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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78강 枝末法會, 善見比丘 (大方廣佛華嚴經 解釋)]
(2) 善見比丘의 容貌와 德化
......智慧廣博이 猶如大海하며 於諸境界에 心無所動하며 若沈若擧와 若智非智의 動轉戱論이 一切皆息하며 得佛所行平等境界하며 大悲敎化一切衆生하야 心無暫捨하며 爲欲利樂一切衆生하며 爲欲開示如來法眼하며 爲踐如來所行之道하야 不遲不速으로 審諦經行할새 無量天龍夜叉乾闥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와 釋梵護世와 人與非人이 前後圍遶하며 主方之神이 隨方廻轉하야 引導其前하며 足行諸神이 持寶蓮華하야 以承其足하며 無盡光神이 舒光破暗하며 閻浮幢林神이 雨衆雜華하며 不動藏地神이 現諸寶藏하며 普光明虛空神이 莊嚴虛空하며 成就德海神이 雨摩尼寶하며 無垢藏須彌山神이 頭頂禮敬하야 曲躬合掌하며 無碍力風神이 雨妙香華하며 春和主夜神이 莊嚴其身하야 擧體投地하며 常覺主晝神이 執普照諸方摩尼幢하고 住在虛空하야 放大光明하니라
2. 善財童子의 問法
時에 善財童子가 詣比丘所하야 頂禮其足하며 曲躬合掌하고 白言호대 聖者여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求菩薩行하노니 我聞聖者는 善能開示諸菩薩道라하니 願爲我說하소서 菩薩이 云何學菩薩行이며 云何修菩薩道리잇고
3. 正示法界
(1) 依緣得法
善見이 答言하사대 善男子야 我年이 旣少하며 出家又近이라 我此生中에 於三十八恒河沙佛所에 淨修梵行호대 或有佛所엔 一日一夜에 淨修梵行하며 或有佛所엔 七日七夜에 淨修梵行하며 或有佛所엔 半月一月과 一歲百歲와 萬歲億歲와 那由他歲와 乃至不可說不可說歲와 或一小劫과 或半大劫과 或一大劫과 或百大劫과 乃至不可說不可說大劫에 聽聞妙法하고 受行其敎하며 莊嚴諸願하야 入所證處하며 淨修諸行하야 滿足六種波羅蜜海하며 亦見彼佛의 成道說法이 各各差別호대 無有雜亂과 住持遺敎와 乃至滅盡하며 亦知彼佛의 本所興願이 以三昧願力으로 嚴淨一切諸佛國土하며 以入一切行三昧力으로 淨修一切諸菩薩行하며 以普賢乘出離力으로 淸淨一切佛波羅蜜호라
선견비구(善見比丘)의 용모(容貌)와 덕화(德化)
원광일심(圓光一尋)까지는 육안으로 분별할 수 있는 신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마음의 모습, 마음세계에 있어서의 어떤 훌륭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광박(智慧廣博)이 유여대해(猶如大海)하며, 지혜가 넓고 넓은 것이 마치 큰 바다와 같이 그렇게 넓으며
어제경계(於諸境界)에 심무소동(心無所動)하며, 그래서 모든 경계에 마음이 동하는 바가 없으며, 여여부동(如如不動)이지요. 마음에 동하는 바가 없으며,
불교 공부를 한다거나 불교를 믿으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경계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심무소동(心無所動),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마음에 동요가 없어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자기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갈 줄 아는 것, 이게 사실은 불교를 믿는 영험이에요.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동요하지 않자고, 마음에 충격 받지 않고, 마음에 상처 받지 않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자고, 그래서 부처님을 믿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불교 공부를 하는 거예요, 사실은.
내용을 우리가 깨어 놓고 이야기 하자면 그겁니다.
그럼 그것은 부처님 지혜에요. 동요하지 않을만한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그만치 지혜가 넓다는 거지요.
지혜가 넓으면, 정말 지혜가 제대로 갖춰져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것이 다 인연의 도리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결론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요할 까닭이 없는 거예요.
