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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인협회 김현우 소설가가
계간 <경남문학> 2023. 가을(통권 144호)에
소설 "역행逆行"을 발표했다.
소설
역행逆行
김현우
난세였다.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은 이괄의 난을 불러왔으니 조선 천지는 난세로 소용돌이치는 몸살을 앓았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얼마 있지 않아 조정에서는 논공행상이 있었다.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우익대장으로 분투했던 평산도호부사 겸 황해도방어사 박진영朴震英은 논공행상에서 정공신이 아니라 원종이란 두 글자가 더 들어간 공훈 책록이 있었다. 그러자 품계에 떨어지는 박진영 방어사의 훈록에 부하들과 아들, 수행 부관 김정덕이 놀라며 분해했다.
“아니. 이거 뭐요? 방어사 장군의 공로가 큰데…… 우째 된 일입니까?”
부관 김정덕이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아들 유룡과 세룡도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백병전을 벌였으며 고비마다 세운 군공이 크니 응당 진무공신이란 포상이 있어야 하는데 빠졌으니 몹시 서운해했다,
“저희들이야 하찮은 장졸이니 그렇다 쳐도 아버지는 우협대장으로 싸워 혁혁한 공적이 있는데 정공신에서 빠지다니요. 진무1등공신 안에 꼭 들어가야지요. 장만 도원수나 중군 남이흥 방어사와 똑같이 싸우고 공을 세웠는데 제외하다니! 3명인 일등이 안 되면 진무공신 2등은 돼야지요. 너무 야박하고 억울합니다.”
이괄의 난에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대처를 했기에 정공신에서 탈락했다는 후문에 수하 장수, 별장들과 아들이 더욱 분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박진영은 조금도 서운한 기색 없이 조용히 아들들과 김정덕에게 말했다.
“다들 입을 다물어라. 이괄이 뭐 때문에 난을 일으켰느냐? 반정 때 논공에 서운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 바람에 피아간 비명에 간 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조선 건국의 시작은 위화도 회군이었는데 그게 바로 요새 말로 하자면 혁명이요 쿠데타였다. 그 이후 4번의 정변이 있었으니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그리고 인조반정이라 할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40여 명이 참수당하고 200명 이상이 귀양을 갔는데 가장 가혹하고 잔인했다.
반정을 일으킨 세력은 통제 불능으로 논공행상 끝에 불만으로 터진 것이 이괄의 난이었다.
광해임금 시절에 권력을 차지했던 인물들은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로 경상도 함안 출신 박진영은 어쩌면 그들과 가까웠다고 할 수 있었다.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은 서인들이었는데 그때 박진영은 조정과는 멀리 떨어진 북방 서관西關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 피바람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몸을 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난세를 만난 것이었다. 지혜롭게 난세를 관통해 바로 서야 했으니 곧 현자, 현인賢人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듬해 정월, 이괄의 난 소식을 접한 평산도호부사 겸 황해도방어사 박진영은 평양 도원수부로 달려갔다. 팔도도원수 겸 황해병사인 장만에게 급히 알리기 위해 그의 손에는,
― 임금 곁의 난신들을 처단 숙정하기 위해 기병했으니 호응하시오.
하는 평안병마절도사 이괄의 동조 요청 서신이 들려 있었다. 이괄은 장만 도원수 다음인 부원수이기도 했다. 영변에 주둔한 그의 관할 군사는 1만 2천여 명이었고 평양의 장만 휘하 군사는 5천여 명에 불과했다.
박진영의 황해도방어사 군영이 있는 황주는 평양과 가까워 달려가 곧 장만 도원수부에 당도하니 평안방어사 남이흥, 황해병사와 황주목사를 지낸 유효걸 별장과 안주방어사 정충신 등 장만 도원수 휘하의 장령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이내 대책회의가 열려 황해방어사 박진영이 이괄의 동조 요청 서신을 먼저 좌중에 공개하니 남이흥도 반강제적인 호응 요구 이괄의 서신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유효걸이 장만 도원수부 직속 별장이라 이괄의 기병 경과를 좌중에 자세하게 말했다.
“이괄의 아들 전이 조정의 학사들과 여럿에게 공신들의 횡포를 개탄하고 정치의 문란함이 지난 임금 때나 다르지 않다며 조정의 일을 논란했다는구먼. 그런데 누가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했다고 하오.”
“그들의 논란은 논공에 불만이 생겼기 때문이라 하지오. 정사공신靖社功臣 53명이 책봉되었는데 같이 군사를 움직였던 누구는 일등공신이 되고 이괄은 2등으로 밀려났으니…….”
장만 도원수의 말을 받아 유효걸이 토를 달았다.
