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의 어리석은 행동과 그릇된 말, 그리고 부정한 지도력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가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상대방의 중요한 정보를 이해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피력한다. 욥은 그의 친구들을 이런 의미에서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불렀다.
'회사는 경영자의 그릇 이상으로 커지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인간은 자칫 잘못하면 작은 성공에 만족하기 쉽다. 진행되는 상태가 약간만 좋아도 안심하고 안일에 빠진다. 세상에 성공한 사람이 적은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하는 것도 망할 요인을 그 내부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고, 성장을 하는 그만한 요인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다. 회사는 사장이 경영한다. 선장이 어떻게 키를 잡고 지취하는냐에 따라 좌초도 하고 반란도 일어난다.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일하는 사람이 경영자를 선택하는 역선별시대가 되었다. 일하는 사람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리더자는 리더십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 경영자는 최고의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최고의 리더십을 갖춘자는 대부분 지위나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피터 드러커는 "리더십을 지위나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수한 리더는 책임을 스스로 지고 부하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부하들을 성공시킨 자신의 기여를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리더십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 한다. 최고 경영자는 바른 리더십을 가질 때 성공할 수 있으며 편협된 리더십이나 잘못된 리더십을 가지면 실패한다. 경영자의 리더십 가운데 신뢰받을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리더를 따르는 부하는 없다. 피터 드러커는 핵심을 찌르는 충고를 한다. " '신뢰받는다'가 반드시 '좋아한다'와 동의어는 아니다.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리더로서는 신뢰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신뢰받는 리더자는 어떤 자인가? 언행이 일치하고 일관성이 있는 리더이다. 참된 리더십을 갖춘자는 업무능력, 책임감, 신뢰받는 자이다.
1. 열정적인 리더십을 배우라.
오늘날 최고의 예술가, 과학자, 건축가, 기업가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혁신적인 리더들의 공통점이 있다. 성공이 지속되기도 했고,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나는 수도 있지만 그들이 공통점은 'H3 리더'라는 것이다. 열정적이고(Hat), 진보적이고(Hip), 일을 만들어가는(Happening)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열정적인 리더십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어떻게 기독교신앙이 기존 종교를 상대로 그토록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가?"라고 호기심을 나타내면서 '교의 자체가 가진 설득력 있는 근거'와 '기독교도들의 열성'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또한 우리는 세번째 이유를 제시할 수는 것이 신앙을 위한 비상한 리더십이다. 초기기독교인들이 유대인, 다신교도, 로마 당국과 경쟁했을 때, 그들의 '열성'이 가지는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는 그들이 넘어서려고 했던 그 적들에게서 좋은 점들을 받아들였다. 타종교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이는 열성, 그리고 철학자들의 개념과 논리적인 방법들을 채택해서 교의를 설명했고, 처음 몇 세기 동안 권력이 주교들에게 주어졌는데 교회의 지역 또는 지방 수장으로서 주교들은 주정자이자 집행자이자 심판자이었을 뿐 아니라 대성당, 공회당, 도로, 요새의 건설자였다. 그들은 신부, 수도사, 수녀, 전도사들뿐 아니라 지역 유력자와 교구민들을 통솔했다. 뒤에 로마의 주교가 교황이 되어 기독교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주교들은 바티칸과 각 교구들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리더십>에 힘을 실어주고, 설득력 있는 <교의>를 가지고 <열심>을 가진 기독교야말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1932~)는 일본 벤처 기업의 대명사가 된 ‘교세라(교토 세라믹사) 그룹’의 창업주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소이치로와 더불어 '일본의 3대 기업인'으로 불리고 있는 그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전 세계 세라믹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최강기업 교세라를 만들어 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교세라를 창업하기까지 그의 청춘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그는 중학교 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했고, 결핵을 앓았으며, 대학입시도 실패했고, 가까스로 가고시마대학 공학부를 나왔지만 지방대학 출신이라 취직도 여의치 않았다. 교수의 추천으로 어렵사리 들어간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간 도산 직전 기업인 ‘쇼후공업’이었다. 이나모리는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당시 새로운 분야였던 세라믹을 접하고 자신의 전부를 걸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고등학교시절부터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나는 머리가 나쁘니까 다른 사람의 두 배를 공부해야 한다.” 이나모리는 그러한 신념 때문에 아예 연구실에 취사도구와 이불을 싸들고 들어가서 잠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렸다. 