해가 넘어 갔다고 동요할 사람이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의 해가 넘어가도, ‘아이구, 내가 넘어갈 때가 되었으니 넘어간다’고 .......(녹음이 끊어짐)..........동요할 일이 없고 넘어가도 동요할 일이 없는 거지요.
그게 다 이치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니까요.
그래서 지혜광박(智慧廣博)이 유여대해(猶如大海)가 되어야 돼요. 지혜가 넓은 것이 마치 큰 바다와 같이 되어야 어제경계(於諸境界)에 심무소동(心無所動)이라, 참 좋은 말이에요.
이게 정말 부처님의 지혜이고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하고, 참선 하고 하는 그런 모든 불교적 행위의 궁극적 목표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조금 잘 되면 그냥 잘 되는데 도취해서 정신을 잃고, 못되면 늘 죽을 맛이 되어 가지고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고, 그게 아니거든요,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어요. 그 속사정을 보면, 그 내면에 흐르고 있는 인연의 도리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당연한 귀결인데 그 당연한 귀결을 우리는 모르고 횡재라고 하고 불행이라고 하고 이건 내가 운이 없어서 그렇다고 몰아 부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동요하는 거지요.
정말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면 하루의 해가 떴다고 해서 동요할 까닭이 없고 하루의 해가 졌다고 해서 동요할 까닭이 없는 그런 이치를, 평범한 일로 받아들일 수가 있지요. 그걸 깨닫는 사람, 그걸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깨달음의 지혜이고 부처님의 지혜이지 다른 거 없어요.
부처님의 지혜가 뭐예요? 결국 그런 이치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 대해서 동요가 없자고 하는 그것이 부처님이에요.
지혜라, 부처님 일생 중에서 제일 불행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위국의 유리왕은 파사익 왕의 아들이지요. 그 유리왕이 부처님의 나라인 가비라 국을 침범하여 석가족과 가비라국의 백성들을 사정없이 무찌르는 그 모습을 부처님은 육안으로 다 봤어요.
세 번이나 만류했지만 유리왕이 듣지 않고 결국은 쳐들어 왔거든요.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님이 교화하신지 40여년쯤 됐을 때의 일이에요.
부처님은 제자도 그렇게 많은데 우리 같으면 제자들한테 전부 총칼을 다 맡겨가지고 저놈들 하고 한판 싸우자고 했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뭐에요? 결국 악순환이 계속 되고 그렇다고 나라의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서산, 사명 같은 이들이 그럼 제대로 했느냐고 하면,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한 것이 아니에요. 승병 일으킨 게 불교적으로 처리한 일은 아니라고요.
부처님도 그러한 상황을 겪었는데 부처님은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거든요. 부처님은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고요.
당신의 형제자매인 석가족이 멸망하는 그런 상황을 앞두고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유리왕이 쳐들어 오는 길목에 나가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서 있지요.
그 유리왕이 부처님을 알잖아요. 멀리서 보니까 부처님이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 서 계시니까 군대를 데리고 쳐들어 가다가 황송해 가지고 말에서 내려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여쭈지요.
“부처님이시여, 저 좋은 두꺼운 그늘이 있는 데 왜 이 마른 나무 밑에 서 계십니까”하고 말하지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나의 출신 고향이 황폐해 가기가 마치 이 마른나무와 같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유리왕이 그 말에 감화가 되어 가지고 회군(回軍)을 해서 돌아가잖아요. 석가족인 가비라국이 멸망하는 그런 상황 앞에서 부처님 마음이 어떻겠어요.
나라의 강하기가 게임이 안 되었지요.
가비라국은 약소국이지요. 아주 작은 나라인데 그러나 대대로 성군(聖君)이예요, 종족으로 치면 아주 선하고 아름답고 전통 있는 가문이지요. 사위국은 나라는 아주 크고 강대한데 말하자면 개똥상놈이 왕 노릇을 해 온 거예요. 그런 경우가 많았잖아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지금도 왕건 이야기가 나오지만 중국이나 인도나 옛날에는 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무력 앞에 어떻게 되겠어요. 무력 앞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것 뿐이지요.