“그게 무고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고 하던데요?”
“그게 다가 아니요. 조정에서 금부도사를 영변에 보냈소. 이괄의 아들 전을 압송해가서 조사하려고. 그런데 이괄이 금부도사 일행을 죽여버리고 나서 그랬다고 했소.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라’ 했다오.”
도원수의 말에 남이흥이 받았다.
“사내가 어찌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을 수야 없지!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변란을 도모하면서 관할 수령들에게 동참하라 했으니 이런 변고가 어딨겠소?”
박진영이 썩 나섰다.
“당장 전군에 알려 이괄군의 진로를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병起兵에 호응 가담한 장수들도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부화뇌동했을 것이니 그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귀순하라 회유하는 포고문을 띄워야 합니다.”
박진영의 회유 발언에 남이흥이 호응했으나 장만 도원수가 빙긋 웃으며 그를 힐난하는 소리를 했다.
“박 방어사는 이괄과 친한 모양이구려? 투항을 권고하자니요! 이괄이 반역을 일으키면서 그랬다고 하오. 우리 원수부에 장수들이 많지만 그중 회유를 권고하자고 금방 말한 박 방어사나 남 방어사, 유 별장만이 오직 쓸 만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편없는 것들이다, 라고 했다지요?”
“아! 그 말은 들을 게 못 됩니다. 도원수 장군. 그게 반간계反間計요. 이괄의 이간책입니다.”
남이흥이 도원수의 말에 언성을 높이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럴까? 투항하라고 포고문을 보내자는 박 방어사 말을 들으면 반역군 속에 방어사와 친한 장수들이 많은 모양인데?”
“용병술이 있는 방어사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한번 귀순을 회유를 해 볼만합니다.”
문무를 겸비해 군사지휘관의 면모를 보여 병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장만 도원수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박진영의 계책에 대해 좌중의 의견을 물었다.
“이괄의 군사가 모두가 정예군인 데다 임란 때 항복한 왜놈 항병降兵 100여 명까지 합해 수만 명이라니! 우리 군사는 5천 명이니 숫자로 보아 대적할 수가 없소. 투항을 권하는 박 방어사의 계책이 어떠하오?”
“반역군에 가담한 별장 유순무, 이신, 이윤서가 결코 이괄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원수.”
남이흥이 박진영의 말에 동감한다면서 그 중 구성부사 이윤서는 반군 편에 서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들이 이쪽으로 오고자 하면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일 뿐일 겁니다. 박 방어사와 의논해서 귀순 권유 포고문을 작성하여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 사이 각 군에 통지하여 장수들은 별장으로 임명하니 군사들을 이끌고 도원수부로 속히 모이라 하십시오.”
남이홍의 말에 도원수는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모인 각처의 장령을 별장으로 삼아 대적하기로 하였다. 남이홍은 중군대장, 박진영은 우협대장右協大將, 유효걸을 좌협대장, 정충신을 선봉장으로 삼았다. 함안 출신 황주 조방장이며 자산군수 이휴복도 별장으로 박진영과 함께 군졸 천여 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었다.
이괄의 난이라는 또 다른 소용돌이 난세가 들이닥치니 박진영은 그 혼전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평안도에서의 거센 피바람을 간송 조임도의 글에 피비린내가 가득하다고 했다.
- 서쪽 관문 돌아보니 피비린내 먼지 눈에 가득하네
― 회수서관回首西關 성진만목腥塵滿目
박진영은 평소 이윤서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도원수와 남이흥 등의 연명으로 회유 포고문을 반군 진영에 보내고자 하였다. 이괄이 란을 일으키며,
“조정에 또 역변이 일어났으니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려고 하니 동참하라!”
하였으니 그 거짓말에 속아서 따라나선 장수와 군사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또 부화뇌동하는 장수들의 억압이나 협박에 못 이겨 억지로 따르는 군사들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반란의 대열에서 이탈하도록 토벌 진압하기 전 먼저 귀순을 설득하여야 한다고 남이흥과 함께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귀순을 권고하는 포고문에 도원수부 장수들이 연명으로 서명해 보내면 더 신뢰감이 있을 것이라 했다.
“여러 장수들이 함께 동참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들도 신뢰하고 이괄군에서 이탈할 것입니다.”
“그럽시다. 여럿이 연명하여 보내면 이괄군의 장수들이 잘못을 깨닫고 귀순하겠지요.”
