농민의 소유이어야 하고 생산물은 직접 생산에 종사한 사람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시킨 것이 그가 〈전론〉에서 제시한 ‘여전제(閭田制)’로의 개혁안이다. 모든 사람들이 전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생산물을 노동일수에 의하여 공동으로 분배하자는 것이 이 개혁안의 골자이다. 다산이 이와 같은 혁명적인 개혁안을 제창한 것은 그가 〈전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농사짓는 사람은 전지를 얻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얻지 못하게 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얻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얻지 못하게 되는’ 사회, 또한 ‘힘쓴 것이 많은 사람은 곡식을 많이 얻게 되고, 힘쓴 것이 적은 사람은 곡식을 적게 얻게 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토지문제와 함께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일컬어지는 환곡(還穀)과 군포(軍布)의 불합리한 점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환향의(還餉議)〉(권9), 〈환상론(還上論)〉(권12), 〈신포의(身布議)〉(권9) 등의 글이 그것이다.
천자(天子)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며, 대중이 추대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대중의 의사에 따라서 천자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힌 〈탕론(湯論)〉(권11)과, “통치자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백성이 통치자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백성들의 필요에 의하여 통치자를 선출하였기 때문에 통치자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 〈원목(原牧)〉(권10) 등의 글에서 우리는 다산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다산은 봉건 지배층의 기반을 강화,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적인 여러 장치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봉건제도의 존립은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농업 생산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고, 위로는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바, 다산은 자기 시대의 모든 착취가 이 봉건적 신분제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지역적 차별대우와 적서(嫡庶)의 차별, 당쟁에 의한 정치적 요인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지 못한다고 말하며 이의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통색의(通塞議)〉권9〕 그리고 이와 같이 불합리한 신분제도가 주로 과거제도(科擧制度)에 의하여 유지, 강화되어 왔기 때문에 과거제도 또한 그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과거제도에 대한 비판은 철저한 것이어서 “과거(科擧)의 학문은 이단(異端) 가운데에서도 그 폐해가 가장 혹심한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과거의 학문은 가만히 그 해독을 생각해보면 비록 홍수와 맹수라도 비유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위반산정수칠증언(爲盤山丁修七贈言)〉,권17〕심지어 그는 일본을 예로 들어서,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기 때문에 문학이 뛰어나고 무력도 중국과 대항할 만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2) 과학사상(科學思想)
다산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체의 비합리적인 것을 배척했다. 이것은 그의 자연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성리학자들이 자연을 심성도야(心性陶冶)의 도구로 생각한 반면 다산은 자연을 그 자체의 법칙성을 가진 객체로 인식했다. 그럴 때에 자연 속에 내재해 있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는데 이것은 과학정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과학정신이란 자연을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자연을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합리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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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손목의 맥(脈)을 짚어 병을 진단하는 진맥법의 부정확성을 설파했고, 얼굴 모양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관상법(觀相法)을 배격했으며, 갑자을축을 따져 길일(吉日)을 택하는 따위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맥론(脈論)〉, 〈상론(相論)〉, 〈갑을론(甲乙論)〉,권11〕그는 또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도 맹렬히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사(地師)의 아들이나 손자로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나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된 사람을 몇 명이나 볼 수 있는가? ㆍㆍㆍㆍㆍㆍ 재상(宰相)으로서 풍수술(風水術)에 빠져 여러 번 부모의 묘를 옮긴 사람치고 자손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사서인(士庶人)으로서 풍수술에 빠져 여러 번 부모의 묘를 옮긴 사람치고 괴이한 재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국역본,Ⅴ책, P.145, 〈풍수론〉 5〕
그는 심지어 풍수술을 가리켜 “아, 이야말로 꿈속에서 꿈꾸고 속이는 속에서 또 속이는 연극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죽기 전 아들들에게 “내가 죽으면 집의 뒷동산에 매장하고 지사(地師)에게 묻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로 풍수설을 배척했다.