두 번째 쳐들어 왔을 때도 그랬고, 세 번째까지는 그렇게 해서 유리왕을 물리쳤어요. 부처님의 그런 태도로 물리쳤습니다.
네 번째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는 부처님의 덕화로도 안 된다며 부처님께서는 자리를 피해 버리잖아요.
제자들을 데리고 군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을 떠나버리지요. 그래서 가비라국이 멸망을 하고 석가족도 많이 죽게 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지요.
부처님이 태어나신 불생(佛生) 가비라국은 사위국에 합병되어 버리는 그런 일을 겪게 되지요.
금강경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절절지해라 했지요. 유리왕이 가리왕으로 나오지요. 그 모습이 내 몸을 칼로 마디마디 자르는 것과 같다고 표현해 놨잖아요.
절절지해(節節支解), 마디마디를 저미는 것과 같이 그런 아픔을 겪었는데 ‘내가 그 때에 어떠했겠는가? 나는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이라,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아상 인상 중생상이 없었다.’
그게 이제 성인으로서의 해결책이지요. 성인은 그렇게 밖에 해결이 안 된다고요. 보통 사람 같으면 이성을 잃고 그냥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비다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듯이 그런 처참한 꼴로 종말을 고하고 말겠지요. 뻔하지요.
그 강력한 군대 앞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밖에 안 될 텐데 그 뻔한 것을 보고 성인으로써 그런 무모한 짓은 안하는 거지요. 그러나 중생들은 그런 무모한 짓을 해요. 덤벼가지고 그냥 죽고 마는 거지요.
그리고 상대를 더욱 화나게 만든다든지 하는데 부처님은 자기의 친족이 살해되는 것을 보고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의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같으면, ‘부처님이 무슨 그런 행동을 하시냐, 죽을 때 죽더라도 한바탕 붙는 거지.’하고 해석할는지 모르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해석이에요. 그건 정말 용기만 앞세우는 일이지, 그런 게 아니지요.
부처님은 그런 상황을 다 겪으면서 그 역시 인연의 도리라고 하는 것을 꿰뚫어 본 거예요. 꿰뚫어 본 거라고요.
그러니까 상대가 마침 이해를 해서 자기 대(代)에서 원수를 갚지 않고 참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할 수 없이 다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지혜광박(智慧廣博)이 유여대해(猶如大海)라, 지혜가 넓고 넓은 것이 마치 큰 바다처럼 되어 가지고 이해 못할 게 없는 거에요. 뭐든지 그 근원을, 그 인연의 도리를 다 이해해 가지고
어제경계(於諸境界)에, 자기 나라가 멸망하고 자기 친족이 멸망하는 그런 경계에 봉착하더라도 심무소동(心無所動)이라, 마음에 움직이는 바가 없더라.
왜 움직이는 바가 없겠습니까만 우직하게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 거지요. 심무소동(心無所動)이라, 마음에 동하는 바가 없다.
보통 보면 장사도 오기로 하다가 망하고,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어보라.’하다가 망하지요.
정말 아니다 싶으면 발을 빼야 되는데 오기로 하다가 다 망하거든요. 오기로 해서 제대로 성공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게 다 어리석은 소치이지요.
어제경계(於諸境界)에 심무소동(心無所動)이라, 모든 경계에 마음이 동하는 바 없다.
햐, 우리가 불교를 믿고 공부해 가지고 평생에 이거 하나 건지면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어요. 정말이지 이거 하나 건지면 더 이상 뭐 바랄 게 있습니까? 아주 평온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없어요,
약침약거(若沈若擧)와, 혼침이라거나 도거라거나,
침(沈)은 혼침(昏沈)으로 졸음 오는 거지요. 또 거(擧)는 도거(悼擧)라고 해서 망상이지요.
