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노닐다
2010년 9월 30일
늘봉산에 올라 산천경계를 두루 살피려던 계획이 어렵게 되어 부득이 하동읍의 송림으로 향했다. 철부지 시절의 송림은 섬진강변 모래밭에 노송들이 우거진 모습이었다. 그 소나무엔 높다랗게 그네가 걸려 있었고, 갓 쓴 어른들이 국궁 활시위를 당기던 그런 곳이었다.
40여년의 세월은 그 모든 것을 그저 기억 속에서나 있는 허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젊은 소나무가 많아진 송림은 보호 철책 속에 갇혀 있고, 소나무 사이로 산책로가 보인다. 우리는 그 송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댐으로 인해 물이 적어진 강변의 백사장을 거닐고는 쌍계사로 향했다.
섬진강변은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봄의 벚꽃이나 가을의 단풍이 아닐지라도 여유롭게 즐기기에 참 좋은 곳이다. 평사리 들녘에는 황금빛 벼가 빛나고 있다. 저 고운 빛깔 때문에 벼농사를 놓지 못하리라. 섬진강 둑길의 코스모스는 차를 다시 돌리게 했다. 어린 시절 학교로 들어가는 입구나 운동장 주위는 온통 코스모스 천지였다. 빨간 코스모스를 따서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는 아이의 하얀 등짝에 따악 도장을 찍으면, 거기 내 코스모스 연인의 징표가 역력했었지…
12시 53분, 우리는 화개 초입의 옛날팥죽집에 자릴 잡았다. 내 어릴 적 기억속의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음식을 잘 만드셨다. 특히 국수를 좋아한 나에겐 어머니야말로 7성급호텔의 세프를 능가하는 최고의 요리사였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국수 중에서 팥죽칼국수를 특히 좋아했는데, 고향을 떠난 뒤로는 별로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총무원시절 출장으로 하동을 지날 때엔 시장 안에 있는 ‘할매집’에 들려 팥죽칼국수를 먹고 가곤 했다. 이번에도 그 계획을 말했더니, 도반들이 화개의 옛날팥죽집을 권했던 것이다. 우리는 팥죽칼국수와 매생이정식을 시켜 먹고, 옹심이 팥죽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13시 반경에 팥죽집을 떠나 계곡의 동쪽 길에 기대어 쌍계사로 오른다. 길가에 고랑지어 잘 가꾼(?) 차밭이 있어 사진을 찍고, 다시 오르다 이번에 한 그루씩 따로 가꾼 차나무 밭을 보고 또 찍었다. 어쩌다 차가 사람에게 좋다고 알려져 이리 매연을 뿜고 달리는 도로변 밭에까지 울타리모양지어 자태를 뽐내게 되었더란 말이냐? 차나무야 본디 구경거리가 아닐 터인데… 그냥 저 야산에 제 멋대로 자라게 두고,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차 잎 좀 빌리면 좋지 않겠는가. 참으로 인간의 욕심 가득 묻어나는 그런 차는 별로 마시고 싶질 않구나.
이전엔 참 바삐 오갔던 쌍계사다. 전국 본사들을 정해 출장길에 나서면 짧은 일정에 업무를 처리하고 다음 절로 향해야 했으니, 어찌 한가로이 사진인들 찍을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1시간 반 가량 여유를 가지고 참배하기도 오랜만인 것 같다. 도량은 손길이 많이 스친 듯 비교적 정갈하다. 고려시대 조성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언제나 정겹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대웅전이 이상하다. 가만 보니 탱화가 진본이 아닌 사진이다. 보존 때문인가? 성보박물관이거나 다른 안전한 곳에 잘 모셔 둔 것인가? 본디 법당에 모셔져 예경의 대상이었던 탱화가 사라져 버린 법당은 가을 햇빛에 너무 가볍게 흔들린다.
개울 건너 계단을 올라 금당에 참배한다. 육조대사 정상탑(頂相塔)이 모셔진 곳. 진실일까? 육조대사의 두정골을 잘라 와서 모셨다는 것이…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래 도둑질한 것을 버젓이 탑을 세워 내 보인다고? 내참 기가 막혀서…
나는 휘적휘적 뒷짐 지고 노니시던 육조대사께 예를 올리고 내려 왔다.
15시 가까이 되어 칠불로 향했다. 지금은 잘 포장되어 금방 휘익 오르지만, 예전엔 참 고생깨나 하며 올라야 했던 곳이다. 근래 완전히 새롭게 모습을 바꾼 칠불암은, 이름도 칠불사로 바뀌었다. 아주 오래전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자들이 이곳에 출가하여 모두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칠불(七佛)은 과거칠불에서 알 수 있듯이, 석가모니부처님까지의 일곱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칠불을 통해 하동이 과거로부터 이미 불연(佛緣)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바로 아자방(亞字房) 얘기이다. 신라 담공선사가 만들었다는 아자방은 한번 따뜻해지면 오랫동안 불을 때지 않아도 온기가 유지된다고 했다. 물론 지금의 아자방 선방은 복원된 것이다.
16시 10분경 산바람을 맞으며 칠불을 내려온다.