이와 같은 합리적 사고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다산의 저작들에서 이러한 과학적 인식의 흔적을 수없이 대하게 된다. 그는 밀물과 썰물이 천지의 호흡 때문에 일어난다는 속설을 일축하고 그 원인을 해와 달의 운동에서 찾았다.〔〈해조론(海潮論)〉,권11〕그는 렌즈의 원리에 대해서도 상당히 정교한 이론을 개진했다. 근시(近視)와 원시(遠視)에 대한 종래의 견해는, “가까이 보지 못하는 것은 양(陽)의 부족 때문이다.” 또는 “가까이 보지 못하는 것은 수(水)의 부족 때문이며 멀리 보지 못하는 것은 화(火)의 부족 때문이다.”라 하여 음양오행설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다산은 이를 비판하여 “근시, 원시는 다만 눈동자가 볼록한가 평평한가에 달려 있는 바, 평평하면 시선의 초점이 가깝기 때문에 근시가 된다.”라 하여 사람이 늙으면 눈동자가 평평해져서 초점이 멀어져 원시(遠視)가 된다고 했다.〔의학집(醫學集),권6, 〈근시론(近視論)〉〕
이 밖에도 시문집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논증한 〈지구도설(地球圖說)〉(권10),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種痘法)을 연구하여 보급한 전말을 기록한 〈종두설(種痘說)〉(권10), 수원성(水原城)을 축조할 때 기중기(起重機)를 창안하는 등 여러 가지 기술적인 방법들을 제시한 〈기중도설(起重圖說)〉을 비롯한 여러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학정신이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불후의 의서(醫書)를 탄생시킨 것이다. 다산의 자연과학적 업적이 근대 과학의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고, 또 상당 부분은 서양의 이론을 수용한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사물을 관찰하는 그의 합리성은 철저한 바가 있다. 다산의 과학적 사고는 〈기예론(技藝論)〉(권11), 〈계림 옥적변(鷄林玉笛辨)〉, 〈영석변(靈石辨)〉, 〈철마변(鐵馬辨)〉(이상 권12) 등의 글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3) 문학의 세계
다산은 시문집의 1권에서 7권까지 2500여 수의 시(詩)를 남긴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그의 산문의 비중에 눌려 시인으로서의 다산의 면모가 상대적으로 축소된 감이 있지만 그는 시에 있어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그의 시에는 그의 실학정신이 일관되게 구현되어 있다.
위대한 시인은 개인적인 정서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자기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의식이 시의 밑바탕을 이루는 법이다. 설령 개인적인 정서를 노래하는 경우에도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보다 큰 문제가 개인의 경험 속에 수렴되고 집약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산의 시에서 우리는 이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배지 강진에서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는 것이라면 시(詩)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라면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서지 않고 학문이 순전하지 못하며 대도(大道)를 듣지 못하고 임금을 요순(堯舜)의 성군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히려는 마음을 갖지 못한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너는 힘쓰도록 하여라.〔국역본, Ⅸ책, P.17,〈寄淵兒〉〕
이와 같은 문학론을 그는 실제 작품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이조 후기의 사회적 모순들이 남김없이 고발되어 있다. 잘못된 사회제도가 백성을 어떻게 멍들게 하며, 관리들의 횡포로 농민들이 얼마나 고통당하는가를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시냇가 찌그러진 집 뚝배기와 흡사한데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 망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다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된다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 걸려 있고
닭 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놓여 있다
깨진 항아리 뚫린 곳 헝겊으로 발랐고
찌그러진 시렁대는 새끼줄로 얽매었네
ㆍㆍㆍㆍㆍㆍ 후략 ㆍㆍㆍㆍㆍㆍ
〔국역본, Ⅰ책, P.215, 〈교지를 받들고 지방을 순찰하던 중 적성의 시골집에서 짓다〉〕
이 시는 그가 33세 때 암행어사로 경기도 연천(漣川) 지방을 순찰하면서 목격한 한 농가를 묘사한 작품의 일부이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전 생애를 일관하는 민중지향적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다산은 당시의 사회문제들을 우화시(寓話詩)의 형태를 빌려 노래하기도 했다.
제비가 처음 날아와서는
쉬지 않고 비비배배 지저귀네
무슨 말 하는지 뜻은 잘 몰라도
집이 없다고 호소하는 것만 같애
늙은 고목나무 구멍도 많은데
왜 거기서 안 사는가 했더니
다시 날아와 비비배배하는 소리
사람이 한 말에 대꾸하는 것 같애
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와 쪼아먹고
홰나무 구멍에는 뱀이 와 더듬는다고
〔국역본, Ⅱ책, P.211, 〈고시 27수〉 중에서〕
이 시에는 제비와 황새, 제비와 뱀이 대조되어 있는데, 이 경우 황새와 뱀은 강자이고 제비는 약자이다. 다산은 자연계에서의 강자와 약자 간의 생존경쟁에서 빚어지는 대립관계에도 관심이 있었겠지만, 제비에 가탁된 일반 민중의 슬픔과 황새나 뱀에 가탁된 지배층의 횡포를 말하려는 것이 다산의 의도이다.
다산은 이 밖에도 호랑이와 양, 구렁이와 까치, 고래와 작은 물고기 등 본질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들을 우화시의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다산의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이와 같은 자연계에서의 강자와 약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와의 대립은 거의가 봉건 지배층과 일반 백성들과의 대립을 말하기 위한 알레고리라 볼 수 있다.