그러나 박진영이 귀순하라는 이괄군에게 보낼 서신 초안을 작성하여 돌렸으나 다들 꺼렸다, 하는 수 없이 남이흥과 유효걸, 셋이 서명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그의 군영에는 함흥판관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는 아들 유용과 임용과 기룡, 수행 부관 김정덕이 있었다. 아들 둘은 그사이 무과에 급제하여 무장으로 성장하여 별장으로, 김정덕은 수행 부관으로 삼아 군사들을 맡겨 훈련하도록 했다.
항상 따라다니고 있던 부관 김정덕을 불러 귀순 권고 포고문을 구성부사 이윤서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초계 사람 이윤서는 좌영장으로 또 위장衛將에 있었는데 이괄이 영변에 가면서 중군으로 삼았다. 그는 이괄이 교만하고 방자한 것을 가까이 보고 나서 그만 실망하여 친분이 있는 박진영에게 이괄에게서 떠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박진영은 밀서를 이윤서에게 보낸 것이었다.
부관 김정덕은 적진에 잠입하여 이윤서의 종에게 포고문을 전달하였고 종은 이윤서에게 곧바로 그것을 전했다. 역순逆順과 의리의 이치를 들어 반역의 진영에서 이탈해 도원수 군영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박진영이 보낸 포고문을 읽은 이윤서는 곧바로 뜻이 통하는 별장 유순무, 이신, 제장 이탁과 의론하였다. 그들은 반역의 대열에서 벗어나기로 비밀리에 굳게 약조를 했다.
그때 이괄군은 영변에서 출발해 순천 자산慈山에 도착해 있었다. 목적지가 한양으로 반역의 길인 역행逆行이었다. 자산은 평양과 순천, 은산, 성천 등과 통하는 곳이었다.
박진영의 서신을 받은 이윤서는 애가 찢어지고 머리털이 서서 곡기를 끊고 비밀리 답장을 써서 초관哨官 왕유영을 시켜 보냈다. 곧 부하를 거느리고 샛길로 탈출하여 원수부에 가서 죽음으로 갚겠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윤서는 첩과 두 딸을 먼저 평양 원수부로 보냈다. 이윤서는 역적 이괄을 베어 죽이려고 별장 유순무와 의논하여 기회를 노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변을 출발한 후 엿새 동안 꾹 참고 기다렸으나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역도를 죽이려 한 계획이 실패했으니 구차하게 살 수가 없구나. 내가 장차 중군의 군사를 이끌고 도원수에게 갈 것이다.”
이괄군이 자산에 왔을 때 박진영은 이윤서와 비밀스럽게 화포를 쏘는 것을 신호로 중군 군사를 이끌고 귀순하기로 하였다. 밤중에 박진영과 약속한 대로 이신, 이탁 등이 화포를 적진을 향해 쏘게 하였다. 난데없는 포격에 이괄군은 어쩔 줄 몰라 동요하는 그 틈에 이윤서는 중군 3천 명을 이끌고 박진영의 군영으로 무사하게 탈출하였다.
“잘 오셨소. 이 장군이야 말로 용맹하고 대의大義를 아는 분이시오.”
박진영은 이윤서를 안고 반가워하고 감격하였다.
“방어사! 소장은 죽음으로 맹세코 역도에게 차마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오.”
“함께 싸웁시다. 역도들이 곧바로 한양으로 갈 모양인데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윤서는 고개를 떨구며 울부짖었다.
“어찌 도원수를 만날 면목이 나에게 없구려. 통탄하게도 역적을 베어 죽이지 못하고 왔으니!”
도원수 장만은 투항한 이윤서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크게 기뻐하며 환영한다는 소리를 했다.
“잘 왔소. 우리 같이 반군을 막아냅시다.”
“제가 적중에 잠시나마 있어 도원수와 전하께 면목이 없습니다.”
이윤서는 도원수 장만을 만나자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칼을 목에 갖다 댔다.
“소장이 역적을 죽이지 못했고 적군이 이리로 들어오게 하였소. 무슨 낯으로 천지 사이에 서겠소?”
그러면서 죽기로 결단을 한 이윤서는 종을 불러서 당부했다.
“종장宗長에게 돌아가 사당에 내가 충의를 지켰다고 고해라.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
말릴 틈도 없이 이윤서는 의연하게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자결을 바라본 모든 군사가 깜짝 놀라서 탄식하고 발버둥 치며 말리려 했다. 이윤서가 반역한 이괄을 죽이지 못하고 왔음을 통탄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이 좌영장의 자결을 알게 된 군사들은 모두 장하게 여겼다.