약지비지(若智非智)의 동전희론(動轉戱論)이, 지혜나 지혜가 아닌 이런 것, 또 동전희론 이런 문제들,
불쑥 어떤 감정이 솟는 것이 동전(動轉)이지요.
희론(戱論)은 이런 저런 우스개 소리, 무슨 되도 않는 말, 가설 이런 것들이지요.
일체개식(一切皆息)하며, 이 사람 앞에서는 다 쉬어버렸어요. 이 선견비구는 그런 문제가 다 쉬어버린 사람이에요.
득불소행평등경계(得佛所行平等境界)하며, 부처님이 행한 바 평등경계를 얻고 있는 바이며
대비교화일체중생(大悲敎化一切衆生)하야, 또 큰 자비로써 일체중생들을 교화하며
그런데 그 교화하는 일에
심무잠사(心無暫捨)하며, (교화하는 일을) 마음에 잠깐도 버리지 아니하며
위욕이락일체중생(爲欲利樂一切衆生)하며, 일체 중생들을 이롭고 행복하게 하며, 모든 사람들을 이롭고 행복하게 하고자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위욕개시여래법안(爲欲開示如來法眼)하며, 또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안을, 법의 눈을 열어보여 주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이 선견비구에게는 늘 충만해 있으며
위천여래소행지도(爲踐如來所行之道)하야, 여래께서 행한 바 도를 밟기를 위해서
부지불속(不遲不速)으로, 더디지도 아니 하고 빠르지도 아니한 것으로,
무슨 일에 너무 열 내고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쳐져 가지고 느적 느적 할 것도 아니지요. 중도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지요. 세상에‘알맞게’같이 어려운 말이 없어요. ‘알맞게’, 제일 어려운 말이 그 놈이에요. 참 어려운 말이에요.
어쨌건 부지불속(不遲不速)이야, 더디지도 아니하고 빠르지도 아니 하게 하는 것으로써
심제경행(審諦經行)할새, 심제(審諦), 경행하는 것을 깊이 체득하고 있다는 거예요. 살펴서 잘 통달하고 있다는 거지요. 심제(審諦), 사제(四諦) 할 때의 제자는 진리 제(諦)자도 되고 깨닫는 다는 뜻도 되고 그래요.
경행을 그렇게 해야지요. 막 촐싹거리고 돌아다닌다든지 하면 이건 경행도 아니지요. 너무 느릿느릿 하게 걷는 그것도 또 경행이 아니지요. 적당하게 알맞게 그렇게 경행할 새.
경행에서 그동안 선재동자가 바라 본 선견비구의 모습과 선견비구 내면의 어떤 살림살이라 할까 이런 것들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행을 하는데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호위를 하고 에워싸고 그리고 보호하고 지켜주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이지요.
무량천룡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無量天龍夜叉乾闥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와, 한량없는 천룡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와
석범호세(釋梵護世)와, 범천과 제석과 호세, 호세도 천상의 이름이지요, 호세천과
인여비인(人與非人)이, 사람과 사람 아닌 그런 여러 신장들이
전후위요(前後圍遶)하며, 앞뒤로 딱 에워쌌으며
주방지신(主方之神)이 수방회전(隨方廻轉)하야, 주방이라는 것은 방향을 맡은 신이지요. 그러니까 동쪽으로 가면 동쪽을 맡은 신, 서쪽으로 가면 서쪽을 맡은 신, 남쪽으로 가면 남쪽을 맡은 신, 북쪽 간방 어느 쪽이든지 그 방향을 맡은 신들이 그 방향을 따라서 전부 같이 돌아가지요.
선견비구가 이렇게 돌면 같이 돌아가고, 저쪽으로 가서 돌면 같이 또 이렇게 돌아주고, 외면하지 않고 늘 지켜 준다는 거지요.
