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 해서 산소에 갔다
가시던 날에는 눈이 왔는데
익은 벼 이삭들이
머리숙인 무덤 앞에 서니
자욱한 안개비 풍경을 가린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넓은 잎 떨구며
울고 섰는 것이 비파나무라더니
칠순을 겨우 넘기고 가실 일을
엇길로만 가던 자식이 비파나무로 서서
울고 우는 것이다
마른 손으로 평생 일 못 놓으시고
돌갓, 돌미나리 보자기에 싸서
회나무 서 있는 동구까지 따라와
무명 밤물 들인 동저고리 바람에
수척한 얼굴로 서 있는
어머니 산소 앞에 서서
비파나무로 울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낸 도광의 시인의 '비파나무로 서서'란 시이다. 대학을 나오고도 고향 과수원에서 빈둥거리던 아들을 두고 "木月인가 뭔가를 한다고 맨날 저러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던 어머니. 이제는 가고 없는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나는 도 시인같이 어머니를 그리는 시를 대할 때 마다 가슴이 저려온다.
이렇게 좋은 시를 쓸 능력이 없는 것도 그러려니와, 현실적으로 이런 시를 쓸만한 낭만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이런 시는 더욱 내 가슴을 적신다. 나는 대구의 작가 이수남이 '향토문학연구' 제7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의 첫도입부에 등장한 이 시를 몇번이고 읽었다.
작가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눈시울을 적실만한 시이다. 향토의 작가가 현존하는 대구의 문인을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을 쓴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작가나 주인공인 시인이나 내가 잘 아는 대구의 문인이고, 둘다 매일신춘문예 출신인 것도 각별한 인연이다. 그리고 도광의 시인은 내가 문화부에 와서 문학을 담당하던 시절 처음 만났던 풍류객이었다.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아온 그를 내가 좋아하고, 시와 문학을 이해하는 나를 그도 좋아하게 되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곧 부화될 문학을 품은 젊음과 열정으로 새벽달이 뜰 때까지 울퉁불퉁 마셔대던’ 문학청년시절부터 지역 문단을 지켜온 두사람을 나는 잘 안다. 그러다보니 그러잖아도 리얼한 작품 내용들이 손에 잡힐 듯 영상처럼 되살아나곤 했다.
작가 이수남은 소설속 주인공이 교과서에 나오는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쉼표 하나 빼먹지 않고 줄줄 외우고, 정석모.박목월.박훈산.전상렬의 시를 막힘없이 읊어대는 문인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 그렇다. 나는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몇번이고 그같은 광경을 접했다. 술이 거나하면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애조띤 노래가락은 더욱 시적이다.
그래서 나는 도 시인과의 술자리를 아주 좋아한다. 주흥이 도도하면 나도 몇구절의 시를 읊조리고 정감나는 노래로 맞대응을 하기도 한다. 작가가 쓴 내용대로 나는 "시는 존재의 한 순간을 잊지 않는 절박한 심정의 표현이자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도 시인의 말이 참 좋다. 그리고 오랜 세월 술독 안의 용수에 고여든 곰삭은 술 떠낸 듯 한 시 한편을 떠올린다.
시인이 경남 마산고에서 창신고 교사로 옮겼을 무렵 밤새 술을 마신 시인이 눈내린 아침 하얀 포구를 바라보며 단숨에 써내려 간 '갑골길'이란 시다. 이 시에는 내 貫鄕(관향)인 咸安(함안)이 나오고 '趙氏'란 구절도 들어있어 더 눈길이 간다. 이 시가 매일신문에 발표되었을 때 박주일 시인은 도 시인에게 키스 세례까지 퍼부었고, 김동리 선생은 "다소 인생파적이지만 슬픈 감도 없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경남 함안여고(咸安女高)
백양(白楊)나무 교정에는
뼈모양의
하얀 갑골(甲骨)길이 보인다.
함안 조(趙)씨, 순흥 안(安)씨, 재령 이(李)씨
다투어 살고 있는
갑골리(甲骨里)에는
바람 많은 백양(白楊)나무 생애로
노총각 한선생(韓先生)이 살아 왔다.
산까마귀 울음 골짝에 잦아
외길진
뙈기밭 능선을 이웃하면
함안 조(趙)씨, 순흥 안(安)씨 사당(祠堂)들이
기왓골에 창연(蒼然)하다.
명절날 둑길 위로
분홍 치맛자락이
소수레 바퀴의
햇살에 실려가면
닷새만에 서는
우시장(牛市場) 읍내에는
건장한 중년(中年)들로 파시(波市)가 선다.
어쩌다가 높은 둑길 위로
청람(靑藍)빛 가을이 펼쳐지면
청동색 강이 오히려 외롭다.