그렇게 몰입해서 연구한 결과 그는 TV브라운관의 전자총에 사용되는 절연용 세라믹 부품 개발에 성공했고, 회사를 위기에서 구했으며, 그 2년 후 교세라를 창업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철학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장에서 땀 흘리지 않으면 어떤 일에도 익숙해질 수 없다. 아무리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의 작은 일에 충실해 실적을 쌓지 못한다면 성공은 있을 수 없다. 그는 1960년대 말, 갑자기 커져버린 회사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아메바 경영’이라는 독창적인 시스템을 창안, 경영에 도입해서 성공함으로서 교세라는 세계적인 부품회사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다. 현재 교세라는 일본 2위의 종합통신업체 KDDI를 비롯해서 반도체 부품,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 등을 망라한 세계적 종합정보통신그룹으로 성장해서 1만4천568명의 종업원과 세계 각국에 161개의 지사를 거느리고, 1996년에는 소니를 제치고 수익률 1위 기업으로 부상했다. 성공의 중요한 요소로 능력, 사상, 열정 이 세 가지를 꼽는 이나모리는 사람들이 아주 단순한 세상의 원리를 모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매출은 최대로, 경비는 최소로’라는 지극히 단순한 경영철학을 실천에 옮긴 경영인으로서 인격과 도덕성으로 종업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있는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성공적인 요인 세가지 중에서 제1 요인이 <열정>이다. 그의 열정 경영이 세계 세라믹업계를 평정하며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게 했다. 이나모리 회장의 철학의 모든 것을 열정(PASSION)에서 비롯되는데, 그는 이 낱말의 머릿글자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7가지 경영원칙을 착상하여 사업을 성공시켰다. Profit(이익), Ambition(야망), Sincerity(진실성), Strength(용기), Innovation(혁신), Optimism(낙천주의), Never Give Up(절대 포가하지 않는 것). 오늘날 교세라는 <포천>지의 '500대 기업'에 당당히 속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열정에 기인한 철학'이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전문기업 안철수연구소의 CEO를 거쳐 현재 KIST석좌교수가된 안철수교수가 연세대 공학원에서 열린 "차세대 전문가에게 필요한 자질"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시대가 변해도 으뜸의 자질은 열정과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머리 좋은 사람 못당하고 머리 좋은 사람이 운 좋은 사람 못당한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노력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에요." 안 교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머리와 운을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게 의미 있는 비교"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차세대 전문가에게 필요한 두 번째 자질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꼽았다. 그는 도요타의 'T자형 인재'와 비교해 'A자형 인재'를 소개했다. 전문성과 폭넓은 상식을 갖춘 전문가가 'T형'이라면 그 사이에 소통능력이라는 가교까지 갖춰야 'A형'이라는 것. "아는 것이 아무리 깊고 넓어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지금은 사실이 아닌, 사실에 대한 타인의 인식이 진실인 시대입니다." 안 교수는 그 외에도 '긍정적 사고 방식, 타분야에 대한 상식과 포용력, 자신의 한계를 넓혀라'는 이상과 같은 다섯가지가 차세대 전문가가 필요한 자질이라고 말했다.
2.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을 배우라.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 1924~)는 1970년대에 오일쇼크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 1억 6,000만 달러의 엄청난 적자를 내고 다 쓰러져가는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를 기적적으로 회생시킨 미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기업인이다. 그가 크라이슬러 회장이 되기 전에 32년간이나 근무하던 포드 자동차에서 기업주인 헨리 포드 2세와의 불화로 잘못도 없이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해고는 당했지만 불운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파산 직전으로 내 몰려 휘청거리는 크라이슬러에서 그를 최장으로 초빙하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미 기업 평가에서 회생불능이란 평가를 내려졌기에 내로라하는 CEO들이 모두들 사양하는 회사였지만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를 결정했다. 그는 크라이슬러 회사의 경영 분석을 마친 후, 포드사에서 일하는 동안 수백 명의 임원들의 경력과 능력 등을 기록해 놓은 자신의 '개인적인 인사관리 기록부', 즉, 블랙노트를 뒤져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해고시켰고, '블랙 노트'에서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능력 있는 경험자를 스카우트해서 그들과 교체했다. 그는 노조에게 양해를 얻고 크라이슬러 경영을 재정비하고 신제품 개발을 감독했다. 온갖 어려움 끝에 멋진 소형차 개발에 성공했다. 그 차는 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그는 드디어 흑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는 회사의 고질적인 부채를 갚은 후에 약속대로 5년 만에 정리 해고한 근로자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5% 삭감했던 근로자들의 연봉도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영웅적인 기업인이 되었다. 그는 자서전에 희망적인 말을 남겼다. “지난달에는 무슨 걱정을 했었지? / 작년에는? / 그것 봐라. 기억조차 못하고 있잖니. / 그러니까 오늘 네가 걱정하는 것도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닌 거야. / 잊어버려라. / 내일을 향해 사는 거야.” 그는 미래를 바라보는 탁월한 리더자였다.