다산의 시에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그의 시가 강한 민족 주체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 시를 쓰면서 민족 주체의식을 담는다는 일이 언뜻 모순되는 말인 것 같지만 다산은 그 나름대로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적인 권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는 강진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십 년 이래로 괴이한 일종의 의논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문학을 크게 배척하여 모든 선현의 문집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데 이는 큰 병통이다. 사대부의 자제로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고 선배의 문집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의 학문이 고금을 꿰뚫었다 할지라도 자연 조잡하게 될 것이다. 〔국역본, Ⅸ책, P.8, 〈寄二兒〉〕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일을 인용하는데,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 《고려사》, 《국조보감(國朝寶鑑)》, 《여지승람(輿地勝覽)》, 《징비록(懲毖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기타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취하여 그 사실을 채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해서 시에 넣어 사용한 뒤에라야 세상에 명성을 얻을 수 있고 후세에 남길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십육국 회고시(十六國懷古詩)》는 중국 사람이 판각하여 책으로 발행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다. 〔국역본, Ⅸ권, P.18, 〈寄淵兒〉〕
우리나라의 고전에서 사실을 뽑아내고 우리나라의 지명을 고구(考究)하여 시에 인용해야만 후세에까지 남을 수 있는 작품이 된다고 말한 것은 민족적 색채가 풍기는 시를 쓰라는 말이다. 그러한 작품의 예로 든 유혜풍의 〈십육국 회고시〉는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말하는데, 이 작품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노래한 영사시(詠史詩)이다. 이와 같이 〈이십일도 회고시〉류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데에서 다산의 문학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침내 그는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국역본, Ⅲ책, P.144, 〈老人一快事〉〕라 하여 ‘조선시(朝鮮詩)’를 쓰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는 실제 시에서 우리나라의 고사(故事)를 사용하기도 하고 순수한 우리의 토속어를 한자화(漢字化)하여 시어(詩語)로 사용하기도 했다. ‘보릿고개’를 ‘麥嶺’으로, ‘높새바람’을 ‘高鳥風’ 등으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서 사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했고, 이 땅에 사는 한 우리의 정서를 우리식으로 노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한자를 빌려 쓰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를 중국문학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중국적인 기준에 의하여 평가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중국을 정신적인 고향으로 생각하고 우리 문학을 중국 문학의 주변문학(周邊文學)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다산의 견해는 매우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시 이외에도 전(傳), 기(記) 등의 글에서 다산의 문학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다.
(4) 비지류(碑誌類)의 글들
《다산시문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글은 비지류 특히 묘지명(墓誌銘)이다. 그 중에서도 집중본(集中本) 〈自撰墓誌銘〉은 다산 연구의 필수자료이다. 이 글은 그가 환갑을 맞던 해인 1822년에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이 장문의 묘지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어서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사회사(社會史)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저술과 학문적 역정(歷程)을 자세히 기록해 놓아서 역시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이기양(李基讓), 오석충(吳錫忠), 윤지범(尹持範) 등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억울하게 죽었거나 피해를 입은 선배와 지기(知己)들의 묘지명도 중요한 자료이다. 다산은 실로 야심적인 의도를 가지고 이 묘지명들을 지었는데, 이 인물들의 누명을 벗기고 역사적 진실에 접근함으로써 어려운 시대를 살다간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학문세계를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유배시절 초기 다산의 고독을 달래준 후배이자 친구였던 파격적인 승려 혜장(惠藏)을 위해 지은 〈아암 장공 탑명(兒菴藏公塔銘)〉을 비롯한 여러 편의 글들도 다 읽을 만하다.
(5) 서간문(書簡文)
다산의 시문집에서 서간문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유배지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산의 생활철학, 학문하는 자세, 문학적 견해 등이 곡진하게 나타나 있다. 강진에서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된 중씨(仲氏) 약전(若銓)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뜨거운 형제애(兄弟愛)를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술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질문하는 편지글에서 도도한 다산사상의 핵심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선배나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산의 중심사상이 다른 저술에서보다도 더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중에서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와 3년여에 걸쳐 주고받은 서한이 눈길을 끈다. 이 왕복서한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사단장(四端章)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일대 토론으로서, 사단(四端)ㆍ칠정(七情)ㆍ인심(人心)ㆍ도심(道心) 등 유학의 기본 문제들에 대한 다산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이상으로 《다산시문집》의 내용을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많은 중요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일일이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다산은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서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다. 다산은 한국이 낳은 최대의 사상가이다. 다산 이전에 다산만한 사상가가 없었고 다산 이후에도 다산만한 사상가가 쉽사리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오직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사색하고 저술하고 활동했다. 유배되기 전이나 유배기간 중이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은거할 때나 한결같이 자신의 영달보다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이 점이 그의 위대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