군사를 3천 명을 얻었으니 장만은 반갑게 여기면서도 박진영의 공이라 칭찬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하 방어사가 고분고분 자기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며 반란군과 화의나 귀순을 권하는 말에 장만은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면서 장만은 앞서 반란을 일어난 초기에 박진영이나 남이흥을 포섭하려는 이괄의 칭찬이 담긴 서찰을 받았음을 알고 있으니 그 일도 의구심이 생겨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박진영은 싸워서 적을 섬멸하기보다는 같은 조선 백성이고 군사들이니 그들의 목숨도 소중하므로 회유하여 억울한 희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니 그 역행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회유 포고문 연명서를 적진에 있는 이윤서에게 보내자고 했을 때 불만스러워 장만은 외면했던 것이었다.
이괄군은 장만 도원수 진이 있는 평양을 우회하여 자산에서 사잇길로 한양을 향해 신속하게 진출하고 있었다.
박진영은 도원수에게 인근 군영의 군사들이 다 모이지 않았지만 속히 나아가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원수는 그의 계책을 듣지 않았다. 이괄군은 만여 명이나 되는데 우리 군사는 그에 미치지 못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중앙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출전을 미적거렸다. 그러면서 박진영의 조급함을 탓하는 소리를 했다.
“적보다 월등한 군사라야 싸울 수 있소. 곧 조정에서 지원군을 보내올 터이니 우리가 성급하게 출전했다간…….”
“적이 벌써 황해도 쪽으로 갔다는데요? 평양을 지나서 말입니다.”
“그러면 군사를 그쪽으로 보내 추격하면 될 것이오.”
도원수는 이괄군이 황주 근처에 이르렀다고 하자 그때에서야 출전 명령을 내렸다. 도원수는 병약하였으므로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병략에 밝은 우협대장 박진영이 앞서서 여러 가지 군략과 대책을 도원수에게 제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장만은 선뜻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괄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앞서서 박진영은 싸우러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늦게야 명이 떨어지니 이휴복과 함께 천여 명의 발 빠른 군사를 거느리고 이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앞장서 달려나갔다. 정충신도 선봉장으로 추격에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 중군 남이흥이 출발하였으며 장만은 뒤처져서 따라 왔다.
갑자기 관서지방의 각처에서 모인 군사들이라 군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별장으로 나선 장수들도 제각각의 전략으로 싸우려고 하니 군령이 제대로 서지 못했다. 박진영은 중군 남이흥에게 군영을 순시하면서 통솔을 위해 하나 된 군령에 따르라고 명하도록 했다.
그즈음 형조판서를 지낸 이시발이 체찰부사로 황주에 급히 왔는데 박진영과 구면이라 반가워했다. 몇 년 전 순천군수로 있을 때 판서 이시발이 오도참획사五道參畫使로 임명되어 관서 여러 군현을 순시하며 관료의 민폐를 단속하고 군영의 훈련을 살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박진영이 영웅호걸의 기개를 지녔다고 그가 칭찬한 일이 있었다.
장만 도원수 군영의 군사들이 적을 만나 처음 싸운 곳은 황주 부근 상원이었다. 중군장 남이홍과 우협장군 박진영은 군사들을 시켜 이괄군에게 투항하라고 고함치게 했다. 남이홍이나 박진영은 이괄군의 군사들이 같은 조선 사람이니 반역이 잘못임을 설득하여 귀순시켜 희생자를 크게 줄이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귀순자가 많으면 자연히 반역한 이괄군의 기세도 꺾일 것이라 생각했다.
박진영이 이괄군을 귀순시키고자 애쓴 것은 공자의 가르침인 인의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임진란 때 권율장군 막하에서 있으면서 복병장으로 왜적 100여 명을 투항하도록 한 것처럼 아무리 적이라 하여도 항복하거나 귀순하면 살려주고자 한 이치로 그 바탕이 바로 인仁과 의義 곧 어짊과 의로움이었으니 현자, 현인의 자세였다.
박진영은 군사들을 시켜 적진을 향해 고함치게 했다. 투항하라는 권고였다.
“투항하라! 반역 대열에서 이탈하라!”
“투항하면 살고 반역하면 죽는다!”
“장수와 군사들아 들어라! 임금님께 충성하여야 하는데도 의리를 배반하고 반역을 하다니! 감히 우리와 맞서니 천도天道가 두렵지 않느냐?”
“너희들은 구족까지 멸족당할 죄인이다!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재앙이 곧바로 닥칠 것이다!”
그러자 이괄군의 두 번째 장수 한명련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이홍의 군문 앞에 와서 고함을 쳤다. 반역군을 향해 투항하라고 고함친 것이 효과를 본 듯하였다.
“박 방어사! 투항하겠소! 나는 한명련이오. 속히 군문을 여시오!”
“정말 한명련 장군이시오?”