우마차(牛馬車) 바퀴에
옛날이 실려가면
함안여고(咸安女高)
백양(白楊)나무 교정(校庭)에서
사십대(四十代) 노총각 한선생(韓先生)은
유년(幼年)의 여선생(女先生)을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벼 익은 하늘의
먼 황소 울음에 젖다가도
삼천포 앞바다의
편(片) 구름을 바라본다.
소설 중에는 대구의 웬만한 문인이라면 한두자락의 추억쯤은 남겼을 법한 단골술집도 숱하게 등장한다. 주인공이 쌀을 맡기고 술을 마시던 아카데미 극장 뒤 '옥이집', 쌀막걸리의 추억이 서린 '쉬어가는 집', 생맥주집 '가보세'와 주인이 일본여자였던 '새집', 향촌동의 '고구마집'과 나도 문인들과 몇번이나 들락거린 적이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인근의 '토담'집 등.
작가는 도광의의 '酩酊(명정) 40년'을 "술이 와촌의 동강 강물처럼 흥건히 흘러 시와 삶을 적셨다'고 표현했다. 경산 와촌은 그의 고향이다. 소설 속에는 경향의 숱한 문인들도 주인공과 함께 낭만의 공간을 연출한다. '지도 꾸부정하게 키 크고 나도 그렇고,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것도 나와 같고, 월급으로 아낌없이 친구 접대하기 좋아하는 도광의가 나하고 어찌 그리 비슷한지...'.
교직을 마무리한 효성여고 시절 같이 근무했던 문인 서정호와의 일화도 리얼하게 되살렸다. 도광의와 김동리 선생과의 특별한 관계도 소개하고 있다. 도 시인에게 '木雨'(목우)라는 호를 준 사람도 바로 김동리였다. 호의 뜻 또한 '후박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작가가 소설의 제목으로 인용한 것이기도 하다.
木雨, 후박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 정감나는 그의 시를 읽는 것 같고 애조띤 그의 노래가락을 듣는 것 같다. 소설에는 지금도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권기호 시인과의 인연과 얼마전 타계한 김춘수 시인과의 사제간의 정, 제자인 안도현 시인과의 별난 추억도 소개했다. 얼마전 경북대 교수로 정년퇴직한 권기호 시인도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또 술을 사랑하는 문인으로 나와는 수차례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김춘수 시인은 2년전 대구문화예술회관 인근 레스토랑에서 인터뷰를 위해 오랜 얘기를 나눈 원로시인이었다. 당연히 스토리가 내게는 더 실감이 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주인공을 '대한민국의 어떤 시인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의리있고 술에 살고 시에 죽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도 시인의 제자들이 손으로 엮은 '화갑기념문집' 출판기념식장 정경과 '갑골길' 이후 20여년만에 출간한 두 번째 시집 '그리운 남풍' 출판기념회의 풍경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술만 먹는 도광의'가 아니라 '사람 좋아하고 제자 잘 만든' 도광의였던 것이다. 주인공 도 시인은 경산시 와촌면 동강리 고향의 정경을 꿈에도 잊을 수 없다.
물 젖은 나락을 내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던 부모님의 애환이 묻힌 그곳을.... 경북대 대학원 등록금을 몽땅 술값으로 날려버렸던 시인은 당시 선친의 피땀어린 아픔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대구문인협회장을 두 번 역임했고 교직에 있으면서 40여명의 유명시인을 제자로 배출한 도광의 시인. 그는 요즘 '우슬'이라는 애견과 산에 오르며 건강과 시를 찾고 이따금씩 장단맞는 문인들과 술을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
12일 밤 권기호 시인, 작가 이수남, 제자이기도 한 작가 박상훈 그리고 나와 함께 한 술자리도 그런 것이다. 나는 그날 밤 도 시인과 함께 우리 아파트가 있는 시지동으로 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통음을 했는데, 어떻게 집으로 들어갔는지 기억이 없다. 젊은 내가 그러한데, 회갑을 넘긴 도 시인은 상인동 댁까지 어떻게 돌아갔는지 민망할 따름이다.
작가 이수남이 쓴 이 실명소설은 196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대구문단사의 한 단편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 술과 시 밖에 안했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도광의 시인 그리고 그의 주변의 문학과 삶의 이야기들. 이는 무대만 대구로 옮긴다면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EBS TV '명동백작'의 한 장면같기도 하다.
'소방산을 오르며'란 그의 시 한편으로 요즘 그의 일상을 대변해 본다. '갈 곳 없는 날/ 작은 봉우리 소방산을 오른다/ 배고픈 날 갈색 뿌리에 머루순 넣고/ 조청을 만들던 새댁같은 머리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무릇도 보고/ 황금 꽃술의 금불초랑/ 검은 표범 무늬로 산길을 두렵게 하는/ 범부채 꽃잎도 만난다/ 바람 자는 꽃그늘에 돌아앉아/ 뉘우침 많은 잎들의 울먹임도 보고/ 세상 때 묻은/ 물매화 하늘거림도 본다'
2005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