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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승지 홍국영의 폐망 |
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10일 이상 붉게 피워있는 꽃은 많지 않고, 권력도 10년 이상 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속담은 오래전부터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최초로 ‘세도(勢道)’라는 말이 통용되어 ‘세도정치’라는 못된 악정(惡政)을 창시했던 사람이 홍국영(1748〜1781)이었습니다. 그의 무섭던 세도정치는 10년은커녕, 겨우 4년에 폐망하고 말았으니, ‘권불사년(權不四年)’이라고 말해야겠지만, 죽기 전까지의 4년은 정말로 무서운 권력에 부귀호강이 따랐던 대단한 위세였습니다. 할아버지가 관찰사를 지낸 풍산 홍씨 가문의 명문집안 태생인 홍국영은 나이 겨우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민완한 정치적 수완과 재치 있는 판단으로 영조의 눈에 들어,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고 외롭고 고단하게 세손(世孫)에 책봉된 뒷날의 정조를 보호하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사도세자를 모함과 위계로 죽게 했던 벽파들은 세자의 아들 세손의 신변을 위협하는 존재였지만, 홍국영의 수완과 재치로 세손의 지위를 유지하다, 끝내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자기 신변을 보호해준 일등 공신, 홍국영은 29세의 나이로 훨훨 나는 권력을 쥐게 됩니다. 곧바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임금 곁에서 모든 정치와 온갖 인사에 관여하였고, 국왕 보호를 위해 숙위소라는 경호실을 새로 만들어 숙위대장까지 겸직하여 온통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곧이어 도승지[知申事]에 오르고 금위대장·훈련대장을 거쳐 오영도총숙위가 되어 나라의 군권(軍權)까지 장악하여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지신사(고려 때의 도승지)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임금을 알현할 수도 없고 지신사를 거치지 않은 어떤 인사발령도 불가능한, 그야말로 세도의 절정에 올랐습니다. 짧은 기간에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의 벼슬까지 높아, 그는 안하무인의 처지였는데, 누이동생까지 정조의 빈(嬪)으로 책봉해, 왕실의 지친(至親)이 되었으니, 그는 바로 요즘의 ‘왕실장’이자, ‘소통령’, ‘부통령’보다도 더 강한 권력자였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겨우 세손의 지위를 유지할 때, 자신을 보호한 공로에 보답하던 정조의 총애를 믿고, 홍국영은 못할 짓 없이 온갖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그러나 4년도 안 된 어느 날, 홍국영의 패악한 사건이 발각되어, 은인을 죽일 수야 없다고 목숨은 살려 준 정조 덕택에 그는 모든 권력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변방으로 추방당했으나, 울분에 못 이긴 그는 끝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산의 기록 「번옹유사(樊翁遺事)」라는 채제공의 사적(事績)을 읽어보면, 그런 무서운 권력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고 정정당당하게 맞서던 번암 채제공의 위인(偉人)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라고, 악독한 권력은 반드시 불행하게 끝난다는 것을 홍국영은 역사에 남겨주고 갔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채제공 같은 국가적 원로이자 위인이 있어 조금의 통제라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위인도 없는 세상이어서, 때아닌 ‘지신사’의 권력이 입에 오르기 시작하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절대 권력은 뒤끝이 좋지 않았다는 홍국영이 타산지석이나 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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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