남이흥이 어둠 속에서 투항하겠다고 고함치는 장수를 바라보았다. 박진영도 살폈다. 한명련이 다급하게 고함쳤다.
“뒤에서 추격해오니 우리가 죽을 판이요. 투항을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우리를 죽여주시오.”
박진영은 임진왜란 때 한명련과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함께 싸운 적이 있어 그를 알아보았다. 남이홍과 박진영은 한명련의 투항이 틀림없다 판단하자 군문을 열게 하였다.
그게 거짓 투항이었다. 그걸 모르고 반겼는데 갑자기 적이 공격하는 바람에 무방비였던 이쪽에서 크게 패하였다. 방심하다가 별장과 선봉장 등 많은 군사들이 사로잡히거나 전사했다. 한명련은 꾀가 많고 전략에 밝은 장수였다.
박진영 옆에서 싸웠던 함안 사람 별장 이휴복이 크게 걱정을 했다.
“큰일 날뻔했다. 우협대장은 아들 둘이 옆에서 싸우니 든든하구나.”
“이 별장도 조심해! 가급적이면 너무 앞서 뛰어들지 말게.”
한명련과 이괄은 관군에게 피해를 크게 입힌 다음 상원에서 한양을 향해 갔다.
도원수 장만은 박진영 우협장군과 남이흥 중군장이 적에게 크게 속아서 패하자 버럭 성을 냈다.
“아니! 장수가 싸움을 겁내어 피하기만 하려고 하다니! 무조건 적이라면 힘껏 싸우고 공격해 죽여야지. 싸움을 마다하고 화해니 투항이니 하시오?”
“귀순하겠다고 오는 자들을 받아들여야지 무조건 공격해 죽이라니. 물론 우리가 한명련의 꾀에 속았으니 크게 오판하였소.”
“우군장이나 중군장은 적을 만나면 무조건 싸우시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적을 섬멸해야 하오. 앞으로!”
장만은 더 성을 내지 않았으나 불만스러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일이 나중 논공행상 때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박진영이 싸움을 하지 않고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조정 중신들에게서 받게 된 것이었다.
예성강 상류인 평산 마탄에서 황해방어사 이중로와 우방어사 이성부 등이 여울물을 지켜 적을 막으려고 매복하며 싸움 준비를 하던 중에 적의 급습을 받았다. 부도체찰사 이시발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는 적을 맞아 힘껏 싸웠다. 항왜를 앞세운 만여 명의 적군이 기습 공격했으므로 격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중로와 이성부가 전사하였으며 이괄군은 강을 쉽게 건너갔다.
정충신 선봉군과 박진영 우익군이 좀 늦게 달려가 싸웠으나 추격전이라 큰 효과가 없었다.
마탄에서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강에서 지키던 관군을 기습 공격했다. 역시 관군은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괄군은 벽제로 향했다.
도원수 장만은 뒤따라 오면서 곧바로 서호를 건너서 남으로 가라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였다. 서호는 한강 하류로 서강에서 마포에 이르는 유역으로 호수처럼 넓은 곳인데 우회하여 반군의 한양성 입성을 막도록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진영은 남이흥에게,
“강폭이 넓은 서호를 건너가라는 도원수의 명보다는 군사를 재촉하여 길마재로 달려가서 먼저 그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하는 것이 어떻소?”
하고 강폭이 좁아 도하하기 쉬운 지점으로 진로를 바꿀 것을 제의했다. 정충신이 그 말을 듣자마자 찬성했다. 남이흥이나 정충신은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박 장군의 주장을 항상 따르고 있었다.
“옳습니다. 서호까지 가다간 성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길마재로 가서 진을 쳐야합니다.”
남이흥이나 정충신이 박진영의 말에 옳다 하고 도원수의 명을 못 들은 척하고 군사들을 재촉해 임진강을 건너 길마재로 급하게 추격하였다. 밤중에 길마재로 급히 진군하여 반란군 모르게 진을 쳤다. 박진영은 남병사 신경원과 함께 동쪽 골짜기인 동교에 진을 쳤다가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뒤따라 온 장만은 자신의 명을 무시하고 길마재에 진을 친 것이 박진영의 주장 때문이란 것을 알고서 성을 냈다.
“군령을 어긴 장수는 나중에 엄히 처벌하겠다!”
이괄군이 영변 행영에서 변란을 일으킨 지 19일만인 2월 10일, 한양에 입성하였다. 왕은 공주산성으로 파천하였고 도성은 비어 있었다. 이괄은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옹립했다.