아침 금정사를 떠날 때부터 예정된 곳이 있었다. 순천만 갈대밭이다. 아직 갈대꽃이 피기엔 이르지만 어쩌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물며 종일 노래 불러온 것을…
요즘은 국도나 고속도로나 별반 차이가 없다. 잘 닦여진 길 위에 네 바퀴 바삐 굴려 이윽고 순천만에 도착한 시각이 17시 반경이다. 참 유명해지긴 했나보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매우 많다. 오나가나 인공적인 손길이 너무 많이 닿아 있다. 물론 철이 이른지라 노을에 하얀 맵시 뽐내는 갈대꽃은 볼 수 없다. 40여분을 거닐다가 간단한 요기라도 하려고 가까운 식당에 들렸다. 순천 특식이라는 것을 시키긴 했으나 우리 입에는 너무 짜기만 해서 화개에서 포장해온 옹심이 팥죽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자! 이제 마지막 여정이 남았다. 선암사를 참배하는 일이다. 이미 어두워진 시각이지만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다. 야경이라도 좀 보고 가자고…
20여 년 전, 총무원 출장으로 송광사에 들렸다가 지나는 길에 참배케 된 선암사는 너무나 좋았었다. 마침 내게서 공부했던 스님도 꼭 한번 들리시라고 청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참배케 되었고,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도량을 거닐며 차도 마셨었다. 그때 그 분위기에 다시 취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19시 50분, 드디어 초입에 들어섰다. 비포장도로의 진입로 양쪽에는 등이 걸려 불을 밝히고 있었다. 덜컹거리며 경내의 주차장에 이를 때까지는 그런대로 분위기를 탔다. 그러나 곧 옛 기억은 낙하하는 물방울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계단을 오르는 내 시야에 쇠파이프로 터널을 만들고 비닐 등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 들어왔다. 한숨을 푸욱 푹 쉬며 대웅전 앞으로 갔더니, 마당 가득 쇠파이프에 현수막에 가려 현판도 볼 수 없었다. 고즈넉한 야경을 사진기에 담으려던 소박한 바람도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둠을 헤집고 뒤쪽으로 올랐다. 겨우 어지러운 시설에서 벗어나서야 깊은 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욕심의 너저분함이여! 그냥 빈 채로 두면 좋지 않은가?
[하동읍 섬진강변의 송림-옛날과는 많이 다르다]
[쌍계사 가는 길목의 섬진강]
[토지의 무대였던 황금빛 평사리 들녘]
[섬진강 둑길의 코스모스-한참 가다가 되돌아와서 찍다]
[보기에는 참 멋진 차밭-차나무 건강에는 별반 좋지 않다]
[보기에는 좀 어지러워도 이 차밭이 좀 나은 편이다]
[쌍계사 대웅전 본존불-후불탱화가 사진본이라 영~]
[참 친근하게 느껴지는 마애불-고려 조성으로 추정]
[육조대사 정상탑이 모셔진 금당]
[새로 중창된 칠불사 원경]
[신라 담공선사가 최초로 지었다는 아자방 선원]
[아자방 내부의 모습-그리 넓은 편이 아님-다른 선방이 있음]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순천만의 갈대밭]
[불빛따라 찾아 올라간 선암사 원통각 오르는 길]
첫댓글 쌍계사 가는 길목의 섬진강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굽어도는 유장함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고요.
황금빛 평사리 들녘에선 "토지"속,(딱히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을)인물들의 삶이 아련하고 아리게
배어나고요.
코스모스 꽃길에선 깡총대며 재잘거리며 꽃도장 딱 찍고선,얼굴 빨개진 어리고 고운 모습들이 아른거리네요.
참 푸근하고 소박하고 정다우신 마애불님껜 들꽃 한송이 올리고 합장의 예를 올리고 싶고요.
스님 !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참 좋네요.몇 번 씩은 가보았거나 익숙해서 더 좋고요.스님 따라 다니니 더더욱
즐겁습니다.^^ 언짢고 속상한 모습들은 그냥 강 따라 흐르게 내버려두렵니다.
이 글 읽는 분들 가벼운 소풍놀이 시켜 드리려고 썼답니다. 소풍 제대로 하시는 구려. ^^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소풍놀이 하고있습니다.
때로는 우짜면 저렇게 사진을 잘찍을수있을까하는 감탄도함께 하면서(특별한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낀데~~)
익숙한 곳이라 더 정감이 흐릅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가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사진만 하더라도 아마추어 중에서도 아마추어랍니다. 누구에게 사진기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적절한 자료가 나올 것입니다. 아 참! 제 사진은 작품사진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자료사진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
벗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답던 쌍계사까지 이르는길,
어느 노래 가사에 자주 듣던 화개장터, 하동 쌍계사 가는 길.. 스님 따라 옛 기억을 다시금 떠 올려 봅니다.( )( )( )
꽃길을 걸을 줄 알다니------- ^^
평사리 벌판에 저녁 해가 아직은 황금 물결을 치게하고 산 밑 동네 초가 굴뚝에서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당일치기 여행 내용을 너무나 알차게 보여주셨습니다.쌍계사의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감사합니다.( )( )( )
해질녁의 운치까지 보태주시니 그림이 꽤나 멋들어졌습니다. ^^
옛날에 선운사 가는 길에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보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던 때가 생각납니다.제사진속 코스모스보다 더 흐드러지게 피었네요.()()()
둑길의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는 언제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나 봅니다. ^^
지난 봄 송림과 섬진강 모래 빛깔의 무상함에 ~
모래사장에서 과별 단합대회 추억 한 장 떠올리며 얼른 빠져나온 곳~
짧은 여정의 남도행에서 가을의 정취를 가득 담아 오신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다녀 온 칠불암의 아자방과~
그곳에서 멀지 않은 연곡사의 가릉빈가 새의 형상이 두드러진 부도탑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아주 탁월한 스크린을 갖추고 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