3. 섬기는 리더십을 배우라.
리차드 포스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네 가지로 규정했다. 첫째, 단순한 삶이다. 생활의 모든 삶이 단순해야 한다. 먹는 것이 단순하고 입는 것이 단순하고 사고하는 것이 단순해야 한다. 둘째, 섬기는 삶이다.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어떤 위치에서든 항상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는 순종하는 삶이다. 어떠한 일을 처리하거나 생활의 방식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넷째, 나누는 삶이다. 나에게 일부가 타인에게는 전부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특별히 섬김의 삶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간다. 일본 MK택시는 독특한 경영으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MK는 일반택시보다 요금이 10% 저렴하지만 서비스 면에서는 최상이다. 교토시민들은 이 회사를 교토의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지난 60년 택시 10대로 출발한 MK택시는 현재 34개의 주유소와 수백 대의 택시를 소유한 최고의 운수회사로 성장했다. 이회사의 주인인 유봉식, 태식형제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성경,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라”는 말씀에서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운전자를 가족처럼 섬겼으며, 운전자들간 화목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운전자들은 손님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하게 됐고,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MK택시회사에는 회장실이라는 간판이 없다고 한다. 회장실 간판이 집무실에 붙어 있어서 사원들이 자기 안방 드나들 듯이 회장실을 찾지 못하는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경영진과 사원과 거리가 크면 클수록, 경영진은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옳게 파악할 수 없으며 사원들과 대화하지 않고서는 회사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유봉식 회장의 철학이다. 그는 "뛰어난 경영자는 무엇보다도 근로자들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한다. 당장은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종업원이 5년 후나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사원의 비전을 중요시하고 인간을 존중히 여기며 섬기는 그의 리더십이 MK를 일본 최고의 택시회사의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말씀하셨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섬김의 미학이 “MK회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항공기 운항과 수송 승객 수에 있어 미국 내 1위, 영업 순이익에 있어 3위를 차지했던 델타항공사는 1924년 농약살포를 주목적으로 하는 항공사인 '허프 달란드 더스터스(Huff Daland Dusters)'에서 출발, 1929년에 델타로 이름을 바꾸고 처음으로 여객기를 띄우면서 본격적인 항공우송업에 뛰어들었다. 미국내 48개 주, 218개 도시와 58개국 131개 도시를 운항하고 있는 델타항공이 보유한 항공기만 해도 무려 830여 대에 이르는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우수한 인력의 선발과 교육에 큰 비중을 둔다. 관리자들은 각 직원들이 조직 내, 그들의 위치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델타항공의 경영책임자인 맷슨 씨는 델타의 주요 성공요인으로 우수한 직원들을 통한 최고의 서비스, 즉 섬김의 실천적 자세를 꼽았다. "우리의 목표는 '고객의 눈에 최고인 항공사'가 되는 것입니다."
4. 창의적 아이디어에 앞선 리더십을 배우라.
베네통은 이탈리아 루치아노 베네통 현 회장이 세운 패션기업이다. 2005년말 기준으로 매출액은 17억 6500만 유로(약 2조 2000억원)이며, 연간 생산량은 약 1억 1500만점에 달하며 세계 각국이 판매시장이다. 지역별 판매시장은 유럽(83.3%), 아시아(11.8%), 미주(4.2%), 기타(0.2%) 순이다. '베네통 창립 40주년 기념 패션쇼'에서 루치아노 베네통 사장에게 "베네통은 이런 회사다"라고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기자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쉽진 않은데... '색-열정-젊음(Colourpassionyoung)'이라고나 할까?" 또한 좌우명을 묻는 질문에 루치아노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일 할 수 있는 걸 오늘 하라(Do today what you could do tomorrow)" 베네통하면 튀는 아이디어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다. 베네통은 장남으로 태어나 열살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게 되어 세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중학교를 마친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잡화점에서 양복점으로 옮겨다니면서 일을 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를 좋아했고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조각난 행주감을 엮어 나비 넥타이를 만들어 착용하고는 양복점 손님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손님들은 그의 참신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상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양복점 주인은 오히려 화려하다 못해 요란스런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베네통에게 '넌 양복 판매원이지, 서커스 광대가 아니다.'라며 알록달록한 작품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각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주인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갔다. 베네통은 양복점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꿈을 이룬 사람이다. 차별화에 숭부했던 루치아노 베네통의 철학은 "남의 뒤를 따르는 자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나누기 위해 절약하는 리더십을 배우라.