밤새도록 말을 타고 진격해 한양이 보이는 길마재〔鞍峴〕에 박진영 우협군과 남이흥 중군, 정충신 선봉장이 이끄는 군사들이 올라가 밤중에 진을 쳤다. 신경원, 이휴복, 이명신을 비롯한 별장들도 군사들을 매복시키며 앞으로 있을 공격에 대비하였다. 동향인 이명신은 박진영과 같은 해의 무과 급제자로 웅천현감을 지냈는데 안현 싸움에 참전했던 것이다.
새벽에야 이괄군이 길마재에 관군이 포진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많은 군사들을 독려해 공격해 왔다. 골짜기와 절벽을 따라 적이 개미 떼처럼 붙어 올려다보고 공격을 했다. 박진영은 군사 수가 적고 약해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는 관군을 격려하려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싸움을 독전했다. 활과 총을 쏘고 돌을 던지고 포를 쏘았다.
“활을 쏘아라! 북을 쳐라!”
정충신이 말을 타고 아래로 내달리며 달려드는 적을 향해 창을 휘둘러 베며 적진을 종횡무진 달렸다. 이휴복이 창을 비껴들고 고함을 쳤다.
“우리도 달려가 싸우자!”
“그래! 힘껏 싸워서 물리쳐야 해. 돌진하라!”
박진영과 함께 있던 아들 유용과 세용도 창을 곧추세우며 이휴복의 뒤를 따라 달려나가 적을 무찔렀다. 또 셋째 아들 기룡도 호위 부관 김정덕 뒤를 따르며 군사들에게 호령하며 독전하는 박진영을 방패로 호위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냈다. 그러나 화살이 박진영의 어깨에 날아와 박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피가 흘렀다. 기룡이 아버지 상처를 베로 감쌌다.
싸움은 치열했다. 육박전이요 백병전이었다. 이휴복이 창을 내 휘두르며 몰려오는 적과 용맹하게 싸웠다. 화살을 맞은 박진영은 어깨에 난 상처를 싸매고 적을 향해 돌진하며 칼을 번개처럼 내둘러 싸웠다. 그러다가 또 허벅지를 창에 찔렸다. 격전을 벌이던 이휴복도 칼에 복부가 찔려 크게 다쳤다. 적장과 마주쳐 싸웠는데 칼에 여러 번 베이어 복부와 팔 등 여러 곳 상처가 나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면서도 적장을 죽였다.
마침 길마재 아래쪽에서 적을 퇴치하며 달려오는 천여 명의 원군이 있어 더욱 힘이 났다. 원군은 부원수 이수일의 군사들이었다.
한명련이 총탄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이괄군의 사기가 확 꺾이고 관군의 기세가 올랐다.
도원수 장만은 수하 장수들에게 고함을 쳤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역적들을 살려두면 안 된다! 죽여라!”
장만의 명령에 군사들은 닥치는대로 창과 칼을 휘둘러 반군을 참살하였다. 쌍방의 죽이고 죽는 치열한 백병전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묘시(오전 5시~7시)에서 사시(巳時;9시~11시)까지 몸을 부딪치며 창칼이 난무하는 육박전이 전개되니 그 일대는 피바다가 되고 피아의 죽은 군사들의 시체가 산기슭에 널브러졌다.
항왜들도 전멸되고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지면서 적장 한명련이 부상을 당하니 이괄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원수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창칼을 버리고 투항하려는 자나 부상해 신음하는 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퇴로를 차단한 살육전이었다.
반군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려고 하자 박진영은 수하 장수들에게 은밀하게 명하였다.
“투항하려는 자는 한 곳으로 몰아 살려주어라. 부상자도 죽이지 말라! 도망치려는 자는 쫓지 말고 길을 열어주어라.”
장만의 섬멸하라는 명령과는 전연 달랐다. 다 같은 조선 사람이니 살려주고 싶었다. 소수의 반군은 박진영이 퇴로를 열어주자 성안으로 달아났다.
길마재의 결전은 이괄군의 패전을 불러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괄과 한명련은 광주廣州로 도망치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자 변란은 막을 내렸다.
왕이 환궁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서관지방의 장수들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본래 진영으로 돌아가야 했다.
박진영도 평산도호부로 돌아갔는데 뒤따라 2월 24일에 통정대부로 승급시키면서 평산도호부사에 연임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달라진 것은 위계位階가 1등급 올라 통정대부였다.
왕이 환궁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반군과 싸운 장수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하였다. 처음에는 조정에서 도원수 장만은 반역군의 한양도성 입성을 막지 못했으니 죄를 물어 백의종군해야 한다는 일부 중신들의 주장이 거셌다. 그러나 곧 도성을 수복한 공을 들어 관작을 회복시켰으니 반정공신이었던 사위 최명길의 변호 덕이었다.