인도기전(引導其前)하며, 그 앞을 인도해 주지요. 눈에 보이지 않게 그렇게 하는 거지요. 선견비구의 경행하는 그 앞을 인도해 주며
족행제신(足行諸神)이 지보연화(持寶蓮華)하야, 걸어 다니는 것을 맡은 신들이지요. 족행신이라는 신이 있지요 걸어 다니는 것, 발로 행하는 것에 대한 맡은 신이지요. 걸어 다니는 그 일을 맡은 신이 보연화, 보배로 된 연꽃을 가지고는
이승기족(以承其足)하며, 선견비구의 발을 받쳐 주지요. 그러니까 선견비구가 걸을 때마다 항상 연꽃이 그 발밑에 있다는 거지요. 부처님이 태어날 때 그랬다지요. 일곱 걸음을 걷는데 연꽃이 척 올라와 가지고는 발을 받치고, 연꽃이 올라와서는 발을 받치고...그만치 부처님을 존중시하고 미화하고, 그렇게 해도 부처님의 덕은 다 표현이 안 되지요.
무슨 신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꽃으로 발을 받쳤는지 안 받쳤는지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표현을 가지고도 그 선견비구의 덕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무진광신(無盡光神)이, 다함이 없는 광명의 빛의 신들이
서광파암(舒光破暗)하며, 빛을 척 펼쳐서 어둠을 깨뜨리지요.
그러니까 이 분이 가는 데는 그냥 훤한 거예요. 어둠을 다 깨뜨려 주니까요.
염부당림신(閻浮幢林神)이, 염부나무의 깃대처럼 솟아있는 그런 신이, 염부나무도 있어요.
우중잡화(雨衆雜華)하며, 여러 가지 각양각색의 꽃을 비 내리듯 뿌려주며
부동장지신(不動藏地神)이, 움직이지 않는 땅 속의 갈무리 되어 있는, 땅 속을 지키는 그런 신들이
현제보장(現諸寶藏)하며, 여러 가지 보배의 그런 창고들을 드러내어 나타내 보이고
보광명허공신(普光明虛空神)이 장엄허공(莊嚴虛空)하며, 보광명 허공신이 허공을 또 장엄해 주며
성취덕해신(成就德海神)이, 그리고 덕을 성취한 바다의 신이
우마니보(雨摩尼寶)하며, 마니보배를 비 내리듯이 뿌려주며
무구장수미산신(無垢藏須彌山神)이, 신이 이렇게 많이 등장해요. 무구장수미산신이
두정예경(頭頂禮敬)하야, 허리를 구부려 합장을 떡 하는 그런 무구장신이 있고
곡궁합장(曲躬合掌)하며, 머리와 이마로써 땅에 엎드려서 예배를 드리고
무애력풍신(無碍力風神)이 우묘향화(雨妙香華)하며, 걸림이 없는 힘의 풍신이 아름다운 향화를 비 내리듯 하며
춘화주야신(春和主夜神)이, 아주 좋은 신이네요, 요즘 신이네요. 봄은 낮도 좋지만 봄밤이 좋아요. 아주 상큼한 봄밤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거든요, 며칠 안 돼요. 그 봄밤의 신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지요.
장엄기신(莊嚴其身)하야, 그런 신이 그 몸을 장엄해 주고
거체투지(擧體投地)하며, 온 몸을 전부 땅에 던져 가지고서 예배를 하며,
상각주주신(常覺主晝神)이, 낮을 맡은 항상 깨어 있는 신이,
주야신은 춘화주야신(春和主夜神)이라, 봄 춘(春)자, 화기(和氣)가 있다 할 때의 화합할 화(和)를 써서 춘화주야신(春和主夜神)이라 그랬지요.
주주신(主晝神), 낮신이라고 하는 신은 상각 주주신이에요. 낮은 늘 밝잖아요. 그러니 항상 상(常)자, 깨달을 각(覺)자에요. 밤은 밤대로 편안하고 아늑해요. 그리고 평화로워요. 그러니까 춘화(春和)라고 하는 말이 아주 잘 맞고,
낮은 늘 깨어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상각(常覺)이지요. 초롱초롱 깨어있는 것이 낮의 의미이거든요. 낮에 곯아 떨어져 자는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상각주주신(常覺主晝神)이니까, 낮을 맡은 항상 깨어있는 신이
집보조제방마니당(執普照諸方摩尼幢)하고, 보조(普照), 온 세상을 환히 비추는 마니로 된 깃발을 잡고서
주재허공(住在虛空)하야 방대광명(放大光明)하니라, 허공에 떡 머물러서는 대 광명을 놓고 있더라.