1998년 집계한 개인 자산만도 500억 달러가 넘는 미국 최고이 갑부가 된 빌 게이츠는 50세가 되는 해 자신의 재산 중 95%를 자선단체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한바 있다. 이미 게이츠는 1999년 2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윌리엄 H 게이츠」재단과 「게이츠 학습」재단에 33억 4,000달러(약3조8천 600억 원)를 기부 하였다. 빌 게이츠는 평소 비행기도 일반석만 이용하며 점심도 주로 햄버거로 때울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빌 게이츠의 검소한 생활을 증명해 주는 ‘아이스크림 사건’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밤, 빌 게이츠는 시애틀 로렐허스트 지역의 편의점에서 버터피컨 아이스크림 상자를 껴안고 줄을 서 있었다. 계산대의 줄이 조금씩 줄어들어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을 때, 빌 게이츠는 계산대에 동전과 아이스크림 상자를 놓고 50센트 할인 쿠폰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지 시작했다. 시간이 걸리자 뒤에 있던 한 손님이 25센트 동전을 두 개 내던졌다. 그러자 빌 게이츠는 얼른 그 동전을 주워 들고는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빌 게이츠는 금전적으로 굉장히 절약했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벤처기업 시절에 벤처기업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무의미한 낭비가 일체 없었다. 이러한 절약하는 생활 모습에서 자립정신과 검소한 삶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한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6. 불도저 리더십을 배우라.
정주영 회장은 '불도저'로 불린다. 사업 추진력을 빗대어 붙여진 별명이다. 일단 해보겠다는 목적의식이 들면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게 주변의 평가이다. 그의 경영전략들을 살펴보면 그는 저돌적인 불도저였다. 정주영은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을 길은 수출뿐이다” 라며 1965 년 국내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도했다. 정주영이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에 응찰했을 때만 해도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격려조차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강인한 추진력으로 마침내 1965 년 해외 건설시장 개척을 위해 태국으로 진출, 해외시장 진출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1970)를 건설했다. 정주영은 1968 년 12 월 각계의 반대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다. 드디어 1969년 9 월 11일 착공한 지 290 일 만인 1970 년 7 월에 경부고속도로 428km 가 개통됐다. 그가 세계 최대의 현대조선소(1973)를 창업할 당시 현대조선소의 창업 당시의 일화는 유명하다. 정주영이 조선업에 진출하고자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정주영은 강인한 추진력으로 몇몇 국가와 끈질긴 협상 끝에 마침내 영국과 스위스에서 1 억 달러의 차관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금융권에서 수주실적을 요구하자 정주영은 거북선이 새겨진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만 들고 그리스로 날아가 리바노스 회장에게 260 만 톤급 유조선 2 척을 수주 받았다. 그 후 정주영은 2 년 3 개월 만인 1973 년 울산조선소를 완공했고, 그 완공식은 당시 수주 받은 배 2 척의 명명식과 함께 거행되어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전무후무한 일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 순수 우리 기술의 자동차 포니 생산(1976)도 그의 저돌적인 리더십이 적용되었다. 정주영은 1967 년 현대자동차를 설립, 그 다음해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인 미국의 포드와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을 체결하여 코티나 자동차를 조립, 생산했다. 이후 정주영은 ‘자동차 입국’을 꿈꾸며 적극적인 투자로 1976 년 우리 고유 모델인 ‘포니’를 생산했다. 포니의 생산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 번째로 자체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리는 사우디 주베일산업항. 9 억 3 천만 달러라는 공사 금액은 계약을 한 1976 년 당시 환율로 4 천 6 백억 원이었는데 이는 그 해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되는 큰 금액이었다. 세계적인 10개의 건설업체들이 각축을 벌였지만 일주일 동안 씻지도 않고 견적서를 써서 드라마틱하게 현대가 공사를 따냈다. 세계 최초의 정주영 공법으로 서해안 간척지 개발(1984)을 하는데도 그의 탁월한 저돌적 리더십이 적용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바다를 막아 농토로 전환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 중 최종 물막이 공사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1984 년 정주영은 노후화된 대형 유조선을 이용해 엄청난 압력의 물의 흐름을 막아 둑을 완성하는 '유조선 공법(일명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여의도의 48 배에 해당되는 서해안을 간척했다. 그는 또한 포니 엑셀로 미국 시장 성공적으로 진출(1986)했다. 자동차 입국’의 굳은 신념을 가진 정주영. 현대자동차를 창업한 지 10 년 만인 1976 년에 우리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생산 해외시장에 선보였다. 그리고 1986 에는 ‘포니 엑셀’로 자동차 시장의 메카인 미국으로 진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대자동차는 현재 전세계 200 개 국가 중 190 여 개 국에 진출 ‘코리아=현대자동차를 만드는 나라’로 국가 이미지 제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리더십은 올림픽 유치 및 올림픽 성공적 개최(1988)를 하게 되었다. 