도원수 장만은 수하 장수들에 대한 공적 장계를 올렸다. 박진영에 대한 공적도 적었겠는데 자신의 군령을 고비마다 어겼다고 자주 말했으니 공로가 어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장만은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함께 평양에서 출발해 싸웠던 남이흥, 정충신, 이수일, 유효걸 등은 진무공신에 1, 2등에 3계나 2계 품계가 올랐다. 길마재 동교에서 바로 곁에서 싸운 신경원과 이휴복 등은 진무공신 3등이었으나 도원수부의 두 번째 장수였던 박진영은 진무공신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여하간 결과는 엉뚱했다. 아니 실망스럽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박진영이 반역군 토벌에 미온적이었다는 말이 조정안에 나돌면서 진무공신에서 빠져 버린 것이었다.
“이거 도리어 군령을 어겼다고요? 그러면 그때 부원수 이수일, 남이흥 병사나 정충신이나 함께 명을 어겼으니……. 군령을 어긴 그분들은 다 무사하고요. 유독 방어사 장군만 당하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부관 김정덕이 펄펄 뛰며 분해서 고함을 쳤다.
공신 책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진무공신이라 함은 정공신正功臣이고 원종原宗공신은 정공신을 도와 작은 공을 세운 자란 뜻이다. 따라서 진무공신과 달리 원종공신은 영작榮爵이나 봉군 교지도 없고 각 등급에 해당하는 토지·노비 등을 주고 자손들에게도 음직蔭職을 주는데도 차등이 있었다.
30여 명 진무공신에 오른 장수들은 무슨 군君이라 품계를 받게 되어 ○○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박진영은 봉군되지 않아 교지도 없는 공신 녹훈이었다. ‘원종’두 자가 더 들어간 격이 떨어지는 진무원종공신 1등이었다.
교지도 없이 명단에 수록되는 형편이기도 하였다. 진무원종공신은 이괄의 란에 참전하여 적의 수급을 몇이라도 벤 공이 있는 군사들에게 내려졌는데 그 수가 많았으며 박진영도 그중의 하나였다. 아들 박경룡은 어해장군, 박임룡 출신(무과 급제자로 아직 벼슬이 없는)이 진무원종 일등공신으로 올랐다. 곧 경룡은 율포만호로 임룡은 월곳현감에 제수되었다.
함안 사람 도곡 조익도와 이명호의 동생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웅천현감을 지낸 친구 이명신이 역시 진무원종 2등공신에 올랐다.
“장군께서는 조용하게 넘어가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임진란 논공행상 때 나와 같은 일을 당한 사람도 있었으나 군자의 도리로 입을 다문 분이 있었지.”
박진영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망우정에 은거하다 돌아가신 천강홍의장군 곽재우를 떠올린 것이었다. 망우당이 대범하였듯 그도 개의치 않고 대범하게 처신하고자 하였다.
백의로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를 지켜낸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왜란이 끝난 지 4년 후쯤인가 공신들에 대한 녹훈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순신, 권율, 이원익 등등 25~26명과 함께 곽재우의 이름도 올라 있었는데 막상 선무공신 책록이 발표될 때는 빠져 버렸다. 그러다 2년 후인 1606년 4월에 곽재우를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공신녹권에 올렸다. 선무공신을 도와서 작은 공이 있다며 ‘원종’ 두 글자가 붙은 것이며 그때 한꺼번에 900여 명이나 원종공신이 책록되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러나 곽재우는 불평 한마디 없이 망우정에 은거하고만 있었다. 용화산하동범 때 박진영이 한강 정구선생과 망우당을 만나 낙동강 도흥나루에서 뱃놀이하며 온종일 지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고 유유자적하던 현자의 태도를 잊을 수가 없었다.
20대 초반에 임진란이 발발하자 국난 극복을 위해 창의하여 큰 전공을 올렸던 박진영도 그때 선무원종공신 2등이 되기도 했었지만 젊었던 시절이라 당연한 처사로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 일대 혼란에 빠트렸던 이괄의 난에는 주저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웠다. 인의와 기지를 발휘하여 3천여 반군을 회유 귀순시켜 전세를 뒤바꾸고 난리를 평정하는데 큰 부상을 입으면서 공헌하였지만 논공행상은 아주 달랐다. 결코 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사인士人의 집안 자제로 과거 공부에 열중하던 선비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국난에 과감히 전란에 나선 자세는 곧 영달이 아닌 사의식士意識에 의한 현자의 처세일 뿐이었다.
논공행상이 그러하자 같이 싸웠던 체찰부사 이시발과 중군 남이흥이 조정에 이의를 제기하였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던 김시양이 누구보다도 박진영의 활약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이원익에게 주장하였다.