낮이, 훤하게 밝은 태양으로 비추고 있는 그런 광경을 그렸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선견비구의 용모 그리고 그 분의 덕화를 봤는데 용모도 용모이지만 덕화가 아주 잘 그려져 있네요.
그 다음,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문법(問法)이라. 이제 법을 묻는 거지요.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이 때에 선재동자가
예비구소(詣比丘所)하야, 선견비구의 처소에 가서
정례기족(頂禮其足)하며, 그 발에다 정례하고
곡궁합장(曲躬合掌)하고, 허리를 구부려 합장하고 예불하면서
백언(白言)호대, 고해 말하되
성자(聖者)여, 성자시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나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으며
구보살행(求菩薩行)하노니, 보살행을 구하는 중입니다.
아문성자(我聞聖者)는, 제가 듣기로 성자께서는
선능개시제보살도(善能開示諸菩薩道)라하니, 모든 보살의 도(道), 보살이 걸어가야 할 그 길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잘 보여준다고 하였으니
원위아설(願爲我說)하소서, 원컨대 나를 위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보살(菩薩)이 운하학보살행(云何學菩薩行)이며, 보살은 어떻게 해야 보살행을 배울 수 있으며
운하수보살도(云何修菩薩道)리잇고, 또 어떻게 해야 보살도를 닦을 수 있습니까?
또 이렇게 선견비구에게 선재동자가 물었어요.
정시법계(正示法界)라, 진리의 세계, 법계에 대해서 바로 보여준다.
의연득법(依緣得法)이라, 인연에 의지해서 법을 얻다, 제목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선견(善見)이 답언(答言)하사대,
선남자(善男子)야 아년(我年)이 기소(旣少)하며, 선남자야, 내 나이가 아직 젊어
출가우근(出家又近)이라, 출가한 지도 또한 얼마 되지 않아,
가깝다고 하는 말은 몇 해 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아차생중(我此生中)에, 그런데 차생, 이생 가운데에
어삼십팔항하사불소(於三十八恒河沙佛所)에, 삼십팔 항하사 부처님 처소에서
정수범행(淨修梵行)호대, 범행을 청정히 닦았다. 범행(梵行)도 청정한 행이지요. 청정하게 닦았으되
혹유불소(或有佛所)엔, 혹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그러니까 삼십팔 항하사 부처님 처소이니,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만 하더라도 그 수가 어마어마 하지요. 그런데 서른여덟 개의 항하강, 그 모든 강에 있는 모래의 숫자와 같은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 많은 부처님, 그러니까 모든 중생들,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들, 뭐 식물 동물 광물 할 것 없이 일체 존재들을, 말하자면 전부 부처님으로 섬기고 거기에 내 나름의 수행을 했다.
동물은 동물로 위하고, 광물은 광물로, 자연은 자연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편하고 행복하도록 위하는 자세이지요.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부처님, 웬 부처님이 그렇게 많았겠어요? 해운대 바다에 있는 모래만도 어마어마한데 항하강의 모래라고 하는 것은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여기 해운대 바닷가의 모래 한 알이면 항하강의 모래 열 개를 만들어요. 그렇게 미세하고 고물같아요. 아주 밀가루처럼 가늘어요, 그러니까 그 숫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많지요.
어쨌건 그런 많은 존재들을 부처님으로 보는 그 선견비구의 안목이라고나 할까요.