지난 1981 년 민간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정주영에게 올림픽 유치위원장직이 맡겨졌을 때의 국내 분위기는 일본의 나고야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올림픽 유치 위원장을 맡은 정주영은 각국 올림픽 위원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적극적인 개별 로비와 정성이 담긴 꽃바구니 선물을 통해 한국인의 강인하고 따뜻한 마음을 전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낸다. 결국 88 올림픽 개최지는 서울로 결정됐고, 그후 정주영은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떼몰이 방북(1998)을 보라. 1989 년 민간기업인으로서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정주영은 약 9 년 만인 지난 1998년 6월에 통일소 5 백 마리와 함께 남북 긴장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을 방문했다. 정주영의 ‘소떼몰이 방북’은 1991 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래 사회주의 국가의 얼어붙은 빗장을 연 세계적인 빅 이벤트로 국내외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정주영은 필생의 사업을 ‘금강산 관광사업’이라고 여기고 84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98년 10월 북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켜 1998년 11월 18일 분단 반세기 만에 남측의 국민들이 금강산을 방문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됐다. 남북간 대규모 물적ㆍ인적교류의 밑거름이 된 금강산 관광사업 이후에 정주영은 남북한 교환 통일농구대회, 북측의 교예공연 등을 선보여 남북경협 차원을 뛰어 넘어 남북 체육ㆍ문화교류에까지 확대, 발전시켰다.
7. 도전정신의 리더십을 배우라.
애플사 PC의 시조는 사실 스티븐 잡스가 아니라 스티븐 우주니악이었다. 우즈라 종종 불리우는 우주니악은 잡스 스스로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자신보다 전자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탁원한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PC개념이 보편화되고 생활화될 수 있는 기틀을 세운 사람은 스티븐 잡스였다. 그가 실제로 '애플1'을 상품화하기 위해 보인 열정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PC는 훨씬 늦게 보급되었을지도 모른다. 초창기 애플사의 출판기자인 레지스 맥케나는 PC의 개발에 있어서 스티븐 잡스의 역할을 다음처럼 소개했다. "우즈가 훌륭한 기계를 실계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잡스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장난감 가게에나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우즈가 복음전도사와 손잡은 것은 행운이었다." 컴퓨터 업계에서 전도사의 역할을 한 사람으로 잡스를 꼽는 비유이다. 1976년 출시된 애플1은 최초의 프로그래밍 컴퓨터가 아니었다. 2년 앞서 통신 판매 카탈로그를 통해서 판매된 알타리 8800 이 원조인데 그것은 게임기나 추미용품 정도로 소개되었다. 알타리는 저장과 취소가 불가능하였기에 최초의 PC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잡스와 우주가 개발한 애플1, 곧이어 발표된 애플2는 기능상 오늘날 PC의 표준과 동일한 최초의 PC가 되었고 1977년에는 키보드, 외부프로그래밍, 컬러 모니터 등을 함께 갖춰 판매되기 시작했다. 처음 애플1의 최초 모델 제작에 성공한 두 사람은 커다란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이디어를 파느냐 생산해서 판매에 도전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즈는 로열티를 받고 설계를 팔자고 제안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제작해서 팔기가 힘든 상황이므로 어떠한 방식이든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상품으로 제조되어 판매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즈의 제안에 잡스는 눈에 불을 켜고 반대를 했다. 그럴 수 없다는것이다. 잡스는 즉시 아버지의 집에 자기 방, 응접실, 차고 등을 개도하여 아예 미니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19세에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다. 만들지도 않은 컴퓨터를 홍보하고 판매업자를 설득하여 선불을 받아 낸 것이다. 우즈는 천재적인 엔지이어였지만 경영마인드는 없었다. 잡스는 엔지니어의 천재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혁신적인 기업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의욕적이고 저돌적인 잡스의 도전정신이 없었라면 애플사의 판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PC의 탄생이 스티븐 잡스의 도전정신에 의한 의지에서 이뤄졌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8. 벤치마킹에 발빠른 행동하는 리더십을 배우라.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내어 실행에 옮겨라' 오늘날 잭 월치가 가장 신봉하고 있는 벤치마킹 경영비법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GE에 학습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궁극적으로 잭 웰치는 좋은 아이디어라면 합법적인 범위내에서표절하라는 주의이다.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는 게 그의 전제인데, 이는 GE의 수준을 끊임없이 높이기위한 방법이다. GE는 크라이슬러와 캐넌으로부터 새로운 제품의 개발과 출시 기법을 배웠고, GM과 도요타로부터 효과적으로 부품을 납품 받는 방법을 배웠으며, 모토로라와 포드로부터는 품질관리에 대해서 배웠다. 오히려 기업들의 충고와 선진적인 방법을 수용함으로써 해외시장 진출을 선점했으며 많은 것을 공유한 것에 자랑스러워했다. 잭월치는 학습하는 기업문화를 만들기를 노력하면서 다음가 같은 말을 했다. "배우고, 배운 것을 행동으로 빨리 전환할 수 있는 조직의 능력 속에서 경쟁우위가 있다. 위대한 과학자들, 좋은 경영 관행, 또는 마케팅 기법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학습을 했다면 그 학습 내용을 빨리 흡수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9. 위기를 기회로 바꿔 사용하는 리더십을 배우라.