“박진영 방어사는 청렴하며 용병술에 밝아 큰 공이 있으니 논공에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공로가 컸음을 주장하며 위계를 올리기에 힘썼다. 함께 싸웠던 남이흥이 찾아와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네! 박 장군이야 말로 공이 큰데 겨우 한 자급資級(위계)만 올랐을 뿐 봉작封爵에는 참예參預되지 못하였으니…….”
“부사! 소장이 무슨 공이 있습니까?”
“아니요! 여럿이 박 방어사의 공이 큼을 아뢰어 정공신의 봉작을 주어야 한다고 상소했었지요.”
사실 남이흥 등의 아쉬움이 곧 반영되었으나 다시 공신 책록을 번복할 수 없었으므로 작진영은 통정대부에서 종2품 가선대부로 올랐으나 끝내 봉군封君은 받지 못했다. 임금이 한번 결정한 것을 뒤집기는 당대에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괄의 난 이후 인조반정 공신들이 무장에 대한 의심과 시기가 더욱 심해졌다. 반군 가담자뿐만 아니라 동조자와 그 일족도 색출하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켰으므로 무장들은 다들 스스로 위태롭게 생각해 몸을 사리고 있었다. 생각이 다르다면 적으로 몰아버리는 당파싸움이 조정에 만연했으므로 박진영은 남몰래 탄식할 뿐이었다.
남이흥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도 변방으로 나가니 이제 옳게 죽을 곳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처신하여 반정공신들의 견제와 사찰을 일시나마 피할 수 있었다. 남이흥은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부사, 양서순변사로 제수되어 구성龜城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 반정공신들의 감시와 사찰로 군사를 제대로 모을 수도, 훈련 시킬 수도 없었다. 그런 일을 알게 된 박진영은 관직을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남이흥이 역적의 공초에 나왔다 하여 경계하니 그도 남이흥과 사돈간으로 친하고 이괄의 기병 초기에 호응하라는 서찰을 받은 적도 있으니 언제 어떻게 당파싸움이나 정변에 휘말릴지 몰랐다. 고향 친구인 이휴복을 만나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이제 나도 그만 물러날까 하네. 잘못하면…….”
박진영은 고향 친구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으니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순천군수 이휴복을 만나고 돌아오자 인조 2년 2월 24일에 정삼품 통정대부로 승차함과 동시에 평산도호부사로 유임한다는 교지를 받았다. 통정대부는 문관의 정삼품 당상관의 품계였는데 곧이어 종2품 가선대부로 승차되었다. 이원익 도원수와 종사관 김시양, 이시발 등이 갑자춘괄란의 공적이 뚜렷한데 가자加資하여야 한다는 상소때문이었다. 가자는 정3품 상계 이상의 당상관을 왕명에 의해서 승진하도록 하였기에 교지가 내려왔다. 모두 논공행상에서 정공신에 오르지 못한 일에 대한 뒤늦은 배려였다.
또 관찰사 지휘 아래 서쪽 지방 방어를 위해 해서海西방어사를 겸임한다는 왕명이 있었으나 박진영은 곧 사직하고 고향 함안으로 돌아갔다. *
2023 가을 <경남문학> 원고
첫댓글 행복한 가정은 부모자녀간에 인사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잘한 일을 찾아 칭찬해줍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의 이름을 더 자주 불러줍니다.
안녕하세요~??♥
소중하고 사랑하는 남녀고운친구 님~!!! 愛
♥"빵긋~!!! 방가워요~웃으세요~"♥(*^-^*)♥ 쵝오
정말 반갑습니다.하시는 일마다,옮기는 발걸음마다
幸運이 함께 하시길 祈禱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게 크게 많이 웃으시고 한주건강하세요~乃
겸손하고 마음을 아름답고 따스하게
나 자신을 대접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늘..당신의 하루 시작이 행복했음 좋겠습니다~!!!♡
┃-/-┃┓건강한 마음으로
┃▦┃┛여유로움 갖이시고
┗━┛힘찬 하루 행복한 한주 되세요~♡♡
생각이 방향을 결정합니다
좋은쪽을 바라보면 좋은일이 생기고
나쁜쪽을 바라보면 나쁜일이 생깁니다
언제나 좋은쪽을 바라보는 긍정적 생각습관
자신의 미래는 물론 주변의 미래도 밝게 만들어 갑니다
★ⓗⓐⓥⓔ ⓐ ⓝⓘⓒⓔ ⓓⓐⓨ★ "*.forever!.* ♡~★
작은 도움 친절에도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친절은 우리 삶의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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