혹 어떤 부처님의 처소에서는
일일일야(一日一夜)에, 하루 낮 하루 밤에
정수범행(淨修梵行)하며, 범행을 청정하게 닦으며
혹유불소(或有佛所)엔 칠일칠야(七日七夜)에 정수범행(淨修梵行)하며, 혹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칠일칠야를 정수범행하며,
혹유불소(或有佛所)엔 반월일월(半月一月)과, 혹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반달, 혹은 한 달을
일세백세(一歲百歲)와 만세억세(萬歲億歲)와, 일세 또는 백세, 만세, 억세와
나유타세(那由他歲)와 내지불가설불가설처(乃至不可說不可說歲)와 혹일소겁(或一小劫)과 혹반대겁(或半大劫)과 혹일대겁(或一大劫)과 혹백대겁(或百大劫)과 내지불가설불가설대겁(乃至不可說不可說大劫)에
청문묘법(聽聞妙法)하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아름답고 미묘한 법을 얻어 듣고
수행기교(受行其敎)하며, 그 가르침을 받아서 행하기도 하며
장엄제원(莊嚴諸願)하야, 여러 가지 원력을 장엄하기도 해서
입소증처(入所證處)하며, 증득한 바의 곳에 들어가며
정수제행(淨修諸行)하야, 그래서 여러 가지 행을 청정하게 잘 닦아서
만족육종바라밀해(滿足六種波羅蜜海)하며, 여섯 가지 바라밀 해를 잘 만족하게 채웠으며
역견피불(亦見彼佛)의 성도설법(成道說法)이 각각차별(各各差別)호대, 저 부처님의 도를 이루고 설법하는 것이 각각 차별이라.
부처님마다 다 성도하고 설법하는 것이 각각 차별하되
무유잡란(無有雜亂)과, 뒤섞이거나 혼란하거나 그런 게 전혀 없으며
주지유교(住持遺敎)와, 또 거기에 부처님이 머무르고, 부처님이 유훈으로 가르쳐주고, 또 그 가르침을 뒷세상에까지 남겨주고, 남겨준 그 유교, 끼칠 유(遺)자 남길 유이지요.
우리가 유언(遺言)이란 말도 쓰지만 부처님말씀은 유언이라 하지 않고 유교(遺敎)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가지고 우리 모두 공부를 하잖아요. 이게 모두 유교(遺敎)에요. 부처님이 살아생전에 설법하신 것이 뒤에까지 이렇게 전해졌으니까 그게 이제 유교(遺敎)이지요.
그 남겨진 가르침과
내지멸진(乃至滅盡)하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것, 이런 것들을 다 봤으며,
역지피불(亦知彼佛)의, 또 저들 부처님의
본소흥원(本所興願)이, 본래 일으킨 바 원이
이삼매원력(以三昧願力)으로 엄정일체제불국토(嚴淨一切諸佛國土)하며, 삼매로써 일체 제불국토를 깨끗하게 잘 장엄하는 것을 다 알며, 알 지(知)자 이지요. 알며,
이입일체행삼매력(以入一切行三昧力)으로, 또 일체 행에 들어가는, 모든 행위에 들어가는 삼매력,
이런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면은, 일체행(一切行)이란 무얼 하든지 간에 혼신을 다해서 하는 거예요. 그것이 일체행 삼매력이에요. 일체행에 들어가는 삼매력이지요.
적당히 하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지요. 일체행에 들어가는 삼매력이라고 하면, 모든 일에 혼신을 다해서 철두철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삼매력으로
정수일체제보살행(淨修一切諸菩薩行)하며, 일체 모든 보살행을 청정하게 가꾸며
이보현승출리력(以普賢乘出離力)으로, 보현보살의 어떤 행위와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보현승(普賢乘)이라고 그래요.
성문승(聲問乘)이라고 하면 성문의 가르침, 또 성문이 되게 하는 성문의 행과 성문의 가르침, 성문의 정신을 포함합니다. 이 승(乘)자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보현의 정신, 보현의 행, 보현의 가르침, 이런 것으로써 출리, 생사의 길에서 벗어나는 그런 힘으로써
청정일체불바라밀(淸淨一切佛波羅蜜)호라, 부처님이 저 언덕에 이른, 그냥 부처님 바라밀이지요. 불 바라밀을 청정하게 했노라.