미국 방송 프로그램 중 비즈니스 뉴스 부문 1위인 NBR(Nightly Business Report) 방송이 2004년 1월 프로그램 방영 25주년을 맞아 워튼스쿨과 공동으로 지난 25년간 가장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한 비즈니스 리더 25명을 기획한 설문 조사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묶었다. '세상을 변화 시킨 리더들이 힘'이라는 책이다. 조사방법은 NBR 시청자들이 자유 지정한 7백여 명 가운데 위튼 스쿨 교수6명으로 이루어진 심사위원회에서 최종 25명을 선정했다. 25명의 걸출한 리더 가운데 과연 누가 왕중의 왕일까? NBR 방송이 워튼스쿨 교수진에 의뢰한 결과 인텔의 공동 창업자이지 전 회장인 <앤드루 그로브>가 그 영예를 차지했다.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헝가리 태생 유대인 앤드류 그로브. 그는 1956년 스무 살의 나이에 단신으로 미국 망명을 감행했다. 당시 수중에는 단돈 20달러가 전부. 그후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1963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전자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반도체회사인 페어차일드(Fairchild)에서 고든 무어와 함께 일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로브는 고든 무어와 함께 1968년 인텔 창업때 참여했으며, 1979년부터 20년 동안 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앤드류 그로브는 과감한 결단과 독특한 경영 수완으로 인텔을 세계 최고 회사로 만들었다. 1980년대 중반, 인텔은 커다란 비즈니스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일본의 메모리 생산 능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메로리 칩 생산을 포기하고 대신 마이크로프로세서 부문으로 사업의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러데 이렇게 시작된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은 컴퓨터 산업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반도체 D램은 사실상 인텔이 개발해 압도적 시장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떼는 대신 ‘인텔, 마이크로 컴퓨터 회사’라는 비전하에 컴퓨터의 두뇌라 불리는 ‘마이크로 프로세서’에 올인했다. 기존 8개의 D램 공장 중 한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마이크로 프로세서 생산으로 전환했다. 직장 동료 7200명을 떠나 보내고 공장을 두 곳이나 폐쇄하는 아픔이 뒤따랐다. 하지만 인텔은 1992년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 최강자로 뛰어 오르며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브랜드의 중요성을 인식한 앤드류는 1991년 1억달러를 투입해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개발에 착수했다. “첨단산업에서, 그것도 부품 브랜드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거나 “차라리 연구·개발에 투자하라”는 반발이 강하게 제기됐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브랜드 덕분에 인텔은 컴퓨터 제조회사들 사이에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고,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INTEL Inside’ 로고를 부착한 컴퓨터는 다른 컴퓨터들보다 10%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렇게 고속 성장을 즐기고 있던 인텔에 다신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1994년, 어느 날 인터넷 포럼에서 어느 수학교수가 펜티엄칩의 계산 기능에 문제를 제기했다. 마이크로프로세스의 계산 기능에 문제가 있다니 이는 충격이었으며 인텔은 삽시간에 비상이 걸렸다. 다행스럽게도 내부 조사를 통해 그 결함이 나누기 셈을 90억 번 할 때 한 번 정도 반올림을 실수할 정도로 대단치 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다시 말해 그 오류는 즉 컴퓨터 사용자가 2만 7,000년에 한 번 정도 겪는 오류 정도로 쉽게 넘겼다. 그러나 소비자와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모든 소비자들에게 ‘무조건 보상’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수십만 개의 펜티엄 칩을 교환해주고 4억7천5백만 달러 규모의 손실을 떠안게 되었다. 이는 인텔의 연구 개발 연간 예산의 절반이었고, 펜티엄 칩 마케팅 홍보를 향후 5년간 할 수 있는 액수였다. 앤드류는 언론과 고객의 비난 전화를 통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무조건 교환해주어 4억7천억 달러의 보상비용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돈을 절약하기 위해 지금의 혼란을 지속하면서 계속 인텔의 불가능한 오류(?)를 주장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손상시킬킬 것인가?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어려운 선택이지만 인텔은 혼란에 대해 전적으로 무릎 꿇고 뉘우치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결함이 있는 칩을 가진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인 교환을 약속했다. 앤드류는 “기업에는 크고 작은 바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들도 많지만 어떤 것은 태풍으로 돌변하며 기존의 비즈니스구도를 송두리째 뒤엎어 놓는다”고 말하며 이를 ‘전략적 변곡점’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전략적 변곡점에 잘 대처한 기업은 번성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망한다”고 주장한다. 앤드류 그로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더욱 조직과 기술력을 강화시켰으며, 아무리 나쁜 뉴스라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하고 토의할 수 있는 건설적 대립(constructive confrontation) 문화를 만들었다. 인텔의 앤드류 그로브는 위기를 만날때마다 새로운 방향으로, 정직하게 일을 대처함으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10.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배우라.
