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어느 날, 모친이 위독하니 집으로 급히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고 사랑방손님이 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나서는데<♬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받치려하는 이한 노래를 들으소서/ 떠나가면 나만 홀로 외로움을 어이하리/ 언제 다시 만려나 아! 그리운님/ 나의 순정을 받아주소 그리운님>이라는 쇼팽의 이별곡이 애잔하게 흐른다. 기약 없는 석별이라 사모하는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황량한 산마루에 올라 정거장를 바라본다. 소복 같은 어머니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 흔들리고 꽃샘추위에 떨고 있는 나목처럼 이던 입가에 하얀 입김이 서리는데, 긴 한숨을 몰아쉬는 듯이 증기를 내뿜던 기관차가 기적을 날리면서 떠나간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제목도 모르고 보았던 무사영화들과 중학생시절부터 맛을 들여 감상해오면서 추억의 명화앨범 속에 있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를 근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더구나 영화 속에 얼핏얼핏 비쳐지는 수원의 명소들과 예배당이 있는 동네의 이곳저곳이 80년대 중반부터 목회생활을 하고 있는 수원이라 오래전에 사랑했던 연인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수원화성(水原華城)은 97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있는데, 화면에 비치는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訪花隋柳亭)의 주변이 그 시절의 수원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요즘은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들을 유명관광지로 소개하는 풍조라,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를 촬영했던 장소가 수원시내 어디쯤인가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세계문화유산의 아름다운 성벽과 노송이 어우러져있는 팔달산아래는 사극 대장금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행궁이 들어서있다. 그 시절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를 촬영했던 집이 행궁 바로 옆 동네에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알려주시는 고전문학을 전공하시는 김용국교수님의 도움으로 금방 찾게 되었다.
영화에서 봤던 대로 마당 한쪽에 화단이 있고 마루가 넓게 깔린 안채와 광 그리고 서재와 사랑채 부엌 옆으로 식모가 거처하는 방이 있는 기와집, 대문 밖 골목길 너머로 개울이 흐르고 집 모퉁이에 동네우물이 있던 곳을 찾게 되었다. 행궁 앞에서 팔달산을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조금 벗어나자 팔달구 남창동24번지 바로 그 집 앞에 ‘한우물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영화가 만들어진 바로 그 골목길인데 그 앞에 흐르던 개울물은 오래전에 복개되어 없어지고 길한 쪽에 그 당시에 사용했던 동네우물이 폐쇄된 채로 있는데 수원시에서 머지않아 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 나온 기와집은 문이 닫쳐있고 바로 옆에 ‘한우물집’이라는 주차장이 붙어있어 사무실로 들어가 오십대 중반으로 뵈는 부인께 용건을 말했더니 “예, 이집 맞습니다. 제가 이집에 시집오기 전에 우리 집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그 때 아역으로 나온 전영선과 제 남편이 같은 또래여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1961년 신상옥 감독 최은희 김진규 주연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촬영 장소>라고 쓴 흰 아크릴 안내판을 내어주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차(茶)를 권했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는 효행의 고장 수원의 정서를 바탕에 두고 겸손과 인내를 미덕으로 본능적인 갈등을 아울리게 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함축되어 있다. 근간에는 선정적인 폭력물들과 이념으로 국가정체성을 다루고,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풍자와 코믹으로 뿐 아니라, 이기적인 면을 자극적으로 들추어낸 고발성 영화‘밀양’을 떠올리게 된다.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시대의 흐름과 상상을 화면에 담는 게 영화 있지만 감독의 의도와 성향에 따라 그 내면이 표출되고 있다.
60년대는 5,16혁명으로 우리근대사에 대 격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신상옥 감독은 최은희와 김진규를 주연으로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성춘향전 을 근대와 고전의 취향으로 만들어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고 국민들의 정서안정에도 한껏 이바지 했다. 이때로부터 영화계의 거장(巨匠)의 면모가 갖추어진 신감독은 53년 최은희와 결혼하여 20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화인생을 같이 하면서 61년 수원에서 만든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는 한국문예영화의 금자탑을 쌓았고, 최은희와 김진규는 신감독이 만든 여러 작품에 출연하여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주요섭 선생이 35년 문예잡지 조광의 창간호에 발표한 문예단편소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가 신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질 때 나는 옥희 어머니역이었던 최은희와 김진규의 팬이라 그들이 출연한 영화를 거의 다 봐온 샘인데, 부산 영도에서 살던 55년 4월 중순경이었다. 하굣길에 늘 상 광복동을 지나다가 ‘가거라 슬픔이여’라는 영화를 찍고 있는 미화당백화점 앞에서 보았던 20대 시절의 어여쁜 최은희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떠오르는데 무상한 세월 속에 나도 육십 대 중반을 넘겨 주름살이 늘고 있는 처지라 그녀인들 어떤 모습이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사랑방손님을 선생님이라고 따르며 조석으로 선생님 방에 드나들던 여섯 살짜리 옥희(전영선)는 선생님이 계란 부침을 좋아한다고 어머니에게 졸라 매일 아침상에 올리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난기가 발동하여 화단에 핀 수선화를 한 묶음 꺾어들고 안방에 들어와 “엄마, 이 꽃 선생님이 엄마한테 드리라고 주셨어!”라고 내어민다. 어머니는 “얘 너, 괜히 그런 심부름하고 다니면 안 돼”라고 하면서 꽃을 받아 화병에 꽂고, 사랑방손님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윗목에 덮어두었던 피아노를 열어<♬명랑한 저 달빛아래 들리는 소리 무슨 비밀이 있어 소근 거리나……>라는 노랫말이 담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황홀하게 연주한다.
한편 자주 드나들던 계란장수(김희갑)를 가까이 하다 임신한 식모 안성댁(도금봉)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동네에 떠돌자, 할머니(한은진)는 “필경 사랑방손님이 안성댁을 유혹해서 생긴 일일 것이라면서 소문이 좋지 않으니 사랑방 손님을 당장에 내 보내야겠다”고 하신다. 이에 어머니는 “설마 그럴 리가요 좀 더 알아보시지요”라고 하는데 안성댁이 계란장수와 그런 사이로 결혼하기위해 떠나게 되고, 사랑방 손님은 옥희 편에 사랑을 고백하는 쪽지를 보내온다. 어느 날 옥희의 외삼촌(신영균)이 내려와 옥희 할머니에게 “동생을 이대로 만 둘 수 없어 친정으로 데려 가겠습니다”라고 하자 할머니가 극구 반대를 하고 옥희 어머니도 오빠의 뜻을 뿌리치게 된다.
어느 날, 신앙인으로 고고하게 사시는 시어머니께서 젊은 며느리를 보내려 하지만, 고뇌의 시간을 정리한 옥희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옥희 위하여 살기로 한다. 옥희 어머니를 사모하던 사랑방손님이 그 집을 나설 때 <♬사랑의 기쁨은 어느 듯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라는 마틴의 사랑의 기쁨이 들려질 것 같았는데, 63년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때 그의 모국 아일랜드 군악대에 의해 장송곡으로 연주되었던 쇼팽의 이별곡이 이제 는 고인 되어버린 거장 신상옥감독과 사랑방손님의 김진규 그리고 계란장수 김희갑과 할머니 한은진의 추모곡으로 들린다.
2009년 1월 24일 흰 눈이 쌓인 밤 수원샘내마을에서 崔 建 次
첫댓글 목사님 여전하신 활동을 경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