이제 선재동자가 와서 법을 물으니까, 선견비구는 자기는 나이도 얼마 안 되고 그리고 출가한지도 얼마 안 됐다고 해요. 그렇지만 금생에 삼십팔항하사 부처님 처소에서 범행을 닦았는데, 어떤 부처님 처소에서는 일일일야, 칠일칠야, 반 달, 한 달, 백 년, 만 년, 일겁, 소겁, 백겁, 불가설불가설 겁, 이런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 세월 속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했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앞뒤가 안 맞지요? 그러니까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의 도리가 이런데서 나옵니다. 화엄경은 늘 그런 것을 바탕에다 깔고 이야기가 되거든요.
이 사람은 나이도 적다, 출가한 지도 얼마 안됐다 해 놓고는 삼십팔항하사 부처님 처소에서 이 많은 세월동안 범행을 닦았다고 했으니까 한 생각 속에 이미 많은 부처님을 오랫동안 섬기고, 거기서 많은 수행을 하고, 공부한 것이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무애(无涯), 공간의 무애(无涯), 이런 것을 상당히 많이 내포하고 있는 그런 화엄사상에 근거를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모든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지금의 한 시간이라고 하면, 이 한 시간 속에는 무한한 과거의 그 긴 시간과 또 미래의 무한한 긴 시간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과 시간이 걸림이 없고, 공간과 공간이 걸림이 없는, 좀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또 그렇게 존재하고 있어요.
오늘의 한 시간은 무한한 과거의 나의 삶과, 무한한 미래의 나의 삶과 연관을 갖고 있지요. 오늘 이 한 시간을 빼어버리면요, 우리의 과거도 없고 우리의 미래도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오늘의 한 시간은 무한한 과거가 연관되어 있는 오늘의 한 시간이지 오늘의 한 시간 만의 한 시간이 아니라고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런 관점에서 봐야하고, 이치상으로는 또 이럴 수밖에 없는 그런 이치가 있다는 거지요.
이 화엄경은 그런 도리가 좀 어렵지만, 그것이 화엄경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이라고 이렇게 정리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해 놓겠습니다.
첫댓글 어제경계(於諸境界)에 심무소동(心無所動)하며...예. 그리 되고 싶습니다. ^^ ()()()
연보리님!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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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 시간은 무한한 과거가 연관되어 있는 오늘의 한 시간이다.. 항상 염두에 두겠습니다. 연보리님 고맙습니다. _()()()_
마니주님, 쪽지 확인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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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온한 마음을 가진다면 어떤 경계에도 흔들림이 없다....한 말씀 새겨 갑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_()()()_
나 하나에 삼세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거, 절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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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慧廣博이 猶如大海하며 於諸境界에 心無所動하며...지혜가 넓은 것이 마치 큰 바다와 같이 되어야 모든 경계에 마음이 동하는 바가 없으며...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화엄경의 事事無碍 사상 : 時間 空間 无涯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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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無所動,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마음에 동요가 없어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泰然自若하게 자기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갈 줄 아는 것, 이게 사실은 불교를 믿는 영험이에요.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一念卽是無量劫 화엄의 도리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교 공부의 목적;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에 봉착해도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
於諸境界 心無所動
불교를 믿는 영험;어떠한 어려움에 당해서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사는 것
어려움을 만났을 때 동요하지 않고 마음에 충격받지 않고 상처받지 말자고 불교 공부,기도,참선하는 것
--그 만큼 마음이 넓어지려면 지혜-인연의 이치를 잘 알아야 한다
--지혜-인연도리-가 바다처럼 넓어져야 경계를 당해서 마음에 동요가 없다
해가 넘어간다고 동요할 일이 없듯이 인생의 해가 넘어가도 동요함이 없어야 한다
於諸境界 心無所動;불교 공부의 영험
--내면에 있는 인연의 도리를 보면 당연한 귀결이니까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
智慧廣博 猶如大海이면 일체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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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화엄경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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