1956년 모리타 아키오 사장(당시)이 소니(SONY)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뉴욕에서 라디오 판매상을 만났을 때다. 판매상은 “우리 브랜드를 붙이는 조건으로 10만대를 주문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일종의 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이었다. 소니 본사에서도 “브랜드 문제는 회사가 좀 성장한 후로 미루고, 지금 당장은 자금사정이 어려우니 큰 주문을 놓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심사숙고 끝에 모리타는 대량 주문을 포기하고, 소니 상표를 붙일 수 있는 소량 주문에만 응했다. 속으로 “소니를 반드시 유명한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이 같은 노력이 30여 년 쌓이면서 소니 브랜드는 세계 정상에 올랐다. 모리타 회장은 은퇴 회견에서 “당신이 소니를 위해 내린 의사결정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 하나를 들라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956년 브랜드를 고수한 의사결정을 꼽았다. 그는 50년 전에 이미 브랜드와 무형자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단기적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갖춘 경영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또 다른 일화 하나. 모리타 회장이 “걸어다니면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오디오인 ‘워크맨’을 만들자”고 했을 때, 직원들은 “그런 제품은 팔릴 리가 없다”며 거세게 반대했다. 시장조사결과도 좋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시장조사는 어리석은 짓이다”라며 시장조사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객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른다. 헨리 포드(포드자동차 창업자)가 일반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아마 ‘자동차가 아닌,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최종 순간에 결단을 내리며 단언했다. “만약 3만개 이상 팔리지 않으면 회장을 그만 둔다.” 워크맨은 지금까지 무려 3억 개가 넘게 팔리며 소니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CEO는 직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결과에 대한 책임도 CEO 몫이다. 1999년 포천(Fortune)지는 워크맨 개발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의사결정 중 하나로 선정했다.
11. 차별화를 통해 결과를 창조하는 리더십을 배우자.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기업에는 반드시 그 기업의 발전을 받쳐주는 히트 상품이 있다. 회사명보다도 상품면이 일반에게 알려진 기업은 많다, '스시(초밥)로봇'의 점유율 85%를 자랑하는 스즈시게기공주식회사. 그러한 기업 중의 하나로 식품 서비스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식품기계 메이커이다. "어떻게 하면 쌀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이러한 쌀밥 문화에 대한 스즈키의 집념에 의해 탄생한 스시 로봇인 만큼, 창업자의 개성을 언급하지 않고는 '스즈시게기공'이라는 회사를 논할 수 없다. 이 회사를 창업한 스즈키기사쿠씨는 헝그리 정신을 지니라고 사원들에게 말한다. 헝그리 정신이란 배가 고플 때 배를채우기 위해 무슨일이든 한다는 정신이다. 그는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연구와 개발을 진두지휘를 하여 5년의 연구를 통해 스시로봇을 개발하였다. 스즈키 사장은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조금이라도 헝그리 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봉투 한 장, 메모지 한장이라도 낭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킨다. '절약'과 '낭비'의 차이점을 일상 업무에서 어떻게 가르쳐 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한다. "사원에 대해서 세세한 것까지 이야기한느 것이 미안하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생각을 한다면 진정한 경영자가 될 수 없다. 작은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일에는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날 TV뉴스를 보고 있던 스즈키 사장은 분노와 동시에 자신의 사명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뉴스는 쌀 문제였는데 정부가 정책적으로 벼 농사의 규제에 나섰고 그에 따른 농가의 고뇌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를 보던 스즈키 사장은 '쌀의 소비가 늘어나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스즈키와 회사내의 기술자에게는 외로운 투쟁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래서 5년 간 연구 개발하여 스시로봇을 만들었고 판매초기에는 기존의 상식과 맞지 않아 판매가 저조하였지만 곧 판매가 많이 되었다. 그리고 유사품이 나오자 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제공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업이 변신하여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스즈키 사장은 기계공학 기술자는 아니다. 그러나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물건을 만들기'라는 의미에서는 진정한 기술자라고 자부하고 있다. "사장님으로부터 '즉시하라' '즉시 행동으로 옮겨라'라는 명령이 날아옵니다. 사장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나오는아이디어라고나 할까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상품기획의 힌트 등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들 뿐입니다. 사장님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라는 상품 기획 담당자의 설명에서 스즈키의 신기술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부단한 추구를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그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겨 ‘결과’를 창출한다. 그는 직원들에게 항상 ‘즉시 하라’, ‘즉시 행동으로 옮겨라’ 라는 말로 직원들을 독려하고 고객의 욕구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히트 상품이 있으면, 그것을 흉내내는 유사품이 나오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이는 스즈시세게기공도 마찬가지여서 비슷한 기능을 가진 기계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스즈키의 경영을 알 수 있는 그의 말이다. "처음에는 유사품의 대응에 상당히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시로봇이라는 기계만으로 스시가 만들어지는가' 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스시 로봇을 중심으로 전후 공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는 한 스시 로봇을 개발한 가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기계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죠. 유사품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와 더불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스시'를 양산하는 완전 라인화, 그리고 점포 경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심함으로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타사가 스시로봇이라는 단순한 하드웨어를 흉내내도 끄떡없는 기업체질, 바꿔 말하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쌍방이 균형을 이루는 상품개발력이 사내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12. 변혁적 리더십을 가지고 거래적 리더십을 조화시켜라.
효과적인 리더십의 필요성과 중요성으로 인하여 학계의 연구자들과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리더십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이 시도되어 여러 가지의 이론과 모형이 개발되고 그 타당성이 검증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통일적인 견해는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비판도 있으며, 더욱이 실무에서 실제로 적용이 가능한 최선의 리더십 모형은 아직까지 적립되지 못한 미흡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남호현, 2006). 그동안 리더십은 특성론적 접근법, 행태론적 접근법등의 견지에서 연구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과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거래적 리더십이란 전통적 리더십으로 일반적으로 리더의 요구에 부하가 순응(compliance)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교환과정(exchange process)을 포함하지만, 부하들이 과업목표에 대해 열의(enthusiasm)와 몰입(commitment)까지는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거래적 리더는 부하 직원들의 욕구를 파악해서 그 부하들이 적절한 수준의 노력과 성과를 보이면 그러한 노력과 성과만큼의 보상을 제공하는 교환적 과정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이창원, 2005). 합리적 과정이나 교환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리더십과는 다르게, 변혁적 리더십은 감정 및 가치관이나 상징적의 행태의 중요성과 어떠한 사건을 부하의 입장에서 볼 때 의미 있게 만드는 리더의 역할을 강조한다(Yukl, 1999b). 그 결과 변혁적 리더십은 부하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개인적 차원에서 부하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 주며,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부하에게 영감(inspiration)을 제공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이창원, 2005). 이러한 현실에서 경쟁력 있는 리더가 되려면 어떠한 리더십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동안 다수의 학자들이 리더십에 관한 이론과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현재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리더십은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다. 그러나 Bass는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이 서로 별개의 개념이긴 하지만 상호 배타적으로 보지는 않았으며, 이 두 가지 리더십을 상황에 따라 상호 보완적으로 동시에 구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은 서울시장 당시 추천했던 것을 당사자가 대통령이 된 후에 다시 잡았던 도서로 세간에 잘 알여진 책이다. 저자는 리더십의 유형을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예로 들면서 거래적 리더십이란 첫 번째 임기에서 나타난 '임기웅변적이고 고고의 중개술'인 조치들을 통한 부분적인 조작과 적의 제거에서 보여진다. 자자는 이를 '실직적이고 주고받는 식의 리더십'이라 정의한다. 반대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때 그는 국민들과 함께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다른 실페로 변화되어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내적 특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변혁적 리더십의 실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